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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21세기 일본소설의 경계와 탈경계

‘나’의 말이 자리하는 곳

 

김항 金杭

문학평론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서로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 2000』 『근대초극론』 등이 있음. ssanai73@hotmail.com

 

 

1. 시부야를 거닐다

 

시부야(澁谷)의 넓은 역앞 광장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도로 쪽으로 눈을 돌리면 유명한‘스크램블 교차로’가 보이고, 신호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번갈아가며 도로를 점거한다. 광장에서 이 교차로를 건너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토오꾜오 풍경이 나올 때 단골로 등장하는 몽환적인 디스플레이가 밤을 밝히고 있는데, 화면을 보며 길을 걷다 보면 클랙슨 소리에 놀라거나 앞사람 신발을 밟기 십상이다. 이렇게 길을 건너면‘쎈터거리’라 불리는 젊은이들의 유흥가로 이어진다. 이 요란한 거리를 지나 길을 하나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조금 전에 지나온 현란하고 소란스러운 유흥가는 온데간데 없고, 거리는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다. 그곳은 빠리의 까페‘되 마고’(Les Deux Magots) 토오꾜오 분점이 있는‘분까무라(文化村)’가 자리한, 토오꾜오에서도 유수의 부자동네인‘쇼오또오(松濤)’의 초입인 까닭이다.

시부야를 거닐다 보면, 이렇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지러운 공간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묘사하는 것은 진부한 도시론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 혹은 직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이 공간이 바로 현대 일본문학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부야거리가 현대 일본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경험적 기반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현주소라 함은 시부야라는 여러 의미에서 혼성적인 공간이 현대 일본문학판 자체의 알레고리로 드러나고 있다는 뜻이다. 역앞 광장에는 다양한 계층, 세대, 인종이 뒤섞여 있다. 이들은 각각 쎈터거리로, 분까무라로 혹은 약간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도오겐자까(道玄坂)의 뒷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온다. 이 뒤섞임과 나뉨의 동시적 공존이야말로 현대 일본문학판을 특징짓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부야와 문학판의 겹침은 단순한 형상의 겹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뒤섞임과 나뉨이라는 이 알레고리적 형상의 진정한 중요성은 바로 두번의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문학이 돌아온 곳이 언제나 시부야였다는 역사성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다. 특공대의 용사는 이미 암상인이 되었고, 전쟁 미망인은 어느새 새로운 그이로 인해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뿐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의인(義人)도 성녀도 타락한다. 그것은 막을 수 없을뿐더러, 막는다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살고, 인간은 떨어진다. 그것 외에 인간을 구하는 편리한 길은 없다.”(사까구찌 안고坂口安吾 「타락론」, 1946) 안고는 패전 직후 토오꾜오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암시장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그곳은 추락할 데까지 추락해야 비로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장소였다. 일본 전후문학계의 거장 이시까와 준(石川淳)이 자신의 소설세계를 구축한 곳도 바로 이 암시장이었는데, 시부야는 우에노(上野)에 버금가는 암시장이 형성된 곳이었다. 원래 시부야는 고급관료와 장교들이 주로 사는, 도시 중산층의 조용한 거주지였다. 그런 곳에 암시장이 형성된 것은 이곳이 요꼬하마로 이어지는 중산층 교외주택지의 종착역이었기 때문인데, 현재 시부야 쎈터거리의 상가구획은 새끼줄로 표시된 암시장의 임시구획과 거의 일치한다. 아마 현재의 소란스러움은 암시장 이래의 것으로, 전후문학은 이 소란 속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이미 전후 일본문학은 수많은 정체 모를 사람들이 모여드는 암시장에서 탄생했고, 위험함과 음험함으로 가득 찬, 하지만 그곳 없이는 삶이 불가능한 이 장소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혼성적 공간이야말로 전후 일본소설의 숨은 기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한편 1994년 아베 카즈시게(阿部和重)라는 소설가가 데뷔하면서 일본 문학계에서는‘J문학’또는‘시부야계 문학’이라 불리는 장르가 등장한다. 평론가 아즈마 히로끼(東浩紀)가 말하듯이 “90년대 시부야를 거니는 일은 이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헤매는 일이었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일”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이 장소를 피해간 반면, 아베 카즈시게는 “이 혼란과 분열 한가운데서 살기 위해 소설을 썼다.”1 시부야가 일본문학에서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 것은 이 시기부터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은 이른바 버블경제의 호황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토오꾜오 전체가 주연(酒宴)의 뒷자락을 붙잡고 어찌할 줄 모를 때였다.‘J문학’은 이때 등장했다. 버블경제가 한창일 때 주연이 끊이지 않았던 시부야는, 그때까지 뒷거리에 숨어 있던 폭력과 약물만이 남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베 카즈시게는 이 장소에서 현대 일본의 리얼리즘을 발견했고, 눈을 돌리기는커녕 이 폐허에서 소설의 언어를 주조해냈다. 그런데 이 언어는 그때까지 일본소설을 규정해왔던‘나’의 목소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언어는J-POP, 게임, 휴대폰을 매개로 한 혼성적인 언어였으며, 고도성장기 이후 처음으로‘폭력’과‘빈곤’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90년대 이후 일본 현대문학과 시부야는 이렇게 조우했다. 즉 고도성장기부터 버블경제의 호황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경제전쟁’에서 승리한 듯했는데, 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문학의 언어는 다시금 시부야로 돌아온 것이다.

