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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숙의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였던 여성 교육자
소현숙 蘇賢淑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simzee@empal.com
오랫동안 여성들은 망각된 존재였다. 역사책을 비롯하여 과거를 기록한 많은 공식 매체들에서 여성들은 다만 조연 또는 엑스트라에 불과하거나 쉽게 그 존재가 삭제되곤 했다. 이는 무엇보다 여성에 관한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남아 있는 것들도 대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하에 작성된 것이라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드러내는 글쓰기 작업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 하겠다.‘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부족한 문헌목록의 한자리를 메운다는 의미를 넘어서 여성의 경험을 무화하고 역사의 조연으로 배치해온 공식적 역사담론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를 해체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이 여자, 이숙의』. 유명 인사들이 독차지해온 자서전 목록의 한 끝을 장식하게 된 이 책의 저자 이숙의(李淑義)는 소위‘여류 명사’가 아니다. 오히려 반공이 국시였던 남한사회에서 그 존재를 부정당해온‘빨갱이’를 남편으로 둔‘비운의’여성이라 할 수 있다. 반평생을 강요된 침묵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녀는 생애 마지막 순간을 남편과 그를 사랑하고 기다려온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다. 그녀가 남긴 이야기는 단순히 빨치산 사령관인 남편에 관한 회상담이 아니다. 그녀의 자서전은 사상과 이념을 선택하여 죽음을 맞은 남성이 아니라, 그 뒤에 남겨져 가족들을 거두고 가난과 체제의 감시·통제 아래에서 필사적인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던 여성의 이야기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숙의는 1926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모교인 경북 의성읍 의성 중부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한 신여성이다. 그녀는 1946년 해방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에서 좌익 대표로 연설한 박종근(朴宗根)에게 한눈에 반해, 그와 결혼했다. 남편 박종근은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항일투사로, 해방후 의성군 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 의성군 대표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결혼 6개월 만에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월북한 박종근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빨치산이 되어 남부군 제3지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52년 사망했다.
‘빨갱이’를 남편으로 둔 이숙의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경찰의 감시와 탄압 속에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연애시절부터 이미 그녀의 집은 경찰들의 발길로 쑥대밭이 되기 일쑤였고, 결혼 이후에는 학교는커녕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할 수 없어 공장노동,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야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뜨였기에 전후 남편의 사망이 확인된 다음에 경찰서장의 허락하에 비로소 복직될 수 있었지만, 늘 빨갱이 가족이라는 비난에 찬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잊을 만하면 들이닥쳐 과거를 캐묻는 정보기관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으며, 한때는 간첩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그녀의 삶에서 우리는 해방후 남한에서 좌익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의 사상과 활동을 불온시하던 남한사회에서 그로 인해 온갖 시련을 겪은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끝내 잃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그날을 맞이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내일’을 기다림으로써 반공독재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했다. 이 자서전은 그 저항의 증표로서 세상에 내놓은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백이기도 하다.
남편 없이 생계를 책임졌던 그녀는 교직에 복직하기까지 하층 여성으로서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밥 지을 줄도 바느질할 줄도 모르는 신여성이었던 그녀가 피복공장에서 일을 하고 재봉틀로 삯바느질하던 일, 피난시절 부산, 경주행 열차를 타고 사과, 감, 배추 등을 팔던 일 등의 일상을 기록한 부분들에서 우리는 분단 직후부터 전쟁 직후까지 하층 여성들의 생존방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숙의가 빨치산의 아내였던 것만은 아니다. 전후 이숙의는 의성 남부국민학교에 복직하여 의성, 대구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1963년부터는 경북교육국 장학사로 발령받아 1977년 사표를 제출하고 딸과 사위가 있는 서독으로 떠날 때까지 줄곧 교직생활을 했다. 자서전에는 초등학교의 일선교사로서 교직생활 중에 경험했던 다섯가지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교육자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장애아동 연호에 얽힌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특수교육에 대한 개념이나 제도, 시설도 없이 장애아들이 그냥 방치되었던 시절,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린 자기 반 학생 연호가 대변을 볼 때마다 아이를 업고 변소까지 달려가는 번거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연호와 짝이 된 여학생의 부모가 짝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했을 때는 연호가 상처받지 않도록 도와달라며 정중하게 설득하기도 했다. 이같은 학생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그녀가 여러차례 교육자 특별공로상을 받고, 장학사로 발령받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교직생활이 아름답고 보람된 것만은 아니었다. 저자는 독재치하였던 1960~70년대 교육현장의 왜곡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특히 도 장학사로서 어린이들의 애국애족심을 측정해서 통계로 만들어 보고하라는 중앙의 지시 때문에 거짓통계를 작성하여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든가, 애국심과 정직성을 측정하기 위해 교사가 태극기를 찢어 던져놓거나 동전을 일부러 떨어뜨려놓으면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쉬는 시간에도 그것들을 주우러 다녀야 했던 일, 4월 학기 시작 때 아이들의 애국애족심·정직성은 0%였다가 날이 갈수록 점점 자라서 여름방학 무렵에는 40~50%로 향상하고 학년이 끝날 무렵엔 드디어 100%가 되었다가 다시 새 학년이 되면 0%로 떨어졌다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은 독재치하의 교육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분단, 전쟁, 반공독재국가라는 굴곡진 세월을 견뎌내온 그녀의 삶을 담은 이 자서전은 한 여성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이기도 하다. 저자는 생을 살면서 만나고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걸었던 주변인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전해줌으로써, 어려운 시절을 겪어낸 우리 윗세대의 역사를 한편의 대하드라마처럼 고스란히 담아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내용임에도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한 세대의 역사가 담담하고 무리없이 전달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미덕 중 하나이다. 또한 비교적 정확한 기억에 입각하여 씌어진 점 역시 이 책의 강점 중 하나이다. 자서전이나 구술 같은 기억의 기록들은 그 기억이 불분명하거나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건이 일어난 시기나 장소, 인물 같은 객관적인 상황이 불분명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정보당국에 불려가 살아온 생애를 기록하도록 수없이 강요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날짜, 장소 등 과거의 기억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이다. 정보당국에 의해 불온시되고 침묵되어온 그의 기억이 정보당국의 강요에 의해 오히려 또렷이 머릿속에 각인될 수 있었던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몇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저자의 기록이 주로 해방 이후의 시간에 할애되어 있어, 식민지시기의 경험이 거의 기록되지 않은 점이 그 시기를 연구하는 평자에게는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일제 말기에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그녀의 이력을 볼 때, 당시의 교육현실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증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직후 여성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했던 그녀였지만, 그 활동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는 점, 그리고 빨치산 남편을 둔 여성이자 반공교육을 해야 하는 교사로서 그녀가 겪은 내면적 갈등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이 없는 점 등도 아쉽다.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이 자서전이라고 할 때,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반평생을 침묵당해온 그녀였던만큼 사상과 이데올로기 같은 민감한 내용에 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삼가려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이 작동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