독자의 목소리
장편소설 논의와 소설가의 미래
● 지난호 장편소설 특집에 쏟아진 문단과 언론의 관심에 비해 나는 별 감흥을 받지 못했다. 난 왜 생각이 없을까, 저들은 뭐가 저리 심각한 걸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다고는 여기지는 않지만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고 해서 열어지는 게 아니니까. 또 좋은 장편, 읽을 만한 장편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니까.
작가에게 전략적인 글쓰기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집원고 자체가 왠지 작가들에게 전략적인 글쓰기를 강요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른 이들은 어떤 글쓰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한다. 나는 문학에, 소설에 무슨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문학은‘그냥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내 소설의 미래이다. 그냥 쓰다 보면 미래가 열리겠지 생각한다.
작가에게 미래는 문학하는 과정의 절실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특히 장편소설은 작가에게 전략적인 글쓰기를 강요한다. 이상적인 비판은 현실적인 대안이 있을 때만이 정당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지난호 특집에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그것이다. 논의는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부담없이 쓸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데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이 깔리지도 않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대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좋은 장편이 나오지 않는 것을 작가적 역량으로만 돌린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지난호의 한 필자의 말대로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으니 말이다.
작가적인 입장에서 현실적인 제안을 해보면 장편 전작료의 개념을 활성화해보자. 아님 연재지면을 늘리든지. 아마 관계된 혹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헛돈 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손해를 자선사업하듯 짊어질 출판사가 있겠는가. 출판사의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어쨌든 끼니는 때우며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현실도 인정해야만 한다. 끝으로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열망과 절실함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이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가 백가흠 gahuim@nate.com
모든 논의의 시작은 민주주의에서부터
● 최근 한미FTA체결 등 한국사회가 시장만능주의로 급격히 진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촉구하는 이정우-최태욱 교수의 인터뷰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정부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우파 일색의 역대 정부들에 비해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이 노무현정부였고, 결과적으로는 관료집단에 굴복했지만 이들을 극복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내부에서는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는 것이 그러한 평가의 근거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미FTA추진이 노무현정부의 자기부정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대안적 모델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노무현정부를 평가하면서 사회적 대화의 결핍과 그것에 반영된 정부의 비민주성에 대해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집권 초기였던 2003년부터 화물연대와 철도노조의 파업,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갈등, 부안 핵폐기장 사태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정부는 다양한 요구와 이견을 봉쇄했고, 그 결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성은 크게 후퇴했다. 현정부가 내부적으로는 활발한 토론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전사회적인 합의 도출에는 실패해왔다.
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은 가장 좋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체제들보다 사회적 합의 도출에 우수한 기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모델의 모색에서 지켜야 할 것을 딱 하나만 택하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병일 skialy@naver.com
다시금 진보진영의 ‘사상투쟁’을 꿈꾼다
● 6월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87년 6월의 성과와 한계, 그 열망과 좌절, 미망과 회한, 과제와 대안이 쏟아졌다. 이런 움직임은 시대적 필연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백가쟁명하는 이 진보논쟁에서 사실 그 실체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담론의 작동방식은 과거 그대로다. 각 입론들은 관성적이고 자기편향적이고 동어반복적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위기를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특히 87년체제와 97년체제를 두고는, 거칠게 정리하면, 비판적 지지론 대 독자세력화론이라는 해묵은 대결구도를 반복하는 듯하다.
이러한 평가에서 창비도 자유롭지 않다. 물론 지난호에 실린 김종엽의 「87년체제의 궤적과 진보논쟁」은 87년체제론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난 20년을 민주화 프로젝트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기간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의 정치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두 프로젝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해 우리의 실제 삶이 어떤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는지,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명하는 작업은 부족했던 것 같다. 물론 이는 최근‘진보진영’내부 논의의 전반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두고 『한겨레21』에서 지상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긍정적인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는 논쟁이 너무 없었다. 과거의 사회구성체논쟁에 버금가도록 한국사회의 성격과 대안모델을 놓고 지금이라도 치열하게‘사상투쟁’을 전개해나갔으면 한다.
조건형 ghyeong@gmail.com
무거운 세상을 작심하고 가볍게 보기
● 지난호 김남일 소설을 보면 그가 무슨 작심을 하기는 한 것 같다. 아주‘꼼꼼하게’장난을 치려는 듯 꾸며놓고는, 더 은밀하게는 모호함에 버무린 냉소와 풍자라는 문학적 성취를 너끈하게 잡아내는 것 같다. 즉 세상이라는 거대한 타자 앞에서 왜소할 대로 왜소한 주인공 오생의 정체성을 너무나 비참하게 비틀어 보여줌으로써, 실상 오생이 되지 못하고 나름대로 영악하게 적응하는 현대인의 비겁한 삶을 위안해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종횡무진 이어지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말놀이(pun)라는 장치다.‘와습(訛騽)’이라는 조어를 구사해놓고 능청스럽게 각주로, 심지어는 WASP과도 맥락을 잇대서 그 뜻을 둘러치는 솜씨가 도저하다. 또 “홀연 기세” 등의 고소설체 표현도 예사스럽지가 않다. 서기 2007년을 “민국 59년”이라 눙친 것도 그렇고, “부활”과 “불알”의 발음상 유사성을 이용해서 생명력에 대한 연상을 연결하는 솜씨도 능숙하다.
당대의 주제들을 “당”이라는 정치적 결사체와 연결시키는 방법이 교묘하고, 현대사회의 물신주의와 속물주의를 극사실적으로 묘파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라면에서‘스프’가 없어진 일을 모티프로 이 세상의 이모저모를 두루 분해하는 것도 참신하다. 오생의 삶 혹은 입장은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이해에서 이탈해 있고, 더구나 독자의 공감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단언컨대 오생은 독자의 이해 불가를 통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캐릭터다.
이 소설에서는 한 시기 사회적 화두를 이루었음직한, 광고문구를 포함한 사회적 맥락이 교묘히 변주 내지 융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결국 이 작품은 전통적인 서사문법을 거의 파괴하고 있으면서도 사회를 분석하고 해부하는 색다른 접근방법을 구사해서, 기존의 작품들이 이루었던 완성도에 근접해간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듯싶다.
충암중학교 교사 이수인 sooi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