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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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식물-되기’의 고통 혹은 아름다움에 관하여

한강 연작소설『채식주의자』

 

 

김예림 金艾琳

문학평론가. 저서로『1930년대 후반 근대인식의 틀과 미의식』『문학풍경, 문화환경』등이 있음. yerimk@hanmail.net

 

 

채식주의자-먹한강(韓江)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창비 2007)는‘식물-되기’의 고통에 관한 책이다. 식물-되기는 두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초 타인의 폭력적 동물성 혹은 동물적 폭력성으로부터 얻은 상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번. 이 거친 파괴적 힘은 식물-되기를 갈망하는 주체에게 계속해서 몰아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한 인물의 식물-되기의 기원과 과정을 촘촘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간 삶의 상처라는 것을 꾸준히 문제시해온 작가의 치열한 의식을 이어 보여준다고 하겠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175면)라는‘순식물성’발언을 하면서 나무처럼 물구나무를 서는 여성인물의 거식(拒食)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온몸에 꽃을 피운 채 나신으로 치른 정화식(淨化式)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듯하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론적 상처 또는 주체의 파열. 이것은 사실 한국문학에서 아주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주제이다. 특히 많은 작가들이‘개인의 심연’을 천착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는 일군의 여성작가들에 의해 적극 계발되어온 지점이기도 하다(문학 본연의 관심이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있다고 한다면 물론 틀린 지적은 아닐 것이나, 지금은 이러한 원론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경숙, 하성란, 전경린 그리고 한강 등으로 대표될 만한 경향을 생각해보자. 이들의 작품에는 몇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복잡하다기보다는 섬세하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미학적 가공,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포착하려는 특유의 서사적 집중력, (주로) 여성인물들의 내면을 미시적으로 기록하는 치밀함,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체험의 유려하고 능숙한 재현, 분석적 비판보다는 동정적(sympathetic) 공감의 생산이라는 점 등에서 이 작가들은 대략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어느정도 코드화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러한 유형의 미학적 경향은 우리 문단에서 역설적이게도‘고전적’이고‘전통적’인 어떤 것이 되어버렸고, 안정적이고 성숙된만큼 새로운 자극은 없고 변주만 있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게 사실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몇몇 작가들의 명단에, 한강의 이름이 올라 있다. 데뷔작 「붉은 닻」(1994)에서부터 2007년의 『채식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한강은 일관되게 상처입은 존재의 처절함을 미의 문제와 결합해 다루는 데 집중해왔다.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아름다움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좇아 들어간다는 점에서 한강은 몇 안되는‘심미주의자’가운데 하나다. 전체적으로, 고통의 미학화가 그간 이 작가가 보여준 작품세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005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몽고반점」은 그녀가 지금까지 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매우‘한강적인’소설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당시 문단에도 호소력을 발휘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격렬한 결합, 극단적인 미학적 열(熱), 금기를 이기는 치명적 매혹, 육체성을 넘어 승화하는 신성한 예술적 욕망 같은 코드(이들은 한국문학에서는 상대적으로 낯설거나 부족한 어떤 것이었다)에 적극적으로 화답한 셈이다.

‘근원적’아름다움을 향해 터부의 선을 넘어 끓어오르는 욕망, 그 욕망이 가닿는 자리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104면) 당연하겠지만, 그것은‘동물적’육욕을 넘어서는 것이고, 생의 공허와 비애를 감싸안고 이로부터 승화하는 것이다. 지극히 정신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며‘성스러운’결정체.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 고통과 혼돈과 욕망의 에쎈스-아름다움은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107면)로부터 한방울의 눈물처럼 반짝이며 흘러나온다. 「몽고반점」은 작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대묘사하고 있으며, 「채식주의자」는 식물적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처절한 경험을 안고 시작되어 종국에는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아름다움을 찾아 헤맨다는 점에서 「몽고반점」은 일련의 인식론적·미학적 과장이나 추상성을 동반한다. 나는 이것이 「몽고반점」뿐 아니라 「채식주의자」 그리고 그밖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일관된 경향성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몽고반점」의 열에 들뜬 (현재로서는 다소) 생경한 심미주의적 문법과 「채식주의자」의 전반적인 과잉 수사학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것은 「나무 불꽃」에 담긴‘고통의 이해와 아픔의 공유’라는 의미론적 계기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의 눈에는 단지 정신병자이거나 환자일 뿐인 인물의 내면을 끝까지 함께하는 자가 있다. 이 동행자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비로소 상처와 아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싶은 열망. 이 절박한 바람을 포용하고 그 기원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내면에 이와 유사한 상처를 숨기고 있던 사람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201면) 한강은 세편의 연작을 통해 이 정서적·경험적 연대의 희미한 선을 드러낸다.

하지만 독자인 우리에게 남아 있는 궁금증은 『채식주의자』라는 작품 자체에 관한 것이기보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에 관한 것이다. 허윤진(許允紓)은 해설에서 그녀에 대해 “작가는 상처와 치유의 지식체계를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해온 신비로운 사관(史官)이다”(239면)라고 평했는데, 이는 물론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좀 다른 길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신비로운 사관’은 언제까지 이처럼 동질적인‘상처와 치유’의 기록만을 남길 것인가. 그녀에게는 왜 시간의 흐름, 시대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상처와 치유’의 문제가 이토록 오랫동안 유사한 모습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한강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답이 그녀뿐만 아니라 1990년대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여타 여성작가들에게서도 나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김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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