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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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출생.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소설집 『카스테라』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jul

 

 

눈이 흩

 

나렸다. 싸락눈이었다. 긴 담에 이어진 커다란 철문 너머로 작은 쇳소리가 찰칵, 했다. 사오십자(尺) 폭 문의 부피를 생각한다면 그저 사각, 언 땅 싸락눈 돋는 만큼의 소음이었다. 열린 것은 작은 쪽문이었다. 백발의 한 노인이 그 문을 나섰지만 기척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릴락 말락, 운기가 소멸된 싸락눈이 그래서 더 쌀알 빻는 소리를 내고는 했다. 따라나선 교도관과 잠시 말을 주고 받았지만 역시나 노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철컹, 하는 느낌으로 철문이 다시 자신의 전부를 걸어 잠갔다. 남은 것은 노인과, 노인이 든 봇짐과, 듬성 싸락눈 뽀록 돋아 털 뽑힌 생닭의 거죽 같은 망망한 세계가 전부였다. 눈이 계속 흩

 

나렸다. 삭망(朔望)의 하늘에 갈 지(之)를 그은 후, 노인의 시선이 멎은 곳은 전방이었다. 싸라기눈에도 반백이 된 세 사람의 사내가 눈사람과 같은 느낌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대형, 세 사내의 입가에서 일제히 뜨거운 입김이 솟구쳤다. 대천권왕(大天拳王) 김일해-노인의 눈가에 나린 싸락눈 몇점이 하필 작은 물방울로 맺히는 듯하였다. 하필이면, 멀리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 하나가 고오, 소리를 내며 그들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어찌… 하고 권왕이 중얼거렸다. 용이 하늘을 가르거늘 저리 소리가 연약하단 말인가. 안경에 서린 김을 닦으며, 세 사내 중 가장 젊은 중년의 서생이 입을 열었다. 가중등가감각소음기준(加重等價感覺騷音基準)법 때문이옵니다. 법 때문이라… 권왕의 주름진 이마 위로 다시 눈이 흩나렸다. 편편(片片), 세설(細雪)로 덮지 못할 십년의 세월이 그곳에서 선이 굵은 협곡으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형. 나머지 두 사내 중 청룡검제(靑龍劍帝) 최일우가 입을 열었다. 팔척 장신의 과묵한 거구였다. 빼앗듯, 혹은 당연하단 듯 검제가 봇짐을 받아 들었다. 내키지 않는 눈길이 잠시 미풍처럼 흰 눈썹을 흔들었지만, 봇짐을 넘기는 권왕의 손길은 순순하고 순순했다. 곁에 선 단신의 사내가 권왕을 향해 합장을 올렸다. 운무천마(雲霧天馬) 선우진. 지천명이거나, 혹은 환갑이거나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얼굴이었다. 진갑이거나 희수거나, 가늠키 힘든 것은 검제도 마찬가지였다. 여여(如如)들… 하셨나? 넌지시 일행을 둘러보며 권왕이 물었다. 대답 대신, 검제의 검은 눈썹이 비 맞은 숲처럼 어둑하니 흔들렸다. 고오,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상공을 가로질렀다. 둘러, 나누고픈 대화를 가로막긴 했어도 가중등가감각소음기준을 위배치 않은 소음이었다. 조금씩 눈발이

 

끊어지고 있었다. 부지불식, 언제 운신을 했는지 천마는 벌써 몇발짝 뒤 세워진 승합차에 올라 있었다. 부릉 덜덜덜, 부릉… 덜덜덜 덜… 작고 낡은 六인승의 승합차가 건단열을 앓는 말처럼 몸을 떨었다. 차의 옆구리에 <삼우농장>이란 붉은 문구가 씌어 있었다. 오르시죠, 대형. 검제의 안내에 발길을 내떼던 권왕이 중년의 서생을 향해 물었다. 보아하니 무골은 아니신데 계씨(季氏)는 뉘신가? 몸을 조아리는 서생을 대신해 검제가 입을 열었다. 이장록이라고… 썩 유능한 율사(律士)이옵니다, 작금양년(昨今兩年) 저를 따르는 중입니다. 율사라… 고개를 끄덕인 권왕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삼가 영광이옵니다. 정천대법(頂天大法) 이장록의 두 손이 심히 떨며 권왕의 우수를 받았다. 전설의 손이었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라디오는 잡음이 심했다. 차는 잠시 국도를 탔고, 작은 톨게이트를 거쳐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권왕은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허나 묻지 않았다. 묻어둔 세월 속에 후배들의 무연(武緣)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빙해천수(氷海千手) 조인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조인덕의 거처를 향할 수도, 혹은 어떤 반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때로 듬성, 때로 촘촘 과부 머리를 긁빗기는 음양소 자욱처럼, 불규칙한 눈발이 희뿌연 차창에 빗살을 치고 있었다. 권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십년 사이 강산도 세상도 또 많이 변했을 터였다. 휩쓸려, 또 변했을 인심과 민심… 봉밀통을 향해 가는 개미떼처럼 인간이란 강물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 터였다. 그랬다, 정말이지 세간이 개미집만도 못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문파를 이끌고, 대의명분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죽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전설이었고… 신이었다. 대의와 명분이 살아 있던 시대였으니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길고 긴 꿈이라도 꾸고 난 듯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창 너머 이어지는 산과 산, 물… 그리고 물. 올해로 꼭 이백여든해를 살았다. 일국의 흥망을 몇번이나 지켜봤고, 무림의 소멸을 뜬눈으로 목격했다. 전 무림이 찬양하던 금강불괴의 몸이,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무공을 겨뤄본 게 언제였던가. 아마 백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중원을 평정하고 건너온 학익무선(鶴翼武仙) 사마천… 만주에서 가졌던 그와의 일전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그믐달이 막 떠오른 광활한 청보리밭이었다. 그의 광동어를 알아듣진 못했으나 두 고수의 합(合)에는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무선의 권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고 권왕의 권은 대지를 억누르지 아니했다. 학의 날갯짓에 백리 밖 북해까지 그믐달이 밀려갔고, 용의 승천에 전남 장흥의 동백 하나가 늙은 꽃잎을 떨구었다. 동이 틀 무렵 먼저 출수를 거둔 것은 무선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호흡을 다듬었고, 목례를 나누고선 서로가 온 곳을 향해 발길을 뒤돌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선이 이겼니 권왕의 승리니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작 두 본좌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세월이 하 흐른 후, 취중의 무선이 남긴 싯구 하나가 세간의 입을 통해 풍문으로 전해졌다. 밤새 그의 권은 한 포기의 보리도 해하지 않았거늘, 나의 권은 그만 두 포기의 보리를 꺾고 말았네.

