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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한국의 SF, 장르의 발생과 정치적 무의식

복거일과 듀나의 SF를 중심으로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포스트모던 문명의 불만, 괴물들의 이상한 가역반응」 「시체, 축생, 자동인형」 「연대의 환상, 적대의 현실」 등이 있다. nomadman@hanmail.net

 

 

1. SF, 미래에 대한 질문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하지만 선뜻 답변하기엔 의외로 곤란한 질문 하나를 단도직입적으로 던져보자. 최근의 한국소설(비평)은 역사(과거)에 대한 해체적 상상력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그 성과는 그런대로 풍요롭다. 그런 반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다. 혹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방식으로 과거만 그토록 문제 삼는 것은 아닌가. 풍요와 빈곤의 기형적 현실은 문학의 장르 내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자 “무슨 소리!문학은 가장 희망에 차 있을 때에도 엄연히 부정성을 고수해야 하며, 가장 강렬한 부정을 통해 역설적 긍정이 이야기되는 것이오”라는 이구동성의 합창이 도처에서 들려온다.‘희망의 원리’(블로흐)보다는‘부정변증법’(아도르노)이 여전히 대세다. 침윤된 비관주의라는 공통감각이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문학의 정직한 전제조건이라 간주되는 때이며, 느리고 끈질기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상상력보다 단번에 그것을 파괴하려 드는 공상이 더 솔깃한 시대다. 그러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선구자인 샤를 푸리에(CharlesFourier)를 비틀어 말해보면,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에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엄청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미래를 묻는다는 것은 당위적 전망이나 예언을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삶을 다르게 상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SF가 그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한국문학의 장르적 정체성이 급격한 해체를 겪고 있으며, 또한 각 문학 장르간의 이질혼효(異質混淆)가 두드러지는 현상은 더이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SF장르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복거일(卜鉅一)과 듀나의 SF를 다루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예로, 이미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김영하의 『검은 꽃』, 김훈의 『칼의 노래』, 신경숙의 『리진』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뉴에이지 역사소설’(서영채)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는 역사소설의 한 경향을 보자. 이 작가들은 공적이며 기록사관적인 역사 개념을 내파하면서 좀더 은밀하고 숨겨진 역사적 재료들의 틈새에 잠입하여 자신만의 또다른 서사를 상상적으로 주조해낸다. 거기에 마술적 활극(김영하), 내적 독백(김훈), 로맨스(신경숙) 등의 장르가 역사소설 장르에 이접되면서 장르 혼효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해체의 좀더 단순한 과정은 이인화, 김탁환의 역사소설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소설에서 역사는 반영으로서의 현재의 전사(前史)가 아닐뿐더러, 앞서 언급한 김영하 같은 작가들이 염두에 두는 장르적 대당(counterpart)도 아니다. 역사는 이인화, 김탁환 등의 작가들에게는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미장쎈이나 장신구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작가들이 그려내는 역사는 조선후기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탈현대로 통째로 옮겨놓은 박물관과 흡사하다. 그들의 소설에서 18~19세기의 조선은 포스트모던한 중세로 뒤바뀌게 되며, 구한말이나 1930년대의 샹하이에 대한 모방에서 역사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 집단적 기억보다는 영웅서사적 주인공의 사적 전유물로 둔갑하는 고고학적 토포스(topos)가 된다.

그러나 역사소설의 장르적 변화에 대해 숱한 이야기들이 오갈 때 정작 거의 참조되지 않거나 무시되는 『역사소설론』의 저자 루카치(G. Lukács)는 서구 역사소설 장르의 쇠퇴를 이야기하는 중에 플로베르(G. Flaubert)의 『쌀람보』(Salammbô)를 예로 들면서 역사가 일종의 역사의 의장(意匠)을 한 고고학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주목했다. 시효가 완료된 이러한 생각에서 살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고고학으로, 과거라는 시간개념이 고고학적 발굴의 무덤으로 대체되는 최근 역사소설의 형질변화에 어떤 조망을 던져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가 『쌀람보』를 고찰하면서 역사소설 장르의 쇠퇴를 보았던 시기, 1848년의 혁명 좌절 이후의 그 시기는 한편으로는 SF가 난만한 꽃을 피우던 때이기도 했다.1 현재를 비춰줄 수 있는 전망으로서의 역사를 잃어버리자마자, 작가들은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카치와 같은 역사적 문맥에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 복거일과 듀나의 작품들2을 통해 다루려는 SF라는 장르적 발생에 대한 질문은 이런 물음과 궤를 같이한다. 적어도 세계체제 혹은 분단체제의 정치경제적 지형변화와 관련하여 미래에 대한 한국문학의 상상력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한국 SF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어림짐작이라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들은 어떤 미래를 상상해왔던 것일까. 현실에 대한 반영을‘낯설게 하기’라는 미적 과정을 통해 대안사회 또는 대안의 정치적 삶을 구성한다는 SF에 대한 정의 중 하나는, 최근 한국문학 전반에서 진행되는 장르 혼효의 과정을 서둘러 찬탄하기에 앞서 복거일과 듀나 같은 SF작가들의 선구적인 작업의 의의와 문제점을 찬찬히 되묻게 만든다.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SF에 대한 일련의 정의들은 문학의 여타 장르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각양각색이며, 작가에 따라서도 천양지차다. 과학소설(Science Fiction)로 번역되는 SF는‘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융합된 매력적인 로맨스’라는 최초의 정의에서‘인식론적 소외와 낯설게 하기를 특장으로 갖는 반(反)리얼리즘적 허구 서사물’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정의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공간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정의의 역사 또한 갖고 있다. 복거일과 듀나는 SF장르에 대한 자의식에서 스타일과 사고방식,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상이하며, 어떤 경우는 전혀 상반된 행보를 보여주지만, 9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 SF장르의 고유한 특색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단초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마땅한 작가들이다.

