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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명박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
촛불항쟁과 87년체제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이 있고, 칼럼 「6월의 광장을 딛고 나아가는 2008년 촛불항쟁」 등을 『창비주간논평』에 기고했다. jykim@hanshin.ac.kr
지난 5월 이후 우리는 유례없는 항쟁의 시간 속에 있었다. 이런 새로운 사건 속에 있을 때 그것을 이해하려는 욕구는 강렬해진다. 하지만 이런 욕구를 충족하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사건이 새로울수록 기존의 인지적 틀의 변화가 요구되는 법인데, 항쟁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의 해석이 항쟁 참여자들 자신의 의미자원으로 환류해 사건 자체의 행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타당성 확보는 어려운 데 비해, 해석작업은 강한 현실 개입성으로 인해 이후에 미칠 영향마저 고려해야 할 책임을 떠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숲 안에서 숲을 관찰하려 할 때 처하는 어려움과 유사하다. 조망점을 얻기 위해서는 숲을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데까르뜨의 오래된 격언에 따라 자의성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필자는 87년체제론을 이런 방향설정의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혹자는 87년체제의 종언을 말한다. 그런 주장의 우파적 판본으로는 선진화론이 있고, 좌파적 판본으로는 신자유주의체제론, 97년체제론, 신평등연합론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입장들에 서면 우리가 목도한 촛불항쟁은 매우 설명하기 힘들다. 촛불항쟁이라는 사건의 뿌리와 그것의 행로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민주화 이행을 통해서 형성된 87년체제의 발달논리와 촛불항쟁의 연관을 해명하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87년체제가 우리 사회 성원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구현된 방식을 검토하고 그것에 입각해 지난 대선 및 총선 결과와 현재의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대중의 변모라는 논쟁점을 다룰 것이다(1절). 다음으로 촛불항쟁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87년체제 속에서 형성된 민주화의 효과가 어떤 집단에 어떻게 축적되는가 하는점을 다룰 것이다(2절). 이어서 촛불항쟁의 새로운 특성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의 혁신성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3절). 더불어 촛불항쟁의 의미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관련해서 살피고, 이 과정에서 노무현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라는 투쟁구도를 설정해온 좌파적 논의가 간과한 점들을 논할 것이다(4절). 그리고 이에 근거해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관계를 살필 것이며, 더불어 촛불의 그늘에 대한 논의를 간략히 검토할 것이다(5절). 마지막으로 촛불항쟁의 아포리아를 살피고 그것이 촛불의 행로와 관련해서 갖는 의미에 대해 논할 것이다(6절).
1. 대중은 변모했는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그리고 정권 초기부터 인사와 정책 양면에서 많은 삐걱거림이 있었지만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이명박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정확히 맞춰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취임 6개월도 되기 전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놀라운 수준으로 떨어졌고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급반전을 두고 어제 선택한 대통령에게 오늘 국민들이 등을 돌리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 질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의 한정성, 적극적 지지층의 소수성, 대선에서의 이명박 지지를 철회한 국민적 자각 등이 답변으로 제시됐다. 이와 다른 각도에서, 국민들은 제한적이지만 일관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대선에서는 이명박을 지지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서 지지했지만, 지금은 그에게 반대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통합적인 설명은 아니다. 좀더 일관된 설명을 위해서는 87년체제론의 견지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87년체제는 권위주의적 구체제와의 타협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사회세력의 수준에서는 구체제 세력을 해체하지 못했고, 문화적인 수준에서는 구체제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문화적 에토스를 해체하지 못했다. 그런 중에 민주파와 보수파는 체제이행의 경로를 규율할 프로젝트로 각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주장했지만, 둘 가운데 어떤 것도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긴 교착의 국면이 지속되었다.1 어느 쪽도 결정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갈등해온 두 프로젝트는 그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선호체계에도 침투해 들어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더 민주적인 감성을 지닌 존재가 된 동시에, 더 경쟁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적 합리성을 행동문법으로 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개개인의 인격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 사회 성원들을 일직선상에 넓게 펼쳐놓으면 양 끝에는 일관되게 민주적인 가치와 선호체계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일관되게 보수적인 심성과 신자유주의적 선호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대다수는 두 프로젝트의 구성요소들이 상이한 비율로 복잡하게 칵테일된 가치관과 선호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개인 속에서 민주적 선호와 신자유주의적 선호는 내적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데, 지난 20여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사적 행복과 공적 대의를 매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협소했기 때문에 이런 내적 긴장은 강화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성원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체제에 대해 관찰자 시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과 일상적인 경쟁체제 속에 있는 행위자로서의 선택 사이에서 분열을 매우 강하게 경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적 선택도 상황적 요인에 따라 심한 동요를 보이기 십상이었다.3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미 실패를 선고받은 구여당과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기 어려운 진보적 정당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당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성장을 약속하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가 선택된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선 직후에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런 선택을 대중의 보수화로 해석한다든가, 가치의 정치를 대치해 욕망의 정치가 부상했다고만 보는 것은 과도한 것이다.
