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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카라따니 코오진 『세계공화국으로』, 도서출판 b 2007

국민국가를 넘어 세계공화국으로?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jkyoo@pusan.ac.kr

 

 

세계공화국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세계공화국으로』(世界共和國へ,조영일 옮김)는 제목만으로도 대충 결론은 짐작되는 그런 책이다. 인류의 다가올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서 세계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전쟁과 환경파괴, 경제적 격차라는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카라따니는 작년 국내에 소개된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 b)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이 세가지 과제를 문학이 떠맡지 못하기에 문학을 떠난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물론 세계공화국 이념은 그가 제창해온‘뉴 어쏘씨에이션 운동’(NAM), 즉 자본과 국가의 내부로부터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운동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NAM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면, 이제 세계공화국을 향한 위로부터의 운동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커뮤니티(어쏘씨에이션)를 점진적으로 실현해간다는 구상이다.(225면) 오늘날 세계경제에서는 국가나 자본주의를 일국단위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체제를 내부에서 대체하는 과정과 동시에 세계차원의 통합과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공화국은 어떻게 가능할까? 각국이 국민국가의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 양도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같은 곳) 좀 싱겁다고 해야 할지, 실천적 방책으로는 아무튼 이상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책의 실제 내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저자의 말이 무색하게, 계속 다가오는 생각거리 때문에 나로서는 읽기가 별로 쉽지 않았다. 제목과 달리 세계공화국을 제창하는 결론은 아주 소략하며, 책 대부분은‘교환양식’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의 틀과 이를 근거로 한 역사적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목차를 보더라도 교환형식-세계제국-세계경제-세계공화국으로 이어지는 틀은 저자가 모종의 보편사적 역사를 모색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대체로 논리전개는 치밀했고, 서구의 여러 사상가들을 종횡무진 원용한 대담한 주장들은 모처럼 지적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맑스의 생산양식론과 상·하부구조론을 비판적으로 대체하는 교환양식론이라는 새로운 역사인식틀, 그리고 맑스사상에 대한 재해석은 아주 과감한 편이다.

오늘날은 물론 세계경제의 시대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은 세계경제는 자본제〓네이션〓국가의 삼위일체의 접합체로 작동하며 이 세가지가 각기 다른‘교환양식’이라는 것이다. 카라따니는 맑스의 생산양식론이나 상·하부구조론이 오해를 유발하기 쉽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생산양식은 생산이 일정한 교환이나 분배 형태로 이루어지는 방식인데도, 생산이 먼저 있고 교환·분배가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용어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자본』의 과감한 재해석을 통해 맑스에 관한 통상적 이해를 전복시키는 대목이었다. 가령, 맑스 이론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경제적 하부구조이기는커녕 종교적 세계와 같은 것이라든가, 맑스가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계승해 잉여가치론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렇게 한 것은 영국의 리카도(D. Ricardo)학파 사회주의자였다든가, 맑스는 고전경제학에 반대해 유통과정을 중시했다든가, 맑스 이론에서 잉여가치는 광의의 유통과정에만 존재한다든가, 자본은 본질적으로 상업자본이라든가 등등. 카라따니는 이렇게 해석한 맑스를 적극 지지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간다. 이런 대담한 주장들은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고 특히 맑스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통주의자였다고 주장했던 월러스틴(I. Wallerstein)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무튼 카라따니의 맑스 해석은 계속 숙고해보아야 할 논란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카라따니가 맑스의 생산양식 대신‘교환양식’이란 용어가 적절하다고 보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편사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한 사회구성체 내에 각기 다른 세가지 기초적 교환양식을 판별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증여/답례의 호혜(번역본에서는‘호수互酬’)적 교환, 약탈과 재분배의 교환, 상품교환이 그것이다. 호혜적 교환은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약탈-재분배 교환과 상품교환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성립한다. 전(前)자본주의 사회 중에서 씨족적 사회구성체는 세가지 가운데 호혜교환 양식이, 아시아적·고전고대(古典古代)적·봉건적 사회구성체는 약탈-재분배가 지배적인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상품교환이 지배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근대 세계경제에서 자본주의가 상품 및 화폐의 교환양식이라면, 국가는 약탈-재분배의 교환양식을, 네이션은 호혜관계에 기반한 교환양식의 변형을 나타낸다.

