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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난파된 신화와 쎄이렌의 변성(變聲)

김이듬 시집『명랑하라 팜 파탈』

 

 

이기성 李起聖

문학평론가, 시인. 시집으로『불쑥 내민 손』, 주요 평론으로「망각의 언어와 정치적 몸의 탈환」「우울한 하품과 서정의 알리바이」등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명랑하라김이듬의 시에서는 쎄이렌-유령이 노래하고 있다. 견고한 이성의 갑옷으로 무장한 오디쎄우스를 몽상과 신화의 세계로 불러들였던 쎄이렌의 노래는 합리성의 준칙을 위반하는 음험한 도발로 해석된다. 아버지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성장의 항해를 교란하는 그녀들의 출현은 근대라는 미끄러운 평면에 놓인 검고 어두운 심연으로의 초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쎄이렌은 문명의 저편에 놓인 신화를 재현하는 상징이 아니라, 상실된 신화의 파편이자 귀환할 수 없는 고향의 흔적으로 남겨진다. 신화의 붕괴라는 이 재난의 세계에 자신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는 현대의 시인들에게, 쎄이렌의 노래는 “되풀이되는 계절”(「바바야가의 오두막」)의 성벽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악무한(惡無限)과 싸우는 위반과 도발의 언어로 새롭게 불려진다.

이번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김이듬은 쎄이렌의 목소리를 훔쳐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복화술적 간지(奸智)를 발휘하고 있다. 그녀의 시가 보여주는 현실은, 늙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초자아의 역할을 떠맡은 새엄마의 도덕률에 지배되는(‘도덕적 우열을 따지는 엄마’),‘씻지도 않은 손’으로 수음하는 아버지의 비천함으로 얼룩진 훼손된 가계(家系)이다. 그녀의 시는 이러한 비루한 세계를 일그러뜨려 낯설고 현기증 나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질적 이미지를 충돌시키고 구문을 절단하여 비틀어버리는 그녀의 특이한 발성법은 문법적 합리성의 세계를 붕괴시키려는 파괴의 전략에서 비롯된다. 시 「세이렌의 노래」에서 시인은‘낡은 배’를 난파시키고, 익사한 연인들의 귀에 기괴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 목소리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쳐흐르는 유령-언어의 출현을 보여준다. 상징적 질서의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미결정의 지대에서 솟아난 쎄이렌-유령은 견고한 언어의 문법과 미적 관습을 모호한 음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임으로써 무화한다. 어두운 심연에서 솟아오르는‘몹쓸 방언’이며 해독되지 않는 미지의 언어인 그것은,‘동물들의 울음’혹은‘지상에는 없는 아름다운 언어’로 변용되어 마침내 “소녀는 진동했고 발작에 가까웠다”(「드러머와 나」)에서처럼‘진동’‘발작’이라는 파장의 형태로 분출된다. 자아라는 허구적 존재를 근원적 떨림의 운동으로 바꾸어놓는 이‘진동’의 격렬함은, 완결된 문장을 탈구시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고 시공간의 좌표를 마구 뒤섞어 새로운 분열의 공간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시적 무대는‘착시/착란’으로 광학적 원근법을 일그러뜨리는 악몽의 만화경적 세계가 된다. 이러한 도발적 언어의 기원은 시 「유일하지 않은 하나」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백도를 그리랬지 누가 괴발개발 까뒤집은 엉덩일 그리라 했냐? 전요 털 난 과일을 보면 두드러기 생겨요 거짓말을 하고 대머리 미술 교사는 내 복사뼈를 훑는다 숭숭 털 수북한 팔등을 자르는 그림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교사’로 상징되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구축된‘백도’의 순결한 이미지는 욕망의 대상물이다. 시적 자아는‘내 복사뼈를 훑는’욕망의 시선에 의해 허구적으로 착색된‘백도’가 아니라‘괴발개발 까뒤집은 엉덩이’를 그림으로써 타자의 명령을 위반한다. 이러한 행위는 타자의 외설성을 노골적으로 전면화함으로써 그 시선에 은폐된 비열한 욕망을 폭로하는 역설적 힘을 내장한다.‘털 수북한 팔등’을 자르는 신체적 훼손 행위를 통해서 자아에게 투사된 타자의 욕망을 거세하고 비로소 자아는 새로운 그림을 향한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이‘까뒤집은 엉덩이’의 외설적이고 불편한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시적 신체를 어떻게 남성 주체의 허구적 욕망을 되비추는 위반의 도구로 재구성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이듬은 兒슈얼리티의 의도적 과잉 노출과 더불어, 피, 월경, 오줌 등 여성적 신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러한 전방위적 위반을 감행한다. 자아의 내부에서 분출되지만 스스로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비천한 것으로 거부되는 이러한 체액의 이미지들은 그간 여성적 시쓰기에서 반복적으로 동원되고 소비되어온 전략적 소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를 차용하면서도 그녀의 시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시의 계보에 새겨져왔던 억압된 여성 자아의 가위눌림이나 비명지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히려 그녀는 가부장적 질서를 무시로 넘쳐흐르는 과잉된 파토스를 통해서‘늙은 아버지’의 세계를 마음껏 조롱하고 거부함으로써 활력을 얻고, 스스로를 향유의 주체로 재정의함으로써 발랄한 탈주의 리듬을 만들어간다. 시 「헬렐레할래」에서 반복되는‘ㅎ’은 파열적 날숨으로 내부에 갇혀 있던 욕망을 외부로 발산하고, 이어지는‘ㄹ’음은 시간의 견고한 틈새를 파고들어가는 점액질의 언어를 음성화한다.