 

 

2. 한 자유주의자의 미래프로젝트

 

소설가, 시인, 사회비평가 등의 다양한 경력이 말해주듯, 복거일은 예술의 근대적 분업화의 결과인 저자(author)나 소설가보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지식인의 형상인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문사(文士)라는 명칭에 더 부합하는 작가다. 첫 장편 『비명을 찾아서』에서 『그라운드 제로』에 이르는 근 20년의 창작기간에 그가 쓴 작품의 상당수는 장르적으로는 SF에 속하지만, 그 안에는 작가의 시편들과 한국사회의 지식계에서 논쟁이 되었던 수많은 사회비평적 언급들, 예컨대 영어공용화론, 자유주의 경제이론, 신다윈주의적 진화론, 남북통일론,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 비판 등이 서사적 논평이나 우화의 형태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SF는 작가 복거일에게 이 모두를 담아내고 실험을 통해 뒤섞을 수 있는 혼용의 시험관인 문(文)에 가까우며, 거기에는 복거일의 SF가 갖고 있는 정치적 (무)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한일합방이 쇼오와(昭和) 62년(작품이 출간된 시기인 1987년의 현재)까지 지속된다는 가정을 담은 첫 장편 『비명을 찾아서』는 조선인 주인공이 억압되어 있던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떠간다는 탐색서사다. 그동안 이 작품은 주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구현해낸 작품으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와 범주에서 평가되어왔지만, 서사적 공식과 발상은 SF에서 기원하고 있다.3 그러나 SF와 역사소설은 서로간의 절합(articulation)이 무리하거나 서로에게 낯선 장르가 결코 아니다. SF와 역사소설은 서구소설사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근대적 서사장르들로서, 근친성이 엿보인다. 낯선 시공간의 발견과 이동, 이국적인 과거에 매혹당하는 여행자와 미래에 대한 호기심 어린 방문자 등의 요소를 역사소설과 SF는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비명을 찾아서』에서 독자들이 또다른 역사의 진행형인 대체역사, 낯선 미래를 간접 체험하는 과정은 그 역사를 실제로 살아가는 주인공에게는 묻혀 있는 과거를 복원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SF에 대한 작가의 애착과 실험은 개인에서 민족에 이르는 정체성의 통합이 절실해진 좀더 큰 전지구적·역사적 변환의 계기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체제의 변동 그리고 그에 따른 한반도, 즉 남북한이라는 상이한 정치경제적 지형학의 변화라는 변수가 그것들이다.

복거일의 두번째 장편 『역사 속의 나그네』는 독자들에게 1991년에 첫 세권을 선보인 후, 2005년부터 2008년초까지 연재가 재개된 작품으로, 아직 미완이다. 이 작품은 2078년이라는 미래의 시점에서‘가마우지’라는 시낭(時囊)을 타고 16세기 후반(1578년)의 조선 땅에 불시착한 주인공 이언오가 자신이 소유한 과학기술의 이기(利器)를 활용하여 봉건사회의 모순 아래 살아가던 농민들을 규합, 농민전쟁을 수행해나가면서 역사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주인공의 의지와 행동이 표출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토대의 급진적 변혁보다는 주인공의 영웅담을 초점으로 한 사회개혁이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형태의 작품이라고 하겠다. 『역사 속의 나그네』는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시공간에 도착한 미래의 인간이 그 현실에 영향을 미칠 때 그후에 발생하게 될 “가능성의 특이점”(1권 43면)과 같은 시간의 아포리아, 평행우주론에서 그렇듯 독립된 형상인 미래와 현재가 한순간에 합쳐질 때의 시차(視差)의 감각 등 SF특유의 인식론적 가설을 서사적 육체와 밀도있게 결합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거기서 이론은 실천으로, 인식은 윤리로 전환된다. “저렇게 아픈 아이 앞에서 시간 줄길 지킨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저 아이의 목숨과 아픔이지, 아득한 시공 건너에 있는 어느 세상이, 어느 세상의 가능성이, 아니잖나? 저 단단한 실존 앞에 무엇이……”(2권 22면)