 

조선이 멸하고 일제가 물러가고 자유당과 민주당이 들어서고 자유와 법치, 삼권의 분립… 그리고 전쟁은 무림의 맥을 결정적으로 끊어놓았다. 숱한 고수들이 폭격에 목숨을 잃었고 이념으로 나뉘어진 문파들, 밀고와 음해, 북으로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진 협객들, 산으로 숨어버린 은자들… 그리고 말해, 무엇하리오. 이어진 공화당과 유신… 산업과 경제개발… 유수처럼 흘러간 장강의 하구에서 어느새 권왕은 개인으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사의 육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적(籍)을 만들어야 했고, 새로운 세계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학의 늙은이였다. 무신(武神) 대천권왕 김일해. 그는 이미 죽은 인물이었다. 청룡검제와 운무천마, 빙해천수… 불사의 신기를 얻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 무림의 사천왕, 중국 중원을 떨게 했던 동방 四룡(龍)의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가난과 싸워온 반세기였다. 무학의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와 칩거, 막노동이 전부였다. 무공을 겨룰 상대도 비급을 시전할 대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는 세상이었다.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는 이미 무목(無目) 무각(無覺)으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작고 소소한 개미들의 것이었다. 천하 최고수의 자리를 놓고 일합을 벌이기도, 때로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했던 四룡의 무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의 처지를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비참한 세월이었다. 과거의 용은 화석이 되었고, 남은 것은 네 마리의 위타(委蛇)였다.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는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었다.

 

그해 여름의 일은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경성 외곽, 그러니까 서울 변두리의 어느 신도시였다. 사건은 권왕이 거처하던 허름한 숙소 근처 주점에서 비롯되었다. IMF니 불경기니 해서 몇달이나 밀린 보호세가 원인이었다. 들이닥친 건달 몇이 기물을 부수고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우연히 앞을 지나던 권왕의 눈에 주점주인의 눈물과 희롱을 당하는 그의 아낙이 들어왔다. 멈춰라. 그리고 곧 주변은 조용해졌다. 이튿날 어찌 숙소를 알아낸 패거리들의 습격이 있었는데 그저 어인 일인가?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주변은 싸늘해졌다. 무신의 권이었다. 에프킬라를 맞은 모기가 스스로의 사인을 알 수 없듯 건달패들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저희 형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며칠 후에는 그런 초대가 있었다. 정중한 초대라기보다는, 흉계와 함정이 도사린 나름의 납치였다.

 

차를 타고 간 곳은 중심 유흥가의 한 나이트클럽이었다. 대낮이라 영업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홀은 텅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어두웠다. 피식. 권왕과 대면한 무리의 두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참… 후… 무슨… 후… 이바요, 영감님… 왕년에 스포츠 좀 하셨나… 바요? 봐요가 아닌 그 바요가 권왕에겐 불손하게 느껴졌다. 고을의 나쁜 놈들이 모두 모인 듯 어둑한 클럽 안은 사내들로 가득했다. 권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어둠이 출렁였고 두목은 지구의 어떤 스포츠맨보다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 무대 위에 떨어졌다. 잠궈인지 담궈인지 불분명한 신음소릴 누군가 내뱉었다. 홀 가득 함성과 꺼내든 회칼들이 밤바다에 떠오른 학꽁치떼처럼 은은하게 파닥거렸다.

 

형님 여기 애들 좀 보내주셔야겠습니다, 얼른이요. 클럽 밖으로 두 대의 세단과 다섯 대의 승합차가 도착했다. 우루루. 건장한 사내들이 클럽 속으로 뛰어들었다. 형님 지금 전쟁이라니깐요, 싸게싸게요. 아홉 대의 승합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우루루 살기를 띤 사내들이 와르르 연장을 꺼내들고서 홀 속으로 뛰어들었다. 형님~ 형니~임! 으아아아… 악. 급기야 서울 번호판을 단 세 대의 전세버스가 클럽 앞에 도착했다. 뭐여, 머시여… 왜검과 전기충격기, 가스총과 엽총까지 꺼내든 사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클럽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대가 고요해지고 더는 누구도 형님을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차들이 클럽으로 몰려왔다. 다섯 대의 경찰차, 세 대의 전경버스, 이윽고 다다른 열아홉 대의 앰뷸런스. 현장에 내려간 경찰의 입에서 주여… 소리가 나왔다. 계단과 복도, 무대와 홀은 말해 무엇하며… 서른 개의 룸과 대기실, 다섯 칸의 여자화장실 중 네번째 칸까지 쓰러진 떡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꼿꼿이 서 있는 건 나머지 한 칸 속의 두 자루 밀대, 그리고 한 사람의 노인이 전부였다. 뒷짐을 진 자세로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직원입니까? 주여… 를 외쳤던 경찰이 청소부로 보이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대꾸를 한 건 아니지만 권왕은 그저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청소를 끝낸 인간처럼, 그랬다.

 

당연 저쪽도 조직이지요, 어따… 급습을 했다니까요. 나머진 다 튀었고… 저 노인네가 두목이랑께롱. 민중의 지팡이들께서 출동이 늦어부러… 어따 힘없는 사람 못살겠구마, 우리도 세금 꼬박꼬박 내는 민주시민들인디. 노인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으므로 조사는 패거리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사실입니까?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노인은 그저 창밖의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마도 몇마리 새가 흘러가고 때로 비가 내렸으며 졸리운 햇살이 결국 잠들어 또다시 밤을 부르는 나날이었다. 세명이 죽고 열두명이 불구가 되었다고는 하나, 권왕에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연장질과 헛손질에 죽고 다친 이가 나왔을 뿐, 그것은 결코 무신의 권이 아니었다. 밟으면 죽는 여치떼처럼 허약하고 미미한 상대들이었다. 악(惡)이라 하기에도, 응징을 논하기에도, 하물며 죽이기도 부끄러운 상대였다. 요는 밟으면 죽는 여치떼들을 밟아, 죽일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대의가 사라진 세계엔 법이 있었고, 그 세계에 이미 그는 지쳐 있었다. 우리… 마, 버, 법으로 해결하입시더. 떨며 매달리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때 그 어둠 속에서 권왕은 문득 외로웠었다. 악한에게도 명분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싸울 만한 나쁜 놈이 없다는 외로움, 더는 그림자를 만들 수 없는 빛의 외로움을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