2차대전에서의 패배와 경제전쟁에서의 패배, 이 두가지 패전 이후 문학의 언어는 언제나 시부야로 돌아왔다. 이때 시부야란 암시장의 구역 분할에 쓰인 새끼줄로 상징되듯, 어떤 경계가 그곳에서 지워짐과 동시에 비롯되는 혼성적 장소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본 근대문학의 역사에서 보자면, 이 경계의 (재)분할은 언제나‘나’와 관련되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까구찌 안고가 철저하게 떨어지는 것만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 때, 이는 타이쇼오(大正)시대부터 일본 순수소설의 본령이던‘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사소설의 작가이자 주인공‘나’는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충실한 도덕적인 태도로 시적 정신에 기초한 자기고백을 이루어내는 주체였는데, 사까구찌 안고는 이러한 투명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락할 데까지 타락한 인간을 문학의 주체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시까와 준과 더불어‘육체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일본 순수문학은 이 새로운 장르 앞에서 스스로의 경계선을 재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때‘나’의 말은 자기도덕과 시적 정신이 아니라,‘육체’와‘욕망’위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베 카즈시게도 이‘나’를 문제삼았다. 요시모또 바나나(吉本ばなな) 등으로 대표되는 80년대 후반의 작가들은 세상이 나와 관계없이 잘 돌아간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투정과 행복만을 고백해왔다. 그러나 아베는 이러한 세대들이 애써 외면한 외부세계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아베의 방식은 기존 소설과는 달랐는데, 그는 외부세계나 타인을 철저히 컴퓨터게임, 특히 액션게임 속의 배경과 캐릭터로 해석했고, 이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자신마저도 하나의 롤플레잉게임 속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시부야에 둥지를 튼 이유는 이곳이 바로 이 게임적 공간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레벨이 바뀔 때마다 장면은 바뀌지만, 이 장면들은 모두 하나의 게임 안에 들어 있다. 이같은 혼성적 공간 속에 소설의 언어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물론 내용과 형식은 매우 다르지만, 일본 근대소설의 본령을 이루어왔던‘나’의 투명한 목소리는, 전면적인 파국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경계가 불분명한 혼성적인 공간, 즉 시부야로 되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패전 직후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 후반 이후의 현대 일본문학은 여전히 이 혼성적인 공간 속에서 어떤 경계를 그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중인 것 같다. 2008년 봄, 일본의 주요 문예지들은 합의라도 한 듯이‘문학’의 경계를 둘러싼 좌담을 개최했고, 거기에서 수많은 작가와 평론가들은 일본문학의 현황에 대해, 특히 앞으로 소설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어 의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베 이후의 현대소설이 SF, 게임, 음악, 영화, 인터넷, 휴대전화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표현양식을 채택하고 있는 상황에서,‘나’의 말은 더이상 문학의 경계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와 환호가 뒤섞여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문학판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좌담을 중심으로 현재 일본문학계의 소설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려 한다.

