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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2007 남북정상회담을 결산한다

 

 

김근식 金根植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공저서로 『남북한 관계론』 『북한 도시의 위기와 변화』 『북한의 체제전망과 남북경협』 등이 있음. kimosung@kyungnam.ac.kr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도출된‘2007 남북정상선언’을 놓고 엇갈린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재정(李在禎) 통일부장관은 향후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킬‘천사’정상선언(10.04)으로 명명한 데 반해,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핵폐기 약속 없이 북에 제공할 목록만 합의해준 실패작이라고 혹평했다. 심지어 정상회담의 성과 등은 제쳐둔 채 논란이 되는 일부 지점만 집중 제기하면서 전체 정상회담의 의미를 퇴색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에 다녀온 필자로서는 이같은 엇갈린 평가를 접하면서, 분명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 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하고 흠집내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우리 정치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 국면의 정치적 유불리 때문에 존재하는 성과를 백안시한 채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점을 자꾸만 부각하는 것은 남북관계라는 초당적인 사안에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행태이다. 최근 핵문제 해결 움직임과 더불어 이제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시화될 정세변화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어렵게 도래한 한반도 정세 급변기에 정치적 고려만 내세우며 주저하고 머뭇거린다면 또 한번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말 것이다.

 

 

6·15공동선언의 계승과 발전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가 우리가 동의하는 방향이라면 이번 2007 남북정상선언은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합의들을 담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 합의는‘6·15공동선언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압축적 표현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공동선언에 따라 그동안 남북관계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반세기 이상 지속된 적대적 대결관계 대신 화해협력의 관계가 개막될 수 있었고, 그 방향으로 지금까지 7년 동안 남북관계가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6·15가 개척한 길을 걸어오면서 새로운 과제가 생겨났고 극복해야 할 과제도 발생했다. 정치·군사분야의 진전을 이뤄내야 했고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협력 방식을 창출해야 했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은 6·15공동선언에 기초해 지속되어왔던 남북관계를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화해협력이라는 6·15공동선언의 큰 방향을 그대로 이어나가되6·15공동선언에 포함되지 않았던 내용을 새롭게 이끌어냄으로써 향후 남북관계를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번 정상회담이었다. 2007 남북정상선언은 6·15가 열어놓은 길을 좀더 넓히고 포장하고 반듯하게 가꿈으로써 우리가 목표로 하는 평화와 통일이라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와 군사분야의 진전이 이뤄짐으로써 정상적인 남북관계 발전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경제와 사회·문화가 앞서가고 정치와 군사는 뒤처지는 불균형한 모습이었다.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가 빈번해진 반면, 정치적 화해와 군사적 신뢰구축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정상적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은 상호 적대관계 해소,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그리고 전쟁반대와 불가침 의무를 재확인하면서 앞으로 서해상에서 군사적 신뢰구축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합의했다.

이는 남북관계에서 군사분야의 신뢰를 가시화하는 것이며, 나아가 경제협력의 확대·발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경협 발전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바로 남북간 군사분야의 신뢰 부족이었다. 완공해놓은 경의선 철도를 운행하지 못한 핵심적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군사적 보장조치의 문제였다. 남북간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불가불 군사적 신뢰구축과 이에 따른 군사적 보장조치가 원만히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경협 발전의 선결조건이 바로 군사분야의 보장이고 이 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에서 군사적 신뢰구축이 합의된 것은 향후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사활적인 의미를 갖는 셈이다.

