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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마른 연못
물이 빠진 거대한 연못,
오래전 눈에 박힌 풍경이 나가지 않네
장화 신은 발들이
몸속을 저벅저벅 걸어다니네
울컥 고이는 발자국들,
검고 끈적한 진흙이 삼켜버리네
호미를 든 손들이
몸속에 깊이 박힌 연뿌리를 캐네
숭숭 뿌리 뽑힌 자리마다
진흙이 뱀처럼 흘러들어 스르르 문을 닫네
장갑을 낀 손들이
몸속에 흩어진 잔해를 끌어모으네
이토록 태울 게 많았던가
번제를 올리듯 어떤 손이 불을 붙이네
타오르면서 타오르지 않는 불의 중심,
명치 끝이 점점 뜨거워지네
눈이 너무 매워 움직일 수가 없네
뇌수 사이에서 썩어가던 기억의 잎과 줄기가
몇줌의 재가 되어가는 동안
장화 신은 발들이 불을 둘러싸고 서 있네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하고
누구일까, 내 몸을 제물 삼아
마른 연못 속에서 불을 피우는 그들은
園丁의 말
園丁은 겨울을 나는 벌들을 위해
풍로에 설탕물을 끓여서 벌집 속에 부어주었다
벌집 속에서만 잉잉대는 벌떼처럼
눈을 틔우지 못한 채 떨고 있던 매화나무들,
언 땅을 파서 묘목을 캐주던 園丁은 벙어리였다
그해 봄날, 매화나무는
불 꺼진 베란다 구석 커다란 화분에 갇혀 꽃을 피웠다
드문드문, 살아 있다는 증표로는 충분하게
뿌리를 적신 물이 하수구로 흘러들었고
매화나무는 下血을 하는지
시든 꽃잎들이 하르르 하르르 물에 떠다녔다
소리 없는 말처럼 붉은 진이 가지에 맺히고
꽃 진 자리마다 잎이 돋기 시작했다
역류한 하수구의 물이 그녀를 키우기라도 하는 것일까
두려웠다, 집을 삼킬 듯 자라는 잎들이
열매 맺을 수 없는 나무의 피로 무성해지는 잎들이
뒤늦게야 벙어리 園丁을 떠올렸다
묘목을 실어주며 간절하게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말을
아, 알아듣지 못했다
화분 속에 겨울 들판을 들이려고 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