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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이라는 시빗거리

 

 

정영훈 鄭英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 시대 아들들의 운명과 소설의 모험」 「윤리의 표정」 등이 있음. yhoon2@dreamwiz.com

 

 

1. 본격문학의 귀환, 그 징후적 성격

 

최근 들어‘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대립구도를 종종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문학사에서 본격문학이니 순수문학이니 하는 말이 홀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본격문학 혹은 순수문학은 그 반대편에 대중문학이나 통속문학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을 때만, 그러니까 이들에 대한 대당(對當)개념으로만 쓰였던 것이고, 평소에는 그저 문학이었을 따름이다. 본격문학은 문학의 지붕 아래 얌전하게 공서(共棲)하던 대중·통속문학이 난데없이 자기 몫의 지분을 요구해올 때, 나는 그대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노라고 금을 긋기 위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런만큼 본격문학이나 대중·통속문학은, 현상적으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문학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규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중문학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개념적 정의의 실패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본격문학’또는‘대중문학’이 내포하는 어떤 불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특정한 작품을 예로 들어 본격문학적이거나 대중문학적인 속성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두가지 범주 안에 솜씨 좋게 가려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중문학에 관한 논의들이 대개 대중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는 데서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의된 바가 없기 때문에 대중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선 합의해야 했던 것이다.1

그러니 본격문학의 귀환은 그 자체로 징후적이다. 문학이 놓인 삶의 자리에 대해,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본격문학 대 대중문학의 대립과 관련한 우리 문학사의 논쟁을 살펴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처럼, 이 논쟁은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가령 1930년대의 통속소설에 관한 논의는 일제 군국주의의 팽창으로 대표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성격과 환경의 부조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를 그 배면에 깔고 있다. 통속소설은 성격과 환경의 부조화를 안이하게 해결해버리고 있거니와 이 점이 바로 통속소설이 대중적일 수 있는 조건이다. 이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가장 잘 반응함으로써, 가장 민감한 지점에서 본격문학 혹은 순수문학이 놓여 있는 장(場)의 조건을 건드린다. “시대가 요구하는”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역사적 전망에 따라 미래를 선취하는 것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문학을 정치권력의 보조적인 도구로 만들거나, 21세기식으로 하면, 일개 문화상품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가 이 표현에 담겨 있다. 따라서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이 자율적일 수 있기 위하여 맞서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대중·통속문학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대중문학은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바로미터, 그것도 가장 민감한 지점을 건드리는 성감대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대중문학이라는 타자와 대면하면서 본격문학이 자기상실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다. 대중문학과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본격문학은 자신에게는‘본격’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상대에게는‘대중’혹은‘통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한 다음 재빨리 문학으로 회귀한다. 문학이라는 장의 내부에서 발견한 대중문학이라는 타자는 문학으로의 귀환을 위해 소모되었을 뿐, 본격문학이 대중문학을 위해 자기를 포기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대립구도와 마주하면서 느끼는 물음거리란 이런 것이다. 장르문학이 본격문학의 맞은편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대중문학을 대신한 자리에 장르문학이 놓이게 되었음을 뜻할 것인데, 그렇다면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관한 논의들은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본격문학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만큼은 장르문학이라는 타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아예 싸움에서 패해 자기 자리를 물려주게 될까. 아무래도 답하기에는 곤란하고 예측하기에는 어려운 물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일단 길을 떠나보아야겠다.

 

 

2. 지금,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도

 

다시 한번 하는 이야기이지만 대중문학이 장르문학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전히 반대편에는 본격문학이 있고 둘 사이의 위계도 그대로이니, 근본적인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새삼스레 소설의 위기를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의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도 달리 언급할 것이 없다. 상업적 성공이라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본격문학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 사이 문단 내부에서 보이는 장르문학에 대한 관심은 예사롭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하반기 이후의 작품들만 놓고 보아도, 박민규의 「크로만, 운」(『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원종국의 「두 사람이 보이는 자화상-Mix-and-Match 4」(『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윤이형의 「마지막 아이들의 도시」(『작가세계』 2007년 가을호), 「큰 늑대 파랑」(『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이명랑의 「2012년, 은하 스위트」(『문학사상』 2007년 9월호), 남한의 「갈라테아의 나라」(『문학수첩』 2007년 겨울호), 오현종의 「창백한 푸른 점」(『문학동네』 2007년 겨울호), 복거일의 「애틋함의 로마」(『문학과사회』 2007년 겨울호), 박상우의 「독서형무소」(『세계의 문학』 2008년 봄호) 같은 작품들이 SF와 판타지, 무협소설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다.2 물론 소설이란 것이 워낙 잡스러운 물건이라 “다른 모든 문학장르, 나아가서는 다른 예술들까지도 거의 다 흡수해버리는 경향이”3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여겨진다. 이들은 장르소설일까 아니면 장르소설적인 소설 혹은 장르소설의 상상력을 빌려온 소설일까. 혹 발표 매체가 달랐다면 우리가 느끼는 실감과 ○○소설이라는 규정 역시 달라졌을까.