 

인정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과 사주를 받은 주점주인 내외가 패거리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첨부했다. 창 너머 어디선가 새들이 호드기 소리를 내었고, 해와 달이, 또 별들이 가댁질로 시간을 탕진하고는 했다. 인정하십니까? 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패거리들에겐 유능한 변호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검찰과 끈이 닿아 있었다. 법에 의해, 법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었다.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는 순순히 이 세계를 인정해주었다. 한 그루 도래솔처럼 쓸 곳 없는 스스로의 권을 봉하며, 그는 끌끌한 마음으로 끄덕이고 끄덕였다. 세계는 흘러갈 터였다. 정의도 악도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라디오 좀 끄지 그러냐. 검제가 무거이 입을 열었다. 볼륨에 손을 얹고도 천마는 네, 신청해주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습니다. 윤아 제시카 넘넘 사랑하신다고요…까지를 듣다가 볼륨을 돌렸다. 애들… 이쁘더라… 감방에서도 인기가 많아… 허공에 눈길을 붙박은 채 권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늘픔있는 세상은 아니라 해도 도담다담 다시 만난 이 세계가 성장해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검제도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희끗한 솔숲 너머로 눅눅한 해무리가 어슴푸레 번져 있었다. 주변 어드메 공장이 있는지 더 멀리 청산 하나가 자신의 상봉(上峯), 상상봉에 슈룹 같은 삿갓구름을 얹고 있었다. 그, 한폭의 세계를 굽어보며 검제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덜, 덜. 낡은 차체의 진동이 도투락을 맨 그의 장발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신청곡처럼, 맥연히 그 리듬이 애잔하고 서글펐다. 영웅의 시대는 끝이 났다. 바야흐로, 소녀들의 시대였다.

 

四룡의 존위가 있다 해도, 검제가 우러르는 무신은 권왕뿐이었다. 장(掌)으로 자신의 강기가 실린 백팔근 배달검을 받아낸 인간은 권왕이 유일했다. 천하제일의 자리를 놓고 겨룬 백이십년 전의 일합이었다. 남해금산 묏마루에서 시작된 일전은 몇개의 섬을 건너뛰며 배래로 이어졌다. 권왕의 격산타우(隔山打牛)를 견딘 검과 인간도 검제가 유일했다. 백팔근 무게의 검이 삼십장 허공에서도 남해의 파랑을 가르고 또 갈랐다. 때로 그것은 한 자루의 천둥이었고 때로 그것은 작렬하는 폭죽이었다. 어검비행(馭劍飛行), 이기어검(以氣馭劍)… 세개의 섬이 사라지고 통영과 대마도에 해일이 일었으나 권왕은 단 한번도 부동의 자세를 흩뜨리지 아니했다. 검의 울음소리를, 검제는 들었다. 삼가 이 행성을 양단한다 해도 눈앞의 권왕을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잰 며느리만 본다는 음력 초사흘달이, 그리고 곧 자취를 감출 즈음이었다. 돌연 발경을 거두며 권왕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명검을 거두심이 어떠하오 대협.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검격이 미치는 이십리 안, 두 척의 어선이 들어와 덤벙 그물을 내리는 중이었다. 대형! 부끄러운 손방으로 이 무녀리가 아조 귀잠이 들었나 보옵니다. 서너평 바위섬에 무릎을 끓고 검제가 예를 올렸다. 손방을 따지자면 내 어찌 입을 열겠소, 다만 오늘의 승부는 저 해심에, 혹은 해미에 묻었다 생각하심이 어떨까 싶소. 손사래를 치며 권왕이 말했다. 드레에 눌린 검제의 심중에, 하여 고독한 무도(武道)의 길섶에도 운김이 서리는 느낌이었다. 허, 허허, 허. 두 무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밤바다를 한결 출렁이게 만들었다.

 

그리운 시절이었다. 권과 검… 천하는 권왕과 검제로 양분되었다는 정설이 중원을 거쳐 사라센까지 호령하던 무렵이었다. 한 자루 검에 자신의 전부를 건 초인들이 산과 사막을, 물을 건너 도전장을 내밀었다. 서인도의 검성 이브레임, 누란의 후예 신장워월도 검제의 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무운(武運)이 꺾인 것은 一九四五, 을유년 여름의 일이었다. 친일 오적 중 셋의 수급을 베고 난 후 고가의 인선(忍仙) 타께마루 한조의 방문이 있었다. 본좌가 어찌 대제의 칼을 받으리오, 다만 일국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절명을 무릅쓰고 동해를 건넜소이다. 무릇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푸는 것이 도리, 여기 대동아(大東亞) 공영의 국검 키바까미 주베이의 결투장을 전달하오. 거북의 갑골에는 짧은 한편의 하이꾸가 새겨져 있었다. 나 혼자라면, 죽은 자를 위한 염불도 들을 일이 없겠지. 한 호흡 한 획, 전설의 영검 후즈노미따마의 검흔이었다. 답장을 바라는 갑골의 하단을 향해 검제가 잔즛이 검지를 들어올렸다. 휘익. 검지가 갑골 위를 스친 것과, 갑골이 다시 타께마루의 무릎 앞에 던져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손톱을 깎고 가겠노라 너희 국검에게 일러라. 검제의 일갈에 타께마루가 머릴 조아렸다. 존명. 갑골의 하단에는 역시나 짧은 한줄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나 혼자라도, 손톱은 곱게 깎아야겠지.