87년체제를 살아온 사람들 다수의 인격구조 속에는 구체제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민주적 가치와 선호 또한 구조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요소가 늘 표면에 드러나고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의 선호를 실현할 사회적 기회가 제약되면,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선호까지 상황에 적응시킬 때가 많다. 민주적 가치와 선호가 이런 제약상황에 처할 때 대중은 보수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적 가치와 그것을 구현하는 제도가 중대한 위협을 받으면, 적응을 위해서 유보되었던 민주적 선호와 가치가 표현될 수 있거니와, 이렇게 가치와 선호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때만 촛불항쟁 같은 사건의 발생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민주적 선호의 발현이 역전에 대한 방어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민주적 성향이 잘 표현되지 않은 것 자체가 기회의 제약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대안이 가시화되면 그것은 더 활발하게 표현될 수 있다. 촛불항쟁을 통해서 대중은 자신의 민주적 가치와 선호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과 유사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경험했다. 이런 공동의 경험은 아직 정치적 대안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대안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져다주었고, 바로 이런 사회적 대안에 대한 지각이 민주적 감성을 더욱 활성화하고 촛불항쟁을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2. 왜 청소년과 여성이었나
촛불항쟁은 87년 이후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잠재력이 표현됨으로써 더 강화되는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은 정치적 민주화에 후행한 문화혁명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87년체제의 문화적 잠재력이 폭넓은 저변을 가졌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런 힘이 각 사회집단들에 상당정도 차별적으로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점을 촛불항쟁의 주역이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촛불항쟁은 사회적 합의도가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유례없이 대규모 동원을 이룩한 운동이다. 그렇게 된 것은, 민주화된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고 더불어 참여비용이 아주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와 정면으로 대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 한복판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차지하는 대규모 대중동원이 가능했다.4 이렇게 대규모 대중집회가 지속됨에 따라 참여자의 구성은 거의 전사회를 포괄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누가 촛불집회에 참여하느냐고 질문한다면, 남녀노소 전계층이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런 초보적인 답변을 넘어 막상 항쟁의 주역에 대한 세밀화를 그리려고 하면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6·10항쟁과 대비한다면 적어도 몇가지 아주 인상적인 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집회에서 누구나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사실은 대학생의 자리가 청소년들에게 이양되었고, 남성의 자리가 여성에게 절반 혹은 그 이상으로 넘겨졌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전체 항쟁의 격발자(擊發者)가 현대사에서 자주 그래왔듯이 대학생이지 않고 청소년, 그것도‘촛불소녀’였고 항쟁의 바톤을 이어받은 자가 넥타이부대가 아니라 유모차부대와 하이힐 여성들이 된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87년체제를 통해서 경합하던 두 프로젝트인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세대와 성별 그리고 계층과 지역의 분할선을 따라 어떻게 상이하게 작동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왜 대학생이 아니고 청소년인가를 생각해보자.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집단의 세대적 경험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두 집단의 부모가 다르다. 현재 청소년집단의 부모는 87년 민주화 이행을 주도한 386세대이지만, 대학생들의 부모는 70년대 대학생집단과 겹친다. 386세대는 대체로 대중화단계의 대학을 다녔고, 민주화운동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가진 세대였다. 