평론가 강유정(姜由楨)은 박민규와 윤이형, 오현종의 소설들을 예로 들어 “이들의 소설은 외양적으로는 로봇과 우주, 싸이보그를 그려내지만 실상 그것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미래’혹은‘거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삶”이며, 이들이 빌려오는 SF적인 요소는 “관습적, 장르적 장치로서의 SF가 아니라 한국문학이 지금껏 중심으로 받아들인 적 없는 문체로서의 SF”4라고 평가한다. 의미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반성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이 있는 SF를 SF적인 외양을 가졌으나SF와는 다른 소설로 간주한다면 과연 순수하게 SF이기만 한 작품의 수는 얼마나 될까. 비근한 예로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부문 당선작인 조현의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냅킨 혹은 T. S. 엘리엇의‘황무지’중‘Ⅳ. 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을 두고 “인간사의 리얼리티를 진지하게 예술적으로 승화시킨‘순문학’을 중시하는 신춘문예에서 SF를 선정하다니!”5라며 놀라워하는 반응이 보인다. 본격문학 독자들에게는 SF적인 소설인 것이 장르문학 독자들에게는 그저SF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6 이쯤 되면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혹 경계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구분하는 매체들 사이의 경계가 아닐까.

문단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장르문학의 움직임은 더더욱 예사롭지 않다. 과학소설 전문무크지 『Happy SF』 창간호에는‘SF는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야심찬 제목의 좌담이 실렸는데, 사회자 임형욱은 이 자리를 마련한 의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전제로‘본격문학이 위기다라고 하는 상황에서 SF나 판타지가 본격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둘 사이에 관계성이 있고,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이 헤게모니를 잃어버렸을 때 다른 대안의 헤게모니로서 SF나 판타지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인데,‘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면 본격문학에서 가지는 위기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위기의 근원을 SF나 판타지가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을 나누어 보자는 것입니다.7

 

누군가의 위기는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는 법이다. 본격문학이 맞고 있는 위기의 실체에 대해서는 문단 내부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이것이 상업적인 실패와 독자들의 외면을 뜻하는 것이라면 본격문학의 위기는 장르문학이 복용할 만한 좋은 약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장르문학이 독서시장에서 비교우위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본격문학이 지금 장르문학을 마주해서 대중문학을 대극(對極)에 놓았을 때와는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전에는 본격문학이 대중문학에‘대중’문학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것이 본격문학에 미달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제는 종종 장르문학이 “주류문학에 있는 사람들이 본격문학이라는 틀 안에 갇혀서 SF를 잘못 해석하고 있고, 잘못 평가하고 있고, 왜곡하고 있다”“무지와 무식의 소치로 폄하하고 있다”8며 주류문학에 시비를 걸어오곤 한다. 그런가 하면 시장에서는 “순수(본격-필자)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중간소설”과 팩션, 칙릿, 추리소설, SF, 판타지, 스릴러, 로맨스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9을 제정하여 둘 사이의 경계 허물기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장르소설의 승리” 선언과 함께 “본격소설이 장르소설의 한 장르에 속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10을 조심스레 내놓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본격문학은 예전과 달리 수세에 몰린 채 장르문학과의 경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0년 전 오생근이 한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장르문학을 “강 건너 불 보듯, 무조건 비판적으로 경멸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다.”11

 

 

3.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장르적 관습

 

