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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진실은 구체적이다

쎄바스띠앙 쌀가도 사진전

 

 

진동선 陳東善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장 sabids@hanmail.net

 

 

오늘의 사진은 더이상 진실의 증언자가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더이상 정의의 대변자도 아니고, 시대의 목격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사진에서 과거와 같은 진실과 정의의 사도로서의 강한 믿음과 신탁을 철회한 지 오래다. 이제 사진은 가볍게, 아주 가볍게 마음에 들 때까지 찍고 지우는 즐김과 유희의 대상이거나, 자신의 모습을 편집하는 도구일 뿐이다. 사진이 왜 이렇게까지 변모했는지 묻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다. 이러한 변모나 변모의 이유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를 따져묻는 것들은 이 시대에 의미가 없다. 어떤 경우도 그 원인이 디지털카메라 때문이라거나 동영상 비디오 때문이라거나 인터넷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대답이 아니다. 사진을 변화시킨 것은 시대이고, 시대가 우리의 주체도구를 변화시킨 것이다. 사진에 대한 인식방식, 표현방식, 의미방식을 바꾼 것은 우리이다. 우리가 사진으로부터 진실의 믿음과 정의의 신탁을 철회하고 박탈했다. 참이 무용해진 세상이므로.

 

르완다 난민캠프 병원의 고아들, 자이레 1994.

르완다 난민캠프 병원의 고아들, 자이레 1994.

 

때문에 디지털이미지가 홍수를 이룬 시대에, 사진이 진실의 대변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앙리 까르띠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과 쎄바스띠앙 쌀가도(Sebastião Salgado)의 사진전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역설로 보인다. 또 흔해빠진 게 사진이고, 전국민이 누구나 디카, 폰카를 갖고 있으며, 최소한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이미지 공간을 갖고 있는 이때에 아주 고답적인 사진의 틀, 어쩌면 너무도 진부해서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아날로그 사진전에 수십 미터씩 줄을 서는 것이 의아해 보일 정도이다. 사진이 죽었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디지털이미지 홍수 앞에서 그렇다면 쌀가도의 사진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것은 추억 때문인가, 향수 때문인가, 아니면 작가의 유명세 때문인가.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어깨를 밀치면서도 짜증을 내지 않게 하는 인내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브레히트(B.Brecht)가 말한 ‘진실은 구체적이다’라는 사실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폭염을 무릅쓰고 전시장을 찾은 것은 디지털시대라서 역으로 정통적인 사진을 보러 온 것도, 가벼운 이미지시대이니까 향수를 느끼게 하는 무거운 흑백사진을 보러온 것도, 또 세계적인 작가의 유명세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쌀가도 사진에 나타난 진실의 구체성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시대가 흘러도 진실은 그저 막연한 모습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 구체성을 담보하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진실의 구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유효한 매체이고,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하고 구사한 사진가가 쌀가도이다. 관객들은 바로 그의 사진(예술)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진 속 진실의 구체성을 보러 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사진의 모습이 변하고, 사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마저 변해도 결코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삶의 진실의 구체성이다.

쌀가도 사진은 아무리 변해도 변해서는 안되는 것들과, 아무리 바빠도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을 삶으로부터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진을 알기 전에 경제학 박사였고, 사회학자였다. 그가 아카데미를 박차고 카메라 한대로 지구촌 삶의 현장을 누빈 것은 후기산업사회의 노동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펜보다 강한 것이 사진이고, 강단보다 호소력 있고 생생한 것이 현장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그때부터 그는 구체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쫓아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라이카 카메라는 그의 새로운 눈이 되었고, 플래시는 세상을 비추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렇게 그는 삶의 한복판에 그리고 적나라한 생의 전면에서 사진으로 노동의 역사를 쓰고자 했다.

 

안바드 지역의 석탄 광부들, 인도 1989.

안바드 지역의 석탄 광부들, 인도 1989.

 

쌀가도가 오랫동안 삶의 최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목격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역사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육체노동의 비참함을 역사적 문맥에서 말하고자 했다. 그의 사진에서 미학성과 예술성은 나중의 일이다. 무엇보다 삶과 노동, 그리고 역사적 문맥에서의 진실과 휴머니즘이 우선이었다. 쌀가도 사진전(서울갤러리, 2005.7.8~9.3)은 바로 이것, 지구촌 곳곳에서 전개되는 쇠락한 육체노동의 현장을 비춘다. 노동현장과 생산구조 전면을 조명하고, 노동자의 삶과 그들이 처한 생활의 뒤안길을 드러낸다. 그러나 진실의 구체성을 지향할 뿐 결코 값싼 동정이나 슬픔, 비극을 강조하지 않는다. 또 노동과 자본에 대한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구조를 비추지만 어느 경우든 “노동은 신성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사진전은 쌀가도가 만났던 네 가지의 전지구적 삶의 이슈를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비추고 있다.‘라틴아메리카’ ‘노동자들’ ‘이민, 난민, 망명자’ ‘기아, 의료’라는 카테고리는 노동―자본―계급―휴머니티로 이어지는 구체성의 리얼리티들이다. 1977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24년간 찍은 사진 중 173점이 전시된다. 이 사진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바로 삶의 존재양식과 우리시대의 휴머니즘이다. 그의 깨끗하고 투명한 흑백사진들은 노동이 우리 사회의 정당한 사회적 실천이면서도 무시되고 무력화되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가 그의 사진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진이 어떻게 세계의 거울이 되며 동시에 삶의 전면과 이면을 투사하는 역사의 창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신성해야 할 노동의 가치와 그로 인해 인식되어야 할 삶의 실체성과 기술시대의 인간의 존엄성을 구체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