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박선미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창비 2007
식민지 여성의 유학, 그 막힌 출구
이희경 李禧京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lhk2021@hanmail.net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는 식민지시기 여성들의 일본 유학경험을 다룬 책이다. 그 자신이 일본 유학생이었던 박선미(朴宣美)의 박사학위 논문을 일본에서 책으로 엮고, 그걸 다시 저자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니, 이 책 역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회유(回游)한 셈이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생긴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학교를 다니는 여성들은 매우 드물었고, 따라서 초창기 여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이러한 사정은 대체로 1919년 3·1운동 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교육이 아주 더디게 확장되었던 식민지 초기에도 일본 유학을 감행한 소수의 여성들이 존재했다. 1910년에는 34명의 여자유학생이 있었는데 이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20년에는 145명, 1930년에는 215명, 1940년에는 1707명에 이르렀다.(41면) 그런데 이는 조선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 다시 말해 이화여전이나 중앙보육학교보다 일본 여자미술학교나 나라(奈良)여자고등사범학교, 킨조오(錦城)여자전문학교 등에서 더 많은 조선 여성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일본 유학생이 많아지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당시 조선 내에 여성 고등교육기관이 매우 빈약했던 사정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달리 말해 식민지시기 교육피라미드의 정점에는 늘 제국의 고등교육기관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생기는 상급교육에 대한 열망, 그것은 구조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제국의 중심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동경은 동방의‘런던’이오 신아세아(新亞細亞) 문화의 총본산”(79면)이라는 인식,‘구질구질 콧물 흘리고 촌스러운’조선의 아이들과는 달리‘쎄일러복을 입고 단정한 복장’을 한 일본 아이들(84면)에 대한 열망이 일본 유학의 근본적인 충동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것만이 일본 유학의 동기는 아니다. 교육받은 여성이 늘어난다는 것은, 개성을 자각하는 근대 여성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성을 발휘하면서 산다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연구결과에도 나타나는데 저자가 인터뷰한 64명의 식민지시기 일본 여자유학생 중 78.1%가 사회진출을 위해 유학을 선택했고, 특히 교사를 희망하여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고 한다.(74면) 이제 조선의 작은 마을들에서 경성으로 통하는‘길’이, 또 경성에서 제국의 메트로폴리스로 연결되는‘길’이 만들어지고, 지식과 학력을 찾아 그 길을 걸어가는 일련의 여성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대인의 여정, 근대인의 길찾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니던가?
일본 여자유학생들도 이제 메트로폴리스를 통과해, 연어가 귀환하듯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일본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한 일은 무엇일까? 그들은 일본 유학을 통해 어떤 정체성을 획득했을까? 전체 여성인구 중 말 그대로 한줌도 되지 않는 일본 여자유학생은, 그 희소성 때문에 무엇보다 선각자와 교육자로 자신을 인식했다.(4장 1, 2절) 여성들도 여자다워야 한다는 규범이나 태도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니! 어셔 공부해가지고 사업함세다”(89면)라고 호소했던 여성운동가 1세대들, 그들 대부분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다.
그러나 식민지시기‘사람다운 여자’로 자기 개성껏 사는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尹心悳)은 현해탄에서 정사(情死)로 생을 마감했고, 또 한명의‘최초’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은 이혼 후 극심한 빈곤 속에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성유학생들은 좀더 안전한 귀환을 선호했다. 새로운 근대적 지식을 획득하고 사회적으로 적절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길, 그것은 가정학을 전공하고 국내에 돌아와 중등학교 여교사가 되는 길이 아니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가정학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정에서 형성된 여성근대화론이며, 여성 스스로가 전문가로서 여성과 가정에 관한 담론을 주도한 최초의 지적 영역이다.(155면) 이들은 과학적 모성과 합리적 주부의 역할을 익히고 스스로 여성전문가가 되어 조선 방방곡곡에 이를 퍼뜨렸다. 문명화된 여성은 하다못해 “소제”(청소)조차 “가정학에서 배운 질서, 위생학에서 배운 정리, 또 도화시간에 배운 색과 색의 조화, 음악시간에 배운 장단의 음률을 이용하여” “건조적이고 응용적”으로 수행해야 했다.(175면) 공적 영역으로의 진입을 꿈꾸며 감행했던 일본 유학에서 획득한 지식이 공·사의 철저한 이분법적 구별을 전제로 하고 그에 맞춘 성역할 모델을 과학적 담론으로 설파하는 가정학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조선에서 길을 떠나 제국의 메트로폴리스를 경유하여 다시 조선으로 회귀한 최첨단 엘리뜨지식인 여성의 여정은 결국 가정에서 출발하여 가정 밖의 길을 걷다 다시 가정으로 회귀하는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지적 여정, 삶의 여정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책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유학파 가정학 전공자들, 손정규, 송금선, 조기홍은 (책에서는 비록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총력전 체제하에 현모양처를‘총후부인(銃後婦人)’과‘군국의 어머니’로 전환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들이다.(177면) 그리고 해방후 (화려한 친일 경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정학계의 대모로,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니 묻게 된다. 도대체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근대가 만들어놓은 작은 출구 속에서 가정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나섰던 여성들, 학교를 가고 유학을 감행했던 이 용감한 여성들이 걸었던 길 끝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제국과 식민지의 낙차, 둘 사이의 문명과 감수성의 낙차 속에서 유학이라는 식민지와 제국의 조우는 제국이 파놓은 물길을 따라 일방적으로 제국의 문명과 감수성을 식민지로 전파하는‘에이전트’만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이 책은 일본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특징답게 각 장마다 독립적으로 완결된 소논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근대적 여성주체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는가와 관련된 분석적 연구가 아직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이 책은 의미있는 실증적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근대를 온몸으로 열어젖혔던 당시 여성들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막혀버린 이유를 식민통치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환원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앞서 이야기한 제국의‘에이전트’조차 공적 영역에 진입하고자 했던 여성 자신의 욕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것조차‘가정 개량’같은 근대성과 합리성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욕망의 논리적 귀결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근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젠더씨스템을 형성하는 존재로서의‘교육받은 여성’의 의미를. 근대와 여성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근대성과 여성성을 형성해가는 배치의 특징을. 식민지시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완강하게 작동하는 이 배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식민지시기를 다루고 있으나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루고 있는 책이며, 근대적 젠더씨스템을 분석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걸 넘어설 가능성을 묻고 있다. 매우 소중한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