이에 비해 70년대 대학생은 매우 특권적인 집단이었고, 소수를 제외하면 민주화운동을 비껴갔지만 학력이나 학벌의 사회적 보상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누린 세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않은 그 세대 사람들에게서도 학력이나 학벌에 대한 집착은 이후세대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두 집단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헌신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며, 이런 차이는 자녀양육을 비롯한 가족생활에도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양식에서의 민주성의 차이가 자녀세대에서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의 차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뿐 아니라 지금의 대학생집단이 십대 초중반에 외환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들은 환경을 예민하게 지각하긴 해도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경제위기를 경험한바, 고통받는 부모의 근심어린 한숨을 매개로 이들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강화되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체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현재의 청소년들은 심각하게 느끼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외환위기를 겪었고 어느정도 경제가 회복된 후에 청소년기를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수용할 체험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생 대신 청소년들이 전면에 나선 것처럼 여성들 또한 정치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청소년집단 중에서도 핵심세력은 소년들이 아니라 촛불항쟁의 아이콘이 된‘촛불소녀’였다. 이런 사실은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이 남성을 넘어 여성에게, 더 나아가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이 축적되었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가 평등주의에 토대를 두는 동시에 평등을 강화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87년체제가 달성한 민주화로 창출된 새로운 권리의 수혜자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남녀간 차별 또한 여전히 심각하다. UN이 발표한 2007년 여성권한지수(GEM)에서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93개국 중 64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여성들이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의 문화적 잠재력이 낮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근한 예로 최근 인문계 고교 졸업자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남녀간에 차이가 없고, 군가산점 폐지 후 공무원시험 합격률에서는 여성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민주화의 효과로 가정생활에서의 부부간 평등도 신장되었고, 정보화지수에서도 연령이 낮아질수록 남녀간 차이는 사라진다.
촛불항쟁과 관련해서는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활용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에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촛불항쟁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거의 일체화되다시피 하는 항쟁에서는 특정 집단의 동원 맥락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활용능력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정보통신기술 활용, 예컨대 휴대전화나 인터넷의 활용은 양적으로 남성에게 별로 뒤지지 않을뿐더러 질적으로는 더 농밀하다. 남성들은 정보통신매체에 도구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성들은 그것을 친밀성의 소통매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예로 든다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동호회 활동에 훨씬 열심히 참여할 뿐 아니라 더 내밀하게 교류한다. 촛불항쟁을 통해서‘82cook’이나‘소울드레서’같은 여성 중심의 인터넷 동호회들이 보인 정치적 활동성은 단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이 먹을거리라는 좀더 여성적 의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보여준 것은 축적된 문화적 능력, 즉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능력이 정치적 자기계몽과 결합할 때 어느 정도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3. 정보통신 그리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혁신성
