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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창기 李昌起
1959년 서울 출생. 198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등이 있음. leeatoz@kornet.net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밭일을 가던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녀는 한번도 물 위를 걸어다니지 않았으며, 허공을 날아다닌 적도 없다. 아무리 아득하거나, 너절하거나, 따분해도 남자의 도움 없이 아이를 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밋밋한 알을 낳은 적은 더더욱 없다. 다만 그녀는 아침나절 눅눅한 부엌 툇마루에 걸터앉아 서너 해째 비어 있는 제비집을 우두커니 올려다보다, 불현듯 장롱 위에 있던 새로 산 굽 높은 뾰족구두를 꺼내 신고 땡볕에 늘어진 마을길을 지나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골 산비탈 과수원으로 또박또박 올라갔을 뿐이다. 신문지에 싼 호미 한 자루와 흰콩 한 주먹 그리고 찐 감자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 스무하루 동안 낚시터에 앉아 있다 어느날 갑자기 신선이 되어 미래의 일을 내다보며 신령스런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는 남편이 있었는지, 아니면 음주운전에 걸려 곤욕을 치른 스무살이 넘은 아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발걸음이 하나 둘 옮겨질 때마다 거칠고 타락한 길들이 그녀의 반듯한 걸음걸이를 위해 실룩거리며 종아리에 낯선 근육을 차곡차곡 늘려갔다는 점이다. 오늘만큼은 자신의 맨발이 낡은 슬리퍼 짝에 묻혀 세상모르고 끌려다니거나, 어두운 장화 속에서 잔돌이나 지푸라기, 죽은 곤충의 일부와 함께 뒤엉켜 지낸다는 것이 그녀는 무엇보다 싫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누군가를 매혹시킬 만큼 그럴듯한 태를 지녔다는 뜻은 아니다. 저녁골 애기 뫼똥 옆 돌밭에서 주눅든 듯이 자라는 야트막한 소나무만한 키에, 한해 두해 콩 까불다 벌어진 어깨하며, 고사리나물 캐다 그늘 든 피부는, 이제 온종일 학처럼 논 가운데서 골똘히 무언가를 응시하며 서 있는 하얗게 머리 센 늙은 농부의 시선조차 제대로 속이지 못했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방심한 사이에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슬픔과 기쁨도 기도원 모퉁이에서 허겁지겁 쏟아낸 뜨근한 오줌발과 함께 골짜기 어디로 스며들고 말았다.
그녀는 시집오던 해에 심은 늙은 복숭아나무 밑에 얌전하게 뾰족구두를 벗어놓았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틀고 복사꽃을 따거나 산 아래 논두렁에 두 뼘 간격으로 흰콩을 심으며 온종일 놀았다. 나무들은 ‘여성시대’의 씨그널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풀들은 그녀의 손길에 복종했다. 그녀는 가끔 먼 산을 보면서 그녀의 영혼의 들판에 끊임없이 돋아나는 잡초들을 한움큼 집어들고 근심 걱정인 양 차분하게 뜯어먹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곳에서 지루했던 십대와 이십대, 그리고 그 안에 숨죽여 있던 노년까지 다시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 나들이 행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조서에 따르면, 그녀는 인근의 무덤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느 삭망(朔望)에 유일하게 남은 낡은 트럭 모양의 쪽배를 타고 마을을 떠났다고 했다. 내가 무기도 없이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식구들과 이 마을에 찾아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이로써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밭일을 가던 그녀는 역사가들의 관심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몇몇 부녀 회원들은 그녀의 뾰족구두가 지난겨울, 풍백(風伯)과 운사(雲師)의 인솔로 부부 동반한 농협 조합원들과 왜(倭)나라로 농업시찰을 갔을 때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노인이 운영하는 한 상점에서 카드로 구입한 것임을 증언했다. 누군가는 분노에 차서 이것이 그년이 처음 한 외도가 아니라고 외치다 끝내 까무러쳤다.
그러나 그녀가 정식 조합원으로서 산비탈 과수원에 꿈을 묻고 살다 파산한 한 많은 농부의 여린 아내였는지, 아니면 지방 방송국에서 농촌생활을 소개하러 나온, 술과 떡을 밝히던 과장된 몸짓의 리포터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황제에게 속한 도원(桃園)의 사납고 눈썹 긴 관리인의 착하고 효성스런 막내딸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했던
그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동물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결코 착하다거나, 겸손하다거나, 점잖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경운기에 시동 걸고, 봄바람 분다는 소문에 언 땅 갈아엎고 씨 뿌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캄캄한 새벽에 경운기 전조등을 켜놓고 모종을 옮겨심는 사람은 아마 그밖에 없을 겁니다. 그의 못 말리는 부지런함 때문에 동해(凍害)를 입은 적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어지간히 먹고살 만해진 뒤에는 아이들 대학 공부시켜야 한다는 핑계로, 또 전두환 노태우 물러간 뒤에는 서울에 세간 내주어야 한다는 핑계로, 평생을 술기운 달고 저녁 솔바람 부는 마을 고갯길 한번 변변히 어슬렁거려보지 못하고 일만 하고 살던 그였습니다.
그가 지금 21세기 변두리 병원 301호실 창가 쪽 침대에 누워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절단된 손목 인대를 잇는 수술이 무사히 끝나게 된 과정을 무슨 민주화 투쟁 비화라도 되는 양 쉴 새 없이 떠벌입니다. 다행히 입을 다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지난 봄눈이 녹기도 전에 논두렁을 건너뛰다 발목이 부러져 목발 짚고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닌 것까지 치면, 그의 입원 행각은 올 들어 벌써 세번째입니다. 갑자기 나는 며칠 전 뒷골 논배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가, 새 창고를 지어야겠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다, 느닷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중얼 내뱉던 말이 떠올랐습니다.“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건달. 내가 왜 건달이 못됐는지 몰라!”
그때 그 동물은 “제발 날 좀 어떻게 해줘!” 하고 절규하듯 외쳤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예전 같지 않은 쇠진한 기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알아들었어야 했습니다. 그가 꿈꾸는 건달이, 세상에 가담하지 않고 언제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빈둥거리며 서 있는 저 열매 없는 늙은 은행나무처럼 큰 건달이었는지, 아니면 어지간히 술 깬 얼굴로 바람 빠진 자전거를 끌고 새벽길을 느릿느릿 걸어들어오는, 그러다 어젯밤 새로 생긴 상처나 쓰윽 핥아대는 그런 풋내기 건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닷새고 보름이고 맞벌이에 지친 며느리가 침대 옆에 붙어 용맹정진한들, 평생을 바쳐 이룩한 그의 굳은살이 한꺼번에 다 녹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