 

결가부좌를 틀고서 키바까미 주베이는 앉아 있었다. 일국의 국검다운 기개가 신사의 너른 마당과 주변의 숲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근교의 미야지마, 이쯔꾸미 신사에 검제가 닿은 것은 몇쌍의 종다리가 황망히 숲을 박차오른 고요한 오전이었다. 배를 실어 나른 호수의 물도 나무도 숲도, 그래서 모두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느낌이었다. 긴 호흡으로, 타께마루 한조가 참관인의 선서를 읽어내렸다. 백팔근 무게의 배달검이 순간 지잉, 하고 너볏한 징울음을 울었다. 그 소리에 인근의 솔수펑이가 잠시 흔들, 하고는 주춤했다. 동굴을 빠져나온 용처럼, 서서히 칼집을 빠져나온 후즈노미따마가 주변의 대기에 눈부신 용린(龍鱗)을 뿌리고 또 뿌렸다. 천하제일검. 하늘 아래 두 자루의 칼이 설 수 없음을 우선 두 자루의 칼이 시나브로 느끼고 있었다. 타오름달의 무더운 오전이었다. 손 안 가득 흥건한 땀을 느끼면서도 타께마루 한조는 장방 백리의 마루와 아라가 얼어, 붙은 듯 느껴졌다. 칼끝을 겨눈 채 두 검신은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디선가 철없는 여치 한 마리가 맨망스런 울음을 울었다. 그 소리에 쩡, 장방 백리의 빙판에 커다란 금이 가버린 듯하였다.

 

 

atom

BOOM!

 

순간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귀청을 에듯 큰 폭음이기도 했고, 귀청이 나간 듯 적막한 느낌이기도 했다. 우선 빛이, 마루의 해가 터진 듯한 빛이 누리를 에워싼 후 서서히 사라졌다. 열풍이 휘몰아쳤다. 부지불식, 거검을 방패삼아 주저앉은 채 검제는 검으나 흰 잿(灰)더미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를 털고 저린 오금을 펴자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풀썩, 하고 만년한철의 배달검이 종이처럼 바스라졌다. 폭발을 등지고 섰던 키바까미 주베이는 자신의 검과 함께 뼈째 녹아 있었다. 사라진 순간 십리 밖을 난다던 타께마루 한조도 한 토막의 검은 숯이 되어 있었다. 아아, 호신강기가 파괴된 검제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검이 지켜준 자신의 연명이 구차했고, 검을 잃고 난 자신의 여생이 끔찍했다. 재가 뒤섞인, 검으나 흰 뜨거운 눈물이 검제의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하제일은 따로 있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다시 태백과 소백을 유랑하며 간신히 검제는 원기를 회복했다. 허나 더는 예전의 검제가 아니었다. 세상 역시 예전의 세계가 아니었듯. 만년한철을 구할 수도, 더는 그런 칼을 벼릴 만한 인재도 없는 세상이었다. 실낱같던 무림의 명맥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산으로 산으로, 검제는 숨어들었다. 움막과 동굴, 화전과 텃밭을 전전하다가도 우두망찰, 흘러오는 세상의 소식에 가슴이 하 답답하고 허망하였다. 무릇 검의 이치는 무엇인가, 무인이 나아갈 길은 어드메며, 정의와 대의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물오름달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들고, 검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무림이 사라진 세상에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

 

다시 세간을 찾은 것은 삼십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여즉 세상을 이끄는 것은 다만 주인을 바꾼 개들이었고, 다시 만난 세계는 뭐랄까 BOOM!한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새 주인은 밥을 많이 주나 보구나. 십오 년 만에 만난 천마와 차를 마시다 불현듯 검제가 중얼거렸다. 말도 마소, 단군 이래 이리 배부른 적이 없었소 대형. 발빠르게, 그나마 천마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있었다. 제법 번듯한 도장 하나를 갖고 있었고, 따르는 제자가 언뜻 보기에도 기십은 되는 것 같았다. 일전엔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을! 그러믄요, 저기 사진 보이십니까? 예, 바로 저 사진… 옆에 선 저 사람이 바로 조지 부시 미대통령입니다. 조지, 부시? 그러믄요 조지, 부시. 취임식을 둘러보고… 또 LA를 갔는데 말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지 아십니까? 그래, 어떠하더냐? 놀라지 마십시오 대형… 거지도 비만으로 살 수 있는 나랍니다. 어허, 거렁뱅이가 어찌 비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삼백근이 넘는 거지도 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어허, 하고 검제는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좋아진 세상인지… 모릅니다, 모르시겠지만… 좋아진 세상 속에서, 허나 쓸쓸한 표정으로 천마는 말을 흐렸다. 그나저나 자네의 경공이 이제 신의 경지에 올라섰네그려, 그래 태평양을 건넜다니 이 어찌 왜자할 일이 아니겠는가. 검제의 물음에 은사죽음을 한 사람처럼 천마는 눈을 깜박였다. 미국은…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대견한 일일세, 지금도 축지와 경공을 배우는 이들이 저리 있다니. 축지라니요 대형, 하고 천마가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무릇 행자(行子)가 됨이 우선이요, 하여 행각(行脚)을 깨친 후에야 축지의 축이라도 논할 수 있겠거늘… 그저 이따금 명주바람도 못 되는 장풍이나 보여주며 관비나 받아먹고 있습지요. 연명이라니, 생각을 하면서도 검제는 천마를 책망하지 아니했다. 술(術)을 펼쳐 득세를 원한다면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도 남을 천마였다. 대형… 대의를 가져선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대인은 어느 한 곳 설 자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대의가 없다니, 일국이 섰고 남아와 기개가 이리 들끓거늘 어찌 대의가 없을 수 있겠느냐? 아아… 한숨을 쉬며 천마가 말했다. 대의가 있다면… 서른두평 아파트입지요, 혹 기개를 품은 남아라면 쉰평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대형, 지금은

 

돈이 최곱니다

 

그때였다. 수련생의 모친 하나가 면담을 원한다며 관장실에 들어섰다. 예, 관장님… 예예, 하면서 아낙이 살랑였다. 이제 특목고 준비도 해야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하고 천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화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대화의 성질을 검제는 느낄 수 있었다. 구름에서 내려온 말이 마구간 구유 속에 스스로를 숨겼구나, 천마의 책상 위에 한줄 시를 남기고서 검제는 홀연히 도장에서 사라졌다. 권왕의 행방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속으로 곡조를 흥얼거리며 천마는 지긋이 악셀을 밟았다. 운무천마 선우진. 중원의 무협들이 그가 二종보통 운전면허로 이런 후덜덜한 차를 몬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땅이 꺼져라 통한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중원을 휩쓸고 고비를 다듬은 바람도, 개마대산을 넘으면 자취를 감춘다는 소문은 바로 동방사룡 중 천마, 선우진을 일컬어 생겨난 말이었다. 그는 바람의 신이었고 경공의 신장이었다. 그의 천마행공(天馬行空)과 능공허도(凌空虛道)는 전 무림의 추앙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권왕의 권도 검제의 검도 천마를 잡지는 못하나니… 무렵 외룡(外龍)으로 떠오르던 빙해천수의 싯구는 그 자체로 권왕과 검제에 대한 도전장이 되기도 했었다. 인선 타께마루 한조와의 경공 대결은 불씨가 꺼져가던 무림의 마지막 전설이었다.

