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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자유주의, 바로 알고 대안 찾기
신자유주의와 대안체제
복지국가혁명을 위하여
정승일 鄭勝日
‘복지국가 Society’ 정책위원. 주요 저서로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가 있음. sijeong11@hanafos.com
87년 6월항쟁 20주년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10년을 맞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경제사회적 문제에 대해 개혁진보진영 내에서 나름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의 다섯가지 정도이다. 그것은 각각‘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조희연 등)‘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손석춘 등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사회연대국가론’(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사회투자국가론’(유시민 김연명 양재진 등)‘신진보주의국가론’(이일영 정건화 조형제 등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함께 새로운 진보대안으로서‘복지국가혁명론’을 제시하고자 한다.1
신자유주의와 현 위기의 원인 진단
앞의 다섯가지 입장은 신자유주의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먼저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과 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 그리고 사회연대국가론은 모두 현 위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시장개방, 시장개혁에서 찾고 있으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한다. 가령 이들 세 입장 모두 주주자본주의와 한미FTA를 거부한다.
이에 반해 사회투자국가론은 지난 10년간의‘시장개혁’이 거둔 성과를 대부분 수용하며 사회양극화 등 현 위기의 원인을 IT기술이 야기한 일자리 축소 등 기술결정론적 요인과 인구고령화 같은 다른 점들에서 찾고 있으며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긍정성, 가령 주주자본주의와 한미FTA의 긍정성에 주목한다.
한편 신진보주의국가론은 이런 점들에 관해 절묘한 균형(?)을 취하는데,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등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의 긍정성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과 결부된 노동시장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나 그것이 초래한 단기주의 전략의 횡행과 고용의 질 저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또한‘능동적 세계화’를 주문하면서도 한미FTA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경제사회적 대안모델의 방향
이렇듯 다섯가지 입장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적 방향에 관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조희연(曺喜昖) 등의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은 유럽형 사회민주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사회민주주의를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좌초한 20세기형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하며 “생태·평화주의를 접목한 더욱 이상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우리 사회 진보의 대안으로 내놓는다. 하지만 과연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주의와 성장주의 때문에 좌초했는지는 의문이다. 먼저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1990년대 초반에 발생한 복지국가의 위기는, 1980년대 중후반 이들 나라에서 진행된 금융규제 완화 등 (신)자유주의적 금융개혁과 그로 인한 금융위기 때문이었지 국가주의 때문은 아니었다. 더구나 북유럽만이 아니라 독일, 프랑스, 심지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전통적으로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을 추구해온 점을 고려할 때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좌초했다는 지적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생태 및 평화의 가치는 이미 40년 전의 68혁명 이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좌파, 즉 북유럽의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영국 등의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핵심 아젠다로 자리잡아왔으므로 세계사적으로 별로 새로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손석춘(孫錫春) 등‘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의 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은 서구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데, 왜냐하면 그것 역시 노동주도성 원칙이 소실된 기존의 자본주의체제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사연은 IT기술의 가능성에 크게 주목하면서 현대적 IT기술을 통해‘경제의 지식기반화’와‘노동력의 지식노동자화’가 새로운 경제체제, 즉‘(지식)노동주도 경제’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새사연은 현대적 IT기술과 접목된 노동주도 경제야말로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체제도 뛰어넘는 획기적인 체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IT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결부된 1990년대 말의 IT산업버블과 벤처버블 그리고 과장된 신지식인론 등의 폐해를 고려할 때, 그리고 IT기술과 결합된 오늘날의 금융세계화와 탈숙련 비정규직의 급증 등을 고려할 때, 새사연의‘(지식)노동주도 경제론’은 아직 미해결의 과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진보정치연구소가 제시한 사회연대국가론은 교육복지와 숙련·지식노동자화를 통한 하이로드(high road)형 성장전략, 노동자 경영참여 등 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을 대부분 수용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당강령 차원에서 자본주의 배격과 사회주의 도입을 천명하고 서구형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며 거부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사회연대국가’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뜻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를 말하는 건지는 모호하다.2
