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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하승수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7

지역의 눈으로 한국사회 길 찾기

 

 

김기현 金起鉉

부천YMCA사무총장 khkim21@hotmail.com

 

 

지역지방자치2008년 한국은 성장과 개발의 이데올로기가 온 사회를 휘젓고 있다. 물론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도 성장과 개발이 주요 담론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겉포장일망정 지속가능성을 얘기하고 시장만능에 대한 견제장치를 고민했던 것에 비해, 이제 한국은 정글로 변해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브레이크마저 제거한 채 비장한 죽음의 레이스에 돌입한 형국이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사회적 역동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문제,‘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발상의 미학, 안전과 삶의 질을 보장하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 등은 한가한 것으로 치부된다. 아직도 70년대 근대화의 허상에 매몰되어 양적 성장지표에 목을 걸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일로매진할 태세다. 이들의 눈에는 이미 상당히 성숙해진 한국사회의 발전단계와 씨스템으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지역’이 중요하다. 성장과 개발의 풍랑 속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사회실험을 일으키고, 후퇴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살아나는 거점을 만들고, 고도로 복잡하게 전개되는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대안적 해법을 생활현장에서 만들어가야 한다. 10년 앞을 내다보는 시야와 장기적인 호흡을 갖고, 성장과 개발의 분출하는 욕망 때문에 삶의 질과 사회적 관계망이 파괴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대안적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지역, 생활,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하여 한국사회의 길 찾기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하승수(河昇秀)의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는 절묘하게도 바로 이런 시점에 나온 책이다.

평자가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저자 하승수 변호사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이론가이자 실천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화려한 중앙의 시민운동보다는 풀뿌리 지역현장에서 오랜 기간 묵묵히 실천과 연구를 병행해온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런 그의 장점이 이 책에 잘 배어 있다.

그는 “지역에서부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것, 그것에 기반을 두고 관료 주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책과정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핵심과제”라고 생각한다.(9면) “지역이 살길”이라고 하지만 그는 결코 지역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가 본 지역에서는 “시민의 무관심과 낮은 참여, 특정 정당이 장기 지배하고 있는 대의정치, 독주하는 지방자치단체장, 견제·감시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지방의회, 이익 배분 또는 기득권 보장과 정치적 지지를 교환하는 뿌리깊은 후견주의(clientalism), 중앙 관료조직에 의한 획일적인 통제, 그리고 지역사회의 저변에 존재하는 기득권을 가진 사회단체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고, 고착되고 있다.”(7~8면)

그래서 그는 줄곧 이런 이중성과 씨름한다.‘자치의 꿈과 풀뿌리 기득권 구조의 강화’(1장)‘지방자치의 딜레마와 쟁점’(2장)‘왜곡되는 직접민주주의와 주민 참여 가능성’(4장) 등 풀뿌리 민주주의에 열광했지만 결국 풀뿌리 보수주의로 귀착되고 있는 지역의 절망적 현실, 중앙보다 더 지체되어 있는 지역의 모순과 문제를 하나하나 냉정하게 해부한다.

“2005년 6월 『한겨레』가 서울, 경기, 인천 등 세 지역의 기초의회 홈페이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당선인 명부’에 나타난 이 지역 기초의원들의 출신경력을 조사해 분석한 결과, 전체 1126명 가운데 37.5%인 422명이 3대 관변단체(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운동, 자유총연맹)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다.”(39면) 그래서 그는‘한국의 지역사회는 누가 지배하는가?’(3장)라는 질문을 던지며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뿐 아니라 토호, 관변단체, 중앙정당과 중앙정치인, 지방언론, 지식인(전문가)집단, 시민·사회운동, 경제인 등 지역사회 각 주체들의 상호관계를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하남시에서 있었던 주민소환투표, 부천시에서 진행중인 화장장 건립을 둘러싼 갈등 역시 1차 당사자(지방자치단체와 지역주민)간의 힘의 대립과 갈등으로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그렇게 한정하면 너무 평면적이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지역사회 각 주체들의 역동과 상호작용을 잘 포착해야 문제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갈등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지방자치의 발전을 도모할 때 역시 지역 주체들의 역동성과 상호관계를 고려해야지, 단순하게 올바른 방향과 입장에 서 있다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정권하에서 추진된 지방분권이 지방자치, 주민자치의 강화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지역의 개발연대와 토착세력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는 점, 정당정치의 발전을 표방한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그나마 조금씩 성장하던 지역 풀뿌리 정치세력을 궤멸시킨 사례는 이러한 역동성과 상호관계에 대한 고려 없는 순박한 접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고 있다.

하승수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 사회에서 지역간 불균형이 생기는 원인은‘중앙집중화’와‘도시화’이고, 이 두가지 큰 흐름으로 한국사회에서의 불균형은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 (…) 기본적으로 노무현정부가 말하는 균형발전은‘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역성장정책’이고, 지방에서도 발전 지역 또는 가능성이 큰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거점 중심의 개발전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은 본질적으로 불균형성장정책이다”(박경, 183~84면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2005년 11월 2일 전국 4개 지방자치단체(군산시, 포항시, 경주시, 영덕군)에서 동시에 실시된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와 관련된 주민투표를 최소한의 민주주의 원칙조차 무시된 사례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에 대비해 울진과 영광, 삼척이 방폐장 유치신청을 하지 않은 점을 부각시킨다. 특히 전남 영광군의 김봉열 군수는 “원자력발전소 6개가 영광군에 건설·가동된 이후에 20여년 동안 영광군에 3000억원 정도가 지원되었지만, 주로 공공시설 사업에 투자된 이러한 자금이 군민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194면)

그는 이러한 예를 통하여‘내발적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외래형 발전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지역에 있는 자원·기술·인재·문화·시장 등을 활용하여 복합적인 경제를 육성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에서 저자 러미스(C. Douglas Lummis)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활동과 시장 이외의 행동·문화·즐거움을 발전시키는‘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역을 재구성해야 한다. 풀뿌리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천과 대안적 실험을 통해 지역이 활기찬 삶의 거점이 되고, 민주주의의 방파제로 작동하고,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생활의 디자인이 이루어지는 장(場)이 된다면, 그때 비로소 한국사회의 심층적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목적으로 진행되는 지방자치운동의 쟁점과 과정에 대한 축약된 안내서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승수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자치의 꿈과 풀뿌리 기득권 구조의 강화”“풀뿌리 보수주의인가 풀뿌리 민주주의인가”“직접민주주의의 희망과 좌절”“내발적 발전은 불가능한가”“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밑그림.” 이제 한층 더 치열한 연구와 실천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