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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반전평화를 위한 미술가들의 선언

평화선언 세계 100인 미술가전

 

 

정영목 鄭榮沐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mylove@snu.ac.kr

 

 

올 여름과 가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평화선언 세계 100인 미술가전’(7월 31일~10월 24일)이 열렸다. 김윤수 관장 체제 아래 갖는 첫 대규모의 기획, 주제 전시로 이러저러한 말도 많았지만 성사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라크전쟁과 북핵문제 속에서 한국 문화계가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는 측면에서 이는 시의적절했다. 한국전쟁을 겪었고 또한 이라크전쟁과 본의 아니게 연루된 우리로서, 나아가 냉전체제의 유산을 그대로 안고 북핵을 둘러싼 미국의 다음 행보가 심히 걱정되는 우리로서 이 싯점에서의 평화란 우리의 생사와 관련한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전시회의 취지와 목적에 관한 더이상의 이야기는 필요없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의 두 지성 데리다(J. Derrida)와 주프루아(A. Jouffroy)가 작성한 전시도록의 ‘선언문’ 중 다음 구절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한다.

“문화적 일방주의나 정치·군사적 일방주의는 모두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타락과 부패의 영향을 가져온다.” “(모든 문화가 동등하게 취급되면) 자유는 더이상 정의와 분리되지 않고 자유라는 알리바이가 더이상 정의의 폐지를 위한 보증인 노릇을 하지 않게 될 (세계 사회).”

두 지성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저해하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 전략을 부정한다. 아울러 조폭의 보스처럼 행동하는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인류의 타락과 부패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때문에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미국이나 그 어느 국가도 전쟁을 도발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지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평화를 주장하는 지성인의 역할에 좌우익의 구분, 진보/보수의 편향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그렇지 못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진 자들의 일방적인 평화만 있을 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탐욕은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1937년 「게르니까」를 그린 삐까쏘에게 그렇게 갈채를 보냈던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정치적 행동과 그림으로 평화를 주장한 삐까쏘를 소련의 첩자로까지 몰아세웠다. 삐까쏘가 공산주의자가 제창하는 평화에 앞장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탐욕과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미국의 정치적 편향성이 이처럼 잘 드러난 사건은 20세기에 없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역작을 그린 삐까쏘와 그를 밉게 본 미국의 태도를 시대가 낳은 냉전의 부산물쯤으로 지금은 가볍게 취급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가장한 미국의 탐욕스러운 눈이 평화를 지향한 한 예술가의 지성을 어떻게 관찰하고 평가했는지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국은 지금도 변한 게 없다.

서용선 「폭격」, 2004, 캔버스에 아크릴 227×181cm

서용선 「폭격」, 2004, 캔버스에 아크릴 227×181cm

아마도‘평화선언 세계 100인 미술가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위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전시회의 개념과 관점이 이라크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와 일치하므로, 미국은 한국의 국립미술관이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규모의 기획전을 갖는 것 자체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미국측의 참여 작가는 짐 다인(Jim Dine)뿐이었다. 사안이 그럴수록 정치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영국 측의 작가들을 더 많이 영입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시의 주축을 형성한 것은 한국과 독일,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특히 ‘세계 100인 미술가’ 중에서 한국 작가가 52명이나 참여해 과연 ‘세계적’이란 명분의 대표성과 보편성에 합당했는지 의문이다. 참여한 한국 작가들 중에는 기획전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안이한 작품도 섞여 있었으니, 김창렬, 전성우, 이우환, 김종학, 방혜자, 이두식 등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석연치 않다.좀더 체계적이고 선명한 기획과 주제의식이 있어야 했다. 이는 큐레이팅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에 걸맞은 전체로서의 합의와 문제의식을 도출해내지 못한 결과이다. 때문에 외국 작가의 일부 작품에서도 이러한 아쉬움이 있었다.

‘평화선언’이라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방한 전시라 미리 예측할 만한 ‘평화’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개념정립도 필요했다. 작가들의 대부분은 역설의 측면에서 평화의 이미지로 ‘전쟁’과 관련한 특정의 도상이나 추상적인 느낌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내용과 형식이 제각각이어서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각인되기에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 역시 큐레이팅 과정에서 어느정도 잡아주었어야 했다. 현대의 전시는 시공간을 통한 이미지의 적극적인 정치학이고 경제학이자 수사학이다.때문에 전시는 말없이 대중을 선동하고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우리의 뇌리에 시와 같은 이미지로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최근의 전시는 국가간의 경쟁을 유발할 정도로 권력화되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각 나라들과 유수의 도시들이 대규모 국제전을 경쟁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이러한 양상을 대변한다. 때문에 국가가 어느정도 개입하는 것을 나쁘게 볼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적극적인 문화정책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힘을 실어주어야 함을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평화’에 관한 대규모의 국제전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개최한다면, 그 명분이나 위치나 시기에서 얼마나 그럴듯한가! 이참에 ‘평화선언 세계 100인 미술가전’과 같은 전시의 지속적인 개최를 미술관측에 제의한다. 물론, 그 형식과 내용과 방법에서 더 나은 미래를 전제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