 

장소는 금강산이었다. 귀공의 존함이 등평도수(登萍渡水)로 바다를 건너왔기에 내 오늘 친히 자웅을 겨뤄볼까 하오. 오만한 얼굴로 초상비(草上飛)를 취하고 선 인선의 말에 천마가 답했다. 거, 풀님들 무겁게 왜 그러시오. 마침 자정이요, 공산에 달도 밝으니 차라리 든든한 산정일랑 밟으며 놀아봅시다. 두루 족적 하나씩을 남겨봄이 어떠하오? 이곳 일만이천 봉 일만이천 산정에 말이외다. 물도 산도 낯설 터이니 본좌가 수를 접음이 도리일 터, 나는 가장 낮은 봉우리에서 오름새를 취할 테니 귀공께선 상상봉 비로봉에서 내림새를 취하소서. 말하자면 귀공의 첫발 찍는 소리가 오늘밤 놀이의 시작이요.

 

안다미를 놓은 풀들이 잠시 한번 몸을 푼 사이 만월이 걸린 비로봉 꼭대기에 인선이 올라섰다. 해밀 같은 밤하늘임에도 마치 읏비가 내리는 듯 산 전체가 긴장했다. 그리고 투둑, 비로봉 멧부리에 소나기 한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선이 사라진 것도, 천마가 자취를 감춘 것도 그 순간이었다. 금강의 구릉과 산맥을 따라 곳곳에서 산돌림 소리가 들리고 또 들렸다. 궁신탄영(弓身彈影) 허공답보(虛空踏步) 일위도강(一葦渡江) 어기충소(御氣衝溯). 내려서는 인선도 천마의 족적을 볼 수 있었고, 올라서는 천마도 인선의 족적을 만날 수 있었다. 둥근 달만이, 오로지 두 무신의 궤적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일만이천! 마지막 봉우리에 족적을 찍고서 인선은 귀를 기울였다. 산돌림 소리가 한번이라도 들린다면 자신의 승리가 분명한 순간이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천마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안절부절 상공을 맴도는 텐진(天神)을 쳐다보았다. 벼락을 따돌리고, 천리 밖을 내다보는 천하의 영물, 수지니였다. 끼익 하고 울음을 운 텐진이 남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금강산 굽이굽이에 어슴푸레 새벽이 첫 족적을 찍고 있었다. 텐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인선은 몸을 냘렸다.

 

강과 벌판을, 그리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숨을 고르며 내려선 곳은 제주 서귀포의 어느 바위 위였다. 쪼그려 앉은 채, 천마는 그곳에서 생선회를 뜨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하고 해맑은 얼굴로 천마가 미소를 지었다. 비봉폭포에서 멱을 감고 오느라 두 마리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다금바리라고… 뜨거운 눈물이 인선의 뺨을 타고 흘렀다. 곡주와 내미는 회 한점을 거절하고 타께마루 한조는 발길을 뒤돌렸다. 옆구리 살을 몽땅 베인 생선처럼, 제주의 해풍이 시리고 서러웠다. 끼릭, 하고 텐진이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외곬인 권왕이나 검제와 달리, 천마는 변화에 순응하고 풍류를 아는 무신이었다. 세간의 여자를 얻어 손(孫)을 얻기도 했으며, 또 집을 떠나 정처없는 삶을 살기도 했다. 무림의 소멸과 현대사의 질곡을 거쳐오며, 그는 자신을 그저그런 인물로 포장할 줄도 알았다. 장풍·축지 간판을 내걸고 조촐한 도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어차피 배울 인간이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그것을 사기라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런 사진 하나 걸어두면 여러모로 좋습니다, 공무원들 태도도 달라지구요. 어찌 알게 된 모리배가 귀띔을 해주면 거 나도 하나 만들어주게, 쉽게 말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그래도 따르는 관원들이 있었다. 간혹 보여준 새발의 피, 아니 벼룩의 똥만한 발경 시범, 겨우 콧바람만한 장풍 방사만으로도 입을 허벌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사부님, 하고 사범 황일규가 말문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부님… 주변 다른 유파의 도장들에서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때문에 떨어져나간 관원들도 많구요… 사부님… 사람들이… 사부님을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천마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부님… 솔직히 저 사진은… 합성한 티가 너무 납니다… 아아.

 

