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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경제관료의 눈으로 회고한 외환위기

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삼성경제연구소 2005

 

이상철 李相哲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sclee@skhu.ac.kr

 

 

현장에서본한국경제30년

해방 이후 한국현대경제사 연구자가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자료 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그동안 공공기관에서 생산한 자료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무수행과 관련된 정부자료의 보존이 의무화된 것은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2000년 이후부터이며, 그전까지는 정권이 바뀌면 당대 정부의 각종 정책관련 문서와 역사적 소장가치가 높은 기록물이 폐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소홀한 관리와 보존이 비단 공공기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 역시 과거의 경영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폐기한 사례도 종종 있어왔다.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소홀한 관리는 한편으로는 당대에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을 감추려는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기관이나 공공기관 할 것 없이 모두가 과거의 실패를 반성하고 조직 내부에서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경제정책의 형성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인사의 회고록은 해방 이후 한국현대경제사 연구에서 소중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만, 실제 자료로서의 활용가치가 높은 회고록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의 업적만을 장황하게 떠벌리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저서가 많았기 때문이다. 강만수(姜萬洙) 전 재정경제원 차관이 집필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부가세에서 IMF사태까지』는 이런 점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회고록이다.

저자는 국세청과 재무부·재정경제원에서 20년 동안 주로 세제업무를 담당하다가 관세청장 및 통상산업부 차관을 역임했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1998년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후 한나라당에 관계한 바도 있고 현재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재경부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현역 경제인이다. 신문 칼럼 등을 통해 최근의 경제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경제평론가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국세청에서 재무부로 옮긴 이후 공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담당했던 업무를 재정·금융·국제금융이라는 주제로 묶어서 정리하고 있으며, 마지막 한 장을 할애하여 1997년 외환위기의 발발과 대응과정을 상술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우선 치밀함이다. 공직을 떠난 다음달부터 구상하여 6년 동안 집필했다는 530여면에 달하는 본문의 내용은 각장 말미에 수록된 풍부한 주석에 의해 뒷받침된다. 평자는 본문만큼이나 주석을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자 역시 본문을 집필하는 것보다 주석을 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고 적고 있다(554면).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정부부처 내에서 정책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이것이 다른 부처와의 역학관계 그리고 재벌을 비롯한 민간기업 및 정치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경제정책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74년 이후 외환위기까지 한국경제정책 형성과정에 관한 자료로서 가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 재무부에 오래 몸담았던 저자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대목도 발견된다. 부가가치세 도입, 재정경제원 신설, 금융자율화 추진, 한국은행법 개정, 그리고 외환위기 과정에서 저자가 소속된 기관과 이견을 노정하거나 갈등을 빚었던 당시의 정치권, 경제기획원, 한국은행, 청와대, 대기업집단 등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 일정한 평가를 하고 있다. 평자로서는 이 점이 매우 흥미로웠고, 이 책의 독자라면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내세우는 각각의 주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후세의 경제사가의 몫으로 남겨두자.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실 이 책은 환란(換亂)에 관한 것이다. 1997년 경제위기를 직접 다루고 있는 4장뿐만 아니라, 다른 장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일련의 정책들이 어떻게 외환위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예를 들어 제1부의 제목은 ‘재정’이지만 4장과 5장에서 단일관세율 및 제정경제원 설립문제 등을 다루면서 외환위기와의 연관성을 추적하고 있으며, 제2부에서 다루는 금융자율화 과정 그리고 중앙은행법 개정 및 금융감독제도 정비과정 역시 외환위기와 관련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 시사주간지의 표현을 빌린다면, 저자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김인호(金仁浩) 청와대 경제수석, 강경식(姜慶植) 부총리와 함께 IMF행 주역 4인방 중의 한 사람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발발 및 수습과정이 정권교체기와 맞물리면서 당시에는 정치논리에 압도되었고, 그후에도 객관적이고도 엄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저자의 항변이 책의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외환위기에 대한 평가에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자는 지난 6년간의 저술활동을 통해 역사적 평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일단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셈이다. 후세의 경제사가가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라는 이슈를 다루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반드시 검토해야 할 한권의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