그런데 『역사 속의 나그네』에는 SF장르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26세기라는 미래에서 출발한 시낭이 2077년, 조선공화국의 대전에 처음 불시착했을 때 벌어지는 전지구적 소동을 그리는 다음 인용문이 그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은 깨달았다, 시간여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것들 속엔 자신들이 이미 태어났다는 사실까지도 들어간다는 것을.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것만 걱정해온 사람들에게 시간여행은 훨씬 무서운 죽음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잘못하면, 아니,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도, 어느날 갑자기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상이 송두리째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은 딛고 선 대지가 문득 갈라지면서 컴컴한 심연이 드러난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심연에서 광기의 검은 기운이 올라와 단숨에 세상을 덮었다. 모든 사회들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끝이 온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폭력과 파괴가 전염병처럼 사회에 번졌고, 내일을 생각지 않는 쾌락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권 54~55면)

 

“딛고 선 대지가 문득 갈라지면서 컴컴한 심연이 드러난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한 대목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의지하고 있던 믿음의 무의식적 체계가 전지구적인 형태로 집단적 붕괴를 겪는 것과 상관이 있다. 뒤이어 나오는 북미연방의‘복음재해석교회’나 조선의‘미륵하생교(彌勒下生敎)’같은 각종 신흥종교의 출현은 그런 믿음의 붕괴를 막고자 이른바 대타자(the Other, 미륵, 신)를 재도입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의 결과들이다. 『역사 속의 나그네』 첫 세권이 1988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1991년에 출간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대지가 문득 갈라지면서 드러난”“세상의 끝”에 해당하는 것이 당시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동구 사회주의의 붕괴와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 역사나 이데올로기의 종말, 민족주의의 난립 등과 같은 세계체제의 격변)임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사람들의 집단적 광기와 폭력과 파괴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그것이 소설에서는 시낭의 불시착이라는 사건으로 알레고리화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작품의 연재에서 출간에 이르는 시기가 때마침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의 폭발로 인해 전지구적 의미의 세계체제가 급작스럽게 변경되면서, 소설 속에서 시낭의 출현으로 인해 그랬던 것처럼, 불확실해진 미래를 목전에 둔 집단과 개인의 정체성 위기가 증상으로 표출되던 격변의 시기임을 상기할 필요는 있겠다.

한편 인용한 대목은 소설에서 이언오의 개인적 삶에 닥친 변화와 정확하게 맞물리면서 그가 시간여행을 통해 백악기로 가려 했다가 16세기 후반의 조선에 불시착하게 된 계기가 단순히 시낭의 계기 고장이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16세기라는 과거의 무대는 정확히 이언오가 그 무대에 포함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서사로서 전개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역사 속의 나그네』는 이언오가 해군 대위로 진급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군인으로서의 삶을 더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만일에』라는 과학잡지사에 입사하게 된 경위를 요약하고 있다. 그때가 바로 26세기의 시낭이 21세기에 도착하기 3년 전(2074년)이다. 이언오의 시간여행이 그의 좌절된 소망이 대리 성취되는 결정적인 기회임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 속의 나그네』는 일종의 소망충족의 서사가 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이언오는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할 기회를 맞이한 것이며, 그것은 그를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언오가 시낭이자 인공지능을 가진‘가마우지’를 떠날 때, “시낭은 모체였고 시간비행사는 태아였다”(1권 38면)고 덧붙이는 서술자의 진술은 이를 확증한다. 또한 『역사 속의 나그네』 3권에서 자신이 조직한 창의군 소속 기병대의 돌격을 지켜보면서 농민군 대장이 된 그에 대해 서술자는 “이제 그는 꿈을 많이 꾸었던 생도 시절에도 꾸지 못했던 꿈을 얼결에 이룬 것이었다”(267면)라고 적고 있다. 복거일에게 SF는 이처럼 현실과 미래에 대한‘만일에’라는 실험적인 서사적 가설일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이념을 표방하는 개인과 집단의 통합을 꿈꾸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욕망의 서사이기도 하다.

PC통신 하이텔에 연재되었던 『파란 달 아래』(1992)는 2039년이라는 시점에서 “인류의 생장점”(267면)으로 불리는 달표면 기지에서 민족통합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그린 SF다. 그런데 작품후기인 「작가로부터의 편지」에 SF에 대한 복거일의 견해가 정치적 형태로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전산망과 과학소설은 “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 질서보단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질서를 불러오는 특성을 지녔”(298면)다고 한다. 복거일이 염두에 두는 SF가 자유민주주의적 유토피아의 정체(政體)를 상상적으로 구현하는 한편, 그런 프로젝트에 걸림돌이 되는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천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역사 속의 나그네』가 전자를 구현한다면, 『목성잠언집』과 그 연작인 레제드라마(lesedrama) 『그라운드 제로』는 후자의 실현에 가깝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2000년 전후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은유인 미래의‘개니미드 기지’는 『목성잠언집』에서는 혜성과의 충돌로,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핵전쟁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SF의 형식이라는 주형(鑄型)에 사회비평적 내용들을 단순히 붓고 찍어낸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라서 아쉬운 곳이 적지 않다.