앞서 잠시 지적했듯이 촛불항쟁의 두드러지게 새로운 특징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운동이라는 점이다. 온라인이 거리와 광장으로 걸어나오고 광장이 다시 온라인으로 회귀하는 양상, 아니 오프라인 광장이 실시간으로 온라인 광장에 접속해 있는 상황이 바로 촛불항쟁의 핵심 특징이다. 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손에는 휴대전화, 무선인터넷을 갖춘 노트북, 캠코더와 디지털카메라가 들려 있고 집회가 인터넷을 통해 직접 중계되었다. 이런 정보통신기술의 활용으로 촛불항쟁은 양과 질 모두에서 이전의 어떤 항쟁보다 많은 도큐먼트를 생산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몇개의 검색어를 두드리기만 해도 방대한 기사, 토론, 사진, 동영상을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가공되어 동호회 게시판과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저장되고 이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현실 총체에 육박하는 텍스트로서 현실을 조정하고 변동시키는 온라인의 현존은 촛불항쟁에 두가지 방식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우선 정보통신기술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적 매체들에 의해 형성된 공론장을 대치하거나 변형하는 대안적 공론장으로 작용했다. 이 점은 우리의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7년 민주화 이행의 타협성으로 인해 민주화가 공론장의 건강회복이라는 효과를 낳기는커녕 권위주의적 구체제에 봉사하던 보수적 언론기관들에 더 폭넓은 자유와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87년체제를 통해 보수층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보수언론들은 자의적인 기사와 프레임 조작 그리고 표변(豹變)까지 일삼으며 공론장을 외설적 공격성이 넘치는 진흙탕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결정적 장애가 됐다. 따라서 민주적 감수성을 성숙시키고 소통시키기 위해서는 대안적 공론장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런 작업이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같은 대안적 공론장의 발전이 정보통신매체에 의해 내재적으로 보증된 것은 아니다. 정보통신기술은 현실사회의 여러가지 구조에 의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구조화되기 마련이다. 현실자본주의에 대응해 정보자본주의가, 현실의 감시통제 경향에 대응해 전자파놉티콘(Panopticon)이, 현실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전자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잠재적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이 얼마나 실현되는가는 사회 성원들의 민주적 잠재력에 달려 있다. 종종 인터넷 공론장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더 큰 자유의 소통을 가져오기보다는 공격성과 적나라한 욕망이 배설되는‘전자 뒷골목’으로 퇴행할 가능성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촛불항쟁은 이런 퇴행의 위험을 방어함으로써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대안적 공론장을 창출했으며, 그럼으로써 보수언론의 여론조작과 정부의 정보통제를 효과적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렇게 형성된 공론장은 대규모로 군집한 대중이 창의력과 자제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그리고 그들이 집합적 지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5 근대 민주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대중의 집합적 행동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산재한 불만이 특정한 계기로 결집할 경우 그들의 행동은 잘 조절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폭력에 경도되는 때도 많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런 집합적 행동이 지적 담론에 매개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집합적 군중이 민주적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으며, 발달된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결합할 때 그것이 고도의 지성과 자기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촛불항쟁은 보여주었다. 인터넷을 통해 계속해서 집회의 의제와 방향을 토론하고 적합한 시위수단을 모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창의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비폭력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전자는 항쟁 전반이 그토록 유쾌한 축제성을 지닐 수 있게 해주었고,6 후자는 참여자들에게 높은 도덕적 자긍심과 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앞서 민주화의 효과로 촛불항쟁은 참여비용이 크게 낮아졌다고 했는데, 이렇게 참여비용을 낮추는 데 참여자 자신의 비폭력 유지도 큰 몫을 차지했다. 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진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서 폭력적 진압을 시도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폭력시위를 유도했는데, 그 핵심 목표는 촛불항쟁 참여비용을 높임으로써 참여자 수를 줄이고 집회에서 강경파를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쟁 참여자들은 이런 폭력의 유혹을 거절하는 자제력을 보였다.
촛불항쟁이 보여준 거의 세계 최초이다시피 한 정보통신항쟁의 측면은 이미 많이 논의된 바이다. 하지만 그리 많이 논의되지 않은 촛불항쟁의 새로운 측면이 있으니, 87년체제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일상적 경험으로 가진 시민들의 자력화된(self-empowered) 태도로부터 출현한 새로운 비판의 양식과 정신이 그것이다.