이 세가지 입장이 서구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좌파적인(?) 혹은 더욱 반시장적인 대안모델을 지향하고 있는 데 반하여,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서구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우파적인 혹은 더욱 친시장적인 대안모델을 모색한다.3 이 두 입장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주장한 이른바 ‘제3의 길’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의 경제사상과 노동·복지사상 양쪽에서 다 관찰되는데, 먼저 두 모델 모두 지난 10년간 추진되어온 금융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 등 금융 및 기업 관련 개혁의 긍정적 성과를 인정한다. 이는 1990년대에 집권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이 마거릿 새처 보수당에 의해 80년대에 추진된‘금융빅뱅’의 성과를 전면 수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전통적인 케인즈형 복지국가를 거부하고 실직자 직업훈련 등 스웨덴식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요소들을 도입하면서‘생산적 복지’를 주장했던 블레어의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두 대안모델 공히 국가의 교육투자 등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와 지역혁신클러스터 같은 정책을 강조한다. 특히 신진보주의국가론의 주창자들은 한반도경제 및 동북아경제 구상 등의 지역경제 구상과 함께, 지역혁신클러스터 같은 지방균형발전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하지만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되는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영국형 제3의 길에 대한 높은 관심에 대비되는 북유럽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 혹은 비판적 태도는 두 모델 모두에서 관찰되는 공통점이다.
이렇듯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주요 논점들에서 매우 큰 상호친화성을 보여주지만 서로 다른 점들도 많다.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사회투자국가론의 주창자들은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옹호를 분명히하면서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경제적 성과를 거의 모두 수용하고, 한미FTA에도 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하여 신진보주의국가론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시장주의 개혁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내재한 폐해를 지적한다. 가령 투명성 강화 등 재벌개혁의 성과를 수용하는 동시에 주주자본주의의 만연이 가져온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세계화와 시장개방의 불가피성과 그 장점을 받아들이지만 또한 OECD가입과 한미FTA로 인한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분배·복지정책과 조세정책
앞의 다섯가지 입장은 모두 분배정책 혹은 사회복지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복지 혹은 사회안전망을 위한 구체적 정책들을 얼마나 마련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는 각각 차이를 보인다.
아무래도 정당조직과 시민단체 차원에서 활동하는 까닭에 매우 구체적인 사회복지정책들을 구상하고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인 진보정치연구소와 참여연대 소속 연구자들이 이 점에서는 가장 앞서 있다. 평생학습과 직업훈련, 아동보육과 장기요양 보호 등 제반 사회복지정책에서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의 구상은 거의 동일하다. 진보정치연구소가‘사회연대적 복지’를 구호로 내걸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차원으로 들어가면 역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과 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의 주창자들은 별다른 사회복지 구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가치의 문제인데, 전자의 경우 생태·평화를, 후자의 경우 지식노동자화와 통일경제를 사회복지에 비해 더욱 높은 가치로 놓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사회복지 혹은 분배정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다. 다음으로 전문성의 문제인데, 양자 모두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구체적 정책은 정당 혹은 시민단체의 복지정책 전문가들에 의존하는 까닭에 굳이 언급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다섯가지 입장이 모두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는 구체적인 정책들을 발전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는 공통적인 한계가 있다.
첫째, 다섯가지 입장은 모두 서구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진부한 모델로 치부하며, 따라서 복지를‘정책’의 차원(즉 사회복지정책)에서‘국가체제’의 차원(즉 복지국가)으로 격상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 혹은 무관심을 보인다. 먼저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기든스의‘제3의 길’사상에 따라) 복지국가를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실패한 모델로 간주한다.4 그리고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 역시 서구의 복지국가를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좌초한 낡은 모델로 본다는 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도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노동주도형 경제를 창조하는 데 실패한 진부한 모델로 여긴다.
