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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장르들과 접속하는 문학의 스펙트럼

 

 

박진 朴辰

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양·특성화대학 교수. 저서로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음. libra3061@ssu.ac.kr

 

 

1. 장르문학 vs ‘본격문학’?

 

장르문학(장르서사)은 추리소설, 판타지, SF등과 같이 각각의 장르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직관적으로 공유하는 일련의 관습들(conventions)과 규약들(protocols)로 이루어진 서사양식을 말한다. 장르문학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현실을 직접 반영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장르의 세계, 또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작품들 전체를 자기반영적으로 비춰 보인다.

이 글의 관심사는 장르문학(장르서사)이 그 경계를 넓혀가면서‘장르 아닌 것들’과 결합하는 양상, 그중에서도 장르적 요소들이‘본격문학’안으로 활발하게 유입되어 장르문학과‘본격문학’이 혼성되는 양상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장르문학의 영역을 공간적으로 구획할 수 있다는 생각,‘본격문학’의 영역 또한 그러하다는 생각, 장르문학은 본질적으로‘본격문학’이 아니며‘본격문학’은 장르문학이 아니라는 생각 등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이 모든 전제들은 의심스럽고 자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논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관례적·제도적인 경계와 직관적인 구분법을 존중하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어쩔 수 없이’이다.

이보다 좀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장르문학의 맞은편에 놓인 문학을‘본격문학’이라 명명하는 일과 관련된 전제들이다.‘본격문학’이라는 말에 새겨진 가치 개념에 딸려나오는 전제들, 그러니까 장르문학은‘본격문학’에 미달한다거나‘본격문학’은 장르문학보다 더 수준 높은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이 그것이다.1 이같은 고정관념은 너무도 완강하고‘문학 하는’사람들에게서는 더욱 그러해서, 우리는 종종 의심의 여지 없이‘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가치론적으로 위계화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최근‘본격문학’작가들이 장르적 관습을 차용하거나 장르소설과 유사한 작품들을 내놓는 경향은 아무래도 불길하고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소설을 옹호하고 그 의의를 밝혀주려는 노력이 흔히 장르문학(장르서사)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먼저 편혜영(片惠英)의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에 대한 언급이다. 이 책의 해설에서 이광호(李光鎬)는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불가해하고 기이한 사건들”은 “대중적인 장르 안에서”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고 결국‘설명 가능한’세계로 귀결”됨으로써 “‘나와 우리’가 범죄의 참혹한 죽음에 연루될 수 있다는 공포와 죄의식”에 “면죄부”(246면)를 주었을 거라고 말한다. 반면에 편혜영 소설은 “이런 스릴과 면죄부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대신에, 시체들이 출몰하는 현실의 악몽을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인간의 문명세계 전체를 지옥도로 그려낸다”(245~46면)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측면은 스플래터(splatter)와 고어(gore)적인 장르서사가 최종적으로 가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피범벅이 된 시체들과 절단된 신체와 쏟아져나온 내장 등을 눈앞에 들이대는 장르서사들, 특히 아무런 죄도 없고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무차별하고 몰도덕한 폭력의 희생자로 누군가가‘선택’되는 이야기들은 얄팍한 피부 안에 우리 자신이 감추고 있는 온갖 구역질나는 것들과 우리를 대면하게 한다. 그 질척질척한 무정형의 덩어리들은 이성과 문명이 억압한 대지의 내장, 원지적(原地的) 자연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하면서 삶과 죽음, 문명과 야만을 안전하게 분리해놓으려는 인간의 모든 기획을 조롱한다. 그것은 꽤나 꺼림칙한 일인데,‘근사한’장르서사는 바로 이 지점까지 우리를 억지로 데리고 간다.

