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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이주영

이주영 李柱渶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1986년생.

leejy14@hanmail.net

 

 

 

카나리아 핀 식탁

 

씨놉시스

근주는 언제나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형옥은 남편이 짐을 싸지 못하게 하느라 다툼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렇게 16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결국은 이혼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오는, 둘이 함께하는 마지막 길에서 근주와 형옥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아리는 부모의 사고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집으로 찾아온 근주의 내연녀 서희를 맞이한다. 아리는 상황을 익히 눈치채고 있었기에, 서희가 아빠의 짐을 싸가도록 허락하지만, 둘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게임을 하는 척하며 서희를 지켜보던 아리는 서희가 싸는 짐이 모두 자신과 관련된 물건이라는 것에 불쾌해하고, 아빠와 엄마가 가장 아끼는 식탁을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서희를 견제한다. 이때 집달관들이 들이닥쳐 집이 차압되었음을 알리는데, 감정이 격해진 아리와 서희는 언성을 높이고 만다. 영원히 그림자만 바라보는 처지인 서희는 아리의 철없는 시위를 책망하고, 아리 역시 가족의 부재를 서희에게 질타한다.

식탁을 포기한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서희는 근주의 짐을 처분하면서 허망함에 눈물을 쏟는다. 짐을 싸는 행위는 근주와 형옥의 부부애를 확인하는 과정의 일부였던 것이다. 비로소 근주의 진심은 바로 아내 형옥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서희는 불감당한 절망과 함께 죄책감에 휩싸인다. 누구보다도 아리의 심정을 잘 헤아리는 서희는 아리에게 때늦은 용서를 구하고 장례식장에 함께 갈 것을 부탁한다.

 

*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등장인물

근주(39), 아내 형옥(42), 내연녀 서희(32), 딸 아리(16), 그외 음식배달원, 집달관 1, 2, 3.

 

무대

1993년, 8평 남짓의 지하 단칸방. 작은 간이씽크대. 컵, 그릇, 수저, 칫솔 따위가 거의 두개씩만 있다. 책들도 몇권 쌓여 있다. 행어에 잡다한 옷들이 일렬로 빽빽이 걸려 있다. 반듯이 개켜둔 이불더미. 베개도 쿠션도 방석도 심지어 화분도 두개씩이다. 중앙에는 다리가 짧은 나무식탁이 있고, 그 위에 라디오가 올려져 있다. 음악채널에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온다.

 

커다란 남방에 반바지 차림인 형옥, 식탁에 주저앉아 책장만 넘기고 있다. 이따금씩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거나 허밍을 하기도 한다. 근주,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가방을 열어 앞으로 멘다. 방을 휘젓고 다니며, 두개씩 놓인 물건들 중에서 하나씩만 꼭꼭 배낭에 처넣는다. 시위라도 하는 양 행동이 과장되고 거칠다. 뒤돌아 형옥을 보고 한숨. 근주, 행어에 있는 옷들 중 일부를 통째로 빼낸다. 배낭에 짓이겨 넣는다. 잘 들어가지 않아 끙끙댄다.

 

 

형옥 (조용히) 옷걸이는 빼고 가져가라.

(근주, 잠깐 멈칫한다. 그대로 배낭을 들고 뒤돌아서 나가려고 한다. 형옥, 벌떡 일어나서 근주의 가방을 낚아챈다. 근주도 뺏기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인다.)

형옥 옷걸이는 빼고 가라고! 내 돈 주고, 내가 산 거거든!

근주 그게 중요하냐, 지금!

형옥 내 것, 네 것은 확실히하자며? (밀고 당기면서) 내가 처음 이사할 때부터 옷걸이 필요하다고 했니, 안했니? 그때 너 분명히 거추장스럽다고 했다. 옷은 대충 벗어젖히면 그만이라면서? 뻔히 여기다 벗어놓고, 저기다 던져놓고. 몇달을 구기고 사나 보다가, 죽어라고 사다 나르고, 걸고, 다리고, 개킨 게 누군데? 왜? 이제 와선 아니니?

근주 알았다, 알았어. 놓고 가면 되는 거지?