둘째, 복지국가 구상의 결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다섯가지 입장은 모두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조세개혁 구상을 진지하게 전개하지 않고 있다. 먼저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자들은 조세개혁의 중요성과 그 구체적 방안에 거의 무관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일영(李日榮) 등 신진보주의 국가론자들은 국민들의 맹렬한 조세저항을 거론하며 아예 한국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실현가능성을 부인한다. 박세길(朴世吉) 등 노동중심 통일경제론자들 역시 국민들의 조세저항으로 인해 서구형 복지국가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통일경제가 가져올 군비축소에 따른 복지재원 증대의 가능성은 이와 다른 문제이다.
조세개혁 구상을 일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그나마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와 참여연대 정도인데, 이들의 조세개혁 구상은 사회연대국가론과 사회투자국가론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조세투명성 강화와 신용카드 사용 등에 대한 조세감면 혜택의 축소 등 여러가지 구상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상당수는 이미 재정경제부에 의해 채택되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하지만 재경부는 이러한 소소한 조세개혁을 넘어서는 획기적이고 과감한 조세개혁 구상에는 맹렬히 반대하고 있다. 또한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민들 역시 실제로 저출산-고령화 대책을 위한 소폭의 조세부담 증가조차도 반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고 사회복지 재원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은 별다른 뾰족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 그리고 사회연대국가론을 주창하는 대부분의 학자와 연구자 들의 공통점은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5 따라서 이들은 케인즈 및 포스트 케인즈 경제학의 전통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균형재정론과 조세축소를 주장해온 신고전파 경제학, 특히 주류 공공재정학에 어떤 이론체계를 가지고 맞설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 재정적자 가능성을 무릅쓰고라도 국가적 복지지출을 과감하게 늘리며, 동시에 소득세 누진율 대폭 확대 등 과감한 조세혁명을 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설득할 논리적 토대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새로운 진보적 대안을 위하여
먼저 분명히할 점은 국민들이 느끼는 삶의 불안이 이른바 민주정부가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 확실히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민주화가 되면 과거보다 더 공정하고 더 잘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은연중 기대했는데, 이것이 좌절된 데서 오는 실망과 불만족이 매우 크다. 더구나 민주화와 함께 들어온 자유주의 시장원리의 확산에 따라 무한경쟁의 각박하고 비정한 승자독식 게임에 모든 사람들이 빨려들어갔다. 높은 수준의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연대를 추구했던 민주화의 기본정신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년간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자기반성해야 한다.
앞에서 본 대로 기존의 다섯가지 대안은 모두 생태·평화, 동북아공동체, 지식기반 경제, 지역혁신클러스터, 투명성과 시장원리, 재벌개혁, 기술혁신 등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사회보장 혹은 복지국가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모두 복지정책과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연대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선언하는 경우에도 실제 정책에서는 조세개혁의 비현실성을 거론하며 복지국가의 실현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까닭에, 복지정책은 주변적인 아젠다로 밀려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시장개혁’담론이‘혁신주도형 경제’니‘지식기반 경제’니 하는 담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이에크(F.A. Hayek)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에 따르면 불확실성이야말로 혁신의 원천이다. 슘페터(J. Schumpeter)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리고 시장원리의 확산은 모든 것을 유동화·유연화하고 불확실하게 만드는 까닭에 더욱 높은 혁신성을 추동해낸다.
하지만 하이에크의 생각은 틀렸다. 혁신을 위해서는 유연성과 불확실성만으로는 안되고 안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날 OECD와 다보스포럼조차 세계 최고의 혁신능력을 지녔다고 인정하는 덴마크다. 덴마크는 대표적인 복지국가인데 노동시장 유연성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기업주가 언제든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 정리해고의 천국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해고를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휴식으로, 재충전의 계기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개인에게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숙련과 지식을 새로 갖출 때까지 2년이고 3년이고 재교육을 해주고 실업수당으로 먹고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업주와 경영진의 필요에 따라 구조조정되더라도 종업원들이 이를 쉽게 수용하는 까닭에 산업혁신과 기업혁신, 고도화가 매우 쉽다.