『역사 속의 나그네』를 좀더 살펴보면, 이언오는 혁명가가 아닌 개혁가로 이른바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적 실천을 감행한다. 관헌에 예속된 기생들의 신분을 평민으로 승격시켜주고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남자들이 받을 수 있는 품계를 여자들에게 주는 등의 평등한 조치, 그리고 개별 농민군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고 품계와 직책을 부여해주는 등 이언오는 민주주의적 대의정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저수지 공사를 계획하거나 신무기를 제작하고 세제개혁을 단행하는 등 이언오에게서 엿보이는 인간형은 실용주의적 엔지니어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수많은 시평(時評)을 통해 알려진 바 있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작가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연관된다.‘과학이 사람의 삶과 문명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들을 다루는 소설’이라는 SF에 대한 복거일식 정의는 과학소설 일반보다는 자신의 SF에 더 잘 들어맞는다. 이에 비해 듀나의 텍스트는 SF에 대한 복거일식의 정의와 부분적으로밖에 일치하지 않는다. 복거일의 SF에서‘과학’(science)에 방점이 찍힌다면, 듀나의 SF에서 과학보다 중요한 것은‘허구’(fiction), 즉 장르다.

 

 

3. 어느 독신기계의 브리꼴라주

 

“과연 빈정거리는 장르 패러디인지, 진지한 드라마인지, 아니면 초현실적인 판타지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냥 장난일지 모른다는 첫번째 가설도 아직 지울 수 없었다. 진담으로 치기엔 작품 자체가 너무나도 기형적이었던 것이다.”(「히즈 올 댓」, 『태평양 횡단 특급』, 38~39면) 이 인용문은 듀나의 SF에 대한 언급으로 읽힌다. 게다가 이는 듀나의 소설 속 주인공이 쓴 문장이다. 이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대목이야말로 듀나의 SF가 지니는 특성의 단초다.

첫 단편집 『나비전쟁』(1997)을 시작으로, 최근의 장편 『대리전』과 『용의 이』에 이르기까지 도합 다섯권의 창작집을 낸 듀나의 SF를 읽고 나면, 그의 글에서 수시로 받는 어지러운 인상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먼저 그 인상부터 정리해야 듀나와 그의 SF에 대해서 비로소 어떤 말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무질서한 인상의 목록들은 대략 이럴 것이다. 더이상 자라지 않으려고 하는 영악한 소녀의 냉소적 웃음, 사물과 세계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중성적이고도 무심한 응시, 어떠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잔여를 남기지 않으려는‘쿨’한 독신자적 냉담함 등등. 듀나가 누구인가에 대한 그토록 호기심 어린 항간의 질문들에 가능한 최선의, 그러나 궁여지책의 대답을 하나 골라낸다면, 그것은 듀나가 근대적 의미의 저자 개념에 잘 들어맞지 않는 작가라는 것뿐이다.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이기를 거부하는 듀나 소설의 주인공들과 닮은‘독신기계들’이 등장하는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에서 들뢰즈(G. Deleuze)와 가따리(F. Guattari)는 “우리는 둘이서 『앙띠 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4이라고 말한 바 있다. 듀나는 그‘우리들’과 어쩌면 가장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우리들’의 정체는 듀나의 작가적 위상과 주인공들 그리고 듀나의 SF가 갖는 장르적 특성과도 이어진다.

듀나의 SF는 기왕의 SF장르 끌리셰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고실험의 성격이 강한 두번째 단편집 『면세구역』에서 듀나는 씨스템의 무한증식의 부산물인‘면세구역’같은 위상학적인 공간에 대한 탐색,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 나비효과 같은 카오스이론, 영혼불멸의 현대적 판본인 유전자 복제, 데까르뜨적인‘전능한 악마의 가설’에 발단을 둔 음모론, 도플갱어, 인간과 기계의 위상 등의 무거운 주제를 실험적이면서도 재치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표제작 「면세구역」은 씨스템의 자기증식의 예상치 못한 부산물이자 일종의 포스트모던한‘제2의 자연’의 틈새인 돌연변이적 블랙홀의 탄생이라는 주제를 함축한다. 그런데 듀나의 SF전반을 염두에 두고 이 단편을 읽는다면, 듀나의 SF는 장르 끌리셰에서 진화한 돌연변이적 문화생산품이자 그 진화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인다.