SF장르의‘침공’으로부터‘본격문학’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발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열림원 2004)이 SF라기보다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을 지향한다는 데 안도감을 표하거나(성민엽·최수철의 심사평),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지구적, 문명적 문제들의 상상적 연속-확대상으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을 들어 “상대적으로 공상적이고 오락적인” SF와의 차별성을 언급하는 견해(김예림의 해설, 348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백민석(白旻石)의 『러셔』(문학동네 2003)를 영화 <매트릭스>와 대조하면서 이 소설이 “단순히 앙상하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의 뼈대에 영웅의 활약상을 덧칠한 싸이버펑크 활극만은 아”님을 역설하는 견해(이수형의 해설, 188면)도 있다. 오현종의 「창백한 푸른 점」(『문학동네』 2007년 겨울호)이 “가상의 세계나 과학적 이론으로 제시된 개념 공간을 유영하는 쾌감이 아닌 현재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객관화”하는 데 주력하는 소설이기에 SF와는 구별된다는 주장(강유정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체, SF(Symptom Fiction)」, 『작가세계』 2008년 봄호 251면)도 있다. 이들 소설의 가치와 의의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일단 그것이 SF장르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필요라도 있다는 듯이.

하지만‘지금-여기’의 삶을‘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SF장르의 본질적인 성격이다(「창백한 푸른 점」은 정말 그런 일을 해내고 있는가?‘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지구의 삶과 너무나 흡사해서‘다른 시선’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것은 아닌가?). 또한 현재 우리가 당면한‘지구적, 문명적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성찰하고 재검토하게 만드는 것은 대다수의‘좋은’SF가 지닌 주된 공통점이다. SF장르가 그려내는 미래(적인) 사회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기라보다는 현재에 대한 특정한 관점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기계와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의 미래세계는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의 맹목적인 질주, 그 질주를 추동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법칙, 그리하여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버린 문명 자체의 괴물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형상화한다. <A.I.>와 <공각기동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로봇과 싸이보그의 모습은 개인의 고유성과 진정성, 주체의 자발성을 의심하는 오늘날의 인간 존재에 대한 해석적 논평을 담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 신체의 테크놀로지화, 기억과 정신의 전자정보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SF는 이같은 문제들을 낯선 논리적 질서 속으로 옮겨놓고, 그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달리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시각을 연다. 그‘환상적’세계가 곧바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환원된다면, 이는 SF적인 인식의 전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일 수 있다. 공상적이고 오락적인, 그저 영웅의 활극을 보여주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가상공간의 쾌감을 제공할 뿐인 SF는 분명‘본격’SF가 아니다.

‘본격문학’과‘본격’장르서사 사이에 자명한 위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본격문학’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이 아니라 좋은 문학, 이상적인 문학(문학적인 것)을 모델로 한 개념이라면, 그 비교의 대상 또한 좋은 장르서사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별성에 대한 논의들은 이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문학이 지금 장르적인 것들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가장 장르서사다운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문학적’인 것과 통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일이 필요하다. 참으로‘문학적’이지 않은 것들, 기득권을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방어나 정통성에 대한 순혈주의적 집착, 배타적인 유아론 같은 것에 사로잡힌‘본격문학’의 개념이라면 하루빨리 벗어버려야 할 테고 말이다.

 

 

2. 장르서사〓대중서사?

 

장르문학의 대립항을‘본격문학’으로 설정하게 되면, 이로부터 또다른 편견과 혼란이 발생한다.‘본격문학’의 전통적인 대립항인 대중문학(대중서사)과 장르문학(장르서사)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장르서사 안에서도 개별 작품들마다 대중성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더구나 장르서사라는 말은 구조와 관습과 지향이 전혀 다른 수많은 장르들을 한데 뭉뚱그려 가리키는 이름이다. 대중적인 경향 또한 각각의 장르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장르가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장르가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장르들 가운데는 영화에서 비롯된 범주들이 꽤 많다. 그중에서도 영웅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물, 갱스터와 누아르, 멜로물(19세기 대중연극으로 시작된) 등은 대체로 대리만족과 소망충족을 지향하는 대중적 장르들이다. 멜로물의 경우,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 테마로 하여 이런저런 갈등 상황(신분 차이, 출생의 비밀, 부모의 반대, 삼각관계, 시한부 인생 등)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장르의 일반적인 관습이다. 문학이 멜로물의 관습과 지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면 문학의 대중화 현상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멜로적인 것을 끌어들이면서도 그 관습들을 교묘하게 비틀거나 현실과 사랑의 간극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멜로물의 작위성과 기만성에 눈을 뜨게 하는 경우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해두어야 할 것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오직 문학뿐이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이 그러듯이 멜로물을 통한 멜로 장르의 전복은 다른 매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양상은 멜로물을 희화하는 방향만이 아니라 그 장르적 영역을 확장하고 멜로물의 관습과 성격을 스스로 변화시켜가는 움직임으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물 또한 대중적인 장르인데, 역사적인 지식과 교양을 얻고‘실제로 있었던 일’이 주는 의미감을 경험하고자 하는 역사물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는 무척 대중적인 요구이다. 최근에는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세분화된 전문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말랑말랑하게 가공하여 전달하는 문화상품으로서의 역사물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새로 등장한 역사판타지는 거대서사 전반에 대한 회의가 고조되면서 역사물이 잃어버린‘장엄한’이야기를 신화적인 판타지로부터 보충하는 양상을 띤다. 역사스릴러나 역사추리물은 성격이 전혀 다른 장르의 서사구조를 도입하여 역사물에 더욱 흥미진진하고 안정감있는 스토리를 공급한다. 팩션(faction)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의‘다른 판본’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역사’란 무엇이고‘진실’은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면,‘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한번 더 의심스러워진다. 김연수(金衍洙)의 『꾿빠이, 이상』(문학동네 2001)은 역사추리 장르의 이같은 가능성을 가장‘문학적’인 방식으로 확인시켜준 소설이었다.