(근주, 가방을 뒤집어 모조리 쏟아버린다. 신경질적으로 일일이 옷걸이를 빼내 던진다. 형옥, 쏟아진 물건 중 베개를 꼭 껴안는다. 쿵쿵 발을 구르며 이불더미 쪽으로 가서 남겨진 베개를 근주에게 힘껏 내던진다.)

형옥 이게 네 거잖아! 왜 내 걸 가져가?

근주 (일어서며) 그거나, 이거나!

형옥 (던져진 베개를 다시 던지며) 네 거! 네 거!

근주 참 내. (컵 하나 들고) 이건 내 거 맞지? (컵을 일부러 깨버린다)

형옥 그 옷 내가 사준 거지? (근주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려 한다) 벗어!

근주 끝까지 정말.

형옥 끝이니까 이러지, 시작일 때 이랬니? 벗어, 당장!

근주 벗으라면 못 벗을 줄 알아?

형옥 (짐을 발로 차며) 할 말 있어? 따지고 보면 다 내 지갑에서 나온 거야.

근주 (웃통을 벗어던지며) 됐냐? (때마침 시끄럽게 울리는 라디오를 내려놓고 식탁을 어깨에 멘다) 이건 나 실습 나가서 처음으로 만든 거야, 맞지?

형옥 (식탁 한쪽을 붙들고 실랑이) 나 때문에 만든 거지. 내가 한 디자인으로.

근주 재료도 순전히 내가 샀다.

형옥 말은 바로 해. 공구는 내 거였어.

근주 이러지 말자. (형옥의 손을 잡고 타이르듯) 누나. 응?

형옥 누우나? (식탁을 세게 밀자, 근주 넘어져버린다) 나가! 나가라고!

근주 (넘어진 채) 나갈 거야!

형옥 이럴 거면 왜 들어왔어?

근주 (가방에 넣었던 짐들을 신경질적으로 갖다 놓으며) 가지든, 버리든, 팔아먹든 알아서 해.

형옥 너 걔 좋아하니? 사랑해? (약간 울먹)

근주 그래서 전화했어? 걔한테 물어보려고? 하루에도 전화통이 수십번씩 울려대서 아무것도 못하겠대. 숨이 턱턱 막힌대.

형옥 나도 숨이 막혀. 나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

근주 ……걔 이제 고1이야. 공부 좀 도와준 거 가지고 왜 이래.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사는 애, 안쓰럽지도 않냐? 누난 다 가지고 있잖아. 부모님도, 멀쩡한 집도, 번듯한 직장도……

형옥 그래, 얼마나 궁상맞고 불쌍한지 걔 얼굴이나 보려고 전화했다, 왜?

근주 걔가 무슨 죄야? (한숨)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형옥 근데 어디서 반말이야, 이게? 누나라며? 누나라며! (근주에게 달려들어 때린다)

근주 (형옥을 붙잡고) 같이 산 것도 일년이야! (가방에서 짐을 주워 담으며) 좀 좋게 끝내자. 서로 원망 안하게.

형옥 (짐을 도로 빼내며) 우리 산 거 일년은 안됐어. 좀 나쁘면 어때?

근주 나가는 건 너 때문이잖아. (짐을 내려놓는다)

형옥 나가는 건 너뿐이야! 뭘 그렇게 챙기려고 들어, 꼴사납게.

근주 (식탁을 들고) 이것만 좀 양보해. 다른 거엔 미련 하나 없으니깐.

형옥 너한테만 소중하니? 나한테도…… (엉겁결에 식탁을 쳐서 떨어뜨리자 다리 한두개 부서진다)

근주 (부서진 식탁을 보고) ……됐다.

형옥 (식탁을 보고 주춤하며) 수도 고장났어. 고쳐놓고 가.

근주 에이에스 불러.

형옥 오늘 일요일이야.

근주 좀 참아, 그 정돈.

형옥 싫어!

근주 ……간다.

형옥 가져갈 것 없어서 좋겠다! 몸만 나가면 된다 이거지.

(근주, 그대로 나가려는데)

형옥 그럼 네 애는? (사이) 그것도 버리고 가니?