 

 

2. 21세기 일본문학, 게임과 인스톨

 

먼저 살펴볼 대담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문학평론가인 타까하시 겐이찌로오(高橋源一郞)와 작가 사이또오 미나꼬(齋藤美奈子)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2 여기서 타까하시와 사이또오는 아베 카즈시게가 21세기 일본‘현대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하면서, 우선 그전 세대 소설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타까하시 분위기로 보면 80년대 작가들은 버블경제를 반영하고 있죠. 특별히 버블경제로 난리법석을 떤 잔치 분위기를 소재로 삼지 않았더라도 순수한 판타지나 우정소설 같은 것도 말이죠.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든 요시모또 바나나든 버블이라는 배경이 없었으면 쓰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이또오 무언가 안심하고 쓰고 있다는 느낌이죠. 세상은 괜찮다는. 그 속에서 각각이 탐구해야 할 재미있는 문장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고, 문학이 그야말로 유행, 즉 모드였죠. 야마다 에이미도 요시모또 바나나도 데뷔작으로 바로 스타가 됐잖아요. 그런데 90년대에 벌써 붐은 지나가버렸죠. “풍요로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 이런 거죠 말하자면.

 

80년대 후반의 일본문학은 하나의 역사가 극점에 다다름과 동시에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내내 일본사회를 윤택하게 한 호황은 “Japan as No. 1”이라는 구호를 가능케 했고, 결국 60년대 이후 정부 주도로 전개된 경제발전 드라이브가 성공을 거둔 것처럼 여겨졌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자본주의국가들은 너도나도 일본의 생산방식을 벤치마킹했고, 토요따로 상징되는 창의적 노동과정은 포드주의와 포스트포드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하는 듯했다. 아사다 아끼라(淺田彰),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 하스미 시게히꼬(蓮見重彦) 등이 평론계의 스타로 부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들은 이른바 일본의 포스트모던 비평을 주도했고, 이제 문학의 언어가 결정적으로‘역사’이후의 언어가 되어버렸음을 알렸다. 즉 더이상 소외나 투쟁을 매개로 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역사적으로‘발전’한다는 도식과, 이 도식 속에서 사회의 총체적 지양(止揚)을 온몸으로, 실패하든 성공하든, 체현하는‘나’는 성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야마다 에이미나 요시모또 바나나가 그전 세대의 소설가들, 즉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나 무라까미 류우(村上龍)와는 전적으로 다른 문학의 언어를 구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온 국민이 중산층”이라는 화려한 성공의 신화 아래, 풍요로운 외부세계는 문학의 언어에서 변화하지 않는 배경으로 고정화되고, 그‘완성된’무대 위에서‘나’의 말은 더이상 공적인 언어가 되기를 지향하지 않고 사적인 웅얼거림인 채로 부유하게 됐던 것이다. 이때 하나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나’의 말이 공적인 언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공적인 것은 이미 완성되어 거기에 있음과 동시에 더이상 인간의 행위로부터 구성되기를 그친다. 공적인 것이 “모두의 것”(respublica)을 뜻하는 한에서, 하나의 역사는‘나’의 말을‘모두’의 말로 지양하는 과정 그 자체인데,‘나’의 말이‘나’의 것으로 머무는 한에서 더이상‘말’은 역사 속에서 자리하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꼬제브(A. Kojève)가 말한 대로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말을 하지 않는 동물 혹은 내용 없는 완벽한 형식을 반복하는‘스놉’(snob)이 잔존하게 된다면, 80년대 후반 일본문학의 언어는 이런 동물이나 스놉의 언어였던 셈이다. 완성된 풍요로움이 인간을 동물로, 스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의 종말은 단순한 역사의 해프닝에 다름아니었다. 야마다 에이미나 요시모또 바나나의 문학적 성공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3 이들이 배경으로 밀어낸 외부세계가 처참하게 산산조각나 무대 자체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평론가 후꾸다 카즈야(福田和也)는 다음과 같이 이 상황을 말한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야 할‘일본’조차 없다. (…) 말하자면 90년대를 거치며 우리나라는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틀이나 전망의 전면적인 붕괴를 체험했지만, 아직 새로운, 편리한 방법을 손에 넣지 못했다.”4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전망도 없는, 이 망연자실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아베 카즈시게로 대표되는‘J문학’이다. 이런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등장한 것은 1998년을 전후해서인데, 이때부터 일본문학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것이 타까하시의 판단이다. 야마다 에이미나 요시모또 바나나의 언어가 비록 사적인 웅얼거림에 머무는 것이었더라도, 여전히 그것은‘나’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언어는 더이상‘나’의 언어가 아니다.