장르문학이라는 말은 좀 묘한 데가 있다. 장르‘문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장르문학은 장르‘소설’이다. 대중문학이나 통속문학의 하위항목에 시와 소설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장르문학은 오직 소설만을, 그러니까 판타지소설, 과학소설, 추리소설, 로맨스소설, 무협소설, 호러(공포)소설, 밀리터리소설 같은 것들만을 하위항목으로 거느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개별 장르문학들을 모아봐야 장르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개별 장르문학들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가령 무협과 판타지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혹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머지 소설 장르들을 아울러 장르문학이라고 지칭할 만한 준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각각의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관습들 사이에는 공통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거나, 혹 있더라도 비본질적이다. 그러므로 장르문학 내부의 유사성이란 일종의 가족 유사성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 우지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장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어떤 독자를 위하여 복무하는가’‘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복무하는가’‘진지성’‘예술적 가치’등속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 기준은‘장르적 코드’다. 그것도 수많은 에피고넨(epigonen)을 탄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코드’여야만 한다. 한 개별 작품이 백만부가 팔렸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장르’를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백만종의 유사품들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장르다.12

 

장르문학은 장르적 관습을 자각적으로 인지하고 이를 다시 작품을 재생산하는 데 활용한다. 본격문학 편에서 가장 크게 문제삼는 것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상품미학은 철저히 전략적이다. 히트상품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동종의 유사품들이 등장하여 유행이 만들어진다. 그럼으로써 히트상품은 히트장르로 확산되고 이에 따라 독자들의 기대수준이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변한다. 한 장르를 선택하는 것은 그 바깥의 다른 작품들을 선택하는 것보다,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손쉬운 일”13이라는 상품미학에 대한 비판은 또한 장르문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문학은 관습에 의존해 있다. 어떤 경우든 이러한 규약 없이 텍스트가 씌어지고 읽힐 수 없다. 독자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규약들을 적용하며 텍스트를 읽는다. “소설 속에 담겨 있는‘서사적 관습’이란, 독자들이 이야기를 그럴듯하다고 여길 수 있도록 개연성과 핍진성(verisimilitude)을 갖게끔 하는 제반의 문학적 의례들을 의미한다. 이 의례들은‘문학사’를 통해 작가들에 의해 창조되고 비평가와 연구자 들에 의해 축적되어왔다.”14 그러니 누구도 이 의례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장르란 본질적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계약 (…) 암묵의 동의와 계약에 기초하고 있는 문학적 기관”15인 것이다.

만약 본격문학 내부에서 장르문학이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이를 비본격적인 문학이라 비판한다면, 비판의 정당성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실천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본격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들이 장르문학 못지않게 어떤 서사적 관습에 의존해 있음을 보게 된다. 장르문학에 관한 좌담에서 김영하(金英夏)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요즘의 한국 순수문학의 주인공들은 관습적으로 음울합니다. 그가 왜 음울한지, 실직을 해서 그랬는지, 실연을 당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우울증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죠. 일종의 장르적 규칙과 유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왜 다들 가난하게 반지하방이나 옥탑방에 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죠. 다들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거죠. 가족관계는 희미하고 취미생활도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스쿼시나 골프, 수상스키 같은 걸 즐기는 주인공들은 없잖아요. 만약 순수문학의 장르적 규칙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취미는 이미 배제돼 있는 겁니다. 반면에 프라모델 조립처럼 혼자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은 허용이 되죠.16

 