(근주, 쳐다보고 자리에 주저앉는다)

 

암전.

 

2007년, 42평 정도의 가정집. 왼쪽으로 1/5 정도 경계만 거실이고 나머지는 안방(일부)만 보인다. 무대 중앙에는 침대, 그 옆으로 장롱과 거의 비어 있는 책장, 장식장이 있다. 가족사진도 걸려 있다. 무대 앞쪽으로 낡은 식탁(전에 있던 앉은뱅이)이 있고, 그 위에는 노트북이 있다. 식탁은 다른 가구들과 이질적이고, 식탁을 제외한 가구들은 대체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바닥에는 빨래 따위가 널브러져 있고 쓰레기통도 넘쳐 있는 등 어수선하다.

단정한 교복 차림의 아리, 가방을 거실에 던져놓고 안방으로 뛰어들어 온다. 조끼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진다. 침대에 누웠다 앉았다 한다. 이어폰을 꽂은 채 방방 뛰기도 한다. 노트북을 켠다(LCD화면은 아리를 향해 있어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리, 게임을 한다. 극 내내 이따금씩 게임 효과음이 울린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아리, 신경도 안 쓴다. 초인종이 두어번 더 울린다. 그제야 아리, 고개를 들고 이어폰을 뺀다. 이어지는 초인종 소리.

 

아리 (거실을 향해) 문 열렸어요.

(깔끔한 검정색 정장 차림의 서희, 거실에 들어선다. 한 손엔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에는 새장을 들고 있다. 서희, 안방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문을 두드린다.)

아리 (짜증내며) 아, 열렸다고요!

서희 안녕하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리, 흘깃 보고 다시 게임에 열중한다)

서희 아리양 맞죠?

(아리, 고개만 끄덕인다)

서희 아빠 대신해서 짐 몇가지 챙기러 왔어요. (새장을 아리 옆에 내려놓고 캐리어를 연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놀랐죠? 나는 임서희라고 하고요, 아리 아빠네 회사 직원이에요.

아리 (건성으로) 아버지, 회사 그만뒀는데요.

서희 그래서 온 거예요. (수첩을 꺼내들며) 할머니는 안 계시나요?

아리 장례식장 간다고요, 오늘밤은 거기서 자고 온댔어요.

서희 그럼 아리양한테 양해 좀 구할게요. 일일이 확인하면서 챙겨갈 테니. 괜찮아요?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안방 맞죠? (대답이 없자) 벽지가 이런 색이구나……

(서희, 결혼사진 앞에서 잠시 멈춘 뒤, 기웃거리며 조심스럽게 안방을 살펴본다. 아리의 게임 소리에 맞춰서 새소리 들린다. 아리, 새장을 유심히 쳐다본다. 서희의 옷깃에 스쳐 기념품 하나가 떨어진다. 서희, 얼른 줍다가 아리를 돌아본다.)

서희 (변명하듯) 아, 카나리아예요. 예쁘죠? 한쌍이 붙어 있어야지 좋은 소리를 낸대요. 혼자 있을 때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장롱을 보고) 이 장롱, 아빠가 쓰셨던 것 맞죠?

아리 (쳐다보지도 않고) 네.

서희 한번 열어볼게요.

(서희, 장롱을 열어보는데 옷더미가 우르르 쏟아진다)

서희 (옷더미를 다시 주워 넣으며) 어머, 죄송해요. 어떡해……

아리 (아래위를 훑어보며) 몇살이에요?

서희 저요? (사이) 서른두살이요. 안이 꽤 복잡하네요. 정리도 안돼 있고. (허겁지겁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살펴본다) 카키색이랑 남색 넥타이, (빨래더미처럼 엉켜 있는 옷가지들) 와이셔츠 스트라이프가…… 아, 여기 있구나. (캐리어에 챙겨 넣는다)

아리 근데 왜 그래요?

서희 (잠시 행동을 멈추고) ……못 들었나 보네요. (허겁지겁) 아, 어머니랑 미리 통화했었는데. 셔츠랑 핀 같은 거 몇가지만 가져가면 되니까, 신경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요.