추리물과 스릴러는 장르적 관습에 익숙하고 그 세계를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 주로 사랑받는다는 점에서, 앞의 장르들보다는 좀 덜 대중적이다. 고전적인 추리물은 세계의 안정된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가해한 범죄행위를 납득할 수 있게 합리적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안도감을 제공하는 기능(이광호가 언급했던)을 한다. 추리물의 현대적 변형인 스릴러물에서는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고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서사적 탐색의 과정보다는 미치광이 살인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도착과 위반의 세계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를 통해 스릴러물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타자성을 형상화하고, 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제의적으로 해소한다. 특히 잔혹한 살인마가 날뛰는 공포의 현장 자체에 몰두하는 공포스릴러에서는‘정의는 승리한다’거나‘안정된 질서가 회복된다’는 식의 상투적 결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긴 해도, 살인마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피가 낭자한 한판의 살육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현실에 내재하는 공포를 현실 바깥(스크린 속)으로 몰아냄으로써 생기는 안도감을 얻게 된다. 이런 사회심리적 기능은 대중서사물이 종종 그렇듯이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좀 다른 경향의 스릴러물도 얼마든지 있다. <쏘우> 씨리즈는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살인마의 모습을 통해, <양들의 침묵>은 이성과 법의 논리로 도무지 설명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괴물 같은 타자성을 통해, 이성/광기, 선/악, 신/악마의 구분 자체를 뒤흔들어놓는다. 두명의 살인자가 서로를 모방하며 거울처럼 비추는 <우리 동네>에서는 원본/복사본의 대립이 무화되는 뜻밖의 장면이 펼쳐지고, <거미숲>에서는 살인사건의 전말이 온전히 재구성되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영화의 결말)에 비로소 진짜 수수께끼가 던져지고 미스터리는 다시 시작된다. <추격자>에서는 병적인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약자-희생자를 살리는 문제에 철저히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실상임이 섬뜩하게 드러나고, <가면>에서는 엉뚱한 곳을 헤매며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를 하는 동안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적 폭력의 상황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허망하게 스러져간다. 작품성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상투적 틀을 벗어나는 스릴러의 다양한 경향은 장르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단한 자기갱신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특히 <추격자>의 경우에는, 스릴러 장르가‘문학적’인 현실인식이나 비판력과 결합하여 진화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포물과 SF는 이보다 더욱 좁은 범위에서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는, 대중성이 별로 없는 장르이다. 피서용으로 여름 한철 관심을 모으는 귀신영화나 액션물의 성격이 강한 블록버스터 SF도 있긴 하지만, 고어(gore)적인 공포물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로서의 SF는 대중적인 요구와 감수성에서 확연히 이탈한다. 특히 하드 SF(hard SF)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상당한 수준의 지적 능력과 배경지식 없이는 기본적인 독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경우가 많다(‘고급한’문학작품이‘훈련된’독자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이런 측면에서라면, SF가 문학제도 내로 수용되어 경계적인 작품들이 활발하게 생산되는 양상은 게토적인 하드 SF가 연성화되고 대중화되는 현상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장르서사를 대중서사와 동일시하는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협한 생각이며, 장르서사 전체를 동질적인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나의 장르조차 단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각각의 장르는 다양한 하위장르들이 친족 유사성을 지닌 채로 공존하는 이질적인 집합체,2 느슨하게 열려 있는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개별 장르는 끊임없이 다양한 하위장르들로 분화하고 있으며, 다른 장르들과 교차하고 결합하여 무수한 변종들을 낳는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때로는 대중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미학적 쇄신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또 때로는 이 시대의 변화된 사회문화적·인식론적 상황과 새로운 문제의식들을 담아내기 위한 모색의 과정으로도 나타난다. 그 어디쯤에선가 장르는 문학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또 문학은, 장르들 각각이 스스로를 진화시켜나가는 방식과도 흡사하게, 자신의 모색의 그 어떤 국면에서 장르와 마주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손쉽게 통틀어 이름붙일 수 없는 저마다의 움직임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보아야 한다. 그 양상도 의미도 지향도 다를, 어수선하고 산발적인 발자국들 사이로.

