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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부키 2007

주류 경제학에 대한 또 하나의 불온서적

 

 

유철규 劉哲奎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yoocg@skhu.ac.kr

 

 

나쁜사마리아인들장하준(張夏準)은 싸움꾼이 다 되었다. 그것도 보통 싸움꾼이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을 필두로 물질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가장 강력한 지배자들에 거침없이 집요하게 대든다. 이 기구들은 오랫동안 이구동성으로 개발도상국들에 말해왔다. 때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얹은 조언과 권고로, 때로는 투자철수나 대출거부를 내세운 위협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자유시장 원칙을 따르라. 초국적기업을 포함하여 모든 기업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라. 공기업을 민영화하라. 국제무역과 외국자본의 투자에 대해 완전 개방하라.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경쟁하게 하라. 경쟁이 공정할 때에만 시장이 주는 혜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하준의 눈에는 개발도상국의 산업과 선진국 부자나라의 산업을 동등하게 경쟁시키는 것은 체급이 다른 권투선수의 시합을 주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공정할 수 없는 일이다.

장하준이 들고 싸우는 무기는 의외로 단순하다.‘역사’와‘현실’이라는 두가지가 그것이다. 앞의 세 국제기구가 지난 이삼십년간 천편일률적으로 내놓은 정책들은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서 성장 저하와 불평등한 소득분배의 심화, 그리고 경제 불안정을 낳았”다.(62면) 이것이 무기로서의 현실이다. 또 하나의 무기인 역사는 이렇다. “오늘날 부자나라들의 과거 기록을 보면 외국인 투자 문제나 국영기업, 거시경제 관리, 그리고 정치기구와 관련된 정책 등의 측면에서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정통적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34면) “오늘날의 부자나라들은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 보호관세와 보조금을 사용하고, 외국인 투자자를 차별했다.”(33면)

저자는 부자나라들이 개발도상국에 자기 나라에서 실제로 시행해 성공을 거둔 경제발전전략을 사용하라고 권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의문을 제기한다. 영국에 비해 늦게 산업혁명을 겪은 독일과 미국이 대표적으로 보호무역을 통해 산업화를 이루어낸 사례라는 것은 세계사에 조금만 관심을 둔 독자라면 이미 아는 일이겠지만, 자유무역의 대표로 알려진 영국도 장기간 높은 관세장벽 뒤에서 경쟁국들을 누르며 기술적 우위를 획득하고 나서야 자유무역을 채택한 사실은 다시 들어도 새롭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의 어느 정책가가 미국의 산업발전을 막기 위해 미국이 말발굽에 박는 못을 생산한다고 해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기록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이순희 옮김)에서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유무역은 언제나 기술적·경제적 우위에 선 국가·산업·기업의 논리였으며, 뒤처진 이들은 앞선 자를 따라잡기 위해 자유무역에 반대했다는 역사적 진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독자 앞에 펼쳐진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이 책은 2002년에 출간된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 한국어판은 부키 2004)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격인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장하준은 선진국들이 산업화에 앞서나가는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사용했던 다양한 정책수단들을 이제는 개발도상국들에 금기시하고 있다면서, 이를 리스트(F. List)를 인용해‘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자가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리는’행위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오늘날 절대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이 겪고 있는 저성장의 악순환에 비춰볼 때 분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이 관점이 이번 책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앞서의 역사적 사실들이 다시 정리되어, 매우 흥미롭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로 재탄생했다. 그것은‘외국인투자는 반드시 필요하고 항상 좋은 것인가’‘민간기업은 좋고 공기업은 나쁜가’‘지적재산권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가’‘재정건전성, 부패와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경제발전에 유리한 문화와 민족성이 따로 있는가’같은 주제들이다. 역시 현실과 역사를 무기로 삼아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의 주류 경제학적 대답을 하나하나 반박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위선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거침없이 논박한다.

서구의 지성에게는 또 하나의‘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 싸움에 대해, 장하준은 “진심으로 개발도상국들이 무역을 통해 발전하도록 도우려 한다면”(131면) 그리고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국제적인 씨스템을 구축하기를 원한다면”(330면)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했다.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전공하는 이와같은 열정은 제쳐두고, 그가 싸움꾼이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한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유례없는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이다. 하필 영국에서 한국의 외환위기 소식을 접했던 평자는 외환위기를 두고 그와 열띠게 의견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우리는 2차대전 이후 패전국 대하듯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뜯어고치려고 하는 IMF의 구조조정에 아연했으며, 공황기에 고이자율과 긴축재정과 재정흑자를 요구하는 그들의 정책에 할 말을 잃곤 했다. 뒤에 하바드의 보수주의 경제학자 펠드스틴(M. Feldstein)조차 “한국이 곤경에 처하자 예전에 거부했던 무역 및 투자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IMF의 권력남용”(61~62면)이라고 했던 그 정책에 함께 분노했었다.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 곤경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을 뜻하는 이번 책 제목‘나쁜 사마리아인들’도 아마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부터 기원한 것인지 모른다.

근대적 산업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은 식민지를 겪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성공사례이다. 그런데 이 성공사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국가의 광범위한 시장개입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경제개발계획, 중화학공업화정책, 산업보조금, 관세보호 등에 대해 오늘날 IMF와 세계은행은 질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빈곤 탈출을 원하는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의 사례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국제개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들의 눈으로 보면 서구의 교리에 위배되는 요소를 너무나 많이 가진 한국의 성공사례는 다른 개도국이 본받으면 안되는 위험한 것이다. 장하준은 이를 “집에서는 해보지 마시오”로 재치있게 표현했다.(326면) 심각하고 강렬한 책 내용 중간 중간에 심어져 있는 웃음거리 양념이다. 장하준의 책이 서구 지성계에 갖는 불온성은 한국의 경험에 기인한다.

장하준은 두 종류의‘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보았다. 하나는 가난한 나라의 경제를 장악하고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설교하는 자들이고, 또 하나는 아예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개발도상국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전자는 이기주의이며 위선이다. 후자는 독선이며 무지이다. 책은 두 부류에게 각기 다른 메씨지를 던진다. 전자를 위해서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를 억누르기보다는 진정 경제발전을 이루도록 핸디캡을 인정해주는 것이 세계경제, 나아가 서구경제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후자를 위한 것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공부할 것을 권하는 일이다.

이제 한국은 더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므로 이 책이 한국에 대해 제안하는 방책은 직접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책은 한국이 점점 과거를 잊고 나쁜 사마리아인 흉내를 내고 있다는 데 경고를 보내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 흉내내기를 그만두고 함께 살기에 나서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필요로 하는 한국의 역할이 아닐까 저자는 되묻고 있다. 문제의식과 메씨지가 명확한만큼,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에 대해 말 뒤집기식으로 퉁명스럽게 응대하는 저자의 태도 정도는 넘어가줄 수도 있겠다. 책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상반되는 사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 보호무역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경제발전을 유도했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 타당한 비판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역공을 가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어떤 것(경제발전)을 그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것(보호무역주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만큼 자유무역주의 경제학자들은 오늘날의 부자나라들이 부자가 되기 전까지 자유무역을 실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유무역이 경제적인 성공을 설명하는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98면) 질문의 내용에 바로 답하지 않고 거꾸로 되돌려보내는 방법은 물론 바람직한 토론 태도가 아니다. 그래도 서구 주류의 고압적 태도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통쾌하게 해주는 데는 효과적이다. 그의 책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그에게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