아리 그거 말고요, 아줌마.

(서희, 바라본다)

아리 왜 자꾸 존댓말 써요, 나한테?

서희 네?

아리 지금도 그러잖아요.

(서희, 바라본다)

아리 닭살 돋게.

서희 아…… 그럼 말 놓을까? 아리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 많이 들었어…… 모르는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기분 나빠할까 봐, 걱정했는데. 먼저 말해주니 고맙네. 빨리 싸서 나갈게.

(아리, 다시 게임을 한다)

서희 집이 꽤 넓네. 생각했던 것보다…… (수첩을 보며) 넥타이핀이라…… (옷더미를 헤집으며) 이거 아빠가 자주 쓰시니? (아리 앞으로 가서 일일이 다 보여주면서) 아님 이건?

아리 (게임을 하며) 몰라요.

서희 큐빅이 일렬로 박힌 거 찾고 있는데.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리네.

아리 내가 그런 거나 붙들고 있겠어요?

서희 그렇지? (수첩을 확인하며) 밑에 있나…… 밑에 좀 살펴볼게.

(서희, 장롱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아리, 게임을 하면서 노트북 콘쎈트 코드를 슬쩍 빼버린다.)

서희 휴우, 이건가. (넥타이핀을 캐리어에 넣고 리모컨을 들어 보이며) 텔레비전 리모컨 맞지?

아리 (잠깐 돌아보고) 네.

(서희, 리모컨을 잘 싸서 캐리어에 넣는다)

아리 잠깐만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서희 (미소지으며) 포장해서 가져가려고.

아리 리모컨을 왜요?

서희 이게 꼭 필요하시다네. 손때가 많이 묻었나 봐.

아리 TV도요?

서희 TV는 빼고.

아리 그럼, 뭘로 켜요? 저거 음량버튼 고장났단 말이에요.

서희 같은 걸로 사서 부쳐줄게, 오늘 안으로.

아리 ……그것만 달랑 어디다 쓰게요?

서희 나야 모르지. 가져오라셨으니까.

아리 아버지가요?

서희 응.

아리 짜증나게, 진짜! 아, (한숨 쉬며) 알 수가 없다니까, 하여튼.

서희 소중히 여기셨겠지.

아리 (비아냥거리며) 그걸요?

서희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챙겨오라고 하셨을까?

아리 (기지개를 켜며) ……낼모레면 마흔이래요, 우리 아버지.

서희 (미소지으며) 그게 뭐?

아리 (하품하며) 늙었잖아요. 조금 있으면 노망도 날 걸요. 맨날 골골댔으니까.

서희 걱정했구나.

아리 (정색하며) 내가요?

서희 (장식장을 가리키며) 이 시계들 다 쓰는 거니? (두개를 대보고 비춰보더니) 다들 새거네. 선물받으셨나? 메탈이 아빠 취향 같긴 한데, 디자인은 가죽이 더 나은 것 같고.

아리 모른다니까요.

서희 잘못 고를까 봐……

아리 (게임을 하며) 아무거나 가져가도 금방 싫증낼걸요. (흉내를 내며) 바람난 종잇장처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양반이라 대충 무시하면 알아먹는다고요, 아버지. (돌아보며) 엄마가 그랬어요.

서희 ……가죽이 낫겠지?

아리 둘 다 가져가든가요. 어차피 이제는 필요없을 테니까.

(서희, 캐리어에 집어넣는다)

아리 (혼잣말로) 역시 노망이야, 노망. 시계는 죽어도 안 차면서 웬……

서희 아끼느라 안 차셨을 수도 있잖아.

아리 (퉁명스럽게) 알레르기 있대요, 시계.

서희 알레르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서희, 황급히 가방 쪽으로 가서 소리 죽여 전화를 받는다. 통화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서희 제가 잠시 후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참,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줄래? 번호 적어줄게.

아리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서희 만약이라도. (쪽지에 적어 건넨다)

(아리, 본체만체 계속 게임에 열중한다)

서희 (책장을 보다가) 너무 높네. 안 닿아.

아리 아, 죽었잖아요. (원망스런 말투로) 아줌마 때문에!