물론 정치분야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냈다. 공동선언 2항에 나온‘상호 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로의 전환’은 앞으로 남과 북이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치적 화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상호 내정불간섭과 상대방을 부인하는 법제도의 정비 등은 앞으로 남과 북이 상대방 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용인하는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다. 경제적 협력과 사회·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더라도 상대방의 정치적 실체를 서로 인정하지 않으면 남북의 화해협력은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상대방의 체제·이념·제도를 인정하고 이에 기초해 상호 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정상적 관계의 기본이다. 아울러 이번 정상회담 기간에 남측 대표단이 공식일정으로 아리랑공연을 참관한 것도 사실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상징적 조치이다. 이는 2005년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金基南) 당비서 일행이 공식적으로 현충원을 방문한 일에 상응하는 조치로서, 향후 남북간 정치적 화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사분야의 진전과 함께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경협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공리공영(共利共榮)과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원칙하에 경제협력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존의 경제협력이 대부분 남쪽이 북쪽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일방적인 시혜성 지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면, 이제는 남과 북이 서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쌍방향 투자적 선순환의 경제협력이 가능해졌다. 6·15공동선언에 명기된‘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더해 이제는‘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이라는 경협의 새로운 방향이 명시되었고, 이는 곧 남과 북에 서로 도움이 되는 윈윈(win-win)의 경제협력이 추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번에 합의된 안변과 남포의 조선협력단지는 대표적인 유무상통의 경협모델이다. 한국의 조선산업이 쏟아지는 수주량을 소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이나 동남아에 공장을 짓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국내에서 저렴한 숙련 노동력을 구하기 힘들어서이다. 북한은 최근 령남 배수리(修理)공장을 준공하는 등 선박분야에 관심을 쏟으면서 양질의 기술과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다. 이제 남북의 조선분야 협력이 이뤄지면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더라도 북쪽의 숙련된 저임금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이는 남과 북에 서로 경제적 이익을 주는, 말 그대로 유무상통의 전형적 협력모델이 되는 것이다. 개성공단의 확대와 문산-봉동간 화물열차 운행 및 통신·통행·통관 등 3통문제 해결 역시 앞으로 남쪽기업의 개성공단 투자를 더욱 활성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그동안 남북관계의 진전과정에서 풀어야 했던 문제들, 즉 경협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한반도 평화 문제와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졌고, 그 결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경제협력의 방향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남북관계는 군사분야의 평화 증진과 경제협력부문의 번영이 동시에 진행되는 정상적 관계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경제협력이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를 더욱 증진하고 역으로 군사분야의 진전이 경제협력을 더욱 확대·발전시키는 상호 선순환의‘평화번영’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른바 평화가 경제에 기여하고 경제가 평화를 확대하는‘평화경제론’이 비로소 남북관계에 가시화되는 것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발상의 새로운 전환

 

평화와 번영이 병행되는 향후 남북관계 구상은 바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NLL(북방한계선)을 양보했다며 트집을 잡고 있지만, 이는 정말 과거의 오래된 인식에 사로잡혀 새로운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발로일 뿐이다. 이번 합의사항 중 가장 의미있는 내용으로 꼽히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한마디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커다란 성과이다. 남북간 군사적 대결과 충돌의 최전방이었던 서해에 대하여 군사적 관점에서 협소하게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통해 항구적인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도모할 수 있도록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새롭게 접근한 것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 실현되면 해주공단에서 남과 북의 노동자가 같이 일하고, 공동어장에서 남과 북의 어민이 함께 고기잡이를 하고, 한강 하구에서 남과 북의 배가 공동으로 골재를 실어나르는 전혀 새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남북협력과 공동번영의 구체적 현실이 다가오는 것이다. 서해지대에서 남과 북의 협력이 상시화되고 장차 해주-개성-인천을 연결하는 평화의 삼각지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고가는 새로운 장을 열어나간다면, 여기에는 남북의 군사적 대치와 충돌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경제협력이 평화를 증진하고 그 평화가 다시 경제협력을 가속화하는 선순환의 전략적 접근이 서해에서 가시화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이 군 인사를 불러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고 수락했다는 전언은 이번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안이 우리의 적극적 제안을 북이 합리적으로 수용해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합의문에 NLL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것도 남북 정상이 서해구상이라는 더욱 크고 새로운 발상에 동의하면서 오히려 그 쟁점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군사분야의 평화와 경제분야의 공동협력이 공존하는 서해의 평화번영벨트라면 남과 북이 대치하는 NLL의 협소한 의미는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경제와 군사가 있고 공단과 어장이 있으며 평화와 협력이 동시에 결합되는 향후 남북관계 발전의 실험장이자 모델하우스가 될 것이다. 남과 북에 서로 도움이 되는 경제협력의 현장이자,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가 해소되는 평화공존의 지대가 될 것이다. 해주공단을 오가는 남과 북의 민간선박이 서해를 가로지르고 공동어로구역에서 일하는 남북의 고기잡이배가 자유롭게 왕래하다 보면, 남북의 군사적 대치와 긴장은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사실이 군사분계선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대폭 늘어나게 되면, 군사분계선은 형식적인 선으로 남을 뿐 그 선이 갖는 기존의 위험성과 적대성은 현저히 약화되고 결국은 해소될 것이다.1 마찬가지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현실화되면 NLL은 선으로 존재하지만 그 위험성은 현저히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NLL의 관계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안에 NLL은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본시 정전체제에서 해상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그어놓은 선이라는 NLL의 역사적 취지에 따르더라도, 이번 서해특별지대를 통해 한층 포괄적이고 공고하며 항구적인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이뤄내는 것이 오히려 NLL의 의미를 살리는 길이다. 안보상의 이유로 설정해놓은 지금의 NLL을 영토개념이라 우기면서 집착하는 것보다는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통해 근원적으로 서해상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애초에 우리가 NLL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평화와 안보를 얻어내는 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놓고 NLL을 포기한 것이라며 감정적 비난을 퍼붓는 행위는 발상의 새로운 전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거나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정상회담 발목잡기

