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만해문학상 발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3년 창비가 제정한 만해문학상 제20회 수상작이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2005년 11월 18일(금) 오후 6시 30분 한국프레스쎈터 국제회의장에서 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20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김원일 연작소설 『푸른 혼』
심사위원
본심: 고은 염무웅 오생근
예심: 박영근 김영찬 전성태
2005년 7월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및 심사평
예심위원들(박영근 김영찬 전성태)의 노고를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시집 네 권과 소설집 세 권, 그리고 평론집과 산문집이 각각 한 권으로 모두 아홉 권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 중에서 독특한 투시적 상상력으로 사물과 대상의 감춰진 면을 드러낸 김기택 시집 『소』, 담백한 필치로 인혁당사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깊이있게 통찰한 김원일 소설 『푸른 혼』, 그리고 옥중편지 형식으로 역사의 굴곡과 함께 부침한 한 지식인의 삶을 기록한 정수일의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논의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인식의 면에서 만해의 문학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김원일의 『푸른 혼』을 선정하였다.
김원일은 오랫동안 6·25전쟁과 분단의 비극 그리고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해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각적으로 천착해온 작가이다. 최근에 이르러 장애인과 노인 등 불행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에 대해 작가적 관심을 확산시켜나가면서도, 그는 줄곧 사회현실과 개인적 삶의 역학관계를 끈질기게 탐구하였다. 『푸른 혼』은 이런 탐구의 연장선에서, 왜곡된 역사현실에 대한 정의의 의지와 그 현실의 폭력에 희생당한 순결한 영혼들을 진혼하려는 작가적 책무가 결집된 작품이다. 연작 형식의 이 작품집에서 작가는 인혁당사건의 반복적 서술과 단조로운 전개를 피하기 위해 어떤 때는 개인적 삶의 우여곡절에 촛점을 맞춰 이야기하다가 또 어떤 때는 인물의 내면적 성찰과 꿈에 비중을 두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작품의 주제와 인물의 성격에 따라 주관적인 일인칭 서술과 객관적인 삼인칭의 시점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삶의 내부와 외부를 다양하게 조명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 어느 작품에서건 진실을 추구하는 작가의 엄정한 정신, 삶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증언하려는 작가적 성실성은 만해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이 시대의 문학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高銀 廉武雄 吳生根〕
수상자 약력
金源一 194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66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장편 『노을』 『바람과 강』 『겨울 골짜기』 『마당 깊은 집』 『늘푸른 소나무』 『불의 제전』 『슬픈 시간의 기억』 등과, 중·단편집 『어둠의 혼』 『도요새에 관한 명상』 『그곳에 이르는 먼 길』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 등을 출간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우경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상소감
차마 잊을 수 없었기에
김원일
1975년 4월 9일에 인혁당사건 관련자 여덟 명이 서대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분들은 아무 죄도 없었기에 당국은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기 위해 온갖 고문을 자행했고 그분들을 입막음하려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고 하루가 채 못되어 전격 처형했던 것이다. 서슬푸른 유신정권 긴급조치체제라 아무도 그 살인을 막지 못했다. 나 역시 그분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대구를 방문할 때마다 그분들이 만나 회포를 풀고 술추렴을 했던 약전골목 일대를 용맹 없이 거닐곤 했다. 나는 여덟 분 중 한 분도 살아생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분들이 남긴 증명사진만을 늘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들이 허무하게 잊혀져버린 우리들의 희망과 절망을 당신이 기억해달라고 내게 말을 걸어올 때마다 글쟁이인 나는 부끄러웠다. 계속 써서 책을 묶어내는데 그 글들이 무슨 호작질이냐는 자성의 힐책이 괴로웠다. 언젠가 그분들의 한맺힌 사연을 촘촘히 엮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다짐했으나 세월이 흘러 갑년을 훌쩍 넘겼다.
2002년 나는 그분들의 진솔한 삶을 글로 엮기로 마음먹었다.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유가족을 만나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쓸 것이냐를 두고 한 해를 보냈다. 2003년 가을부터 집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지하에서 그분들의 혼령이 내게 힘을 실어준 탓인지 글은 의외로 빨리 진척되었다. 나는 열병에 걸린 듯 몸살을 앓으며 하루 대여섯 시간을 의자에 붙어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금년 1월 책을 내고, 4월 9일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30주기를 맞아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외곽 팔공산 산자락 칠곡군 현대공원묘지에 여덟 분 중 네 분의 묘소가 있기에 참례는 두번째였다. 선생들의 얘기를 소설이란 틀로 가공하여 열심히 엮긴 엮었으되 나온 책은 겨우 이 꼴밖에 되지 못했다고 나는 영전에 용서를 빌었다. 세상 떠난 이들의 눈물인지 소나기가 뿌리는 속에 정오에는 대구시내 국채보상공원에서 30주기 기념식이 열렸는데 나는 부끄러움으로 유가족을 뵐 면목이 없어 뒷전에 서 있었다. 30년 전 그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마당에 이제 와서 조사며 추도사며 소설나부랭이가 그 맺힌 한을 얼마쯤 풀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져 총총히 자리를 뜨고 말았다. 상경하는 찻간에서 흐린 하늘을 내다보며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심사가 내내 우울했다.
잘 쓰지도 못한 소설에 상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마음자리가 영 불편하다. 여덟 분에 대한 빚의 잔여분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십년이 지난 오늘까지 인혁당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고 그분들은 신원(伸寃)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부채의식은 내가 이 지상을 떠나 유현한 세계에서 그분들을 만나뵐 때까지 매듭을 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