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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총선 이후 한국정치 어디로 가나

제18대 국회의원선거와 정치지형의 변화

 

성한용 成漢鏞

한겨레신문 정치부문 선임기자. 저서로 『디제이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가 있음. shy99@hani.co.kr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세차례 싸웠다. 지역예선에서 3대 2로 승리했고, 8강 조별리그에서 다시 2대 1로 이겼다. 온 국민이 환호했다. 우리나라 야구가 일본보다 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준결승에서 다시 맞붙은 일본 선수들은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6대 0으로 패했다. 일본 야구의 전력은 우리나라보다 확실히 한수 위였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나라가 두차례나 이길 수 있었을까? 첫째 집중력, 둘째 작전, 셋째 운이었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39만표 차이로 이겼다. 2002년 12월 19일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57만표 차이로 이겼다. 이른바‘진보·개혁세력’은 환호했다.‘진보·개혁세력’이‘보수세력’보다 강하다고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2007년 12월 19일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후보를 531만표 차이로 이겼다.‘보수세력’의 전력은‘진보·개혁세력’에 비해 확실히 한수 위였다. 그런데 어떻게‘진보·개혁세력’이‘보수세력’을 두차례나 이길 수 있었을까? 첫째 집중력, 둘째 작전, 셋째 운이었다.

‘보수세력’과‘진보·개혁세력’의 전력은 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분단 때문이다. 해방 이후 좌파는 북쪽에, 우파는 남쪽에 정부를 세웠다. 유럽에서 수십, 수백년에 걸쳐 피 흘리며 겪은 이념갈등을 우리나라는 이렇게 분단이라는 아주 손쉬운 방식으로 건너뛴 것이다. 댓가는 참혹했다.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남쪽과 북쪽 사회는 이념의 불구 상태가 됐다. 북쪽에서 보수는‘반동’으로 몰려 처형됐다. 남쪽에서 진보는‘빨갱이’로 몰려 처형됐다. 분단이 외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북쪽이 실제로 진보정권인지 남쪽이 보수정권인지도 논란이 있지만, 아무튼 그랬다.

남쪽에서는 보수세력의 한 축이‘야당’이라는 이름으로 독재정권에 대항했다. 이들은 학생운동 및 재야운동세력 일부를 흡수해가며‘대안세력’으로 성장했다. 학생운동 및 재야운동세력의 일부가 보수에 뿌리를 둔 야당을 지지한 것은 현실적으로 진보정당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정권을 잡아야 했고, 집권의 가능성은‘야당’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야당’이‘진보·개혁세력’이 됐다.

1990년에 정변이 일어났다. 3당합당으로‘영남’이라는 지역과‘보수’라는 이념이 결합한 민자당이 탄생했다. 일종의‘카르텔’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구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던 영남과, 이념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보수의 연합세력은 막강했다. 당명을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바꾸며 남쪽의‘메인스트림’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1997년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기적은 5년 뒤 또 일어났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로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세번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중력과 작전, 운으로 전력의 차이를 매번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48.7%의 득표율을 올렸다. 2위를 차지한 정동영 후보의 득표율은 26.1%였다. 이회창 후보는‘제3의 세력’으로 보고 계산에서 빼기로 하자. 이른바‘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5.8%,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3.0%, 민주당 이인제 후보는 0.7%, 사회당 금민 후보는 0.1%였다. 정동영 후보의 득표율과 이들의 득표율을 다 합쳐도 35.7%다. 이게‘진보·개혁세력’의‘본전’일 것이다.

지난 4월의 제18대 총선 결과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153, 친박연대 14, 친박무소속연대 12를 더하면 179가 된다.‘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통합민주당 81, 민주노동당 5, 창조한국당 3, 친민주당 성향 무소속 6명 등을 더하면 95석이다. 95석이‘진보·개혁세력’의‘본전’이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와 민주당을 합친 의석이 94석이었다.‘진보·개혁세력’의 의석은 12년 만에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경험하기 이전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간 것이다.

 

총선

 

4·9총선 이후 정치지형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 것일까?