98년 이후 시장개혁과 함께 지식기반 경제, 혁신주도형 경제라는 개념과 이론이 개혁진보세력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소수만 안정된 삶을 누리는 사회구조에서는 소수의 선발된 핵심인력들만 혁신과 지식기반에 필요한 능력을 습득하고 지식노동자화될 뿐 나머지 대부분은 배제된다. 선진국 수준의 사회보장과 주거·의료·노후보장이 마련되지 않는 한, 선진국형 혁신경제로 나아갈 수 없다.
세계화, 시장개방과 복지국가
세계화의 압력이 있어도 사회복지가 국민생활을 뒷받침해주면 사회가 불안하지 않게 유지될 수 있다. 가령 핀란드는 인구 5백만, 스웨덴은 1천만 정도이기 때문에 내수시장만으로 경제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나라들은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방했는데도 국민들은 불안 없이 잘살고 있다. 세계화가 그대로 삶의 불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핀란드가 복지국가 유지를 위해 매우 높은 개인소득세를 부과하는데도 기업들과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핀란드만이 가진 경쟁력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복지국가 씨스템의 결여이지 세계화가 아니다. 한미FTA의 경우에도 복지국가 구상을 빼놓고 투쟁만 하니 답이 나오지 않는 갑갑한 상황이 된 것이다. 시장개방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반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편적 복지제도의 확립이다. 이것이 빠져 있으니 진보의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꼴이다.
왜 우리나라 개혁진보세력은 지난 20년간 복지국가 구상을 내놓지 않았을까? 우리 진보세력 중 다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핀란드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도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불과하므로 더이상 관심도 없다. 그들의 유일한 대안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항상 반대만 했지 구체적 대안은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에 반해‘현실주의’개혁을 주장해온 세력, 특히 시민단체들은 매우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했는데, 사실 그 대안들 뒤에 있는 큰 방향은 자유주의적 시장개혁노선과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투명성 강화, 벤처기업 육성, 지식기반화 등 시장원리의 관철에만 주력했을 뿐 복지국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0년간 한국의 개혁진보세력은 대안 제시에 무능했다. 무능한 진보라는 비난을 들어 마땅한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진보는 복지국가 지향성이다. 그것 없이 진보를 말하는 것은 사기행위이다.
새로운 거대담론, 복지국가혁명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뉴라이트운동과 공병호(孔柄淏) 등 신보수주의자들의 진단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자유시장(free market) 원리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즉 FTA로 시장개방을 가속화하면 시장원리에 의해 국민경제가 저절로 선진화될 것이고, 교육에서도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하면 교육시장에서 자연히 글로벌 인재가 육성될 것이며,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투자를 활성화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분명 그들의 논리는 상당부분 현실성이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 땅에서 앞으로 5~10년 정도 시행되고 나면, 글로벌 시장경쟁력을 갖춘 상위 10~20%의 계층들, 즉 금융자산계급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소수 대기업 및 벤처기업 들에게는‘황금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한국은 바야흐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선진화혁명’은 허무맹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구호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미국식 선진화’에 맞서는 진보의 대안은 무엇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진보세력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개혁진보세력이 과연 투명성 강화와 정경유착 근절, 재벌개혁 외에 그 어떤 커다란 대안적 경제사회모델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가? 개혁진보세력이 과연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안적 경제이념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가?
1987년 독재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 개혁진보세력은 20년이 흐른 요즈음 부쩍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실질적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질적 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면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이 없다.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 반대가 바로 실질적 민주주의이며, 따라서 한미FTA반대야말로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길이라고 한다. 부분적으로 옳다. 한미FTA는 이 나라를 미국식 시장만능주의로 만들 것이고 미국 수준의 사회양극화를 불러올 것이니 맞서 싸워야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만약 한미FTA가 성사되지 않으면, 그러면 그만인가? 과연 진보는 반대의 아젠다를 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대안, 희망에 찬 미래 아젠다를 가지고 있는가? 반대에 머무르는 반대는 공허하다. 예컨대 반(反)공산주의를 내세워 민주세력을 탄압해온 수구세력은 정신적으로 공허하고 황폐해졌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긍정적 아젠다를 앞세운 민주화운동의 공세 앞에서 수세적인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집약하는 긍정적 이념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그들은 자유주의로 충만한 희망찬‘공세적’미래 아젠다를 차례로 제시해왔는데, 90년대의 WTO와 OECD가입, 98년 이후의‘글로벌 스탠더드’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미FTA를 통해 달성되리라는‘선진화혁명’역시 그 일부이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 반대, 한미FTA반대 등 반대에서 반대로 이어지는 수세적 방어에 급급한 형편이다.