그럼 어째야 쓰겠느냐? 대여섯 사범급 제자들의 바람은 마침 열풍이 불기 시작한 실전 종합격투기대회에 출전, 장풍으로 세상을 놀라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그런 대회가 있느냐? 실낱같은 무림재현의 기대를 품고 천마는 제자들을 향해 물었다. 제대로 된 장풍을 견딜 만한 인재들이 있느냐 이 말이다. 사부님… 하고 황일규가 입을 열었다. 전국의 괴물들이 모두 출전합니다. 해외에서 오는 고수들도 있구요. 비록 외공이라 하더라도 그런 고수들이 모인다는 사실이 천마를 흥분케 했다. 종적을 감춘 권왕이나, 혹 산골로 들어간 빙해천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마는 참가를 결심했다.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은 종잇장 같은 글러브를 끼고서 링 위에 올라간 직후였다. 장풍을 방사하거나, 행여 무공을 썼다가는 죽거나 불구가 될 만큼 허약한 상대였다. 아아, 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인간이 개미를 다치지 않게 때릴 수 없듯, 영종도를 이륙한 비행기가 인천 간석동 34번지에 내릴 수 없듯 발경의 조절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달려든 상대를 끌어안은 채, 천마가 해야 할 일은 한사코 얼른 탭을 치는 것이었다. 시합 종료가 선언되었다. 그 순간 탭의 장력에 의해 링이 무너졌지만, 누구도 그것이 내공에 의한 것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어째야 쓰겠느냐? 탄식을 해도 아조 제자들은 벌레를 씹은 얼굴들이었다. 무렵 부산 지부를 연 제자의 부친상 소식이 전해져왔다. 기차나 차편으로 문상을 다녀오려는 제자들을, 천마는 굳이 김포공항으로 끌고 갔다. 합이 일곱, 편도 부산행 비행기의 티켓을 끊어주자 황일규가 물었다. 사부님께선 안 가십니까? 먼저들 가거라, 뒤따라 갈 터이니. 의미심장한 사부의 표정에서 황일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혹시… 하는 예감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영안실에 들어선 순간 이미 도착한 사부의 뒷모습과, 삼십분 전에 오셨다네 증언하는 사형의 얼굴이 어떤 기시감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그날의 마지막 비행기였고 김해공항 인근의 병원이었다. 전설의 축지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행기의 이륙을 지켜본 후 천마는 부산을 향해 축지를 시작했다. 얼마만의 축지인가… 어둑 땅거미가 깔려가는 경기 일대의 벌판을, 땅거미보다 먼저 접수하며 그는 번져가기 시작했다. 한 점의 바람이었고, 바람을 탄 한 점의 구름이었다. 답설무흔(踏雪無痕). 누구도 지나치는 그의 잔영을 볼 수 없었고, 천상제(天上梯)와 능파미보(凌波迷步)로 전신주와 오가는 차들을 넘고 또 피하였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일위도강(一葦渡江)을 앞두고 대전 근처의 고속도로를 사선으로 넘을 때였다. 그만 천마의 눈이 놓친 차가 있었으니 방학을 맞아 모처럼 고국을 찾은 약관의 유학파 이창희의 엔초 페라리였다. 방금 뭐 부딪히지 않았어? 조수석의, 역시나 모처럼 고국을 찾은 유학소녀 방지선이 소리쳤다. 쭙쭙 스타벅스 화이트초콜릿 모카를 두 모금 빨며 이창희가 중얼거렸다. 몰라… 새겠지 뭐.

 

병실을 찾아온 것은 황일규뿐이었다. 전신에 깁스를 한 채 누워 천마는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도장은… 도장은 어떻게 되었느냐? 고개를 숙인 제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너도 가거라. 입술을 약간 꿈틀였을 뿐, 제자는 역시 말이 없었다. 허리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통제를 맞았음에도 왼손, 왼어깨의 통증이 격렬하고 섬칫했다. 그래… 의사는 뭐라더냐? 회복력… 하나는 좋다고 했습니다. 간단히 목례를 하고, 홍삼드링크 한 박스를 올려놓은 후 황일규는 물러갔다. 회복력 하나는 좋은 스승을 남겨두고, 천마의 마지막 제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거처와 도장을 처분해 병원비를 지불하고, 천마는 수소문 끝에 빙해천수 조인덕을 찾아갔다. 소백의 끝자락에 위치한 심심산천이었다. 두서넛 도제를 거느리고, 천수는 그곳에서 미꾸라지 양식을 하고 있었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도제의 수는 언제나 들쑥날쑥이었다. 어찌 자네가 이리 되었단 말인가! 목발을 짚고 선 천마를 보고 가슴을 치며 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공이란 게… 끝없이 자신을 덜어내는 길 아니겠습니까. 허허롭게 허공을 바라보는 천마를 향해 천수가 담배를 내밀었다. 꽁초를 버리듯 목발을 던지기까지, 그리고 춘하추동, 소설과 대설이 지나야 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차는 다시 이삼십분 국도를 내달렸다. 듬성했던 눈발이 소백의 끝자락에 들면서 거세지기 시작했다. 잠시 선잠에 들었던 이장록은 차분히 자세를 고쳐앉아 안경알을 닦기 시작했다. 눈은 금세 길을 덮고, 사방 앙상한 숲에 은빛 새순을 틔우더니 우매한 짐승을 잠재우듯 덜덜덜, 이어져온 엔진의 소음을 나지막히 가라앉혔다. 자드락길 초입부터는 닦은 안경을 쓰고도 밖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대설이었다. 고요히, 검제와 권왕은 귀잠에 빠져 있었다. 길이나 있을까 몰라, 그런 눈 속으로 혹은 산 속으로 네 사람을 태운 차는 말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장록이 구속된 것은 이십삼년 전의 일이었다. 젊은이들이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고, 도모하고, 끝없이 세계의 혁명을 논하던 시절이었다.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반역 및 내란음모… 징역 이십년을 언도받고도 살아남았음이 죄스런 날들이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 쓰러져간 청춘들과 쓰러지지 않던 적들… 함박, 눈으로도 다 덮지 못할 기억 속의 감옥을 떠올리며 그는 허공을 응시했다. 과연 눈부셨으나

 

