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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민주주의라는 창을 통해 본 한국현대사
정일준 鄭一畯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ijchung@korea.ac.kr
한국현대사는 논쟁중이다. 대선판과 엇물려 소위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사이에 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분단과 전쟁, 대결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그런가 하면 지구시대를 맞아 한반도 바깥에서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현대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기간에 이루어낸 성공담이다. 이런 대내외 조건 속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 전반과 박정희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룬 두권의 저서가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두 저서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밖에서 또는 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을 풍부한 역사적 사실 제시를 통해 잘 밝혀주고 있다.
서중석(徐仲錫)의 『한국현대사 60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이하 『현대사』)은 “독재시절을 겪지 않아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감하기 힘든 새로운 세대들에게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하는 것”과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그 경험을 소개해, 한국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성과, 한계 모두를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인류의 자산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6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조희연(曺喜昖)의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이하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진보적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가능한 한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어서려고”(11면) 하면서 “박정희시대의 긍정적 측면도 개방적으로 인정하고자 했다”(14면). 두 저서는 대중적인 한국현대사 입문서 또는 박정희시대 소개서로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사』는 1장‘해방·분단·전쟁·이승만독재’2장‘4월혁명과 민주주의’3장‘박정희 군부정권과 학생운동’4장‘유신체제와 반독재투쟁’5장‘광주민중항쟁에서 6월민주항쟁으로’6장‘민주주의의 진전과 남북의 화해’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한글판에 그치지 않고 영어·일어·독일어·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 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한국현대사의 통사(通史)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저서는 “민주화운동사가 현대사와 어떠한 관련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8면)를 알기 쉽게 서술했다. 『박정희』에서는 박정희시대를 다섯 시기로 나누고 있다. 제1기는 5·16 군사쿠데타에서 민정이양까지(1961~63), 제2기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둘러싼 1960년대 중반까지(1964~67), 제3기는 1968년경부터 유신체제 이전까지(1968~72), 제4기는 10월유신부터 긴급조치 9호 발효 이전까지(1973~75), 제5기는 긴급조치 9호 시대부터 10·26까지(1976~79)이다. 그 위에서 각 시기마다 지배와 저항을 둘러싸고 정권과 운동세력이 어떻게 상호 작용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전자의 책이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풍부한 사실을 바탕으로 비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후자의 책은 비교사회학적 시각에서 “박정희체제를 움직였던 복잡한 동학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것”(8면)을 목표로 삼고 있다.
두 저자는 각기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를, 또 거대한 변환이 일어난 박정희시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연대기적인 사실 나열에 그치지 않고 기계적 중용에 머물지 않으며 이념을 앞세워 과도한 해석에 치우치지 않은 것이 두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아마도 두 저자가 당대를 치열하게 살았으며, 그후에도 학문의 길에 성실히 매진해온 까닭일 것이다. 한국현대사 일반, 특히 박정희시대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된 현시점에서 두 저서의 출간이 대중적인 갈증에 일부 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 연구서가 아닌 대중서인지라 두 저서를 본격적으로 평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첫째, 한국현대사 전반 그리고 박정희시대를 민주주의라는 창(窓)만을 통해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한국현대사라는 건물에는 민주주의라는 창 말고도 국제관계나 국가안보, 경제발전, 민생 등 여러개의 창이 있을 수 있다. 또 창은 정지된 건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차에도 있고 비행기에도 있다. 우주선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창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건물에서도 어느 방향이냐 또는 몇층이냐에 따라 다양한 경관을 마주하게 된다. 한국현대사만큼 역동적이고 압축적이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실재도 없을 터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사를 민주주의라는 창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둘째, 『현대사』는 1945년 8월 15일부터 시작하고,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부터 시작하는데,‘8·15해방’‘5·16쿠데타’라는 통념에 기댄 서술은 앞뒤의 역사적 흐름은 물론 당대의 구조적 맥락도 놓치게 만들 우려가 있다. 『현대사』에서 조선해방의 국제정치적 맥락을 제시하지 않은 점이나, 한국전쟁과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을 전후좌우의 맥락을 절연한 채 각각 5면 남짓으로 서술한 것(『현대사』 36~40면; 114~18면)은 매우 아쉽다. 이 사건들이 민중의 삶과 죽음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끼쳤느냐보다는 저자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의 선택과 서술의 비중 자체가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 게 아닌가 싶다.
셋째, 두 저자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시대와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당대에 풍문으로만 떠돌던 사건이 사실로 확인되기도 하고,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새롭게 인식되기도 한다. 또 세월이 흐르면 당대의 인식과 이해가 일정부분 오류였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예컨대 1961년 “2월 8일 감독권 강화 등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많이 들어 있는 한·미경제협정이 맺어지자 혁신계와 학생들은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반대운동을 벌였다”(『현대사』 84면), “정치인, 군부, 미대사관이 분주히 움직여 군정연장을 보류한다는 4·8성명이 나오기에 이르렀다”(100면), “박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6·3사태를 권력 강화의 기회로 활용했다”(107면)는 등의 언급이 나온다. 이러한 서술은 객관적인 사실을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당대의 인식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1950년대는 흔히‘원조경제’시대라 부른다.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원조물자를 자유당 지배세력이 착복했기 때문에 4월혁명 이후 분배과정을 투명하게 하고자 한미경제협정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요즘 국제원조기구에서 북한에 원조물자를 줄 때 과연 인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감시, 감독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미국이 때로는 군정연장에 반대하기도 하고 박정희정권 편을 들어 사회운동세력을 억압하는 쪽에 서기도 했다는 진술만으로는 당시의 복합국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 한국의 정치변동, 사회변동을 배후에서 좌지우지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두 저서는 너무나‘현재적’이라 당시의 인식과 평가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의 지혜에 기대기에는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것 같다.
끝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 20년과 개혁정권 10년이 지나는 지금 두 저서가 출간되었다는 점이 갖는 함의가 주목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저항의 논리일 뿐 아니라 통치의 원리이기도 하다. 일정정도 민주화가 진전된 지금 여기에서 민주화투쟁을 중심으로 한국현대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남한이 이룩한 민주화에 대한 자화자찬? 민주정권 정당화? 아니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 위한 문제제기? 어떤 이유에서건 상관없다. 민주화시대에는 과거 반민주진영도‘민주적으로’민주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 과거 민주화투쟁의 경험과 더불어 결코 짧지 않은 집권경험을 통해 민주진영의 역사관과 세계관은 더욱 심화되고 확장되었을 터이다.
지금 여기서 민주주의 공고화와 심화를 위해서는 저항과 비판의 논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이를 세계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투쟁경험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시민사회에 머문 인식지평을 국가 너머의 국제정치체제와 세계경제체제로 확장하고 통치사와 저항사를 결합하며, 민중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역사서술에 가중치를 두는 복합적 시각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두 책의 저자들에게만 온전히 맡길 일은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동시에 새로운 사회구성원을 충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Remembering is re-membering).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소중히 간직하고 가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의 실천경험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아울러 한계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한국 민주화의 길은 굽이굽이 길이 길에 연하여 가까스로 이어진 아슬아슬한 장정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앞길도 미래를 향해 뻥 뚫린 고속도로는 아닐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박정희시대를 되돌아보는 일은 역사적 현재로서의 오늘에 대한 새로운 다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