 

98년 이후라면 상징적인 것은 히라노 케이이찌로오(平野啓一郞)의 데뷔죠. 히라노 케이이찌로오는 무엇이든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히라노 케이이찌로오의 모티프가 뭐냐, 이런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답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라까미 하루끼나 무라까미 류우 같은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자신이 무언가를 짊어졌고, 그것을 소설로 표현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문학계에서는‘시대’든‘개인’이든 어쨌든 신인은 무언가를 짊어졌습니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썼던 거죠. 이것은 근대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른바 문학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이었던 겁니다. 신인이 각광을 받아온 것은 이들이 무엇을 짊어지고 있나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데, 히라노 케이이찌로오는 그런 독해방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5

 

물론 히라노 케이이찌로오는J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시부야가 아니라 쿄오또(京都)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에서 폭력이나 빈곤 등을 소재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재나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적인 언어로 말하는‘나’의 소멸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히라노 케이이찌로오 혹은 아베 카즈시게의 소설에는‘나’의 목소리가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 속에서‘나’는 작가-주인공으로서의‘나’라기보다는, 더이상‘나’로 불릴 수 없는‘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해낸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이미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 스스로가 어떤 캐릭터의 역할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소설 쓰기-팔기-읽기라는 일종의 게임 속에서 매번 다른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다.

 

타까하시 그래서 이것은 매우 넓은 의미에서 게임감각입니다. 하지만 게임소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일 자체가 게임인 거죠. 히라노씨가 오해받기 쉬운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말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 이런 질문이 제기되곤 하는데, 읽는 쪽 감각이 근대문학인 거죠.

사이또오 인간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식의 지적이죠.

타까하시 네, ‘나’는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사이또오 그런 건 없는데도 말이죠.

타까하시 소설이나 문학에 기대되어온 것은 그‘나’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였죠. 인간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느냐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으로 문학이 읽혀왔던 겁니다. 그런데 히라노씨나 이 세대 작가들을 그렇게 독해하면 공이 엉뚱한 데로 튀는 것과 마찬가지죠.

 

아마도 1998년 이후 10년 동안 일본 현대문학을 특징짓는 가장 큰 양상이 바로 이같은 문학(소설)의‘게임화’일 것이다.J문학에 등장하는 폭력의 주체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게임으로 치환하여 해석하고 행동한다. 아베의 『인디비주얼 프로젝션(インディヴィジュアル·プロジェクション)』에서 주인공은 철저하게 세계와 타인을‘클리어해야’하는 게임의 한 단계로 만난다. 즉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클리어해야’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단계일 따름이다. 이는 아베가 소설을 쓰는 태도 그 자체와 겹쳐 있는데, 그는 도심 한복판 시부야라는 레벨을 넘어서 다음 레벨인 야마가따(山形)라는 지방도시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여전히 소설쓰기라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히라노 케이이찌로오도 데뷔작인 『일식(日蝕)』에서 일본 초기 근대소설의 현학적인 레토릭을 구사한 다음, 스케일이 큰 역사소설로 무대를 옮긴 뒤, 현대를 소재로 한 단편을 발표하고 있다. 아마도 히라노 케이이찌로오라는 이름을 감추고 이들 소설을 따로 읽었을 때, 같은 작가가 쓴 작품임을 알아맞히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듯 게임이라는 장르가 소설창작 그 자체의 원리 속에 자리잡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작품이 와따야 리사(綿矢りさ)의 『인스톨(インスト-ル)』이다. 와따야 리사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蹴りたい背中)』으로 2004년 아꾸따가와상(芥川賞)을 수상했는데, 이 작품은 2001년 17살에 쓴 데뷔작이다. 한 중학생 소녀와 초등학생 소년이 공동으로 인터넷 음란사업을 벌인다는 줄거리의 이 작품은, 컴퓨터 운영체제(OS)의 인스톨이 이야기의 시작(둘의 만남)과 끝(소녀가 사업을 접고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감)을 지배한다. 즉 만남과 새로운 삶이 모두‘인스톨’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역사’가 없다. 인스톨은 언제든지 언인스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쓰기-인생이 인스톨로 해석될 때, 그 언어는‘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의 운영체제에서 설정된 기계어이다. 이렇게 현재 일본의 문학판에서는 게임-컴퓨터 문법이 소설로 유입되어 새로운 장르적 실험들을 가능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소설이 어떤 식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혹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가 논의되고 있다. 이때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논의의 초점은‘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배꼽 없는 소설, 소설의 경계