부정이 부정에 그친다면 활력을 얻을 수 없다. 긍정적 내용과 실질이 충만한 아젠다만이 국민 개개인에게 희망찬 미래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래야만 수천만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반대’를 넘어 진보가‘찬성’해야 할 긍정적 내용은 무엇인가? 실질적 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진 90년대 이래 지금까지 이 땅의 진보는 거대담론 기피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 역시 엄청나게 거대한 담론이며, 거대담론에는 거대담론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진보세력은 신보수주의자들이 내놓은‘선진화혁명’에 대항해서‘복지국가혁명’이라는 새로운 거대담론을 내세워야 한다.‘미국형 선진화’에 맞서는‘북유럽형 선진화’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 두가지의 선진화담론을 놓고 치열한 이념 논쟁, 거대담론 논쟁을 벌여야 한다.
많은 이들은 북유럽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 모델이 과연 우리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하며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것은 국민의 3분의 2가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를 대폭 늘리는 스웨덴식 모델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선(先)복지혜택 후(後)조세부담의 원칙
우리 국민들은 복지국가를 맛본 적이 없다. 복지국가가 국민들, 모든 개개인의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 감격적인 체험을 한 적이 없다. 먼저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당장이라도 그런 복지국가를 만들기에 우리의 국가재정은 충분하다.
극빈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한번도 국가의 복지혜택을 받아본 적 없기 때문에, 복지국가 하면‘세금 더 걷자는 거냐’하면서 반발만 한다. 경험이 없는 까닭에 국가권력과 정치권이 아무리 미래복지를 약속하더라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국민적 반발은 자연스럽다. 이를 고려할 때 반드시 선복지혜택 후조세부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매우 질 높은 복지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주 유익하고 반가운 혜택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수년간 체험해야 한다. 1년으로 부족하고 3~4년 정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이렇게 좋은 복지국가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하며 조세개혁에 대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때‘균형재정’의 원칙은 잠시 유보될 필요가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과 재경부, 기획예산처 관료들은 적자재정이 되면 마치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우리 국가재정이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양호한 까닭에 몇년 정도는 적자재정으로 가도 별 문제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는 퍼주기식 복지가 아니라 기술혁신과 지식노동자화를 통해 경제성장으로 선순환되는 복지이기 때문에 결국은 조세수입이 증가하여 균형재정을 회복할 수 있다.
선진국들도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먼저 복지예산을 급격히 확충했다. 대공황이 낳은 대량실업과 삶의 파괴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복지예산 확충을 위한-그리고 2차대전 전쟁비용을 위한-재원은 우선적으로 상류층에 대한 소득세를 높임으로써 확보했다. 그후 1950년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서서히 중산층에 대한 조세부담을 늘려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 금융위기시 정부가 공적자금 150조를 퍼부었던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삶의 위기는 97년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재정적자를 걱정하면서 주저할 것이 아니라 100조 이상의 국가예산을 시급한 복지의 확충에 과단성있게 쏟아부어야 한다. 중산층을 비롯한 모든 국민에게 먼저 복지혜택을 과감히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길은 국민 3분의 2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60% 이상이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혜택이 큰 유럽식 복지국가모델을 선호하고 있다. 먼저 세금부터 더 내라는 노무현식 복지혁명이 아니라, 복지혜택을 우선 대폭 제공하고 나중에 증세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방식의 복지국가혁명이라면 대다수 국민이 적극적으로 찬성할 것이다.