 

애초에 정상회담 자체를 내키지 않아하는 측에서는 당연히 이번 합의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성공적인 정상회담이었다고 평가하는데도 일부에서는 합의사항에 시비를 걸면서 계속해서 흠집을 내려 하고 있다. 비핵화와 관련해 합의내용이 미흡하다는 비판이 핵폐기나 비핵화라는 구체적 단어가 명시되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에서 나왔다면 그건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이번 합의가 핵문제에 대해 어떠한 의미있는 내용도 담지 못했다는 식의 비난은 정당하지 못하다. 합의문에서 순조로운 이행을 위해 노력하기로 명시된 9·19공동성명에는‘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프로그램을 폐기’한다는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이 포함되어 있고, 2·13합의는 이를 실질적으로 이행하는 구체적 조치이다. 이 합의들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북의 비핵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회담 도중 핵문제에 대한 노대통령의 문제제기를 듣고 김위원장이 김계관(金桂寬) 외무성 부상을 직접 불러 6자회담 진전상황을 보고하게 한 것은 핵문제에 관한 한 6자회담 틀에서 이미 합의한 핵폐기의 방향으로 갈 것임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주는 행동이었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종전선언을 추진하기로 한 제4항에 대해, 이른바‘3자 또는 4자’논란을 부추겨 이 합의의 본래 의미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중국을 제외할 수 있다는 외교적 논란 책임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결코 훼손될 수 없는 획기적 내용이다. 심지어‘3자’가 한국을 제외한 북·중·미 3자일 수도 있다는‘우려’가 제기되기도 하는데, 그동안 북이 정전협정을 서명한 3자에서 한국이 빠졌다는 이유로 북·미 양자만의 협정을 주장한 적은 있으나 중국을 포함하는 평화협정을 한번도 제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더라도 이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이렇게 북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서 매번 한국을 제외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정상선언의 합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북이 남쪽을 평화체제 논의의 명실상부한 파트너로 공식 인정했다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지난해 말부터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이른바‘종전선언’구상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이 처음으로 공식 화답함으로써 향후 평화체제 논의가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또한 6자회담이라는 국제적 틀로 한반도 평화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현상황에서 이번 회담을 통해 남과 북이 한반도 평화의 실질적 당사자이자 책임자로서 평화체제로의 전환과정에 동의하고 종전선언 추진에 구체적으로 합의함으로써, 이제 한반도 평화를 단순히 국제적 구도 속에서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틀에서 주도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역사적 정당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논란이 되는‘3자 또는 4자’에 대해서는, 부시 대통령의 제안을 김정일 위원장이 수용하면서 당연히 남·북·미 3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3자로 명시한 것이고, 다만 그 표현과정에서 중국이 참여하겠다면 막지 않는다는 개방성의 의미로 4자를 동시에 표현한 것일 뿐이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번 합의의 큰 성과를 애써 무시하고 사소한 문제점을 들춰내려 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획기적 의미라는 큰 숲은 일부러 보지 않고 조그마한 나무만 들여다보려는 옹졸함의 소산이다.