맑지 않은 하늘이었다. 특사로 감옥을 나선 것은 구년 전의 일이었다. 시호시호(時乎時乎),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시재시재(時哉時哉),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한껏 드높았던 세상이었다. 옥바라지에 바랜 아내의 손을 잡을 수 있어 좋았고, 훌쩍 소녀가 된 딸을 안을 수 있어 더 좋았다. 바로 오늘 같은 하늘이었다. 과연 아름다웠으나, 맑지 않은 하늘이었다. 동지들과, 따르던 후배들 사이에서 그는 전설이 되어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옵니다.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이장록이 입을 열었다. 여기선 라디오도 안 잡힐 거구먼. 천마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어찌 속인이 저 양반과 연을 맺었소? 외곬도 저만한 외곬이 없는데… 천마의 물음에 아, 하고 이장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조계 물을 먹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 귀띔으로 어쩌다… 그것은 정말 특이한 사건이었다. 무단 벌목으로 피소된 한 노인의 이야기였다. 현장사진을 보니 부채꼴로 삼헥타르 면적의 나무가 싹 잘려 있는 거야, 야구장 하나 세우면 딱이겠더라구. 그런데 범인이 노인네야, 주변에 움막을 짓고 사는데… 노인은 그것을 위법이라 생각지 못했고,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았다. 보기에도 세속을 떠난 인물임이 확연하긴 했으나 더욱이 특이한 것은 벌목의 이유였다. 새 칼을 시험해보느라 그랬소. 그리고 노인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어떤 힘에 끌려, 이장록은 현장을 찾았다. 허리 높이 나무의 절단면은 절삭된 다이아의 일면처럼 매끄럽고 빛이 났다. 삼헥타르에 달하는 나무 전체가 그랬고, 자라도 대고 자른 듯 그 높이가 일정했다. 문제의 노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칼에 베어진 것이니 그렇지… 허황된 말을 노인의 입은 뱉었으나 노인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장록은 누구보다 진실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죽어간 이들의 진실을 보았고, 살아 진실을 논하는 자들의 거짓을 참아야 했었다. 변질과 변절, 변이와 변태… 적도 동지도 사라진 세상 속에서 그는 홀로이 외롭고 외로웠다. 싸워야 하지만 싸울 수 없는 세계… 다시 만난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혹시 컴퓨터도 써보셨습니까? 물론, 四룡 중 아마 내가 유일할 거외다. 천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감옥을 나와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말입니다, 어느날 이런 메세지가 뜨는 것이었습니다. 예외정보: 개체 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처음 봤을 때의 기분… 그러니까 작금의 세계를 살아가는 제 기분이 딱 그런 것입니다.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삼우농장 10km라 쓰인 작은 입간판을 볼 수 있었다. 다 왔구려. 부릉, 하고 천마가 힘을 줘 악셀을 밟았다. 그러니까 저는… 하고 잇대려던 말을 이장록은 껌처럼 입 안에 가두어 곱씹었다. 어떤 얘기도, 여전히 개체 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오로지 눈뿐인 세상이었다. 정치꾼이 된 동지도, 귀족 노조가 된 후배도, 재벌의 뒤를 닦는 변호사 선배도, 고문후유증으로 여즉 노모가 대소변을 받아야 하는 친구도, 실은 독재가 그리웠던 이웃도, 잘살면 그만인 민족도, 여전히 건재한 친일 후손도, 그보다 더 건재한 발포 책임자도, 어쩌지 않고 어쩔 생각도 없는 대다수도, 실은 있지도 않았던 이념도, 있어도 소용없는 법도, 아빠도 2번 찍지 그래? 하던 딸도, 있지도 않았던 민주와 민중도, 그래서 모두가 이미테이션처럼 느껴지는 골짜기였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은… 무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까?쏟아지는 폭설을 바라보며 천마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둑해진 산중턱에 올라서자 멀리서도 희미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찾아가, 처음 검제를 만났던 움막이 떠올랐다. 정치판을 뿌리치고, 정치판이 아니어도 밥그릇 싸움과 파벌 싸움, 결국 부패하는 세계에 시달리다 참선에 빠져 있던 무렵이었다. 나는 이제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것 같소. 검제의 얘기를 듣는 순간, 십년 전 감옥의 창살로 만들어진 소리굽쇠 하나가 징, 심중에서 커다란 공명음을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정천대법이란 아호를 지어주며 검제는 쓸쓸히 수염을 쓸었었다.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들때밀 같은 표정의 도제 하나가 마당의 눈을 쓸고 있었다. 그저 끄덕 치레하듯 말듯 한 인사를 건넨 도제를 지나치자 대형! 하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북방 외룡, 절대 무림의 신비고수 빙해천수 조인덕이었다. 누추한 방이었지만 따스한 아랫목에 권왕을 모시고 나머지 세 무신이 원형으로 둘러 앉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선 안될 일이었다. 어슴푸레 내 짐작은 했네만… 허허로운 표정으로 권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제록(武帝錄)에 쓰인 그대로입니다. 버릇처럼 수염을 쓸며 검제가 얘기했다. 그래도… 저녁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수가 입을 열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마리 용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쏟아질 줄 알았던 전설과 신화 대신, 도제 두엇이 조촐한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추어탕이었다. 그럭저럭 탕을 끓여본 솜씨였으나 상을 놓는 동작에도, 수저를 추리는 자세에도 어디 하나 존경의 념이 배어 있지 않았다. 어찌 도제들이… 하고 이장록이 운을 떼자 월급을 안 줘서 저런다오, 천마가 말을 가로막았다. 거야 뭐 얼마 된다고… 사부란 자가 일만 부리고 가르쳐주는 게 없어 저러는 게지요. 텁텁히 밥술을 뜨며 천수가 중얼거렸다.

 

빙공(氷攻)! 권왕에 패한 자는 목숨을 부지해도, 천수에 패한 자는 절명을 못 면하니… 백이십년 전, 빙해천수란 이름 앞에 전 무림이 공포에 떤 이유는 바로 그만의 극악빙공 때문이었다. 일지풍(一指風)으로 달리는 말을 꽁꽁 얼리고, 빙백장(氷白掌)으론 잎새달 꽃 핀 산을 빙산으로 만든다는 천수였다. 그와의 대결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오히려 고독했던 북방의 외룡이었다. 내 권을 섞어보지 않았으나 내공의 극강함은 천수가 위지 않겠소? 구한말 권왕의 발언이 퍼지며 번외룡이 무림의 중심에 우뚝 섰으니, 四룡의 신위가 갖춰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런 연유로 권왕은 천수에게 넘어야 할 산이자, 자신을 수립해준 산맥의 본산이었다. 하늘은 권왕과 검제로 양분되고, 땅은 권왕과 천수로 나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내외공, 경공과 술법에 고루 능한 천수에게도 하지만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추운 북방을 벗어나면 위력이 약해지는 빙공 자체의 특성이 그것이었다. 권왕과 천수가 맞붙지 않은 것도, 하여 무림의 지도가 남북으로 양단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기천아! 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천수가 소릴 질렀다. 부르셨습니까? 뜨악하니 도제 하나가 방문을 연 것은 제법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들때밀 같은 표정으로 마당의 눈을 쓸던 바로 그 도제였다. 아까 내 전음(傳音)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어떤 전음 말이옵니까? 깻잎 말고 방앗잎을, 후추 말고 산초를 치라 일렀지 않았느냐. 머리를 긁적인 도제가 불콰해진 얼굴로 목소릴 울먹였다. 사부님… 그리 긴 전음을 도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오년 수련에 오라 가라 간단한 전음도 들을까 말까인데… 그리고 그런 말은요… 휴대폰으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어허, 고얀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내 오늘 세 분 무신께서 모이신다 그리도 일렀거늘! 울먹이던 도제가 결국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四룡께서 모이면 뭘요… 뭘… 정부라도 엎을 겁니까? 네 분이 힘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