이렇게 그녀의 쎄이렌은‘팜므 파딸’(femme fatale)이라는 현대적 욕망의 목소리를 껴입게 된다. 김이듬은 남성 주체에 의해서 구성된 욕망의 허구적 대상이 아니라 자아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체현하고 발산하는‘명랑’한 주체로 팜므 파딸의 이미지를 소환한다.‘노래의 향료’에 취한 자들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쎄이렌의 노래는,‘낡은 배’로 상징되는 미적 관습을 침몰시키고 “나는 내 멋대로 선창한다”(「엔딩 크레디트」)고 도발적으로 선언하는 팜므 파딸의 치명적인 목소리로 변주된다. 금기와 억압의 체계에 던지는 이러한 결별의 노래는 무거운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명랑’의 리듬을 타고 솟아오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명랑’이‘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명랑하라’라는 술어에 내포된 전언은 너의 욕망을 향유하라는 타자의‘명령’이다. 이것은 모든 금지된 것을 위반하는‘명랑’의 언어 속에, 자아를 끊임없이 오이디푸스의 내부로 귀환하도록 만드는‘명령’이 함께 울려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자기 욕망을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는 자아의 환상은 이러한 타자의 목소리를 간파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김이듬의 시적 언어는 팜프 파딸의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외설적 아버지를 불러내어 오이디푸스의 장으로 환원되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명랑’이 저 집요한‘명령’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 「침묵의 복원」에서 자아는 컴퓨터에 저장된 언어들이 아버지의 더러운 손으로 복구되어‘유작시집’이라는 형식으로 고정될 것을 거부하면서도, 그 손에 대한 미묘한 끌림을 동시에 노출한다. 이렇게‘늙은 아빠’로 상징되는 무력한 오이디푸스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위악적 언어 속에는, 억압을 뚫고 나가기 위해 스스로 그 억압의 체계를 재구성해야만 하는 의식의 기만이 작동하고 있다. 위반하기 위해서 금지의 선을 함께 그어야 하는 아이러니는, 지젝(S. Zizek)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라는 환상을 객관적 현실로 전치시킴으로써 증상을 지속하려는 무의식적인 공모에서 비롯된다. 아버지의 더러운 손을 혐오하면서도 그 손의 침입을 반복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금기와 억압의 임계점에서만‘팜므 파딸’의 언어들이 더 매혹적으로 발화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볼 때, 억압을 향유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의 포획으로부터 탈주하려는 팜므 파딸의‘명랑’이란 근대의 저 오랜‘우울’과‘허기’를 은폐하려는 위장술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에게 반한 여자”(「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나는 아름다워요”(「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난 볼 수 없겠지, 창백하게 눈감긴 내 예쁜 얼굴”(「레터 나이프」)에서와 같이 팜므 파딸의 언어는 자기향유적 언어놀이를 통해서 발화된다. 이러한 나르씨씨즘적 자기노출을 통해, 외부의 시선을 봉인한 채 자폐적 놀이에 몰입하는 자아의‘절망과 우울’이 드러난다. 김이듬의 시쓰기를 이끌어가는 명랑과 우울증은, 스스로 고백하듯 “강간당하는 형식으로 습득된 기교”(「안드로메다 이수자」)의 쌍생아이며, 자기파괴적 기교와 절망 사이를 오가는 시적 발열의 징후로 읽힌다. 그리하여 자기 언어에 스스로 매혹당한 팜므 파딸은 난파된 신화의 멜랑꼴리를 체현하고, 쎄이렌의 노래는 “오래 묵은 자의식과 낭패감”(「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으로 얼룩진 채 이 우울의 텅 빈 지대를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