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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만시지탄의 동아시아 지성사

타께우찌 요시미 『일본과 아시아』, 소명출판 2004

 

 

임성모 任城模

연세대 사학과 교수, 일본근현대사 전공 diaspora@yonsei.ac.kr

 

 

 

1932년 8월, 22세의 한 일본청년이 ‘조선·만주 견학여행단’의 일원으로 부산항을 밟았다. 울산·경주를 거쳐 경성에 도착한 그는 단체일정에서 벗어나 혼자 강릉으로 향했다. 오오사까(大阪)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생활을 함께 했던 조선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기차역에 마중을 나온 벗과 얼싸안은 청년은 사복형사의 미행 속에서 조선 요리와 풍속을 맛보면서 이틀을 보낸 뒤 다시 여행단에 합류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조선 체험을, 40년 뒤의 그는 ‘일상성’에 기초한 귀중한 교유로 아스라이 회상하며 ‘조선어’ 공부를 다짐한다. 그에게 조선어란 그것을 말살함으로써 “일본어가 타락한 사정을 확인하고 타락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竹內好全集』 제5권, 筑摩書房 1982, 236면)바로미터였다. 그 짧은 여정은 일평생 스스로 갈구해 마지않던 “차별자가 차별의 자각에 도달하기 위한 원(原)체험” “마음과 마음의 접촉”(같은 책 237면, 244면)이었던 셈이다.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 1910~77)는 중국현대문학자, 혹은 루 쉰(魯迅) 전문가로만 알려진 감이 있지만, 이 일화는 그가 식민지 조선과 ‘조선문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일러준다. 그는 조선을 피차별부락, 피폭자(被爆者), 오끼나와, 중국처럼 일본사회에 만연된 차별의식의 근원 중 하나로서 일관되게 중시했다. 그는 전공의 울타리에 안주한 전문가가 아니라 실로 전방위적인 사상가였던 것이다.

사상가로서 타께우찌 요시미의 중요성은, 먼저 패전 이후 일본사회에 똬리를 튼 식민주의의 망각, 그리고 차별의식의 내면화를 끊임없이 각성시켰다는 데 있다. 그에게 루 쉰, 중국, 아시아는 차별적 식민주의의 온상인 유럽 근대, 그 변형인 일본 근대와의 대립물을 상징하는 은유이다. 아프리카까지 시야에 넣은 세계사적 개념으로서 아시아는 또 일본의 자기쇄신을 통한 주체형성의 방법이기도 했다.

너희가 아시아를 아느냐? 타께우찌 요시미는 패전 후의 일본사회를 향해 일갈(一喝)한다. 그는 일본의 근대를 ‘전향(轉向)문화’이자 ‘노예의 근대’로 규정하고, ‘회심(回心), 즉 혁명문화’이자 ‘저항의 근대’인 중국과 대비시킨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임을 주관적으로 거부하고 주인이 되려 할 때 그 노예성을 온전히 드러낸다. 또 ‘회심’이 자기를 유지할 때 비롯되는 반면, 전향은 자신을 포기할 때 일어난다. 결국 그의 도식은 내적 갈등을 수반하지 않은 외적 변화, 자기의식이 없고 따라서 저항도 없는 몰주체적 변화가 일본 근대의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무대장치이다. 여기서 일본은 저항이 없기에 ‘동양적’이지 않고 자기보존의 욕구도 없어 ‘유럽적’이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배우이다. 그가 보기에 개항 이래 서양 ‘추월’을 구호로 내걸어온 ‘우등생문화’의 근대 일본은 유럽과 아시아의 틈새에서 이윤추구에만 연연해온 매판(買辦)배우에 불과하다. 중국을 너무 이상화했음에도 그의 일본 비판은 적확하고 통렬하다.

일본의 활로는 결국 상실된 ‘아시아성’의 회복에 있다. 타께우찌 요시미는 이를 통해 일본이 진정한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유산으로서 ‘아시아주의’의 전통에 주목한다. 전통의 핵심은 “문명의 부정을 통한 문명의 재건”(199면)이다. 즉 서양의 침략에 의해 자기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오욕(汚辱)의 아시아가 힘의 신앙에 찌든 서양문명을 구원할 새로운 문명을 주체적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그런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보았다. 미야자끼 토오뗀(宮崎滔天), 오까꾸라 텐신(岡倉天心) 등의 언설에는 아시아와의 연대를 통한 저항의 계기가 깃들어 있고, 이는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전개된 ‘근대의 초극(超克)’ 논의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것이다.

The Quarterly Changbi타께우찌 요시미의 염원과는 달리 패전 후의 일본은 다시 ‘미국화’에 매진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포함한 ‘제국의 기억’을 말끔히 소거시켰다. 그는 ‘근대주의’로 대표되는 패전 후의 일본 지성계가 민족주의와의 정면대결을 회피한 것을 최대의 문제점으로 비판한다. 타께우찌 사상의 또다른 중요성이 바로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의 근대 비판이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는 서양근대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를 양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역사주의에 입각해 사고하며 국민국가를 부동의 전제로 삼는다. 때문에 그가 지향한 새로운 문명도 결국 서양문명의 복제에 불과해질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작금의 동아시아 현실에서 민족주의와의 고투를 강조한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아시아의 근대에 대한 그의 직관이 ‘동아시아’ 논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시지탄(晩時之嘆)’은 바로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1980년대에 그가 편집한 루 쉰 저작집이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그의 루 쉰 전기가 소개되긴 했지만, 관심의 촛점은 타께우찌 요시미가 아니었다. 이 책으로 사상 ‘수입’의 이 기묘한 공백이 드디어 메워지게 된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의 ‘미완의 근대’와 공명하듯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근대주의가 과잉 소개됨으로써 빚어진 지적 ‘편식’상태가 개선될 수 있게 된 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에게는 식민주의 비판의 메씨지가 희박했다. 하시까와 분조오(橋川文三)도 소개되어 마땅하지만, 이번에 타께우찌 요시미의 육성이 전해지는 것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의 발언은 아시아를 둘러싼 근대 일본의 주요 구상들을 망라적으로 조감하고 있어 동아시아 논의에도 큰 자극이 될 것이다.

반둥회의 50주년을 맞는 올해, 저 5원칙에 천명되었던 아시아의 평화는 도리어 요원해졌다. 타께우찌 요시미가 강조한 세 가지 미덕, 자각·양심·용기가 지금처럼 절실히 요청되는 싯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평생지기인 루 쉰은 반혁명에서 혁명의 계기를 이끌어내고 절망 속에 희망을 싹틔우지 않았던가.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그 진가를 발하는 법. 직관적 문체가 글의 무게를 더하는 이 책은 동아시아를 뒤덮은 어둠의 심연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낼 나침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