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화평
역사드라마의 딜레마와 가능성
드라마 「제5공화국」
김진철 金眞哲
한겨레 여론매체부 기자 nowhere@hani.co.kr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은 하나의 실험이다. 역사적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은 불과 20여년 전의 정치사를 소재로, 인물이 아닌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또 주인공은 악인이지만 권선징악적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큐드라마를 표방한 「제5공화국」이 시도하는 실험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제5공화국」이 시작부터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킨 것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5공 주역’들이 방송 전부터 대본이 잘못됐다며 수정을 요구한 것도,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동전의 양면과 같은 ‘전두환(全斗煥) 옹호론’과 ‘전두환 미화논란’이 불거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물중심적이며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기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도 논란을 부른 한 원인이다.‘전두환’을 둘러싼 논쟁은 인터넷 시청자게시판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전사모)이라는 정체불명의 동아리가 생겨났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무책임한 연예저널리즘이 일부 게시판 내용을 침소봉대해 기사화하면서 확대재생산된 측면도 있으나, 실체가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전두환 옹호에 나선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드라마와 무관하게 군사독재시절에 향수를 느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전두환을 그리워했다. 이를테면 “아무리 전두환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고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켰어도, 경제적으로는 그때가 지금보다 좋았다”는 식이다. 또다른 부류는 드라마 초반부 전두환 캐릭터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10·26부터 시작해 12·12 쿠데타를 준비하는 전두환의 대담성과 치밀함에 매력을 느꼈을 법하다. 이들은 게시판에 “권총 하나 차고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는 모습에서 을지문덕, 계백 장군이 연상된다”는 소감을 남겼다. 앞의 사람들이 본래의 ‘전사모’였다면 뒤의 사람들은 「제5공화국」으로 꾸려진 ‘전사모’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전두환정권 부정부패의 콩고물로 제 배를 불렸거나 앞을 내다보지 않은 단기적 경기부양책의 덕을 본 이들이지만, 후자는 드라마 속 전두환 역을 맡은 이덕화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연기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그러나 양쪽 모두 역사적 맥락보다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차원에서 전두환과 5공을 이해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제5공화국」은 이런 이들을 위해 필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획자나 연출가, 작가 모두 “역사정리 차원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공개할 것이며, 이를 기초로 새로운 역사인식을 다지고자 한다”며 “이를 통해 일부 기성세대에 남아 있는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없어지고, 독재정권시대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겐 역사공부가 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던 터다. 기획의도와 달리 드라마 초반 뜻밖에도 전두환 미화와 역사왜곡 논란이 고개를 들었지만, 다행히 중반을 넘어서면서 드라마는 본궤도를 찾아 순항하고 있다. 특히, 5공정권의 실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5·18 학살사건 부분에서 전두환 미화논란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 역사를 철저히 고증하여 드라마를 만들겠다던 제작진의 땀방울 맺힌 노력 또한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학계에서 두루 진행되어온 현대사의 재평가작업이 드라마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호평도 받는다.
초반 논란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과 눈길을 거뒀고 악몽처럼 과거가 떠올라 괴롭고 불편하다며 외면하는 이들도 있지만, 「제5공화국」은 역사교과서가 하지 못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80년대를 잘 알지 못하던 젊은 세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새로이 접할 기회를 얻는다. 딱딱한 교과서가 아닌 드라마를 통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뤄진 것인지 알게 됐다”는 반응을 보인다.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언론에 의해 조작·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고쳐 알게 됐고, 어렴풋이 알았던 일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당시 정권의 피해자들이 드라마를 보고 시청자게시판에 올린 생생한 증언들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세대간의 소통의 장도 열리고 있다.
그러나 초반 전두환 미화논란을 낳은 「제5공화국」의 한계는 여전하다. 신군부의 핵심인물 허화평(許和平)에 대한 미화논란이 이를 잘 보여준다. 허화평이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새 정부의 정당성과 명분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고, 민정당 창당과정에서 옛 공화당계 인물을 영입하려는 전두환에 맞서는 인물로 그려졌다. 전두환의 경우처럼 탤런트 이진우의 열연이 한몫했지만, 어디까지나 불의한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핵심 전략통이자 전두환의 충복인 허화평이 전두환·노태우의 대척점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킨 개혁적 전략가인 양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쿠데타 주체세력간의 갈등을 그리려는 의도가 자칫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하고 독특한 캐릭터는 허화평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줄곧 나온다. 극적인 갈등구조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쿠데타세력 내부의 암투, 군부와 테크노크라트 간의 대결, 김대중·김영삼 등 민주세력과 공포정치의 싸움, 5공 말기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 이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5공이 한국사의 비극적 시기임에도 극적 시각으로 보면 흥미로운 캐릭터와 많은 갈등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다른 논란이 충분히 예견되는 것이다.
드라마의 장르적 속성상, 흥미로운 캐릭터와 갈등구조를 살리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극적 재미를 강조하다보면 미화논란이 불거지고 작가적 해석이 개입하다보면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이 터져나오기 십상이다. 제작진이 끝까지 고민해야 할 고통스러운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며 「제5공화국」이 지닌 역사적 사명과 의의를 다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