김영하의 지적대로라면, 우리 소설은 또다른 의미의 장르문학이 되어 있는 셈이다. 더더욱 나쁜 것은 본격문학이 따르는 장르적 관습(만약 이런 것이 있다면)이 독자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즐기는 것은 장르적 관습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이다. 장르적 관습은, 그것이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도구로서 유용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유통된다고 보아야 한다. 공포영화를 예로 들자면, 관객들은 익숙한 장르적 관습이 등장하기 때문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습이 관객을 놀라게 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기에 놀라는 것이다. 장르적 관습이 관객에게 인지되고 상투적인 것이 되며 심지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기조차 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장르적 관습이 통용되는 것은 비단 상품생산을 위한 편의 때문만은 아니다. 장르적 관습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장르문학의 독자들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 그들이 장르문학을 읽는 것은 단순히 장르적 관습이 반복되는 데서 오는 재미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새로움 때문이다. 언급된 본격문학의 관습적 장치들은 흔해서 새롭지도 않고,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틀로서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화해내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예컨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기계, 이를테면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서 인간관계나 인식의 개념 자체가 바뀌었”고 “인간의 개념 자체가 기계적으로나 감각적으로 확장이 된 상황이지만, 순문학 입장에서는 이것을 상상하기”17 힘들다고 비판하거나, “적어도 SF는 조금 더 보편화될 필요가 있다. 과학과 과학적 상상력은 이제 현대사회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대상이며 대중은 SF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미 독자이기 때문이다”18라고 말할 때,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SF야말로 과학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그리는 데 더없이 적절한 장르라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과학기술이고 보면, 이 문제를 “문학의 고찰 대상으로 삼을 능력이 있는 작가들이 나오지 않는 이상 20세기식의 순문학이 21세기적 현실에 적응하기는 힘들 것”19이라는 이들의 진단이 억지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본격문학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현실을 형상화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가령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종종 소재로 삼는 신용불량, 개인파산, 사채, 투기 같은 자본주의사회의 병폐들만 해도 본격문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르문학이 더 많이 읽히는 것이 반드시 장르문학의 통속성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본격문학에는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혹 그 이야기가 본격문학에서는 시도된 바 없는 형식이나 장르를 요청하고 있다면, 이를 수용해오는 것이 작가의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좋은 장르와 나쁜 장르는 없다.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있을 뿐.”20

 

 

4. 장르문학의 모험과 문학의 미래

 

누구나 다 아는 대로 장르문학의 출현에는 컴퓨터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초 하이텔 동호회를 비롯한 통신문학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장르들이 양산되었고, 여기서 이영도와 듀나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리게 되었으며, 이들 동호회를 매개로 장르문학의 독자들이 팬덤(fandom)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본격문학에 관한 논의가 대개 평론가집단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며 간혹 어쩌다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수용되는 것과는 달리, 장르문학의 독자들은 “스스로 작품(원서)을 발굴하고, 번역하고, 번역과 편집에 대해 평가하고, 그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고 축적하는 수준에 다다라 있”21으며, 장르소설 내부에서 계보를 만들고 영웅을 만들고 일급에서부터 차례로 작품들을 분류하면서 그 나름의 문학사를 쓰기도 한다. 뛰어난 소수가 만들어가는 이코노믹스의 시대는 가고 공유와 공개에 기초한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인 능력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키노믹스22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대로라면, 충성도 높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장르문학은 적어도 양적인 면만 놓고 볼 때 위키노믹스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의미는 비단 경제의 관점이나 양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것이 어떤 작가의 생산품이 지닌 자명한‘예술성’이 아니라 어떤 생산품을 사회적‘예술영역’에 위치시키는 복합적인 힘이라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진 지식에 속하거니와, 본격문학이 본격문학으로서의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문학이라는 시장 내에 상징자본의 형태로 유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은 본격문학이라는 상품만이 유통되는 이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교환가치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하는 장르문학의 팬덤들은 문학시장 내부에 또다른 시장을 만들고 독자적인‘화폐’를 유통시킨다. 이들이 마니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마니아가 됨으로써만 작품에 내재한 고유한 가치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의 가치를 입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을 향한 주체편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던가. 마니아와 장르문학은 하나의 순환을 이루고 있다. 마니아는 스스로 마니아가 됨으로써 장르문학의 가치를 증명하고, 장르문학이 읽을 만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있음으로써 증명된다.