세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이명박 대통령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둘째, 박근혜 전 대표는‘이명박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셋째, 통합민주당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이 세가지는 전혀 별개의 사안인 것 같지만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취임 당시에 비해 지지율이 반토막났다. 이대통령의 이런 정치적 위기는 인수위원회의 실책, 장관 및 청와대 인사 파동, 대미-대일외교에서 나타난 굴욕적 자세 등이 축적되어 있다가 쇠고기 파동으로 표출된 것으로 분석된다. 워낙 취임 초기인 탓에 잘못을 깨닫고 위기를 넘길 수도 있지만 자칫 구조적인 국정난맥상이 계속될 수도 있다. 비관론의 근거는 이대통령 특유의 정치혐오증이다. 그는 정치를 싫어한다고 여러차례 밝혔지만, 사실은 정치를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대통령과 국민들이 직접 대립하는 위험한 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본래 한나라당의 비주류였다. 2006년 6월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을 때 한나라당 안에서 그는‘외부인’취급을 받았다. 2007년 8월 경선에서 승리하고 12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비로소 주류가 됐다. 당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생겼다. 4·9총선을 앞둔 공천은 한나라당 주류-비주류의 교체과정이었다. 공천파동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대거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한나라당 지도부를 자신의 사람들로 구성하는 일이다. 대표 자리에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을 앉히고 최고위원의 다수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나라당처럼 복잡한 정당을 비주류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고 대통령의 지시만을 충실히 따르는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들려는 이런 시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통령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다. 그는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현대건설의 신화는 정주영과 이명박의‘독단적 리더십’‘일에 대한 열정’‘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기업체와 국가는 씨스템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기업체에서는 사주가‘전권’을 행사한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다. 낙오자는 추방된다. 국가에는‘견제와 균형’이라는 원리가 있다. 대통령 혼자 전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입법권, 예산편성권은 국회에, 사법권은 법원에 귀속되어 있다. 더구나 국가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가의 작동원리인 견제와 균형은 거추장스러운 장치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세계잉여금(歲計剩餘金)을 올해 추경예산으로 편성하려 했다. 주저앉는 세계경제의 여파로 내수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자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사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행정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가재정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한나라당 안에는 그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정면에서 추경편성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수단도 논리도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국가재정법 개정을 다음 국회로, 정확히는 전당대회 이후로 미루고 말았다. 추경편성 논쟁을 통해 당 지도부를 확실히 장악해야 할 이유를 확인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런 독주 계획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정치인은 누구일까? 박근혜 전 대표다. 박근혜 전 대표는 4·9총선을 통해‘이명박의 대항마’라는 입지를 굳혔다. 4·9총선의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는‘박근혜’였다.

친박연대 14명, 친박무소속연대 12명의 당선자들은 정상적 상황에서라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그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었다. 3김으로 일컬어지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이후에 개인의 힘으로 국회의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가 처음이다. 이회창 총재가 제왕적 총재 시절 많은 국회의원들을 당선시켰지만 그건‘한나라당의 힘’이었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는 특이한 재능을 가진 정치인이다. 곰곰이 생각해서 한마디를 내놓으면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을 박근혜 전 대표는 딱 한차례씩 했을 뿐이다. 한나라당 공천에 이의를 제기하며 내놓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한마디도 이번 선거기간 내내 영남지역을 돌아다니며 이 지역 표심을 통째로 흔들었다. 만일 선거가 1주일 뒤에 치러졌다면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좀더 많은 의석을 잃었을 것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근혜 돌풍은 그만큼 무서웠다.

박근혜 전 대표는 1998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본래는 부친이 교사를 했던 문경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강재섭, 이해봉 의원 등 대구의 국회의원들이 그를 대구로 끌어들였고, 그는 엄삼탁씨를 꺾고 처음 국회의원이 됐다.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할머니들이 몰려와 손을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그는‘비련의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모친과 부친은 총에 맞아 죽었고, 자신은 얼굴에 칼을 맞았다. 정치인들의 대중성은 유권자들의 사랑이나 동정에서 나온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정치인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런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부친의 후광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그후 자신의 실력으로 오늘의 입지를 구축했다.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 대통령이다. 그런데 다음 대선은 2012년에 있다. 너무 멀다. 그때까지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총선이라는 공간을 통해‘이명박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금부터가 간단하지 않다.

5월 10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나 오찬을 함께했다. 쇠고기 파동으로 지지율이 급속히 하락한 이명박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자리였다. 이대통령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신분이었던 지난해 11월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하자 박근혜 전 대표를‘국정의 동반자’라고 선언한 일이 있다. 자신이 어려울 때만 박근혜 전 대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가장 큰 정치적 현안이었던 친박 당선인들의 복당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복당에 대해 거부감은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 문제는 당에서 알아서 할 문제”라고 했다. “전당대회까지 끌고 갈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정치적 힘이 달리는 상황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이면서도 책임은 당에 떠넘긴 모양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앞으로 박근혜 전 대표를 당내 실세로 인정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렇게 하려면 대통령 권력을 나누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 과연 임기초부터 권력의 2인자를 용납할 수 있을까? 권력을 나눠주고 나면 이명박 대통령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결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자칫 레임덕을 맞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건 매우 중대한 문제다.

 

 

통합민주당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통합민주당은 폭풍우가 멈춘 뒤 바다에 떠 있는 난파선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지지 기반이 떨어져나갔다는데, 왼쪽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오른쪽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잘 모르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배의 어느 부분이 망가졌는지 알아내는 일이다. 그래야 어디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어디를 고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통합민주당은 왜 정권을 잃고 소수파로 전락했을까? 여러가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른바‘진정성’을 잃어버린 탓이 가장 크다고 본다. 정치인들의 용어로는‘초심’을 잃었다. 1997년 이전엔 정권교체와 민주화가 동일시되는 측면이 있었다.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화세력이 집권해야 민초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주도했던 세력은 국정운영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행정부를 장악해본 경험이나 관료들을 다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집권 주도세력은 호남 출신 관료, 부산·경남 비주류 출신 관료들을 대거 기용했다.