주로 1인칭의 냉소적인 서술자가 등장하는 듀나의 SF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음모의 개별요소들로 수집된 개인의 정보가 기업 전체의 구조로 드러나는 음모론적 서사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듀나의 SF는 사회적이다. 거기서 「꼭두각시들」(『태평양 횡단 특급』)에 나오듯이 합병과 구조조정 프로그램 같은 집단의 음모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개별자의 집요한 편집증은 하나의 체계인 한에서 음모의 대상이 되는 사회구조를 간접적으로 인식시켜준다.

듀나의 SF는 하나의 문화상품이 생산·유통·소비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재활성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후기자본주의시대 문화논리의 산물이다. 『면세구역』에 실린 단편들의 후기에 붙인 짤막한 작품설명이나 『태평양 횡단 특급』에서 종종 다른 SF작가들의 작업이나 아이디어의 출처를 간접적으로 밝히는 일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이 자기지시적 언급은 선배작가들로부터의‘영향의 불안’(anxiety of influence)을 나타내는 한편, 표절 등의 저작권문제에 대해 우회적이지만 정당한 방식으로 항변하며, 하나의 텍스트가 기성 문화생산품에 대한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공정(工程)을 거쳐 나왔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것은 듀나 SF의 자체 생산과정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실제로 듀나에게서 이전 SF의 모티프나 설정은 다음 작품의 밑거름과 아이디어가 되는 식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며, 단편은 장편의 형태로 확장되기도 한다.5 그래서 듀나의 SF는 상품의 자기복제와 증식이라는 생산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독해 가능하다. 듀나의 SF는 상품화된 문화를 자기지시적으로 서사 내부에 기입하는 방식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를 함축하며, 또한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떤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다. 『면세구역』 이전까지 듀나의 SF는 막연한 의미에서 후기자본주의의 생산품이며, 그것이 지시하는 알레고리적 공간은 아무래도 추상적 보편성에 머물러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듀나의 SF가‘낯설게 하기’나 외삽(外揷)을 통해 현실을 탈현실화하거나 반대로 탈현실화된 공간을 구체화하는 작업은,‘2005년 부천’이라는 시공간을 무대로 외계인과 지구인이 첨단의 4기 문명에 도달할 수 있는 매개물이라 믿는‘코어’를 둘러싸고 학교운동장에서 우주전쟁을 벌인다는 코미디 『대리전』에 와서야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부천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광신적으로 매달리는 코어에 상응할 만한 현실적 상관물(2005년 한국인들이 열광했던 과학을 빙자한 대사기극), 그리고 그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풍자를 이 작품에서 유추해 읽어도 재미있으리라.

최근작 『용의 이』에서 산송장이나 유령과 교신할 수 있는 염력을 지닌 열두살 소녀 주인공‘나’가 낯선 행성의 우주 쓰레기장에 불시착해서 위협적인 바다로부터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듀나 SF의 제작원리가 서사 그 자체로 용해된 특수하고도 상징적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나’가 도착한 행성은 스따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SF 『쏠라리스』(Solaris, 1961)의 행성‘쏠라리스’처럼 일종의‘사고하는 사물’(rescogitans)에 가깝다. 그 행성은‘나’에게 알 수 없는 신호와 정보의 단편들을 끊임없이 송신하며,‘나’는 기억의 정보망으로 송신된 자료들로부터 유의미한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위협적이고 불가사의한 행성에 대처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고,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도 구분할 수 없다.‘나’의 이야기 속에서‘나’가 포함된 그 행성은 행성의 주인인 여왕이‘나’에게 그렇듯 동일자인 동시에 정체 모를 타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용의 이』는 부모나 사회 같은 상징적 초자아의 간섭이 없는 정체성이 탄생하는 기나긴 여정처럼 읽히기도 한다.