 

 

3. 장르의 패러디와 ‘문학적’변용

 

문학작품들은 종종 장르의 세계와 현실의 낙차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으로, 장르의 관습들을 끌어다 쓴다. 천명관의 「프랭크와 나」(『유쾌한 하녀 마리사』, 문학동네 2007)는 누아르 장르의 관습을, 박민규(朴玟奎)의 「111」(『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은 무협소설의 관습을 끌어들여 이같은 작업을 한다. 천명관의 소설에서는 의리와 정의, 배반과 복수, 운명적이고 치명적인 사랑 등의 누아르적 요소들이 일상적·세속적인 삶의 현실 안으로 생뚱맞게 끼어들어오고, 그 결과 누아르 장르가 신봉하는‘사나이들의 세계’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전락한다. 박민규의 소설에서도 대의와 명분, 명예와 법도로 이루어진‘무림의 세계’는 너무도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황당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천명관 소설이 희화하는 것이 현실감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먹고사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장르서사의 허황된 세계라면, 박민규 소설이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은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뒤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176면)는 현실의 초라함이다. “대의가 있다면… 서른두평 아파트”이고 “기개를 품은 남아라면 쉰평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184면)다는 운무천마(雲霧天馬)의 말에서 냉소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저 옛날‘무림의 세계’라기보다는 “경제가 전부”(196면)인 지금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장르의 패러디는 이렇듯 장르 그 자체를 향하기도 하고, 현실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후자가 좀더‘문학적’인 변용의 예일 테지만, 어느 쪽이든 해당 장르에 대한 풍자와 조롱만이 아니라 오마주(hommage)적인 애착이 스며들어 있는 경우, 자기가 변용하는 장르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좀더 매력적인 텍스트가 되곤 한다.