주지하듯 촛불항쟁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헌법 제1조」였다. 올해가 제헌 60주년 되는 해이며, 노래로 불린 제1조는 지난 60년간 여러번의 개헌에서도 바뀌지 않고 지속된 조항이다. 그런데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이었던 적도 별로 없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일은 더더욱 별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조항이며 그렇기에 누구도 떠들어보지 않던 헌법 제1조가 대중 사이에서 흥겹게 읊조려졌다.
통상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은 체제를 정당화하는 메씨지와 그렇지 못한 현실을 대조함으로써 그 메씨지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헌법 제1조」를 부르거나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어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온 촛불소녀의 행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체제를 비판한다. 즉 체제의 이념을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 이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헌법은 헌법일 뿐이며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고, 실제로 현실을 운영하는 원리는 관행’이라는 태도를 정지시키고, 겉으로 내걸었을 뿐인 주장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태도는 좌파의 표준적인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더 효과적이다. 이런 접근은 기존의 이념이든 대안적인 이념이든 모두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익 추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냉소주의를 조장하는 보수언론의 공세를 단번에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방식은 촛불항쟁에서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예컨대 대로를 막은 경찰버스에 불법주차차량 견인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그러한데, 그것은 풍자정신에서만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동은 자신을 법의 주체의 자리에 놓는 민주적인 시민의 주인된 태도를 전제한다.7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가 항쟁 속에서 대중이 회의에 젖지 않는 완강함을 지닐 수 있는 원천이었다.
4. 좌파적 반신자유주의론, 무엇이 문제인가
촛불항쟁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반대로부터 출발하여 금세 의료민영화, 물사유화, 교육문제, 대운하, 공영방송 수호 같은 5대의제로 확대되었다.‘미친 소’에 대해‘미친 교육’‘미친 민영화’‘미친 대운하’‘미친 방송장악’이 등가적 연쇄관계를 수립한 셈인데, 이명박정부가 이런 의제들에서 국민 대다수와 대치선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이들의 정책이 공격적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더 분명히 보기 위해서 이명박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성격을 대조해보자. 노무현정부는 탈냉전적 진보성,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정책 혼합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혼합으로 인해 노무현정부는 경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유지하지만 사회정책에서의 민주성과 남북문제에서의 상대적 진보성을 견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도 조절된 신자유주의 내지 수동적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는 냉전적 보수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혼합물인 선진화담론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두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측면에서 공통분모가 있지만 이명박정부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쇄도를 제어할 수 있는 내적 요인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이명박정부가 취임 즉시 냉전적 외교와 민주주의의 역전을 내포한 대담하고 공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게 된 이유이다.8
이런 견지에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대중의 저항을 무마하며 실행할 수 있는 정부는 신자유주의가 정책레퍼토리의 하나로서 실용적으로 수용되는 노무현정부이지 신자유주의가 일종의 신념의 형태를 띠는 이명박정부는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사실 이명박정부의 이념을 구성하는 성장주의, 냉전적 가치관, 신자유주의 가운데 어떤 것도 실용적 의미를 지닌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강한 의미에서의 신념의 형태를 지닌 경직적인 것들이다. 