서희 (까치발을 하다 뒤뚱거리며) 미안.

아리 (한숨 쉬며) 거실에 의자 있어요.

(서희, 안방을 나가서 의자를 하나 가져온다. 사진첩을 내려 먼지를 떤다.)

서희 (조심스레) 저기, 아리야. 아빠가 에버랜드에서 찍은 사진만 빼오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아리 근데요?

서희 내가 거길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네.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아리 놀이동산이 다 똑같지, 뭐. 롯데월드는 가봤을 거 아니에요?

서희 안 가봤어.

아리 TV에서는 봤잖아요?

서희 ……못 봤는데.

아리 (쳐다보고 한숨 쉬며) 아, 여기 봐요. 척 보면 몰라요? 딱 유치하게 생겼잖아요.

서희 아, (사진을 보면서) 이건 아리야?

아리 그 옷 입은 건 다 거기서 찍은 거예요.

서희 이건?

아리 그건 핑크색이잖아요. 여기 빨간색! (게임을 하며) 그날만 입고 버렸으니까, 이거 보이면 빼가요.

서희 잘 나왔네, 너도, 아빠도. (사이) 어머니도.

아리 잠깐! (돌아서 사진첩을 뺏어들고) 이거 거의 다…… (뒤적여보고) 내 사진이잖아! (쏘아보면서) 내 사진을 왜 가져가요? 기분 나쁘게.

서희 (수첩을 보여주며) 아빠 글씨 맞지? 어머니도 허락하셨어.

아리 뭐라고 해요, 엄마가?

서희 당장이라도 싸그리 싸 짊어지고 가버리라고…… (사이) 장미꽃도 에버랜드인가?

아리 (짜증스럽게) 그냥 대충 가지고 가면 안돼요? 이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도둑이 다 쓸어갔다, 그런 셈 쳐요. 맘 편하게.

서희 ……없어진 게 아니니까 그럴 수 없잖아. 그대로 남아 있는데.

아리 아, 또 죽었잖아요! (일어서며) 말 좀 그만 시켜요, 제발.

(아리,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서희, 멋쩍게 서 있다가 침대 밑을 보느라 낑낑거린다. 잠시 후 아리가 들어오고, 얼굴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아리, 자리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서희, 침대 밑에서 빠져나온다.)

서희 (허리를 두드리다 아리를 보고) 너, 울었니?

아리 아니요.

서희 세수했어?

아리 아니요.

서희 어디 아프니?

(아리, 고개를 숙인다)

서희 나 때문에…… 그래?

아리 아니라니까요! (웅크리고 앉아서 배를 틀어쥔다) ……나흘째예요.

서희 뭐가?

아리 ……똥을 싸긴 싸야 하는데, 싸면 똥구멍이 찢어질 것 같고, 참으면 아랫배가 터질 것 같아요. 이도저도 못하겠으니 답답해 죽겠어요. 잠도 안 오고, 배만 아프고. 아, 짜증나.

서희 약은 먹었니?

아리 약도 안 들어요. (배를 잡고 뒹군다)

서희 괜찮아?

아리 변비 걸려본 적 있어요?

서희 있을걸.

아리 요새는요?

서희 요새는 괜찮아.

아리 그럼, 그런 표정 하지 마요.

서희 어떤?

아리 다 안다는 얼굴.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배달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리, 엉거주춤 일어나 배를 잡고 걸어나간다. 서희, 그사이에 식탁을 만져본다. 곧바로 아리, 배달원을 안방까지 끌고 들어온다. 서희, 무안한지 식탁에서 떨어진다.)

아리 이쪽이에요.

배달원 (음식을 내려놓으며) 만팔천원입니다.

(아리, 노트북을 내려놓고 식탁 위에다 음식을 놓더니 말도 없이 먹기 시작한다)

배달원 만팔천원이요. 삼선짬뽕이랑 탕수육. (서희를 바라본다)

(서희, 주춤거리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배달원, 돈을 받고 퇴장한다.)

서희 배고팠나 보네. (아리에게 다가가서) 근데 먹어도 돼? 배 아프다며?