그러나 장르문학과 독자의 이 밀월관계는 종종 장르문학에 제약이 되기도 한다. 장르문학 내부에서는 “당대의 대중적 서사욕망을 읽어내는 것이 장르문학 생산자(작가, 출판인을 포함한)들의 우선적 과제”23라거나 “‘독자의 경향에 맞춰서’‘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르되’잘 써야 한다”24고 종종 이야기하는데, 본격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작가의식을 팔아 독자를 사는 일종의 매문(賣文)행위가 될 것이다. 장르문학이 오랫동안 대여점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다는 점도 부기해두자. 신무협을 대표하는 작가 좌백(左柏)에 따르면, 1백여명의 전업 무협작가와 4백여명의 작가군, 60여개의 출판사가 생산하는 8백권의 책은 7천개에 이르는 대여점을 통해 소비된다. “이 좁은 시장에 저 많은 작가와 책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 (…) 게다가 그 전업작가들 중 몇몇은 작년에 원고료만으로 몇억을 벌었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몇십만부 판 것도 아닌데), 그것이 거짓이 아닌 구조적 원인”은 “대여점을 중심으로 한 기묘한 창작과 유통 구조”에 있다.25 이 씨스템 속에서 장르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된다면, 아무래도 장르문학은 시장친화적일 수밖에 없고 시장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장르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주요한 이유도 결국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많은 장르문학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작가의식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어 이런 물음이 근거없지 않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자칫하면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에서 나와 그 편견을 확인하는 식의 논의로 이어지기 쉽다. 장르문학의 발생론적 배경이나 존재론적 조건으로부터 장르문학의 비진정성을 곧바로 연역해낸다면, 똑같은 논리로 소설책을 상품의 형태로 만들어 판매하는 상황으로부터‘소설〓상품’이라는 등식을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상품미학의 지배는 필연적이되 그 필연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 필연적이며 지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공세적’으로 저항하는 일, 또 그 안으로 잠입하여 폭파를 기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문화논리가 추구해야 할,‘차선’이 아닌 최선의 지향점이 아니겠는가”26 하고 물을 때, 이런 모험은 결국 실재하는 개별작품들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의 장르적인 존재방식 자체가 작품의 질적 수준을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것은〔도〕 아니”27라면, 장르문학 일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 작품들이 그려나갈 모험을 지켜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장르문학 내부에서는 의미있는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장르문학 편에서 느끼는 위기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기의식은 각 방면에서 두루 표출되고 있다. “현재 국내의 상황은 문학적 주제와 예술성이 부재한 저급 판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 (…) 최근 일부 언론에서 국내 판타지의 퇴조를 지적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급 판타지를 산출하지 못할 경우 독자들과 평론가들의 외면으로 인해 판타지문학은 필연적인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추리소설의 미래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입지가 축소되는 것은 순문학만이 아니다. 장르문학 또한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무협소설에는 미래가 있는 것일까. (…) 무협소설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2004년 현재 로맨스시장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 2002년 하반기 이후부터 대여점과 총판에 의존했던 장르소설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총판의 위기와 대여점의 축소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28