‘나’는 인간의 지능과 대등한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행성에 불시착해 바다를 표류하면서 “어른 팔뚝 굵기의 지렁이들”(『용의 이』, 147면) 같은 낯선 원시생명체(이 소설집의 다른 단편에도 자주 등장하는‘강간’이라는 어휘에서 연상되는 신체강탈의 남근적 이미지)의 위협에 저항하는 한편, 난파된 우주선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상륙에 도움이 될 만한 잡동사니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몸에 부착한다. “비상식량, 생존도구모음, 여벌 속옷, 우주복 그리고 고장나지 않은 열선총들”(139면). 그러나‘나’가 육지로 갈 만한 뗏목이나 배를 마련해야만 하자, 이번에는 “커다란 대문만했고 한쪽 구석이 잘려나간 직사각형” 모양의 “우주선 표면에서 떨어져나온 단열재”를 뗏목으로 삼는다(143면). 이처럼 미리 준비되거나 비축되었다기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주어진 재료들이 새로운 용도의 제작물이 된다. 더구나 그 재료들은 필요한 양에 비해 부족하며, 또 그저‘나’의 눈앞에 우연히 놓여 있었을 뿐이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구조적이고도 건축술적인 사고와 대별해 주어진 신화의 세목들을 이리저리 뜯어고쳐 새로운 신화를 주조하는‘야생적 사고’(la pensée sauvage)의 특성이라 부른 브리꼴라주(bricolage)6는 이처럼 듀나의 SF적 상상력의 모태가 된다. 당연히 다음 인용문이 예시하듯‘나’의 브리꼴라주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날 오후, 나는 배를 타고 도시 주변을 돌아다니며 조각난 정신의 찌꺼기들을 긁어모았다. 내가 모은 것은 대부분 언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 충분한 양의 찌꺼기들을 머릿속에 담아 집으로 가져온 나는 탁자 앞에 앉아 그 찌꺼기들을 토해냈다. 찌꺼기들이 꿈틀거리며 옆에 있는 다른 찌꺼기들과 연결되려고 하는 동안 나는 잽싸게 손가락을 놀려 그들을 배분하고 정리하고 끄트머리를 다듬고 조립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내가 빈 탁자를 건반 삼아 악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자정 무렵에 부품들이 완성되었다. 나는 남은 찌꺼기들을 불어 증발시키고 완성된 부품들을 다시 머릿속에 넣었다.(274~75면)

 

자신의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에 위협적으로만 느껴지는 전체 속에서 방향키를 잡지 못한 채‘나’가 잡동사니의 사물들과 데이터들의 바다를 표류하는 『용의 이』의 첫 장면을, 『역사 속의 나그네』 도입부에서 이언오가 16세기 조선의 바닷가에 불시착했을 때 보였던 대처방식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레비스트로스식으로 말하면, 이언오가 침착하게 시낭으로부터 필요한 도구들을 꺼내어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를 든‘엔지니어’에 가깝다면, 듀나의 주인공은 그 전체를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고 그러하기에 전체의 부분들이 대단히 위협적인 대상으로 다가오는 세계의 음모전략에 맞서 자신만의 대항서사를 구축하는‘브리꼴뢰르’(bricoleur)다. 이런 대항서사의 결말은 『대리전』과 비교해볼 때 그리 체념적이지 않다. 『용의 이』의 마지막에서 초경(初經)을 겪은 열두살 소녀인‘나’가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일종의‘인지적 지도’(cognitive map)를 작성하는 장면도 순전히 다음을 위해서다. “이제 뭐 하고 놀까?”(『용의 이』 386면)

 

 

4. SF, 독단론과 안락사의 경계에서

 

SF를‘인지적 낯섦’(cognitivee strangement)의 효과를 통해 대안사회와 정체를 구상하는 장르라고 정의내린 비평가 다꼬 써빈(Darko Suvin)은 SF와 유토피아의 관계에 대해 간명하지만 인상적인 지적을 한 바 있다. “유토피아는 SF의 사회정치적 하위장르다.”7 이 정의는 SF가 대안사회와 정치라는 유토피아적 내용을 담는 하나의 문학형식이나 장르라는 일반적 뜻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 정의는 SF는 구조적으로 대안사회와 정치에 대한, 한마디로 유토피아적 모델을 어떤 식으로든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른 말로 하면, 유토피아는 SF텍스트의 직물을 짜는 욕망의 근원적 움직임이다. SF를 읽는 비평가에게 유토피아의 독해라는 추가적 난제를 던져주는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가 복거일이 한국소설의 지형에서 SF장르에 대한 실험적 모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즈음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것의 이론적 뒷받침인 자유주의의 지지세력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던 때였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이른바‘역사의 종말’을 통해 어느정도 그 목적을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남은 것은 일명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자유주의가 실현되지 못하거나 따르지 않으려는 국가와 사회에 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일뿐이다. 그에 비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유주의를 제외한 좌파의 유토피아 프로그램 대부분은 일종의‘부정변증법’,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으로만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유토피아 프로그램의 추종자들은 그것의 실정적인 기획, 근본적인 재현과 비전을 스스로 금지시켰다. 그것이 유토피아에 대한 전지구적 부인(否認)의 암묵적인 형태였다. 그리하여 90년대 이후에 가속화된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유토피아는 자유시장경제의 자유인인‘최후의 인간’(니체)의 알량한 행복과 쾌락으로 대체된다.8 따라서 SF의 상상력은 더이상 유토피아에 대한 반영적 재현이나 그것의 금지가 아니라, 재현 불가능성의 재현 또는 중층적 재현이라는 임무를 떠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복거일과 듀나의 SF에 나타난 유토피아적 소망, 이데올로기적 독소에 대한 비평적 해독(解讀/解毒) 역시 이런 견지에서 행해져야 한다.