아리 (먹는다) 먹어야 살죠.

서희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지. 참, 이 정도 싸이즈에 하드케이스로 된 일기장 본 적 있……

(아리, 쏘아본다)

서희 먹어, 계속.

(서희, 이곳저곳 다 뒤지다가 일기장을 찾아들고 일일이 책장을 넘겨본다. 중간 부분의 종이를 박박 찢어낸다. 아리, 입맛을 다시며 게걸스럽게 먹다가 종이 찢는 소리에 놀라 돌아본다. 서희, 뜯어낸 종이를 하나씩 구겨서 캐리어에 넣고, 다시 뜯고 구기기를 반복한다.)

아리 뭐하는 거예요? 왜 찢어요?

서희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가져가야 해서. 2002년도 것만 필요하다고 하셨어.

아리 구기기까지 해서 가져오래요?

서희 다 적힌 대로 (수첩을 보여주며) 하는 거지. 내가 원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아리 ……말 잘 듣네요, 나보다 더.

서희 간단한 심부름인데, 뭐.

아리 (먹으며) 몰랐죠? 우리 아버지 좀 아픈 데가 있어요.

서희 어디?

아리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빙빙 돌린다) 여기.

서희 (잠깐 웃고, 캐리어에다 일기장을 쑤셔넣는다) 마음도 아프실 거야.

(서희, 결혼사진이 든 액자를 내리더니 사진을 빼내고 액자만 낑낑대며 캐리어에 넣는다)

아리 맞죠? 내 말이. (서희의 모습을 보고 킥킥거린다)

서희 (멋쩍어하며) 사정이 있으시겠지.

아리 사정은 무슨. 허구한 날, 짐이나 쌌다 풀었다 쌌다 하는 게 그 인간 전공인데.

(서희, 아리를 바라본다)

아리 ……라고 엄마가요, 그랬다고요.

서희 (허리 한번 펴고) 자주 그러셨어?

아리 일년에 삼백일 정도. 명절이나 제사는 쉬어줘야 되니까. (먹다가) 근데, 그 사진도 같이 가져가면 안돼요? 그렇게 놔두면 놓을 데도 없어요.

서희 사진은 꼭, 빼두고 오라고 그러셨어.

아리 엄마가 있었으면 뭐랬으려나. (게걸스럽게 먹는다)

서희 뭐라고 하셨을 것 같은데?

아리 (까르르 웃어젖힌다) 하하. 비, 비밀이에요. 하하.

서희 ……저기 미안한데, 그 마우스도 가져가야 될 것 같은데.

아리 네? (사레 들려서) 마우스만요? 또?

서희 응. 보, 볼래? (수첩을 보여준다)

아리 장난쳐요? 난 어떡하라고요, 자꾸! 이 게임 마우스로 해야 하는 거예요!

서희 (캐리어에서 새 마우스 박스를 꺼내며) 미리 사왔어. 나도 좀 의아해서.

아리 (받아들고) ……노트북은 필요없대요?

서희 (마우스를 캐리어에 넣으며) 얘만 간택되었나 봐.

아리 (뜯어서 코드를 연결해보고) 이렇게 하는 건가.

서희 광마우스야. 전보단 잘될걸.

(서희, 아리가 한눈파는 사이 계속해서 식탁을 흘깃흘깃 바라본다)

서희 식탁 좀 뒤집어봐도 될까?

아리 다 먹고요.

서희 고마워. 이래저래.

아리 ……쟤는 몇살까지 살아요?

서희 (새장을 돌아보면서) 아. 메리?

아리 메리? 앵무새랑 비슷한 건가?

서희 메리는 내가 지은 이름이고, 카나리아 종이야. 흐음. 관리하기 나름이지. 정성껏 보살피면 수명보다 오래 살고, 아니면 바로 죽기도 하니까.

아리 어디 사는데요?

서희 쟤? 숲 속에 살았겠지, 아마.

아리 말고요, 아줌마.

서희 아, 양천구 신정동. 여기서 좀 멀어.

아리 얼마나 걸리는데요?

서희 한시간 반쯤.

아리 멀미했겠네요.