이는 비록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공명하며 한미FTA를 추진했을망정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문제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노무현정부와 달리, 한미FTA를 위해 미국산 쇠고기를 거리낌없이 전면 개방한 이명박정부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검역주권마저 내팽개치는 공격적 신자유주의에 대중은 곧장 저항하기 시작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87년체제를 통해 다수 국민들은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라는 이중적 프로젝트를 심성 안에 수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경쟁적이고 개인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동시에 기본권 보장을 비롯한 정부의 기본 책무와 기초적인 공공재의 민주적 운영 또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다수 국민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명박정부식 정책은 참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렇게 두가지 태도가 공존하는 대중의 심성을 생각하면, 촛불항쟁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추진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확정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격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수 국민들의 저항의 토대가 무엇이었는가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의 이름은 민주주의였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통해서 자본의 힘이 강력해지는 이유는, 자본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는 반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국민국가 안에 가둬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요체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체계적으로 약해진다. 정부는 세계시장에서의 국가경쟁력을 빌미로 법인세를 인하하고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공적 부문을 민영화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정치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하는 복잡한 국제협상을 빌미로 국민에 의한 정치 또한 약화시킨다. 이로 인해 양극화된 국민국가는 두개의 국민으로 쪼개지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 자체의 내적 연대와 통일성이 희미해진다.9
이런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압력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양 날개를 펴야 한다. 하나의 날개는 국민국가가 더욱 민주적이고 국민적일 것을 요구하는 투쟁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의 지구화에 대응하는 시민사회의 지구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검역주권을 말하고, 붕괴된 대의제에 저항하여 국민에 의한 정치를 가동하고, 그런 투쟁 속에서 국민적 정체성을 가다듬고자 국민의 정치를 수행한 촛불항쟁이 얼마나 사태에 정확하게 개입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대중의‘현명함’에 비추어본다면, 지난해‘진보논쟁’을 통해서 더이상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구도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 진보개혁진영의 이론가들과 운동가들이 처한 오류가 무엇인지도 드러난다. 이들은 민주화의 의미를 폭 좁게 해석함으로써, 87년체제를 통해 형성되었고 비록 복잡한 형태로이지만 대중 안에 잠재된 채로 내연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호소력을 간과했다. 또한 이들은 바로 이런 접근으로 인해 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단계를 제시하며 민주화 과제의 종언을 선포하고자 한 보수파의 담론과 의도치 않게 공명함으로써, 기실 내용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선진화담론의 대중적 설득력을 높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항쟁이 보여준 것은 선진화담론의 허구성에 대한 대중적 자각일 뿐 아니라, 대중의 보수성에서 알리바이를 구하거나 반신자유주의라는 경제주의에 경도된 진보진영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다. 촛불항쟁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87년체제의 민주적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더 심화된 민주주의 그리고 공적 감수성의 결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5. 촛불을 둘러싼 담론과 논쟁들
촛불항쟁은 모두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바가 있었다. 촛불은 개인의 염원 그리고 그렇게 모인 집합체의 염원의 탁월한 은유가 돼주었고, 항쟁 전반을 휩싼 축제와 풍자의 정신, 비폭력성 고수라는 면에서도 값진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항쟁 참여자 개개인에게 탁한 삶으로부터 높이 들어올려지는 체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에 대한 다양한 논평에 흐르는 정조 또한 찬미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촛불항쟁에 대한 이런 논평들에는 냉소도 있었을 뿐 아니라 이론적 문제제기도 있었다. 또 촛불이 부지불식간에 드리운 그늘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촛불항쟁에 찬성하는 편에서 나온 이런 논의들은 비록 선의에 입각한 것이지만 정당한 것들은 아니었다.