복거일의 SF에서 표방되는 유토피아의 구체(具體)는 일관되게 그의 실용주의적 자유주의 이념을 모델로 하는 정치경제적 사회다. 그러나 복거일이 SF라는 형식으로 자유라는 내용을 전달할 때,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신다윈주의적 생존기계, 애덤 스미스에서 하이에크에 이르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라는 저‘과학’을 지칭하는 일련의 계열체는 자유시장경제의 불평등하고도 살벌한 현실을 자연화하고 합리화하는‘자생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예를 들면‘자유’라는 기표는 복거일의 SF에서 그 의미가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체제의 변동에 대한 낙관적 기술(記述)에서 사회적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의로 변신하고, 마침내 그런 체제를 갖추지 않은 국가에 대한 맹렬한 적의로 전치(轉置)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치과정은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적대적 긴장을 토대로 존속해온 시장경제 근간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90년대 이후에 존속하는 방식이 아닌가. 복거일의 SF는 그 과정의 서사화가 아닐까.

그가 제시한 미래의 한 형상을 상기해보자. 『파란 달 아래』에서 그가 미래형으로 설정한 민족어의 잔멸(殘滅)과 영어공용화의 보편화, 남한자본주의 주도하의 남북통일의 이상,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믿음 등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의 헤게모니적 재편, 그에 따른 분단체제의 지각변화 등에 대한 작가의 현상 긍정이 작품에서 미래의 형식으로 투사된 것들이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남북통합의 유토피아는 남북한의 통일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 즉 남한의 통일비용 부담으로 발생한 남한노동자의 임금하락의 결과와 그에 따른 남북한 인민들끼리의 갈등이라는 적대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실현 가능했다. 복거일의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사회적 적대의 은폐이자 그 결과다. 그리고 그후 10여년이 지나, 『목성 잠언집』 등의 작품에서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독재체제에 대한 적의로 전치되어 말 그대로‘폭발한다’. 그래서 그의‘자유주의’는 자유라는 기표가 점령한 정치경제적 식민영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자유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다른 자유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독단론적 교의(doxa)다. 아이러니하게도 복거일의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작금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현실에서 보면 그 꿈을 이미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9

듀나의 SF에 묘사되는 현실은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 부른 이질적이고 다중적인 공간을 낯설게 한 형태에 가깝다. 육체와 정신이 알 수 없는 대타자의 조종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탈주체화되는 음모론의 세계는 어떻게 보면 복거일의 자유주의가 꿈꾸는 일직선의 미래의 음화(陰畵)일지도 모른다. 듀나의 SF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지도(『대리전』의 부천시 축소지도, 『용의 이』의 행성지도)가 음모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대항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단자(單者)가 휴대하는‘인지적 지도’라는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래서 듀나의 SF는 어떤 경우 복거일의 SF에 대한 대항서사처럼 읽히기도 한다. 듀나라면 SF의 오랜 주제 중 하나인 영혼불멸의 문제를 유전자 프로그램의 변형이나 로봇의 발명이라는 복거일식의 낙관론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유물론적으로 희화하거나 좀비처럼 살아 있는 시체로 탈바꿈시키는‘절멸의 프로젝트’로 해결할 것이다. 「펜타곤」(『면세구역』)이나 『대리전』 그리고 「천국의 왕」(『용의 이』)에서 종종 보이는‘안락사’의 이미지는 영혼불멸에 대한 인간의 소망을 풍자하는 은유다(복거일은 의학적‘안락사’에 대한 해법을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찾는 데 반해, 듀나는 인간의 어리석은 자유의지에 대한 풍자적 해법을‘안락사’에서 찾고 있다). 듀나의 SF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어떠한 강박도 없다. 그러나 희망의 형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너네 아빠 어딨니?」(『용의 이』)는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던 가난한 주인공 소녀가 여동생을 강간하려던 아빠를 죽이며, 아빠가 좀비로 다시 태어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펼쳐지는 판타지물이다. 이 작품에서 소녀 주인공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도심을 어슬렁거릴 때, 소녀들은 수많은 상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쇼핑쎈터를 발견하고 그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소녀들의 판타지에서 교환이라는 냉정한 시장원리에 아랑곳없이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도 된다는 리비도적 만족은 모든 인간들의 좀비화,‘세계몰락 프로젝트’라는 초점에 의해 전치된 이 소설의 또다른 유쾌한 소주제가 아닐까 싶다.10 더러 인식 불가능한 복잡하고도 위협적인 현실에 대한 선험적 체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듀나의 방식이 복거일의 방식보다 미래라는 가능성을 살피는 방법으로는 그래도 더 유효하다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생각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한탄하듯, 급진적인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조차 현실의 변화에 대하여 느리지만 끈질긴 변증법적 모색보다는 그런 세계의 전멸을 상상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사실 듀나의 소녀 주인공들이 얻는 리비도적 만족이라는 것도 인간의 좀비화, 세계몰락이라는 허망한 공상의 댓가이지 않은가. 그러나 제임슨 자신이 SF를 읽는 방식도 마치 초국적 자본주의국가라는 거대한 고고학적 폐허에서 변증법적 무기가 될 만한 낡은 유물들을 하나씩 발굴하는 침울한 자의 그것에 가깝지 않은가. 듀나의 SF가 세계의 몰락을 택하든 몰락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든, 독자들은 소녀들의‘노는’방식의 유쾌함에 당분간 흥미를 느낄 필요가 있겠다.