서희 아니.

아리 아줌마 말고요.

서희 ……실은 이 앞에서 산 거야.

아리 왜요?

서희 새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리 무슨 과목 가르쳐요?

서희 수학. 아, 어떻게……

아리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어요…… (사이) 아!

(서희, 놀라 바라본다)

아리 생강 씹혔어. 퉤퉤. 퉤퉤! (다 뱉어낸다)

서희 물 갖다 줄까?

아리 없어요, 물. (뱉어내며) 이름이 뭐라고요?

서희 임, 서, 희야.

아리 아니, 쟤요.

서희 이름은 메리, 성은 크리스마스. 나는 이상하게 크리스마스만 가까워지면 기분이 들뜨고 설레더라. 일년 내내 12월 25일만 기다리거든. 뭉클해지는 거 있잖아. 근데 아직은 여름이니까, 성은 생략했지. 씸플하게. (아리가 듣지 않자) 맛있니?

아리 (젓가락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중이에요.

서희 뭘?

아리 그릇 가지러 오는 사람 머리통에다 던져버릴까 말까요.

서희 별로면 남겨. 억지로 먹으면 더 안 좋아.

아리 알고 있어요.

서희 근데도 다 먹게?

아리 먹어야 싸죠. 안에 있는 걸 밀어내려고 먹는 거예요, 억지로.

서희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어.

아리 점심 먹었어요?

서희 어, 좀 전에.

아리 말고요, 쟤.

서희 ……직접 물어봐.

아리 네?

서희 방금 사서 나도 못 물어봤어.

아리 쳇. (콧방귀 뀌다가, 탕수육 부스러기를 새장에 넣어주고) 아, 배부르다. (눕는다)

(아리, 서희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다가 일어나서 서희를 지나 장롱 뒤에서 소주병을 꺼내온다. 앉은 자리에서 꼴깍꼴깍 넘긴다. 서희, 장식장을 뒤지다 아리를 돌아보고는 멈칫한다.)

아리 술 먹는 거 첨 봐요?

서희 아, 아니.

(아리,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를 몇번 켠다. 아리가 불 붙은 담배를 한모금 빤다. 서희, 침대에 앉아 아리를 지켜본다.)

아리 왜요? 술 마시면서 담배 피는 것도 처음 봐요, 아줌마?

서희 네가 그러는 건 처음 보지.

아리 우리 오늘 처음 봤잖아요.

서희 맛있니?

아리 짱깨보다는요.

서희 다행이네. 안 써?

아리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도.

서희 난 이상하게 술만 마시면 귀에서 물이 나오더라. 아리는 안 그래?

아리 (담배연기 때문에 기침하며) 말이 돼요?

서희 진짜야. (술을 뺏어 먹고) 한번 만져볼래? (귀를 내민다)

아리 (서희를 밀치고, 술병을 빼앗는다) 싫어요.

서희 처음에는 내가 무슨 요정이라도 된 줄 알았어. 그런 거 있잖아, 어쩐지 나만은 특별해서 남들과는 다른 거. 근데 병원에 갔더니 글쎄 림프관이 터졌다는 거야. 어찌나 허무하던지. (웃는다) 재밌지?

아리 (담뱃불을 끄느라 애를 먹는다) 열불 터지게 재밌네요.

서희 ……모범생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네.

아리 공부는 잘해요…… 수학 빼고.

서희 알고 보면 수학이 제일 쉬워. 얼마나 정직하니. 명쾌하고, 단순하고. 답이 딱 떨어지잖아.

아리 삭막해요.

서희 이성적인 거지.

아리 이해가 아니라 계산을 해야 하잖아요.

서희 그러니까 쉽지.

아리 그러니까 어렵죠. 한글과 숫자의 차이점이 뭔 줄 알아요?

서희 뭔데?

아리 한글은 국내산, 숫자는 수입산.

서희 (웃으며) 일리가 없진 않네.

아리 좀 비켜요. 집중 안돼요.

서희 정말 미안한데…… 밑을 봐도 될까? (식탁을 내려다본다)

아리 이번 판만 하고요.