고전적 추리물의 패러디인 편혜영의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아오이가든』)와 이장욱(李章旭)의 「동경소년」(『작가세계』 2006년 여름호)은 그런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편혜영의 소설은 판단력도 기억력도 의심스러운 주인공‘나’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곧바로 체포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라는 추리소설의 대목들과‘나’의 이야기를 교대로 배치해가며, 그 간격에 주의를 환기한다. 그럴듯하고 일목요연해서 독자를 사로잡는 추리소설의 이야기와 지리멸렬하고 볼품없는‘나’의 범죄 이야기의 괴리 같은 것. 하지만 “‘누가’멋진 그녀를 혹은 돈 많은 그를 죽였나”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세계, “‘왜’가 없는 세상”이 “바로 추리소설의 세상”(118면)이라는 식으로 그 세계를 간단히 정의내리고 나면, 그것을 비틀어놓음으로써 보여주고자 하는 또다른 세계 역시 단조롭고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추리소설과 대비되는‘나’의 살인 이야기는 우리 삶의 어느 한 측면을 새로이 조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와따나베 포오’를 주제로 한‘추리소설동호회’회원들의 토오꾜오 기행(紀行)을 배경에 깔아놓은 소설 「동경소년」은 추리물의 관습들을 정교하게 재조합하면서 그 영역을 넘어선다. 창밖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토오꾜오 뒷골목의 후줄근한 여관, 당장이라도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시체가 발견될 것만 같은 낯익은 무대에서 어떤 청년이 소심한 목소리로 한 여자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구름처럼, 그림자처럼 희미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여자 유끼는 연인인 그의 눈에도 점점 더 흐릿해지고 목소리조차 희미해지더니 결국‘허공’이 되어버린다. 그는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인 채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끼를 여관 침대에 쓰러뜨리고 목을 조른다. 그러나 여관 어디에서도 유끼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고, 쎈서로 작동하는 여관의 자동문만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존재를 암시해준다. 유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기에 살인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살인범이 따로 없어도 그런 식으로‘없는 존재’가 된 채 사라져간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청년의 이야기에 동호회 회원들이 “최소한의 긴장이나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듯이(265면), 그 사람들은 그렇고 그런 살인사건만큼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극소수의‘예민한’사람에게나 그들은 혐오어린 죄책감 같은 것으로 잠시 기억될지 모른다. 「동경소년」이 떠올리게 하는 이런 생각들은 장르의 영역을 초과하는 또다른 가능성이자, 추리물의 관습을 다시 씀으로써 낯설게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이다. 문학이 장르를 동원하여 장르와는‘다른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이런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 장르를 차용한 문학작품을 다룰 때 우리는, 그것이 장르의 관습들을 어떻게 비틀어‘문학적’으로 변용하는가뿐 아니라 장르적인 것 자체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고 있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일례로 스릴러와 공포물은 살인마·괴물·귀신 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억압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내부의 이질성들, 우리 자신의 승인할 수 없는 욕망이나 사회적 타자들을 반복적으로 형상화한다. 그 시선은 내부의 타자성을 추방하고 제어하려는 지배이데올로기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정상/비정상, 이성/광기, 주체/타자 등의 이분법을 교란하고 전복함으로써 비판적 사유의 지대를 열어주기도 한다. 이때 스릴러와 공포물은 문학의 지향과 만날 수 있으며, 문학은 이들 장르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 있다.

박성원(朴晟源)이 「긴급피난-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2」(『우리는 달려간다』, 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보여준 이성의 광기와 판단 불능의 딜레마(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잔혹한‘게임’에 초대된 자들이‘합리적인’살인마로 돌변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는 <쏘우>와 <큐브> 씨리즈 등의 스릴러물에 잠재된 장르적 가능성의 또다른 버전이다. 「문득,」(『아오이가든』)에서 편혜영이 인간과 귀신 사이의 관점을 전도함으로써 도달한 인식, 즉 “산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죽은 사람도 사람”이며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 거”(110면)라는 깨달음 또한 <디 아더스>나 <식스 센스> 계열의 공포물이 열어준 사유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이들 소설에 흠집을 내는 일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문학만의’변별점을 내세우지 못하는 한 장르서사와의 연관성은 문학의 오명이라 생각하는 우리의 편견 때문일 것이다.

이와는 좀 다르게, 스릴러의 관습을 가지고 스릴러 장르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노리는 소설도 있다. 연쇄살인이 언어의 상징적 질서를 교란하는 테러의 성격을 띠는 서준환의 「수족관」(『너는 달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2004)이 그런 예이다. 시간 순서에 따라 부분부분을 재배치해놓아도 이 소설의 스토리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게 어그러져버리는데, 이는 통사론적 연속성을 보장하는 동일성의 원리(인물, 사건, 장소, 사물의 동일성) 자체가 파열되어 있기 때문이다(김태환의 해설, 305면). 이를테면‘나’는 티브이를 치우고 방에 수족관을 들여놓은 뒤, 야산에서 유로라는 여자아이를 살해하여 트렁크에 싣고 돌아와서는, 그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를 자기 방 티브이로 보고 있다. 그러고 나서‘나’는 또 범인으로 체포된 이웃 청년 빈이 유로라는 여자아이를 죽여 야산에 암매장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본다. 티브이를 치운‘나’, 유로를 살해한‘나’, 티브이로 살인사건 뉴스를 보는‘나’는 모두 같은 인물일까?‘나’가 살해하여 트렁크에 싣고 돌아온 유로와 이웃 청년 빈이 죽여서 야산에 암매장했다는 유로가 동일인물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이 소설에서‘나’와 유로와 이웃 청년 빈 등은 수많은 파편들로 조각나버린다.