먼저 이론적 문제제기부터 살펴보자. 최장집은 촛불항쟁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한계를 가졌다는 점을 일찌감치 지적하고 나섰다. 신문과 토론회 그리고 자신의 정년퇴임 강연 등에서 그는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이며 민의에 대해 책임성과 반응성을 지닌 정당체제에 의한 제도적 실천임을 단언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정당체제가 허약하고 대의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촛불항쟁이 구원투수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런 운동정치는 대안 형성이 어렵고, 이슈의 위계질서를 세워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정책이 문제될 때마다 거리시위에 나설 수는 없고,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우며, 시민사회 내의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촛불집회에서 발현된 긍정적 힘을 정치적 대표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라는 것이다.11
이런 주장은 몇가지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12 최장집 그리고 같은 논지의 주장을 펴는 박상훈(朴常勳)은 현대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대의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리얼리즘의 입장에 설 때 이런 주장은 옳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론의 입장에 선다면,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오직 하나뿐이다. 인민의 자기통치가 아닌 한 대의민주주의든 다른 무엇이든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 것은 기능의 측면에서 그것이 인민의 의지를 대의하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를 적합하게 수용하는 한에서이다. 그런데 최장집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리얼리즘의 견지에서 본다면, 대의민주주의는 대의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적 계기에 의해서 항상적으로 제어되어야 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의 현실적 조건을 염두에 둘 때, 정당체제가 중요하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최장집과 박상훈의 정당체제에 대한 강조는 여타 중요한 요소를 가릴 정도로 지나치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활성화되고 건강한 공론장, 다양하고 힘있게 조직되어 있는 시민사회의 자율적 조직 또한 정당체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촛불항쟁은 이런 요소들을 창출하는 긍정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요소들은 단지 정당체제의 대표성과 책임성이 강화된다고 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에서 항상적으로 타오르는 열정적 참여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13 더구나 87년체제를 통해서 줄곧 그래왔듯이 허약한 정당체제와 왜곡된 공론장으로 인해 대의제가 잘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 내부의 운동정치 말고는 정당체제와 공론장을 혁신함으로써 대의제를 강화할 길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맥락적인 수준에서도 최장집과 박상훈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당체제 강화론은 장기적 과제와 단기적이고 임박한 과제를 준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항쟁 이전 87년체제의 민주세력이 최대로 결집해 단호하게 투쟁했던 96년 노동법 파동에서도 그랬지만, 촛불항쟁이 그토록 뜨거웠던 것은 쇠고기 수입개방을 비롯하여 이명박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물, 의료, 방송의 민영화 같은 것은 대단히 비가역적인 정책들이고, 따라서 지금 막지 않으면 몇년 뒤에 정권이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되돌리기 극히 어려우며, 그때까지 일상적 삶 또한 견디기 힘든 것이 되리라는 대중의 판단 때문이다. 이런 임박한 의제들의 해결에 나선 대중에게 대의제와 정당체제 강화 같은 장기적인 과제의 이름으로 촛불항쟁의 한계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담론의 환류효과를 생각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행위이다.
최장집이나 박상훈의 논의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촛불항쟁의 한계를 논하는 입장이 있다. 촛불항쟁이 근본적으로 중산층적 의제를 중심으로 하며, 어둠을 밝히는 구실을 해야 할 촛불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이랜드 노조위원장 김경욱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촛불은 거대했지만 이슈는 잠식당했다”고 말했다.14
필자 역시 촛불항쟁이 에둘러간 비정규직 문제, 남북문제, 한미FTA같은 의제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15 촛불항쟁이 제기한 의제들은 더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며, 촛불항쟁에 어른거리는 대안적 사회를 향한 비전을 가다듬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KTX여승무원, 이랜드 노동자 그리고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의당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항쟁을 대하는 노동자들의 태도에 어린 한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들이 처음 항쟁의 깃발을 들었을 때, 그들은 곧장 쇠고기 문제와 더불어 자신들의 의제를 거기에 결합시켰다. 의료인들도 그랬고 언론인들의 일부도 그랬다. 촛불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쟁점에 집중하기 위해 의제설정에서 신중하게 자기한정을 한 것은 맞지만, 무엇이 의제가 되는가는 열린 문제이기도 했다. 이는 촛불항쟁 과정에서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에서 잘 드러난다. 화물연대는 자신들의 의제를 유가인상으로 인한 보편적 고통에 접맥시켰고, 쇠고기 운송거부를 통해서 촛불항쟁에 접속했다. 그리고 대중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고 화주들과의 협상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애정어린 고언을 하자면, 비정규직 법안으로 큰 피해를 보았던 이랜드 노동자나 KTX여승무원들은 촛불항쟁에 너무 늦게 도착했고 자신의 의제를 촛불항쟁에 녹여넣지 못했다.