(초인종 소리)

아리 (밖에다) 잠시만요! (서희에게) 건들지 마요. 알았죠? 또 죽으면 안된단 말이에요.

(아리, 뛰어나간다)

 

(후략)

 

 

 

심사평

 

올해 희곡부문의 응모작은 47편으로 수적인 측면에서나 깊이에서 지난해보다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참신한 상상력이나 가치관을 연극적으로 형상화한 몇편의 수작이 눈에 띄었고, 새로운 세대의 연극언어를 만났다는 설렘을 안겨주었다. 응모작 중 우리가 주목했던 작품은 6편으로, 「미완성교향곡」 「물을 꼭 내려주세요」 「일구야 놀자」 「카나리아 핀 식탁」 「테레비씨 고장나다」 「陷, 위험한」이다.

「미완성교향곡」은 기성세대와 다른 독창적인 캐릭터를 선보이며 자기 세대만의 혼란과 정체성 찾기를 담은 매력있는 작품이지만, 희곡 문법을 체득하지 못해 상황이나 장면이 지나치게 분절되어 있고 씨나리오에 가깝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일구야 놀자」는 반대로 연극적 문법은 탄탄했지만 고문실을 배경으로 삼은 설정이나 작품의 내용이 구태의연해서 신선함이 떨어졌다. 「테레비씨 고장나다」는 가족의 해체와 가장의 위기를 대중매체와 연결시킨 작가적 상상력이 흥미있었지만 관객에게 정서적 울림이나 통찰력을 안겨주기에는 소품이었다. 삼국시대가 배경인 「陷, 위험한」은 성(性)과 권력의 관계를 조명한 야심작인데, 시 한편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꾸려내는 솜씨가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성에 집착하여 보편적 공감대를 얻기에는 무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이 가장 주목했던 작품은 「물을 꼭 내려주세요」와 「카나리아 핀 식탁」이다. 「물을 꼭 내려주세요」는 오랜 방황에서 돌아온 중년의 아들과 어머니의 해후를 담은 작품인데, 사소한 일상의 풍경 속에 드러나는 인생에 대한 성숙한 시선과 섬세함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섬세함이 과연 연극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인지 심사위원들은 고민했고, 클로즈업이 불가능한 연극의 본질을 작가가 좀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올해의 수상작은 이주영의 「카나리아 핀 식탁」으로 결정되었다. 이 작품은 불륜이 소재지만 그것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가운데, 피해자인 딸과 가해자인 정부가 서로 알아가고 화해하는 과정을 익살스러우면서도 잔잔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상투적인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적대적 관계를 무리없이 화해시키는 역량이나 진행과정에서 계속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극작술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감상을 걷어내려다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진 딸의 모습이나 소녀 취향처럼 느껴지는 표현들은 극복해야 할 지점이다. 수상을 축하드리면서 앞으로 많은 정진을 바란다.

사족 같은 이야기지만 소재 빈곤에 대해 언급하자. 연극은 광장의 예술이고 다양한 취향과 관심을 가진 관객집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대부분의 후보작들이 개인적인 소재에만 함몰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젊은 작가들이 사회로 관심의 폭을 넓혀줄 것을 당부드린다.

박근형 김명화

 

 

 

당선소감

 

들뜬 마음에 일양일 동분서주하며 라면만 먹고는 탈이 났었습니다. 한밤중까지 끙끙 앓고 있는데, 베란다 맡으로 무언가가 흉물스럽게 흩날리고 있더군요. 첫눈이었습니다. 칠흑을 가르는 흰 눈. 고공에서부터 폐부에 내리꽂히는 찬 기운, 그리고 살갗에 닿는 눈발 따라 점점 높아지는 미열. 그 상반된 풍경이 참으로 낭만적이었습니다. 치열한 겨울을 만끽할 수 있어 온통 설레기만 하는 12월, 그중에서도 올해의 12월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축하인사를 받을 때마다,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낯부끄럽고 무안해서 어디론가 꽁꽁 숨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아직도‘수상소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이 마음 변치 않게 간직할 수 있도록 앞으로 한줄 한줄 정성스럽게 글을 쓰겠습니다.

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