 

1958년 『분가꾸까이(文學界)』 8월호 권두에 한 좌담이 실렸다. “일본의 소설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이 좌담은, “잇따른 신인들의 등장으로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는 일본문학의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장래의 나아갈 방향을 검토한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이 좌담에는 당시 문단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작가 및 평론가 13명이 참가했고, 이른바 전중(戰中)세대부터 전후세대까지 아울렀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문학계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때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후까사와 시찌로오(深澤七郞)의 『나라야마 부시꼬오(楢山節考)』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가인 후까사와가‘문단’바깥에서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소설은‘순문학’‘대중소설’‘중간소설’로 분류되었다. 여기서 순문학은 문단의‘사소설’계열의 작품을, 대중소설은 줄거리 중심의 통속소설을 뜻한다. 중간소설은 전후 순문학 작가들에게 상업지들이 대중소설을 쓰게 하면서 등장한 장르인데, 1958년은 중간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후까사와의 작품은 문단 바깥에서 중간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소설들에 의해 기존의 소설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게 된다는 위기감을 좌담 참가자들은 공유하고 있다. 이를 놓고 평론가 타까미 준(高見順)은 “배꼽 없는 소설”, 즉 “스스로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소설”이 난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감을 해소해줄 요인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TV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다. 토오꾜오타워 완성으로 상징되는 1958년은 일본에서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 전해에 토오시바가 처음으로 컬러TV를 출시했고, 1954년 1만건이던 NHK수신계약이 1958년에는 100만건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보였다. 이 좌담에서 참가자들은 중간소설이 인기를 얻고 있지만, 결국에는 TV에 흡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TV는 순문학을 위협하는 새로운 매체라기보다는, 기존의 소설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중간소설을 흡수해주는 교통정리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간소설은 TV가 흡수해줄 테니, 순문학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나’의 목소리를 최대한 도덕적이고 시적인 정신으로 그려내면 된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소설의 언어와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일본문단은‘사소설’이라는 일본 특유의 장르가 소설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 후 『분가꾸까이』 2008년 4월호에는 이 좌담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좌담이 실렸다. 당연히 여기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나’의 문제였는데, 논의의 전개는 50년 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앞서 말한‘캐릭터’로서의‘나’라는 인식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11명이나 되는 참가자 각각의 의견을 여기서 낱낱이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캐릭터로서의‘나’에 대한 스와 테쯔시(諏訪哲史)의 발언을 인용해보자.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현실의 나조차도‘세계극장’속의 한 등장인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체는 없는 거죠. 물론‘나’라는 일인칭이 소설에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복화술 인형 같은 것으로,‘나’라는 것이 세계나 소설 속에서 말하도록 조종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완전한‘타자’로서‘나’를 쓸 수 있는 것이죠. (…) 그래서 캐릭터로서의‘나’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6

 