오래전 칸트는 이성이라면 불가피하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경험 불가능한 대상, 가상으로 불렸던 것들(영혼불멸, 신의 존재, 자유의지와 결정론 등)의 해결 불가능성에 직면할 때, 이성은 독단론을 고수하거나 회의론(이성의 안락사)에 빠진다고 했다. 이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정립과 반정립의 무한논쟁을 이루는 주제들은 또한 SF의 오랜 숙제이기도 했다. 복거일과 듀나는 SF의 이런 이율배반을 양극단에서 보여주는 작가가 아닐까. 복거일과 듀나의 SF에서 공통적으로‘전멸의 상상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의아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혜성과의 충돌이나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은 복거일식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역설하기 위한 SF적 극약처방이었지만, 논쟁적인 정치경제적 내용을 별도로 하더라도 그 결과는 SF장르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 느낌이다. 그에 비해 듀나의 SF는 어지러운 카오스에서‘이제 뭘 하며 놀까’라는 유희의 가능성을 좀더 보여준다고 판단된다. 한국 SF의 가능성은, 듀나의 SF에서 보이듯이, 자기복제 씨스템의 부산물인 카오스에서 태어나 좀비들이 우글대는 적대의 세계 한가운데서 조금씩 삶의 권역을 넓혀가는 유토피아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복거일과 듀나는 상이한 방식으로, 각각 반면교사의 지식과 독신기계적 놀이의 형태로 SF라는 장르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케 해주었다. 이들의 선구적 작업이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해체와 혼효라는 2000년대 문학의 현실에 어떤 명암을 던져줄 것인가. 그들이 상상하는 세계몰락 이후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 미래의 형상이 다만 과거나 현재의 한 변종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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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레드릭 제임슨에 따르면, 역사소설과 SF는 서구의 서사장르의 발생적 역사에서 거의 동시대적인 장르다. 역사소설 장르의 최초 작품인 월터 스콧(WalterScott)의 『웨이벌리』(Waverley)는 1814년, SF의 최초 작품으로 불리는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1818년에 출간되었다. Fredric Jameson, Archaeologies of the Future: The Desire Called Utopia and Other Science Fictions, London & New York: Verso 2005, 1~2면.
  2. 본문에서 인용되는 복거일과 듀나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87) 『역사 속의 나그네』 전3권(문학과지성사 1991) 『역사 속의 나그네』 연재(사이언스 타임즈 2005~2006; 판타스틱 2007~2008) 『목성 잠언집』(랜덤하우스중앙 2002) 『그라운드 제로』(경덕출판사 2007), 복거일 시론집 『벗어남으로서의 과학』(문학과지성사 2007). 듀나 『면세구역』(국민서관 2000)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 2002) 『대리전』(이가서 2006) 『용의 이』(북스피어 2007). 복거일 외 『얼터너티브 드림』(황금가지 2007). 앞으로 텍스트를 본문에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작품명과 면수를 함께 적는다.
  3.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박진 「대체역사 서사물의 메타적 자의식」,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청동거울 2007)을 참조할 것.
  4. 질 들뢰즈·펠릭스 가따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11면.
  5. 자기증식 씨스템의 산물인‘면세구역’(『면세구역』) 같은 블랙홀로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사라지는 사람들」(같은 책)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단편 「대리전」(『얼터너티브 드림』)은 동명의 장편 『대리전』으로 확대, 개작되었다. 그밖에도 듀나가 애용하는‘꼭두각시’캐릭터는 「꼭두각시들」(『태평양 횡단 특급』)에서 시작하여, 『대리전』에 이르러 외계인에게 육체를 대리하는‘숙주’등의 몰개성적 집단으로 변주된다.
  6.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한길사 1996, 71면.
  7. Darko Suvin, Metamorphoses of Science Fiction, New Haven 1979, 61면. 이 구절은 F. Jameson, 앞의 책 393면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8. F. Jameson, 앞의 책 142면.
  9. 공평을 기하자면, 오히려 복거일의 SF에서 정작 진솔하게 읽히는 대목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노년의 주인공이 장수(長壽)를 바라는 은밀한 방식으로 유전공학의 성과와 로봇 개발에 삶의 미래를 점치는 순간들이다. 복거일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문학과지성사 2001; 「꿈꾸는 지놈의 노래」, 복거일 외 지음 『얼터너티브 드림』.
  10.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정치적 요인으로서의 향락』,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119면. 한편‘세계몰락 프로젝트’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쓴 『용의 이』의 추천사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