정신분열증 환자-살인마를 동원하여 자기동일성의 붕괴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하는 것(<아이덴티티> <엑스텐션> 등)은 스릴러물의 전형적인 관습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로 오인된 살인마(노희준 『킬러리스트』, 랜덤하우스 2006)나 정신분열증 환자-살인마로 오인된 무고한 타자를 등장시켜(<케이팩스>) 자기동일성의 논리로 봉합되지 않는 타자성을 승인하는 것은 스릴러 장르의 새로운 경향이다. 그런데 「수족관」은 이 모든 경우를 흉내내는 한편 그 어느 쪽으로도 스토리를 통합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자기동일성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상징적 언어체계를 통째로 와해시킨다. 여기에는 대명사를 비롯한 지시어의 기능을 박탈하고 “다양한 단위의 언어적 요소들간의 공속성”을 제거하는 과감한 언어실험이 동반된다(김태환, 304면). 이 급진적인 테러는 스릴러 장르가 지닌 전복의 가능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결과이자, 아마도 오직‘문학만이’도달할 수 있는 언어수행의 가능성일 것이다.

 

 

4. SF 장르와 문학의 접속

 

SF장르와 문학의 교섭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우리 문단에서 SF경향의 소설들이 눈에 띄게 활발히 창작되고 있을 뿐 아니라,3SF자체가 풍부한 잠재력과‘문학적’에너지를 지닌 장르이기 때문이다. SF는 시공간의 이동이나 인간 이외의 존재들(로봇, 복제인간, 외계인 등)을 통해‘지금-여기’의 현실을‘바깥에서’바라보게 하는 관점의 전환을 유발한다. 인류 문명과 인간 종(種) 자체를 상대화·조건화하는 SF적 시선은 그‘안에서’본 관점(문학의 관점이기도 한)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들을 문학이 적극적으로 흡수해들인다면, SF장르는 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박민규의 「깊」(『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은 문학제도 안에서 나온 본격 SF로, SF장르의 시공간과 논리적 질서를 통해 인간의 자연 지배와 정복 욕망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우주를 식민화하는 일에 상당한 진척을 이룬 미래의 어느날, 유례없는 해저지진으로 지구가 갈라져 19,251미터 깊이의 해구(유터러스)가 생겨나자, 끊임없이‘가야 할 곳’이 필요한 인간들은 대체체액(R-71)을 개발하여 심해의 수압을 견딜 수 있는 개량된 인간 종‘디퍼’를 창조한다. 인체의 개조와 인간 종의 개량은 인간의 자연 지배 욕망이 도달한 극단의 지점이다. 디퍼들의‘어머니’인 얀과 총통의 연합관계가 암시하듯, 그 욕망은 과학-권력-자본의 씨스템 안에서 확대·강화·재생산된다. 수차례의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해가며 디퍼로 다시 태어난 이들은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유터러스까지 가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들이 19,251미터의 심해에 성공적으로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정작 아무것도 없다. 유터러스가‘바닥’이 아니라‘끝없는 구멍’임을 알게 된 뒤, 심연의 유혹을 따라 끝없이 하강하는 디퍼들의 선택은 무모하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깊」이 담고 있는 반성적 성찰은 현실과는 매우‘다르게’느껴지는 세계 속에서 낯설게 바라본 그들의 모습이 실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음을 깨닫는, SF적인 경험에서 흘러나온다. 이 소설은 또 온몸의 체액을 R-71로 대체해가는 과정에서 디퍼들이 느끼는 혼란과 의문을 통해 정신과 육체의 관계,‘인간성’이 의미하는 것, 개인의 정체성의 근거 등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싸이버펑크(cyberpunk)적인 존재론의 물음과도 통하는 이런 고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색의 여지를 남겨준다.