호남 출신 관료나 부산·경남 비주류 출신 관료들은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의‘기생세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방식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개선하거나 근본적인 사회개혁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척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 보존과 승진에만 관심을 쏟았다.

집권 주도세력은 관료들의 이런 속내를 잘 알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더구나 집권 주도세력을 구성하는 핵심인사들도 권력의 단맛을 알게 된 뒤로는 점차‘기득권 세력’으로 변화해갔다. 명품 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고, 국회의원이나 장관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민족·민주·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7, 80년대에 묵묵히 학생운동 및 재야운동 세력 그리고 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배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명동시위 당시 운동권 학생들을 숨겨주었던 소상인들은 20년 뒤 국회의원이 돼서 찾아온 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희들이 정치를 하면 세상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우리가 먹고사는 게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너희는 잘먹고 잘살게 됐는데 우리는 그대로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통합민주당의 몰락은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의 잘못뿐만 아니라‘진보·개혁세력’전체의 퇴조와 관련이 있다.‘좌’나‘우’의 문제가 아니라,‘실력’과‘신뢰’‘깊이’의 문제다. 따라서 통합민주당의 정치적 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현실정치에서‘여당’은 이명박,‘야당’은 박근혜다. 통합민주당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치적 존재감이 없다.

어떻게 해야 다시 집권할 수 있을까? 진정성을 회복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7, 80년대를 거치며 쌓은 신뢰를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동안 몽땅 소진했다. 신뢰를 다시 쌓는 것은 단기적으로 불가능하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한나라당의 실패라는 타의적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합민주당 안에서는‘생활 속의 진보’‘새로운 진보’‘제3의 길’‘정체성 회복’등의 처방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 집단의 진정성은 지도자를 통해 표출된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권자들이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두 정치지도자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통합민주당이 단기적으로 맞닥뜨린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을 일으켜 세우고 방향을 제시할 새로운 리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는 곧 물러날 사람이다. 정동영 전 장관은 해외로 나갈 예정이다. 통합민주당 사람들에게 다음 2012년 대선에 대해 물어보았다. 당내 경선이‘손학규-정동영의 리턴 매치’로 치러지고, 본선에서 또 500만표 차이로 지는 것이 최악의 씨나리오라고 했다. 통합민주당 사람들은 요즘‘새로운 리더’를 찾고 있다. 1970년처럼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의‘40대 기수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지역구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전직 차관급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현주소는 군소정당의 맏형이다. 10년 집권의 추억은 잊어야 한다. 손학규, 정동영은 정계에서 은퇴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당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의 길이다. 그래야 그 공간을 새로운 사람들이 채울 수 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리더는 누가 만들어주는 자리가 아니다. 특히 정치계에서는 선배들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 도전장을 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선배들도 자리를 양보하는 법이다. 새로운 지도자는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한 조건이다. 그밖의 자격은 따로 규정하기 어렵다. 지금은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온다는 일반론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처지는 통합민주당보다도 더 어렵다. 진보정당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내부에 있었다. 진보정당이 이번 국회의원선거를 분열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렀다면 훨씬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를 눈앞에 두고 분열했다.

17대 국회에서 10석의 의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법안을 제대로 발의할 수 없었고, 심지어 몸싸움에도 한계가 있었다. 18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이 5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정당으로서 원내활동을 포기해선 안된다. 민주노동당에는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스타 정치인이 필요하다. 원내공간을 활용한 스타 만들기, 그리고 스타의 상품성을 활용한 조직기반 다지기에 동시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정치 일정은 2010년 6월 지방선거, 2012년 4월 총선, 2012년 12월 대선으로 이어진다. 이명박정권은‘경제 살리기’의 성과를 단기간에 보여주어야 하는 초조감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취임 초부터 세계경제가 가라앉고 있다. 이명박정권도 바보는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인내심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냈던 한나라당 임태희 의원은 “연말 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정권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철학과 원칙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따라서 좌충우돌할 것이다. 세계잉여금 추경편성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을 해서라도 성장률을 끌어올리려 할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도 추진하려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은 서막에 불과하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의도대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고 하더라도, 복지예산 축소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일자리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2010년 지방선거를 치를 때쯤이면 이명박정권은 심각한 레임덕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보수세력’은 박근혜를 대안으로 내놓을 것이다. 보수세력의 여론주도층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이 아니라 박근혜를 선택했어야 한다”고 혹세무민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도 자신의 잘못을‘절반’만 인정하기 위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진보·개혁세력’은? 통합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현재로선 대안으로 내세울 인물이 없다. 2년 안에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권 쟁탈전 차원에서 보면‘진보·개혁세력’으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의 묘미는 역동성에 있다. 1987년 6월항쟁이 있었지만 민정당이 재집권했고, 90년 3당합당이 있었지만 97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예측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