 

눈 내린 마당으로 뛰쳐나간 도제가 흐느끼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수저를 집지 못한 채 천수는 말이 없었고, 나머지 무신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천수의 미간이 세인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동란을 피해 내려온 부산에서 겨우 반평 얼음집을 열었을 때도, 지구온난화로 십갑자의 내공을 고스란히 잃고서도 이토록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다. 두평 반 천장의 격자무늬를 올려보며 천마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물지 않아도 담배를 문 것처럼, 이장록은 또다시 개체 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겨우 전음이 통했는지, 숨죽인 도제 두엇이 길고양이 걸음으로 밥상을 빼내갔다. 깻잎과 후추가 흩뿌려진 적막의 수면을 그 누구도 휘젓지 아니하였다. 밤이 깊고, 또 자정이라면 혹 모를까.

 

여기 예언이 있습니다. 검제가 품에서 고서 한 권을 꺼내든 것은 자정이 가까운 깊은 밤이었다. 이 비서(秘書)를 어디서 구했단 말이냐? 권왕의 눈이 호랑이처럼 꿈틀, 했다. 무제록… 사백년 전 인제 출신의 기인 밀공선사가 집필한 무림의 과거와 미래, 시작과 끝이 모두 적혀 있다는 전설의 책이었다. 무제록을 읽은 자 자신의 권을 폐기하고, 검사는 칼을 녹여 괭이와 호미를 만드나니… 일찍이 권왕의 스승이던 삼라만권(森羅萬拳) 강기철은 그런 연유로 무제록의 탐독을 전 무림에 금했었다. 삼백년 전 폐기된 절대 금서가 지금 이 순간 권왕의 눈앞에 버젓이 펼쳐져 있었다. 측자파자(測字破字)와 하도낙서(河圖洛書)를 푸느라 꽤나 애를 먹어야 했습지요. 조목조목 검제가 책의 목록에서부터 해설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유년, 삼라만권의 억울한 죽음과… 또 그 복수를 그의 제자 대천권왕이 한다… 이렇게 다 나와 있습니다. 빙해천수의 본이 중강진이란 것도 나와 있을뿐더러… 이리하여 결국 이 나라는 외세를 이기지 못하구요, 또… 동란과 무림의 소멸에 관해서… 불탄 대지 위에 오직 네 그루 철갑송이 남았으나 세간이 이를 풀포기만큼도 여기지 않을지니…

 

하여 이 나라는… 결국 일국이 있어도 백성이 사라지니… 영리한 자는 눈치를 보고 영악한 자만이 살아남으리라. 이는 국운을 쫓고 시장(市場)을 세운 자들의 책임이나 그 기세와 외세를 이길 자가 없겠구나… 백성은 날로 어리석어지나, 이는 약해짐이 아니라 독하고 악해짐을 뜻하나니… 무릇 충효의 필요를 논할 일이 없겠구나, 밥과 지전을 던져주면… 하여 끊어진 허리를 다시 잇고… 이게 아마도 통일을 말하는 듯합니다만, 아무튼… 이는 이익과 이윤에 의한 것이니 남은 무림의 후예들은 현혹되지… 대체, 그럼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겐가? 검제의 말을 끊고서 불같은 얼굴로 권왕이 일갈했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살 거랍니다.

 

새지 않는, 호롱불 같은 목소리로 검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인데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동방 무림의 끝입니다. 죽지 못한 불사신기의 四룡은 결국 한자리에 모이니 그 형국이 궁궁을을(弓弓乙乙)이더라, 태극의 진법으로 일기(一氣)가 되어 죽은 땅을 피해 비로소 새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자, 어떻게들 보십니까? 말하자면… 넷이 모여 죽는다는 겁니까? 천마가 물었다. 소인의 식견으론 비로소 소멸이 가능하다는 얘길 수도, 혹은 새로운 차원이 열리거나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장록의 얘기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천수가 다리를 풀며 말했다. 나는 동의하오.

 

고요한 새벽이었다. 그런 새벽이 올 때까지, 태극진을 친 자세로 무신들은 오래 의견을 나누었다. 남은 것은 결행이었다. 자넨 어쩔 생각인가? 이장록을 향해 검제가 물었다. 함께 갈 텐가, 아니면 남을 텐가? 저도… 말입니까? 이장록이 되물었다. 노려보고, 굽어 살피는 사천왕의 표정으로 네 사람의 무신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늘진, 도제의 발자국이 얼어 있는 마당으로 이장록은 발길을 내려놓았다.

 

뜨고 싶은 세상이기도 했고, 할 일이 더 많아진 세상인 듯도 했다. 부패를 못 막으면 발효라도 시켜야 할 거 아닌가. 움막에서 들었던 검제의 일언도 다시금 머릿속에 오롯이 떠올랐다. 하릴없는 마음으로 이장록은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잠결의 딸이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 목소리에, 문득 사별한 아내가 그리운 마음이었다.

 

민주니?

오… 뭐야 아빠, 이 시간에.

미안하구나… 급히 좀 할 말이 있어서 말이다.

글세 뭐냐니깐?

민주야… 만일 말이다… 아빠가 사라지면 너 어떻게 살래?

나 원, 별 걱정을 다 하네… 언제 아빠가 경제 책임진 적 있어?

그래, 할 말이 없구나…

 

그래도 민주야… 경제가 전부는 아니잖니.

몰라, 어려운 얘기 하지도 마. 난 돈이 전부야. 또 이상한 사람들하고 같이 있지?

그게 무슨 말이냐.

아, 몰라 끊어. 그리고 아빠… 제발 개량한복 좀 입지 마! 나 쪽팔려 죽겠어.

 

고갤 들어, 눈 그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둥근 것은, 그러니 달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면 할 말이 아주 많을 듯도, 할 말이 아주 없을 듯도 하였다. 고요한 묏채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장록은 발길을 뒤돌렸다. 행여 전화가 오지 않을까, 뒤춤의 손은 전화기를 꼭 쥔 채였다. 잘살겠다고, 잘살고야 말겠다고… 산을 오른 누군가가 등성이 너머에서 야호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언뜻 그 소리가

 

닭울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