 

뇌는 여기에 있고…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다시 소피가 얘기했다. 하지만 생각이란 건 전체 속에 있는 거야. 나라는 전체, 세포 하나하나에 말이지. (…) 캄캄한 공간에서 몇시간씩 유영을 하다 보면 그게 느껴져. 이를테면 뇌만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손, 손도 손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눈과 귀도, 그리고 실은 세포 하나하나가 작고 무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달에서 자란 인간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어. 실은 <나>라고 하는 전체가 얼마나 무수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289~90면)

 

그렇다면 디퍼들의‘생각’은 그들 몸에 속속들이 주입된 R-71과 혼합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전히‘나’의 생각인가? 아니 그보다도,‘나’라는 건 과연 무엇인가?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이노센스>에 암시된 대로‘이노센트’한 인간이란 이제 더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지금, 이런 질문들은 이전과는 또다른 맥락에서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문학이 우리에게 던져봐야만 할 이런 질문들은 SF적인 상상력에 힘입을 때 유독 생생한 구체성을 얻게 된다.

박민규만큼이나 SF장르를 몸으로 받아들인 작가가 윤이형(尹異形)이다. 「아이반」(『내일을 여는 작가』 2007년 여름호)은 로봇과의 사랑이라는 SF의 고전적인 테마를 통해, 「피의일요일」(『셋을 위한 왈츠』, 문학과지성사 2007)은‘갇힌 세계’(게임 프로그램 속)에서 유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인간들이라는 <매트릭스>적 상상력을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한다. 인간을 능가하지만 인간이 되길 거절하는 로봇 아이반과 그를 사랑하는 인간(그녀)의 이야기인 「아이반」은‘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로봇’이야기들(<바이센테니얼 맨>이나 <A.I.> 계열)을 비틀어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를 전복한다. 「아이반」에서 윤이형은‘인간의 고유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술적인 창조력을 잠정적인 답으로 내놓고 있다. 기존의 SF적인 사고실험의 결과, 이성도 감정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더이상 인간만의 것이라 자부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가까스로 찾아낸 대답이‘예술’인 셈이다. 하지만 예술을 낭만주의적 창조성과 연결시키는 그의 관점은 의외로 보수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적인 능력을 스스로 제거한 인간들과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로봇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꽤나 흥미롭긴 하지만 말이다.

「피의일요일」은 좀더 주목할 만한 소설이다. 자신이 원래 인간 종족이었음을 알게 되고, 뒤로 돌아서서 자신의 얼굴을 봄으로써‘바깥세계’로 나갈 수 있음을 배우고도,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묻는‘언데드’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섬뜩하게’일깨우기 때문이다. “살아서 더 높은 레벨로, 더 나은 삶으로 올라가”는 것이 “모두의 희망이고 목적”(103면)인데, 이대로 살면 높은 레벨의 “안전하고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조종되어 살아가는 일이 왜 나쁜 거”(114면)냐는 주인공의 질문은 우리가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수없이 되삼킨 말일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같은 자기 목소리를 우리는 「피의일요일」에서,‘퀘스트’가 주어지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살육전에 돌입하고‘쥐’를 씹어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는 언데드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이다. 게임 화면 속의 언데드 종족이 그러하듯, “자신이 누구인지 지속적으로 기억”(116면)하고 뒤를 돌아 자기 얼굴을 대면할 여유 같은 건 우리에게 없다. “속도와 경쟁”을 “우리 삶에 부어지는 윤활유”로 여기며, “존재의 거대한 무채색 질문이 도사리고 있는 던전에 혼자 던져지는 두려움”에서 도망치고자 오늘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시 접속해주기를”(83면) 기다리는 존재, 그는 다름아닌‘지금-여기’의 인간들이다. 기억해두자. 이 소설이 그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SF장르(또는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판타지적 세계)를 끌어들이고도‘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이렇듯‘SF적’(또는 판타지적)인 논리와 상상력으로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이형의 「마지막 아이들의 도시」(『작가세계』 2007년 가을호), 박민규의 「크로만, 운」(『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백민석의 『러셔』,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 등은 디스토피아의 비전으로 전자적·기계적·생물학적 체계의 통제과정에서 발생하는 억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 소설은 싸이버펑크적이고 리보펑크(ribopunk)4적인 SF로서, 환경·생태 지옥과 기형·변종 인간들, 생식능력을 비롯한 신체·정신능력의 차등화와 이에 근거한 신계급구조 등의 형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들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조망하게 한다. 특히 『러셔』와 『키메라의 아침』에는 인간 종과 인간 개체를 진화론적·생태적 씨스템의 한 구성요소로 바라보는 SF적 관점이 스며 있는데, 이런 시선은 문학이 적극적으로 탐구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비춰주기도 한다.

