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생태적 순환사회를 꿈꾸며
● 지난호 특집에 실린 김종철의 글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를 읽고 나니 민주주의와 성장논리가 어떻게 관계맺고 근대화를 이뤄왔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면서 눈앞이 밝아진 느낌이다.‘적당한 성장’에 관한 고민 역시 의미있게 읽었다. 특히 글 중간에 나온 농촌경제의‘호혜적 공동성’이라는 말이 반가웠다. 올해초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자연이 주는 싱그러움 말고도 마을 사람들의 살뜰한 정에 신선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배타성과 끝없는 직선을 추구하며 결국은 파멸을 향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근대적 방식의 삶을 향한 방향전환이라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를 위해 풀뿌리 저항운동이 더 활발해지고 더 큰 생명력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농촌공동체의 토대가 되었던 호혜적 공동성을 현대사회에서 실현해나갈 방법, 즉 소농과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를 지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 창조적인 발상과 실천방안이 논의되면 좋겠다.
박선희 sun_green@naver.com
자본주의를 통째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다
● 명쾌하고 패기넘치는 김종철의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곳곳에서 눈에 띄는 논리적 비약이 있었지만 눈감아주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농사회로의 회귀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그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저해한다고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씨스템은 현재로서는 자본주의가 유일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씨스템이 필연적으로 양극화와 인간소외, 환경파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히 자본주의를 통째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다. 이번 대선과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참패한 것은 이 문제들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종철이 제시하는‘생태적 순환사회로의 지향’역시 모호하고 극단적이어서 안타깝게도 그다지 만족할 만한 해답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유토피아적 실험에 희생되고 싶지 않다. 변화를 갈망하는 민중을 폭넓게 끌어안을 대안의 탐색작업을 계속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정아영 longish@gmail.com
진보개혁진영의 패배주의 극복에 공감한다
● 지난호 백낙청-조효제의‘대화’는 대선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진보개혁진영이 변혁적 중도주의를 통해 남북연합 단계를 거쳐 분단체제를 해소하고 한반도 선진화로 나아가자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다뤘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진보개혁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추진한 것이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부분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BBK사건 등 이명박 후보의 의혹 관련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 반면, 범여권의 패배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향후 진로에 대한 논의는 좀 아쉬웠다. BBK등의 문제를 지적하면 지적할수록 그런 문제있는 후보조차 이길 수 없었던 무능력이 떠오르고 특검을 탓한다고 해서 범여권에 없던 능력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안전략으로 제시된 변혁적 중도주의나 중도실용론, 신평등연합론 등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길 기대한다. 이는 대선 후 진보개혁세력의 패배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남한 내부에서 지식인간의 발전적인 의사소통을 이끌어 한국사회의 개혁과제 수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하남 KHN102@freechal.com
독자들에게 한방 날린 ‘무협소설’
● 박민규의 새 단편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했다. 문예지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무협소설’을 내놓을 수 있는 뚝심도, 페이지마다 두어번씩은 박수치고 낄낄대며 웃다가 눈물까지 흘리게 만드는 쎈스도, 정말 박민규답다. 무협의 세계, 가상의 인물이 너무나 적나라한 현실과 만나니 처음엔 허리 꺾으며 웃을 만큼 재미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우울해지기만 한다. 아무리 환상적인 내공이 있어도 법 앞에서, 돈 앞에서, 지구온난화며 원자폭탄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고, 사룡이 다 모여도 정부도 삼성도 뒤엎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해 같이 좌절하다 보니, 나도 ‘개체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은’느낌이 들고 “龍龍龍龍 죽겠지~”라고 약올리는 작가한테 한방 먹은 기분이다. 무언가 희망을 가질 만한 여지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냥 구정물 같은 세상에서 버텨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들려 허무해졌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이 X같은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도 함께 밤하늘에 흩
나렸다.
양현진 hyunjin.yang@gmail.com
삭막한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
● 김주대 시인의 「블로그 여행 중‘주정선의 주막’에서 보다」는 시인이 웹써핑 중에 눈과 마음이 번쩍 떠지는 글에 사로잡혀 삭막한 시대에서의‘희망’을 이야기하는 시였다. 배밀이를 하는 남자를 대신해 그것조차 못하고 집에 있는 아내에게 보내는 문자를 찍어주는 푸릇한 여고생을 보며 이 나라에 싱싱한 희망이 있다는 메씨지를 작가는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 시를 다시 내 블로그에 옮겨보며 내 문제는 언제나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몰랐다는 거였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제발 별일 아닌 일로 징징거리며 정신의 불구가 되지 말자고.
이영희 hi5809@hanmail.net
‘문학종언론’을 넘어설 가능성
● 지난호에 실린 한기욱의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은 세계문학의 주요 장(場)이라 할 수 있는 미국문학의 내부를 꼼꼼한 필치로 탐사하는 글로서, 독자들의 지식을 한층 확장시켜주었다. 소수자문학이라 불리는 비주류문학이 주류문학과의 차별화된 감수성을 바탕으로 미국내 현실비판적인 문학정신을 소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의 종언론이 유령처럼 횡행하는 이 시점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소수자문학이 현재뿐 아니라 차후에도 지속적으로 문단과 독자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를 밝히는 좀더 상세한 미학적·문학사회학적 분석이 뒤따랐다면, 미국문학은 더욱 유용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글쓴이는 문학종언론의 단계론과 결정론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위한 반례로 자본주의의 정점에 이른 미국의 문학을 제시한다. 그리고 일본문학을 “마땅히 밟아야 할‘진도’를 건너뛰고 원숙해진 기형”의 판본으로 치부하며 종언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어느새 자신이 비판하는 결정론에 의거하여 카라따니와 일본문학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강동호 finh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