위기에 대응하여 장르문학 내부에서는 장르적 관습을 해체하거나 다른 장르와 이종교배를 시도하기도 하고, “작품성과 문학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상업성과 대중성을 획득할 길”이라는 믿음 아래 상업성과 대중성을 작품성이나 문학성과 동시에 추구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29 “세련된 문체, 소외된 인물의 조명, 변방이나 비주류 사회의 묘사 등”을 통해 무협 속의 문학성을 추구했던 신무협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30 이런 시도는 “패턴을 자기 파괴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기 장르의 패턴을 새롭게 확인하고 장르독자의 원형적인 서사욕망을 충족시키는 거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소수 독자의 적극적 지지와 다수 독자의 아연한 외면을 받을 확률이 높”31고, 대개 작품성이나 문학성이 상업성이나 대중성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모험에 가깝다. 실제로 신무협은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대중의 욕구에 발 빠르게 부응하지 못해 무협소설의 침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실험은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장르적인 문법의 제한이라는 존재조건 속에서도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스타일과 언어의 고유성, 나아가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획득”해내는 것이 “장르 속에서 장르를 넘어서는 일”이고, 이것이 곧 “상품이라는 외적 형식 속에서도 상품의 논리를 넘어서는 일에 해당된다”32는 평가가 비단 에꼬의 『장미의 이름』 같은 작품에만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들에게도 정당한 몫의 평가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새로운 문학(성)을 만들어내려는 무시무시한 모험정신”33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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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령 이동하(李東夏)는‘한국의 대중소설에 대한 검토’라는 과제 앞에서 느낀 낭패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낭패감은, 쉽게 말하자면, 대중소설이라는 낱말을 과연 어떻게 규정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왔다. 도대체 대중소설이란 무엇인가?”(「한국 대중소설의 수준」, 『문학의 시대』 제2권, 풀빛 1984, 53면) 이어서 대중소설의 윤곽을 제시한 후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대상으로 정하여 논의를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오생근(吳生根)의 「한국 대중문학의 전개」(『문학과지성』 1977년 가을호)에서는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 최인호의 『도시의 사냥꾼』, 한수산의 『부초』를, 송승철(宋承哲)의 「대중과 대중소설」과 김태현(金泰賢)의 「위기의 시대와 상품소설」(『문학의 시대』 제2권)에서는 각각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와 최인호의 『적도의 꽃』 『고래사냥』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2. 이런 추세를 반영이라도 하듯, 주요 문예지들은‘장르문학 혹은 라이트노블’(『작가세계』 2008년 봄호),‘새로운 소설장르’(『문학사상』은 2007년 10월호 이후 현재까지‘비주얼 노블’‘생태소설’‘판타지소설’‘역사추리소설’‘과학소설’등을 차례로 연재하고 있다) 같은 기획을 내놓고 있다.
  3. 롤랑 부르뇌프·레알 웰레 『현대소설론』, 김화영 옮김, 문학사상사 1990, 29면.
  4. 강유정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체, SF(Symptom Fiction)」, 『작가세계』 2008년 봄호, 247면.
  5. 인터뷰 「SF식 종이냅킨 접기-작가 조현을 만나다」, 『판타스틱』 2008년 3월호 36면.
  6. 쌔뮤얼 딜레이니(Samuel R. Delany)는 “그녀의 세계가 폭발했다”(Her world exploded)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 본격문학 독자와 SF독자가 작품을 읽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본격문학 독자들은 대개 “도대체 얼마나 격렬한 감정을 경험했기에 세계가 폭발했다고까지 한 것일까”라든지 “왜 이 여자는 이토록 동요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반면, SF독자들은 그녀가 거주하는 행성 내지 거주지(이를테면 우주선)가 실제로 폭발했다고 간주하고 폭발의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리라는 것이다. 김상훈 「현대 SF의 진화-포스트고딕에서 슬립스트림으로」, 『Happy SF』 창간호, 행복한 책읽기 2004, 17~18면.
  7. 좌담 「SF는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앞의 책 53면.
  8. 같은 글 74면.
  9.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http://www.newwaveaward.com).
  10. 김상온 「장르소설의 승리」, 『국민일보』 2007년 11월 7일.
  11. 오생근, 앞의 글 825면.
  12. 우지연 「꿈꾸는 세계가 있는 자만이 장르를 지지한다」, 『북페뎀』 2004년 여름호 40면.
  13. 서영채 「멀티미디어와 서사」, 『소설의 운명』, 문학동네 1996, 125면.
  14.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 푸른역사 2003, 390면.
  15. F. Jameson, “Magical Narrative: Romance as Genre,” New Literary History, No.7, 1975, 135면.
  16. 좌담 「장르문학과 장르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들」,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1155면.
  17. 좌담 「SF는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중 김상훈의 발언, 앞의 책 70면.
  18. 듀나 「SF문학의 오늘-‘일반’의 부재」,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1115면.
  19. 좌담 「SF는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중 김상훈의 발언, 70면.
  20. 이영도 「장르 판타지는 도구다」,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1107~8면.
  21. 임형욱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를 넘어서」, 『북페뎀』 2004년 여름호 262면.
  22. 위키노믹스(wikinomics)는 위키피디아(wikipedia)와 이코노믹스(economics)의 복합어로,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200년 역사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보량을 5년 만에 훌쩍 뛰어넘은 데서 착안한 말이다.
  23. 우지연, 앞의 글 48면.
  24. 문현선 「무협소설에는 미래가 있을까」, 『북페뎀』 2004년 여름호 189면.
  25. 좌백 「통신무협과 신무협」,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1119면.
  26. 서영채 「문화산업의 논리와 소설의 자리」, 앞의 책 69면.
  27. 같은 곳.
  28. 인용 순서대로, 『북페뎀』 2004년 여름호 중 김성곤 「왜 지금 판타지인가」, 35면; 조성면 「도전으로서의 추리소설」, 176면; 문현선 「무협소설에는 미래가 있을까」, 187면; 한미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장르소설」, 195면.
  29. 좌백, 앞의 글 1123면.
  30. 문현선, 앞의 글 183~84면.
  31. 우지연, 앞의 글 43면.
  32. 서영채, 앞의 글 68~69면.
  33. 장은수 「새 문학 위한 치열한 모험정신 필요한 때」, 『조선일보』 2001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