하지만 카라따니의 문제의식은 자본제〓네이션〓국가의 내부이면서 동시에 바깥에 존재하는 제4의 교환공간을 상상하는 데 있다. 상호호혜적이지만 자유가 보장되고, 시장경제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교환양식, 즉 어쏘씨에이션은 시장경제 위에서 호혜적인 관계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어쏘씨에이션의 교환양식이 이미 세계제국시대에 기독교·이슬람교·불교 같은 보편종교(세계종교)에 의해 추구되었다고 본다. “보편종교(세계종교)는 공동체도 국가도 아닌 시장적 공간(도시)에서 출현하고, 또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 즉 새로운 교환양식을 개시한 것”이다.(107면)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사회원리가 되지는 못했는데, 보편종교가 현실적으로 확대·정착되면 다시 국가의 종교, 공동체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카라따니에 의하면 근대 사회주의 사상사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국가적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4의 교환양식인 어쏘씨에이션의 회복으로 극복하려 했던 인물이 프루동(P.J. Proudhon)과 맑스이다. 그밖의 사회주의 사상은 국가에 의한 시장경제 통제라는 길을 추구해왔고, 가령 프랑스 혁명이념인 자유·평등·우애에서 자유(시장경제의 상품교환)를 평등(국가의 재분배)과 우애(공동체적 호혜관계)에 의해 통제하려는 길이었다. 이에 비해 자유를 우선시한 프루동과 맑스는 양자간의 사상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카라따니의 독특한 주장이다. 라쌀레(F. Lassale)식의 국가사회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던 맑스는 협동조합의 어쏘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프루동파라는 것이다. 맑스가 프루동파 아나키스트라면, 엥겔스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레닌은 국가주의적이다.

그래서 카라따니가 보기에 맑스의 결함은 국가주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아나키즘에 있다. 국가의 자립성은 그것이 약탈-재분배라는, 자본주의 경제와는 다른 교환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 그리고 국가는 다른 바깥 국가에 대해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199면) 그렇기에 국가는 내부에서 지양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빠리꼬뮌이나 볼셰비끼혁명 모두 바깥의 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집권화를 강요받고 국가 강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세계공화국의 이념은 자본제〓네이션〓국가의 극복이 국가 내부의 해체로는 충분하지 않고 외부에서 지양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데서 오는 논리적·윤리적 요청인 셈이다.

이 점에서 카라따니의 세계공화국은‘근본적’이면서‘점진적’인 기획이다. 근본적이지 못하고 성급한 전략은 그 의도와 반대로 국가를 강화해 결국 자본주의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스딸린주의와 파시즘이 그렇거니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제〓네이션〓국가를 넘어서기는커녕 후자가 존속하기 위한 유일한 마지막 형식일 뿐이다. 자본제적 시장경제를 그대로 인정한 채 그것을 국가권력으로 제어하려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는 자본과 국가를 지양할 전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통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인데, EU와 같은 지역통합 역시 현존 세계체제에서 국가가 확대된 형태인‘광역국가’일 뿐이다.

카라따니의 세계공화국 구상은 절박한 현실에 맞서는 규제적 이념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만으로 그 구상을 비판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경제에서 세계공화국으로 가는 길의 논리가 칸트(I. Kant)의 영구평화론에 의지하는 당위론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자 그 자신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각 나라의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225면)라는 결론에는 비관의 음조마저 깃들어 있다. 그는 다른 데서도 이런 구상의 실현은 몇세기가 걸릴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론적으로 미래변혁에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데서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찾기도 한다. 누구라도 그같은 장기적 전망과 이념에 근거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카라따니의 결정적 문제는 국가적인 기획이든 지역통합이든 그것에 대한 경계가 지나친 나머지, 일체의 중·단기적 전망과 전략을 백안시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 자신이 애초에 관심을 가졌을 현 세계의 지역간·국가간 위계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시야에서 부차적으로 밀려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같은 지정학적 분열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발상을 국가를 강화하느냐 아니냐 하는 기준에서만 사고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