새로운 경제협력이 추진될 때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을 지나치게 내세워 합의의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모습도 보인다. 항상 사용하던 익숙한 수법이다. 실제로 이번 합의문에는 추가비용이 그리 들지 않으면서 우리가 주장해온 것을 북이 전격 수용한 게 더 많다. 개성공단 확대와 문산-봉동간 철도화물 개통 그리고 통신·통행·통관의 3통문제 해결을 명시한 것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들의 숙원사업이 반영된 것이다.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는 일은 새로운 기지와 저렴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남측 민간 조선회사들의 독자적 판단과 필요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백두산 관광 실시와 이를 위한 서울-백두산 직항로 개설 역시 우리 민간기업이 항상 원해오던 사업이었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는 엄살이 그나마 통할 수 있는 대목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문제인데, 사실 앞으로 남북의 경제협력이 진전되고 북한에 더 많은 특구와 남북합작공단이 개설·조성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남쪽이 북을 통과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면, 철도와 도로의 보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프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북에 무조건 퍼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경협전략 차원의 그리고 우리의 장기적 경제발전을 위한 선투자 개념이다. 결코 헛돈을 퍼붓는 게 아님에도 굳이 천문학적 액수를 내세워, 그것도 여러해에 걸쳐 지출되는 게 아니라 단번에 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혈세가 새고 있다고 호도하는 것은 앞으로 진행될 남북협력의 새로운 경제발전 기회를 도외시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고민

 

이번 정상회담이 애초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평화와 관련해 긍정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비핵화 프로쎄스의 성과에 기초해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남북이 의견을 공유한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한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로서 남북이 전쟁방지와 불가침을 재확인하면서 군사적 대결을 해소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협의하도록 한 점 역시 우리가 목표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도 큰 틀의 방향에 합의한 것 외에 구체적인 사업내용을 명시해놓고 있다. 우리의 숙원이던 경의선 철도의 개통이 우선 화물에 한해서지만 합의되었고, 내년 뻬이징올림픽에 공동응원단이 최초로 경의선을 이용해 가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는 정말 흥미진진한 역사적 이벤트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단골 민원이었던 통신·통행·통관 개선문제가 정상회담 합의문에 명시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서해상에 평화협력특별지대를 만들어 해주공단을 조성하는 것 등 포괄적인 경제협력 방식으로 군사적 충돌을 막고 평화를 보장하는 방안 역시 우리가 준비해간 회심의 카드를 김정일 위원장이 전격 수용한 것이다.

이번 회담의 결과 예상외로 우리의 요구가 많이 관철되는 것을 보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어떤 의도에서 수용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볼멘 의심부터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세와 북한의 최근 행보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최근 김위원장의 속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제 김정일 위원장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전략적 결단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2·13합의 이후 핵시설 폐쇄를 단행했고 연내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에 응했다. 사실 불능화를 결심한 것은 다시 북미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미국을 협박할 핵심카드, 즉 핵시설 재가동을 포기한 것이고 이는 사실상 핵폐기로의 길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불능화에 이른 이상 다시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전제로 그렇게 집착해오던 핵을 포기하기로 결단했다면, 남은 것은 북한의 경제를 회생하는 데 적절한 최선의 방식을 찾는 것뿐이고 그럼으로써 남북관계는 이제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핵을 포기하고 북미관계 개선을 얻어내며 이를 바탕으로 북한경제의 회생과 발전을 택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원이 필수적이고, 이때 남쪽이 제공하는 가장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이 긴요할 것이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고민 끝에 핵포기와 경제회생의 길을 택한 것이고 여기에 남북관계 개선은 필수요건이 된 셈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오히려 우리가 놀랄 정도로 평화 및 경협과 관련된 우리측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다만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경협 발전이 북한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지 결코 남측 일부가 희망하는 북한 붕괴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화평연변(和平演變)전략이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경협 확대는 받아들이지만 북한을 변화시켜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은 결단코 반대한다는 마지노선을 정한 것이다. 회담기간 내내 김위원장이 애써 강조한 개혁·개방이라는 용어 거부와 상호 체제인정 요구가 바로 그 고민을 드러낸 것이다. 핵포기와 경협 확대를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체제 유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딜레마가 이번 정상회담에서의 김위원장의 고민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번 회담으로 정치분야와 군사분야의 진전이 가시화되고 특히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 경제회생을 위해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합의된 내용을 실천하는 의지와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부지불식간 돌출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서도 남과 북은 정치적 화해와 군사적 신뢰구축이라는 원칙과 방향에 대해 일관된 이행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럴 경우 향후 남북관계는 평화와 번영이 상호 선순환하는 정상 궤도에 오르고 군사적 신뢰구축이 증진될 것이다. 또한 북핵 해결 및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이 가시화되고 경제공동체를 향한 전면적 협력이 강화되며, 초보적이지만 정치적 공동기구의 성격이 증대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차원의 남북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방문 소회