소설에 등장하는‘나’를 세계극장 속의 한 등장인물인‘나’가 쓴다고 가정할 때, 소설의 작가와 등장인물은 궁극적인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 이는 이를테면 이중의 게임이다.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芥川龍之介)와 타니자끼 준이찌로오(谷崎潤一郞)의‘플롯논쟁’이래로 일본문학계의 소설 논의는‘나’를 둘러싸고 전개되어왔다. 순문학을 대변하는 아꾸따가와는 줄거리 따위는 궁극적으로 소설에 필요없는 것으로서, 어떻게 작가인‘나’가 느낀 바를 도덕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소설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타니자끼는 작가인‘나’의 신변잡기를 표현하는 것이 과연 소설이냐고 반문하면서, 독자들은 작가와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한다고 반박했다. 1920년대의 이 논쟁이 앞에서 말한 사소설과 대중소설의 경계를 나누는 분할선을 처음으로 그었고, 이는 현재까지 여전히 일본에서 소설의 경계를 논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설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아꾸따가와도 타니자끼도‘나’의 실재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즉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작가로서의‘나’는 실재하는 것이며, 문제는 소설 속에 그 존재를 드러내느냐 마느냐였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일본의 소설에 대한 논의는 이‘나’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데서 그전 논의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소설을 쓰는‘나’라는 존재가 일관되고 투명하게 존재하느냐이다. 특히 말하는‘나’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 즉 특정한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때‘나’는 더이상 일관된 존재가 아니라 게임처럼 인스톨할 때마다 새로운 역할을 떠맡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평론가 아즈마 히로끼(東浩紀)가 소설가 사꾸라자까 히로시(櫻坂洋)와 공동으로 2007년 『신쪼오(新潮)』에 연재한 「캐릭터즈」라는 소설은 이러한‘나’가 쓰고 등장하는 전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아즈마 히로끼이다. 하지만 이 아즈마는 이 작품을 쓰고 있는 아즈마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아즈마 사이의 거리야말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소설이기도 하면서 비평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아즈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비평이란 현실의 자신과 텍스트 내의‘나’를 중첩시킴으로써 글의 힘을 확보한다는 점에서‘사소설’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인터넷을 보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고 저 또한 그 안에서 비평작업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인터넷상에서 “아즈마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라는 독자의 억측이 난무하고, 저는 그것을 읽고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여 이를 염두에 두고 다음 글쓰기를 하는 과정이 그겁니다. 그 결과 저에게 비평을 한다는 일이 언젠가부터 캐릭터 아즈마 히로끼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건 자학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서, 어떤 상황에 아즈마라는 캐릭터가 있으면 재미있겠지 하는 것을 비평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것이죠. 즉 지금 멤버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즈마는 독자들에게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 좌담에 참가했고, 그런 감각을 그대로 써본 것이 「캐릭터즈」였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떤 텍스트가 텍스트 주변의 커뮤니케이션 소비를 어떻게 포함하면서 성립하느냐입니다.7

 

여기서 아즈마는 텍스트를 저자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메씨지로 보지도, 저자와 상관없이 독자들 사이를 부유하는 어떤 말뭉치로 보지도 않는다. 그에게 텍스트는 어디까지나‘나’의 목소리이다. 하지만 이‘나’는 말하는‘나’가 아니다. 여기서‘나’는 독자들이 억측하는‘나’를 연기하는‘나’이다. 즉 독자와 실재의 내가 말하게끔 하고 있는‘나’가 텍스트의 작가인 것이다. “텍스트가 텍스트 주변의 커뮤니케이션 소비를 포함하면서 성립한다”고 할 때, 아즈마는 텍스트가 동일한 캐릭터를 상이하게 조작하는 게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최근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8은 바로 이런‘나’를 분석한 것인데, 여기서 그는 최근에 등장한 SF, 판타지 장르인‘라이트노블’(light novel)이나‘게임소설’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즈마의 분석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새로운 장르들이 오따꾸(オタク) 문화를 넘어서서, 순문학이라 불려온 사소설과 다른 형식의 사소설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캐릭터 소설과 사소설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캐릭터 소설은 텍스트 바깥에 작가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가가 일인칭으로 말하더라도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죠. 반면 사소설에서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닻을 내리는 곳은 작가 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캐릭터 소설은 복수의 작가가 하나의 사소설을 썼다는 모순인 셈이죠.9

 