 

두뇌는 일종의, 모니터에 불과해. 기억은 시냅스 형성을 매체로 삼지만, 뇌 세포에 각인되는 것도 아니고 단백질 기억분자 형태로 저장되는 것도 아냐. 그건 오직, 개별적이면서도 우주적 규모로 통합된 정보장에, 접혀진 채로 보존된다. 그런 걸 쉽게,‘마음’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 너의 마음속에는, 태초의 별에서부터 46억년 전 지구에 이르기까지,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에서 호모 싸피엔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음들이 누적되어 있다. (『키메라의 아침』, 180면)

 

우리 몸은 언제나 흐르고 있어. 원자 수준에서 보면 피부는 6주마다, 간은 8주마다 새것으로 교체되지. 딱딱한 뼈조차도 석달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1년이면 몸을 구성하는 원자 대부분이 교체돼. (…) 게다가, 우리 몸을 순환하는 원자들은 공간적으로, 다른 종(種)의 몸을 순환했던 것이고 시간적으로, 광개토대왕의 몸을 순환했던 것일 수 있어. 우린 매일같이 자기 몸의 일부를 방출하고, 다른 몸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지. 우린 다른 사람들, 다른 생물과 몸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야. (같은 책 165면)

 

이같은 진술들에서 과학적인 정합성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유전학적·정보공학적·원자론적 상상력이 결합하면서 일어나는 SF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종교적 사유를 통해 가닿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지대와는 확실히 다른 측면이 있다. 모든‘마음’들이 누적되어 있는 우주적 규모의 정보장이나 모든 생물들이‘몸’을 공유하는 원자들의 거대한 흐름을 상상해보는 일 또는 존재의 어느 한계점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무한한‘신경’의 망의 일부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일(『러셔』, 180면) 등은‘인간적’인 가치들과 개체성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사고에 색다른 충격을 준다.

SF장르가 유발하는 인식의 전환은 개인의 자발성과 고유성에 대한 허구적 신념을 무너뜨리면서 탈존(ex-sistence)에 대한 사유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고,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을 넘어 생물권(biosphere) 전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감수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때때로 SF적인‘바깥’의 시선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발을 뺄 수 없는‘인간적’인 현실과 실존적인 가치들, 그‘안’에서 본 시선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레그 베어Greg Bear의 『블러드 뮤직』이나 아서 클라크Arther C. Clarke의 『유년기의 끝』이 그 좋은 예이다). 바로 그런 불편함을 통해서 SF는 또한, 안에서 본 시선과 밖에서 본 시선의 타협 불가능한 충돌 속에 끼여 있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럴 수 있다면, SF장르와의 접촉과 교섭은 문학이 또다른 사유의 영역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전화(轉化)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문학이 장르서사와 만나는 양상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어떤’장르와‘어떻게’접촉하는가, 자기가 끌어당긴 특정 장르로부터‘어떤’에너지를 발견하여‘어떻게’활성화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매번 달라질 것이다. 장르와의 접속이 문학적인 것의 고갈이나 타협의 징후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문학적 상상력과 사유의 장에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는 고양의 계기가 될 것인지는 오직 문학의 손에 달려 있다.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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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문학 편에서는‘본격문학’대신‘주류(mainstream)문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지금 시대에는‘본격문학’이 오히려 더 소외받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문학제도의 승인을 얻은 문학이라는 의미에서‘본격문학’은 여전히 주류문학이다.
  2. 임종기 『SF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 책세상 2004, 169면 참조. 이 책에서는 SF장르에 국한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장르서사 전반으로 논의를 확대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3. 주류문학 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SF들을 SF장르 내부에서는‘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명명하고 SF의 하위장르로 이해한다. 슬립스트림은 90년대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SF의 새로운 경향이다.
  4. 싸이버펑크의 연장선상에서 생명공학 문제를 중심 테마로 하는 SF의 하위장르로, 슬립스트림과 함께 90년대 이후 등장한 SF의 새 경향을 대표한다.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이 특히 여기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