중산층을 포함한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사회복지가 단지 경제적 약자에 대한 시혜적·선택적 복지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중간층을 포함하는 보편주의적 복지로 확대될 때만이 비로소 조세개혁에 대한 중간층의 반발을 극복할 수 있다. 즉 월급생활자 등 중간층에게는 세금만 뜯어내려 하고 아무런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복지국가, 가난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복지국가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산층이 복지국가의 맛을 제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산층을 포함한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중산층까지 복지국가 지원세력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고민하는 주택·의료·보육·교육·노후불안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빈곤층의 걱정거리를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우리 국민 90% 이상의 고민을 해결하는 셈이다.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우리나라의 발전단계로 볼 때, 바야흐로 복지를 혁명적으로 확대할 시점에 도달했다. 앞으로 몇년간은 그야말로 폭우가 내리붓듯이, 폭포수가 쏟아져내리듯이 급격하게 국가적 복지혜택을 늘려야 한다.
성장과 복지,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복지국가 역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필요로 한다. 역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도 복지국가가 필요하다. 가령 중소기업 문제를 보자. 우리나라 일자리의 80%를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형편이고, 앞으로의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국제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들을 키워내는 일이다. 그런데 중소기업들이 직면한 가장 큰 곤란은 괜찮은 인력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을 가르쳐 쓸 만해지면 대기업으로 이직해버리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고부가가치화되지 않고 있다. 산업고도화가 되지 않으니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현정부는 지난 4년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R&D(연구개발) 인력을 채용하는 기업에는 병역특례 특혜도 주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중소기업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인력난은 계속되고 있다. 만일 복지씨스템을 혁명적으로 견실하게 구축하여 국민들이 중소기업에 다니더라도 생활 면에서 대기업에 비해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우수한 인재들이 굳이 중소기업을 떠날 이유가 없다. 또한 혁명적 복지체계 아래에서 체계적인 직업훈련과 대학교육을 국가가 책임짐으로써 우수한 인재가 중소기업에도 많이 공급된다면 그야말로‘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고, 기업들의 생산성이 높아짐과 아울러 기술혁신·경영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니, 경제가 자연스레 성장할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혁신클러스터를 이야기하는데, 실은 R&D만 강조할 뿐이다. 사실 혁신클러스터의 성공을 위해서도‘복지 클러스터’‘교육 클러스터’‘생태·문화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 문화, 의료, 체육과 레저, 생태환경 등 삶의 기본영역에서 질 높고 저렴한 복지써비스가 제공되는‘사람 살 만한’지역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제는 외국인투자 유치를 위해서도 먼저 외국인들에게‘사람 살 만한’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지,‘기업 할 만한’환경 만드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야만 그곳에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고 이들을 노린 중소기업과 대기업 들이 옮겨와 혁신클러스터가 형성될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에는 과학기술과 복지·교육·문화정책 등이 하나의 패키지로, 하나의‘거대담론’으로 묶이지 않으면 경제성장이 담보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지국가는 소비적·정태적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산적·역동적 복지국가이다. 보편적 복지제도의 토대 위에서 역동적 복지국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능동적 복지와 혁신경제의 결합, 이것이 바로 혁신동력인 것이다.
능동적 복지란 아동·여성·노인·장애인 등에 대한 복지, 직업훈련과 평생교육 씨스템의 확립을 통해 모든 국민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혁신클러스터를 넘어 복지·교육·직업훈련·문화 클러스터가 구축되어야 하며, 이러한 토대 위에 혁신적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성장이 결합되어 산업고도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고도화를 도와주는 금융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주주자본주의와 동북아 금융허브 등 미국식 금융개혁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국의 추격을 물리치고 선진경제를 이룰 수 있다.