이를 그의 작품 「캐릭터즈」를 통해서 보면, 주인공 아즈마라는 캐릭터를 현실의 아즈마 히로끼와 사꾸라자까 히로시라는 복수의 작가가 그려냈다는 의미에서, 캐릭터 아즈마는 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와 똑같은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는 사소설이기도 하다. 이같은 게임과 순문학의 혼성적인 창작물이야말로 현재 일본에서 소설의 경계와 탈경계가 뒤엉켜 있는 양상이다. 아즈마가 아즈마를 인스톨하거나 언인스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이야말로 현재 일본의 소설이 혼성적 공간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4. 시원(始原)과 반복, ‘나’의 이야기

 

지금까지 다소 이론적인 방식으로 현재 일본문학계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정작 최근 일본문학계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을 꼽으라면, 단연‘케이따이소설(携帶小說)’, 즉 휴대전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소설창작 싸이트에 접속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는 방식으로 시작된 이들 소설은, 싸이트에서 인기가 높았던 것이 오프라인에서 책으로 출판되면서 문학출판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장르가 되었다. 작년 소설부문 베스트쎌러 10위 안에 무려 여섯 작품이 케이따이소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성공이 문학계에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 소설들의 내용이 하나같이 소녀들이 실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경험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골 소녀가 선배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미혼모가 되어 고생한 이야기나, 첫사랑과 기이한 인연으로 헤어지게 된 이야기 혹은 동네 폭력배들의 이야기 등이 이들 소설의 단골메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 이야기는 오자끼 코오요오(尾崎紅葉)의 『콘지끼 야샤(金色夜叉)』10 같은 근대 초기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소설이‘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즉 거의 대부분의 케이따이소설이 자기 체험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케이따이소설상 심사위원을 맡았던 한 평론가는 이를 두고 “궁극의 사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작가를 만나보면 열이면 열, 소설 속의 주인공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중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11 하지만 이 소설을 이른바‘사소설’의 전통 안에 위치시키는 데 동의할 작가나 평론가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는 현재 일본문학계가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고백하는‘나’의 말이 폭발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를 문학의 융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야말로 사소설을 순문학이라고 정의해온 일본 근대문학의 전통이 흔들리고 있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한편에서는 캐릭터화된‘나’가, 또 한편에서는 문학이라 인정될 수 없는‘나’가 순문학을 탈경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 말을 떠올려보는 것은 무익한 일이 아닐 터이다. “사소설은 망했지만 사람들은‘나’를 정복한 것일까? 사소설은 또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플로베르의‘마담 보바리는 나’라는 유명한 도식이 망하지 않는 이상.”12 70여년 전 일본 근대문학의 근원을 목도했던 코바야시의 말은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아마도 게임,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 새로운 소설의 장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존 소설과 대면하여 시부야처럼 경계와 탈경계가 혼합된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일본의 소설은‘나’의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뿐더러, 언제나 그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시부야로 되돌아온 문학의 언어가 언제나‘나’의 목소리가 자리하는 곳을 찾아 헤맨다는 이 시원의 반복은, 아마도 일본의 근대적 주체가 이미 혼성적임을, 그러나 언제나 투명함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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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阿部和重 『インディヴィジュアル·プロジェクション』, 新潮文庫 2000, 206면.
  2. 高橋源一郞·齋藤美奈子 「デジタル·ハイヴィジョン的リアリズムの時代に到達した」, 『文藝』 2008년 여름호.
  3.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소설이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한국의 상황은 현대 문학사를 검토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의 사적인 언어가 문학의 이름으로 여전히 소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외국문학의 수용 문제라기보다 한국문학의 언어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검토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4. 福田和也 『現代文學』, 文藝春秋 2003, 303면.
  5. 앞의 좌담.
  6. 「ニッポンの小說はどこへ行くのか」, 『文學界』 2008년 4월호.
  7. 東浩紀 「小說と評論の環境問題」, 『新潮』 2008년 2월호.
  8. 東浩紀 『ゲ-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講談社 2007.
  9. 東浩紀 「小說と評論の環境問題」, 『新潮』 2008년 2월호.
  10. 이수일과 심순애가 주인공인 『장한몽』으로 번안되어 한국에 소개된 일본소설.
  11. 「ケイタイ小說は作家を殺すか」, 『文學界』 2008년 1월호.
  12. 小林秀雄 「私小說論」(1935), 『小林秀雄全集』, 新潮社 1982, 1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