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 나남 2007

‘연구’와 ‘비평’의 차이에 대한 성찰

 

 

조선정 曺仙貞

서울대 영문과 교수 sjcho@snu.ac.kr

 

 

영국영문학 비평서의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그 사유의 깊이와 문체의 정교함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올 수 없으리라 지레 꼽아두는 저서들이 있다. 그러다가 솜씨 좋은 번역자를 만나 근사하게 책이 나온 것을 보면 우선 번역자의 열정과 성실함에 기분 좋게 놀란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세월을 견뎌낸 고전의 가치에 한번 더 놀라고, 결국엔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가 새삼 돌아보게 되곤 한다. 최근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The Great Tradition, 김영희 옮김)을 접했을 때가 꼭 그랬다.

옮긴이 머리말에서 소개되었듯이 저자 F.R. 리비스(Frank Raymond Leavis)는 “서구 근대문명의 향방을 깊이 고민하면서 여기서 문학의 창조적 성취가 갖는 의미를 규명하는 데 평생을 바친 비평가”이며,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은 “영문학의 지형도를 바꾸어놓은” 그의 대표작이다.(5면) 이 저서의 핵심적인 주장은 영국소설의 역사에 하나의 위대한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전통이 제인 오스틴에서 시작되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 D.H. 로런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위대한 전통을 말하기 위해서 리비스는 과대평가된 작가와 작품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상대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작가와 작품은 적극적으로 재발견함으로써, 통상적으로 거론되어온 작가와 작품에 합당한 제자리를 찾아주고 그 중요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는 관대하고 두루뭉술한 평가를 남발하는 기존의 연구관행이 “문학사에 등장하는 이름이라고 해서 진실로 모두 중요한 창조적 성취를 해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라고 비판하면서 “진실로 위대한 소수”를 가려내는 엄정한 분별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19면)‘거품 걷어내기’이자‘옥석 가리기’에서 출발한 그의 비평작업은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통찰을 넘나들면서, 훌륭하고 완전한 소설은 진정 드물고 그렇게 드물게밖에는 만날 수 없는 문학적 성취에 힘입어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이 진화해왔음을 꾸준히 논증해간다.

리비스는 엘리엇, 제임스, 콘래드의 소설을 관통하는 활력이 “플로베르 식의 염오(厭惡)나 경멸이나 권태 따위를 드러내기는커녕 생생한 체험능력, 삶에 대한 일종의 경건한 개방성, 그리고 강한 도덕적 열정”과 통한다고 파악한다.(30면) 이들을 이어주는 고리는 삶에 대한 도덕적 진지함이며, 여기서 도덕적인 태도란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천착하고 대응할 때 자기탐닉에 빠지지 않고 비판적인 지성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리비스의 이런 생각은 소설장르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묻고 대답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그는 문학이 학자와 교수 집단에 의해 그저‘연구’되는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른바 “기술공학적·벤삼(Bentham)적 문명”(411면)으로 집약된 근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문화적 힘의 원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 문학공부란 어디까지나 최고의 작품을 끊임없이 분별해내는 일이고, 그것은 삶에 대한 성찰에 밀착한 치열한 사유로서의‘비평’에 속한다. 리비스의 문학비평은 작가론, 작품론, 소설론, 영문학사로서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품고 있으면서도 그 모두를 합한 것 이상의 독창적인 사유실험에 가깝다.

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소홀히 넘겨버리기 쉬운 진실이 새삼스럽게 환기될 때 느껴지는 긴장감, 그것이 지금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다시 읽는 보람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위대한 소설이란 삶에 대한 진정성을 품고 있다, 진정한 위대함이란 실로 드물다, 위대함을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곧 비평이고 거기에는 엄정한 분별력과 삶에 대한 책임이 개입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을 제대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 등등의 중요한 진실을 마주치는 순간의 긴장감 말이다. 특히 영국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리비스가 개별 작품의 특정한 구절을 인용하고 논평할 때 그의 비평작업이 얼마나 섬세한 분별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겠다. 한 작품을 거론하면서도 서술의 결이 다른 대목들을 집어내 비교하고, 그런 차이와 불균등이 작품 전체의 성취와 어떻게 연동하는지 세심하게 짚어내는 노회한 비평가의 눈썰미를 따라가는 재미가 각별하다. 설사 영국소설에 문외한이더라도 평소에 소설 읽기를 좋아하거나 비평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리비스가 하나의 작품에서 잘된 부분과 실패한 부분을, 한 작가의 작품들 중 잘된 작품과 미숙한 작품을, 여러 작가들 중에서 최고의 성취를 중첩적으로 가려내면서 무엇이 과연 진정으로 위대하고 창조적인 작품인지 끈질기게 질문하는‘실제비평’의 생생한 현장감을 맛볼 것이다. 나아가 리비스의‘비평’이 비단 영문학계 내부를 향한 문제제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우리가 처한 문화계 안팎의 현실에서 여러 문제들을 극복할 해법을 고민하는 데에도 영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처럼 논쟁을 몰고 다닌 고전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면, 반복해서 읽고 열린 자세로 자극받고 배우고 하는 과정 내내 고전의‘아우라’에 짓눌리기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로 대담하게‘소통’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리비스의‘비평’정신에 충실하려 애쓰는 한, 이 책과‘소통’하려는 독자 입장에서 아쉬움 한자락 없을 순 없다. 그의 비평사전에 등재된 어휘들, 이를테면 진지함, 도덕, 자기탐닉, 성숙 등의 핵심어들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정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비평의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처럼 쓰일 때가 그렇다. 예컨대 리비스는 엘리엇의 어떤 대목들을 거론하면서 작가가 예술적 절제를 잃고 여주인공과의 거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엘리엇이 여주인공에 몰입할 때 균형감각을 잃는다든가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든가 아이러니의 날카로움이 무뎌진다는 식으로 비판하고 이를 작가의‘미성숙’의 사례로 지목한다. 하지만 엘리엇이 여주인공에 몰입할 때 나타나는 서술상의 변화를 꼭 퇴행이나 일탈의 관점에서 미성숙으로 단정할 근거는 특정한 서술방식을 보편적인 모델로 전제하는 리비스의 사유의 틀 안에서만 유효할 수도 있다. 엘리엇의 몰입을 예컨대 여성인물을 재현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개척한 시도로 새롭게 해석한다면, 리비스처럼‘미성숙’을 집어내는 일이 그리 당연하고 정당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리비스의 독법이 틀렸다거나 리비스가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이론적 세례를 받을 수 없었던‘구세대’비평가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리비스의 독법이 위대한 전통을‘구성’하고‘세우려는’그의 궁극적 취지의 산물이라는 면을 지적하는 것이다. 리비스의 위대한 전통은 언제나‘위대한 전통이라는 것’, 즉 인위적으로 구성된 역사적 산물로서만 존재하며 그런 의미에서만 중요하다. 다시 말해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호명’되고‘의미화’되는 기표와 같다. 자신의 시대가 처한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리비스는 위대한 전통이라는 강력한 기표를 성공적으로 의미화한 셈이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위대한 전통이 있느냐 없느냐, 그 계보에 누구의 무슨 작품을 어떤 식으로 넣고 빼느냐를 두고두고 따지는 일이 아니라,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 그리고 작동하지 않는 지점은 어디인지 면밀하게 살펴보고 거기서부터 문학공부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것이 리비스를 (그가 콘래드에게 바친 존경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오로지 “자신의 시대 속에서, 그 시대에 대해”(51면, 강조는 원문) 치열하게 사유했던 비평가로 온당하게 대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