복지국가혁명을 위한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혁신원리와 경쟁원리는 장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원리를 작동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복지국가혁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삶의 불안밖에 남지 않는다.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운동마저 이익집단화되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과거 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새로운 혁명적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향후 백년을 내다보는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복지국가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뭉치지 않으면 막강한 시장주의세력의 힘을 막을 수 없으며 국민들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간복지를 성장의 근간으로 삼으며 인간을 경제의 목적으로 삼는 세력이 나타나야 한다. 지금은 재정경제부와 건설교통부 등 경제관련 부처의 공무원들이 국가예산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들과의 사상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국가예산권을 쥘 수 없고 그러면 복지국가혁명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노무현정부가‘민주복지국가’를 내세웠지만 실은 복지회관, 노인회관 같은 건물을 짓는 데 예산이 다 소모돼버렸다. 건설업자 좋은 일만 하고 끝난 것이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편협한 성장주의와 싸워 그것을 압도해야 한다.
국민들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권리를 행사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았으나 그들은 제대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공백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 즉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이 무능하니 관료들이 행세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비판받아야 할 것은 관료보다는 정책주체들, 특히 정당들이다. 이제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정책정당, 새로운 정책주체가 필요하다.
복지국가혁명을 대통령과 국회의원 몇명이 시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책과 슬로건, 미래비전을 가지고 움직이는 수십만, 수백만명의 사회운동과 정책정당운동이 필요하다. 이들이 수천만 국민들을 감동시켜나가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1980년대에‘의식화’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치적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적 민주화의 정신을 계몽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그 의식화의 약효가 이제 다 떨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시장만능주의의 시대에 맞서 복지국가혁명의 정신을 계몽하는 제2의 의식화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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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복지국가 Society’정책위원회가 저술한 『복지국가혁명』(밈 2007)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이 글의 후반부는 그 책에 실린 좌담‘왜 복지국가혁명인가’와 조원희 대안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의 추천사를 대폭 인용한 것이다.↩
-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가 주창한‘사회연대국가’구상과는 별도로, 민노당의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후보는 각각 독자적인 미래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권영길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사실상 신진보주의국가론 주창자들의 남북평화경제론 및 동북아경제론 그리고 지역혁신클러스터론과 매우 유사한 정책들을 핵심전략으로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신진보주의국가론자들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조차 완곡히 거부하는 모습을 고려할 때 민노당도 실은 사회연대국가(복지국가)에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 따라서 다섯가지 입장 중 어떤 것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모델을 그 자체로서 우리 사회의 진보적 대안으로 모색하기를 거부한다.↩
- 전후 영국에서 전개된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보다 보수주의 복지국가 유형에 가깝다. 이에 관해서는 빅 조지, 폴 윌딩 『복지와 이데올로기』(한울 1999) 참조. 그리고 수십년이 넘는 장기집권을 통해 복지국가를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에 맞게 일관된 모델로 수립한 나라는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유럽국들에 불과하다. 다른 유럽 주요국들에서 전후에 형성된 복지국가는 사실 보수주의 정당들(독일과 이딸리아의 기독교민주당, 프랑스의 드골주의 정당, 영국의 보수당)에 의해 그 주요 특징이 형성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G. 에스핑앤더슨 『복지 자본주의의 세가지 세계』(성균관대출판부 2007) 참조. 따라서 1980년대 이후‘실패한’모델로 간주되는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의 복지국가모델과 앤서니 기든스가 비판한 영국의 베버리지-케인즈 모델은 지금도 ‘성공적인’북유럽형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모델과 상당히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미야모토 타로 『복지국가 전략-스웨덴모델의 정치경제학』(논형 2003) 참조.↩
- 북유럽국들 역시‘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변되는 베버리지형 복지정책과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을 권장한 케인즈 경제학을 복지국가정책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렀던 영국과는 달리 북유럽국들은 실업자 전직훈련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연대임금정책(렌-마이드너 Rehn-Meidner모델) 등을 통해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에 내재된‘소비적·정태적’복지국가의 한계를 넘는 생산적·능동적 복지국가를 창출해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복지국가 논의는 대부분-신진보주의국가론과 사회투자국가론이 대표적인데-생산적·능동적 복지국가(적극적 노동시장과 혁신정책 등)가 마치 베버리지-케인즈형(소비적·정태적 복지국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양 잘못된 환상을 품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논의 전개에는 소비적·정태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생산적·능동적 복지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 앤서니 기든스의‘제3의 길’에 담긴 오류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