 

북한 연구를 업으로 하는 필자에게 평양 방문은 항상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접근하기 힘든 연구대상을 직접 보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평양에는 다섯번 다녀올 기회가 있었고, 이번 정상회담 참가로 여섯번이 되었다. 평양은 묘한 곳이어서 처음 갔을 때는 분단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벅찬‘감동’과 동포를 만났다는‘민족애’로 가득 찼지만 그다음부터는 좀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만든다. 두번째 방북부터는 조금 차분하게 북한의‘실상’을 직접 목도하고 향후 북한에‘변화의 희망’이 있는가 살펴보게 된다.

이번에 특별수행원으로 북을 경험한 일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측 대표단을 반기는 북측 주민들과 보장성원(행사요원)들의 진심에서 우러난 환대는 감동과 민족애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몇달 전에 엄청난 수해를 입었는데도 남쪽에서 오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평양은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건물도 밝은 색깔로 칠해져 있었고 도로 곳곳은 구석구석 청소되어 있었다. 항상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평양의 전기사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번 정상회담 동안 평양의 밤모습은 필자가 다녀본 중에 가장 환하게 밝았다. 작정을 하고 전기사정을 자랑하고 싶었던지 첫날 김영남(金永南)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는 북측 안내원이 먼저 나서서 평양 야경을 감상하라며 일부러 시내 한바퀴를 돌기도 했다. 도로 가로수 위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전구를 밝혀놓기도 했다. 분명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전기를 충분히 공급한 탓도 있겠지만 최근 북한의 경제사정이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연도에 나와 환영하는 평양 시민의 모습도 과거에 비해 화사하고 밝은 옷차림이었다. 신발도 각양각색이었다. 국가가 공급하는 획일적인 신발 대신 시장에서 거래되는 질 좋은 신발이 많이 보였고 특히 젊은 처녀들이 키가 커 보이는 굽 높은 운동화를 많이 신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보통강호텔의 북측 복무원과 우리가 참관한 곳의 안내원 그리고 만찬장과 오찬장의 접대원들 모두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북측 주민들 얼굴에서 경제사정이 나아진 결과를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핵문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린 탓에 외부 지원이 정상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2002년 시행된 7·1경제관리개선조치가 지금의 경제상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시장을 인정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짐으로써 시장경제는 아니지만 시장원리가 일정하게 수용되었고, 각급 공장과 기업소에서도 계획량 이외의 초과생산물은 시장에 내다팔아 이득을 볼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로써 주민들은 너도나도‘실리’를 찾아 장사에 나서게 되고 기업소도 재량껏 원가를 줄이고 판매량을 늘려 이른바‘번수입’을 높이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실리와 번수입이 오늘날 북한경제 활성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7·1조치 이후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확대되고 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선군(先軍)과 일심단결의 구호가 지배하고 창의와 자율보다는 지시와 규율이 앞서고 있다. 경제적 변화의 필요성과 정치이념적 고집 사이에서 북한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절대권위자 김정일 위원장의 선택에 의해 주도되는 위로부터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 우선 필요한 경제변화를 추동하기 위해서라도 현존하는 정치씨스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평양은 여전히 딜레마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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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월 9일 프라자호텔에서 개최된 통일연구원 주최 남북정상회담평가 학술회의에서 행한 백낙청(白樂晴) 교수의 기조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