확실히 촛불항쟁의 의제들은 중산층적인 면이 있다. 더구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이 운동에서 인터넷에 들어가볼 시간조차 없이 노동에 시달리고 해고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촛불항쟁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모두가 주인이 되는 감수성에 충만한 운동에서 유효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제약된 환경에서도 주인이 되는 참여의 길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자는 아직 그 공간은 닫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촛불항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으며, 촛불항쟁의 자기성찰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6. 87년체제의 극복으로 승화되어야 할 촛불
교과서적 논의를 따른다면, 권위주의적 정부의 전복은 통상 다음과 같은 씨나리오를 따른다. 먼저 광범위하게 축적된 불만이 존재한다. 정당성을 결여한 정부는 통상 경제적 수행성을 통해서 이 불만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에 실패한다. 그런 과정에서 특정한 의제를 중심으로 불만이 조직된다. 조직된 불만이 항의와 집회로 발전하고, 이로 인해 정부와 대중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 정부의 무리한 진압은 대중의 투쟁을 더욱 고양하고, 이제 정부는 유화책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많은 양보가 두려워 너무 적게 양보하려고 한다. 실망한 대중의 투쟁은 더 격화되고 전면화된다. 이렇게 투쟁에 나선 대중 앞에서 경찰과 군대는 자신의 친지와 이웃이 어른거림을 발견한다. 진압명령이 작동하지 않고 권위주의 정부는 급격히 몰락한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발생시점 때문에 이런 씨나리오를 따르기 어려우며, 이 시점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비록 대중이 항의를 통해 당장 중지시켜야 할, 더구나 한번 시행되면 대단히 비가역적인 정책들이지만 정부가 이런 정책들을 결코 간단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정부의 교체를 이뤄야만 말끔히 해결될 수 있는 의제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부를 출범 직후에 교체하는 것은 대중적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대안이 이념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행의 비용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것이 촛불항쟁의 아포리아이며, 지금까지 해방후 한국사회에서 존재했던 모든 대중적 항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4·19혁명에서 6·10항쟁 그리고 가까이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중적 투쟁은 권력교체기 혹은 선거주기와 연계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짧고 격렬한 투쟁에 이어서 정치사회의 민감한 반응에 매개된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촛불항쟁의 경우 두달 넘게 대규모 투쟁이 이루어졌으며, 의제가 확장되긴 했지만 여전히 중심에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이라는 단일의제가 자리잡고 있음에도 결정적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선거주기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촛불항쟁 속에서 최장집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민주화과정에서 나타났던 열망과 실망의 악순환, 즉 열정적인 운동의 정치가 제도적 보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악순환을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순환이 형성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다.
대중의 격렬한 저항이 잦아들자 이명박정부는 경찰력과 행정적·법적 조치를 앞세워 여기저기서 참호를 파며 진지전의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에게 유신과 5공과 6공 공안정국의 기시감(déjà-vu)을 끊임없이 유발할 정도로 진행된 이명박정부의 비민주성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라는 정당성을 침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명박정부에 의한 이런 저강도 공안정국과의 길고 지루한 투쟁 속에서 대중이 단련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16
그 연장선상에서 총선이나 지방선거처럼 큰 직접민주주의적 계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작은 수준의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들 하나하나가 전국적 쟁점으로 전환되고 하나씩 제도적 승리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 또한 촛불항쟁의 새로운 발전을 자극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촛불항쟁 와중에 있었던 재보궐선거에서의 여당 패배와 제주도 영리의료법인 설립이 주민 여론조사에 의해 무산된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이어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촛불후보’였던 주경복 후보가 낙선하긴 했으나, 주경복 후보가 촛불항쟁의 힘을 충분히 결집할 만큼 잘 준비된 후보는 되지 못했다는 점이나 몇달 전 서울의 대선과 총선 판도를 생각한다면 선거결과는 촛불항쟁에 힘입은 대단한 약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17 이런 힘은 이런저런 재보궐선거나 주민소환운동을 통해 더 잘 준비된 형태로 지속될 수 있다. 요컨대 작은 규모의 모든 선거들에 초점이 부여되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현정부의 실정과 무능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대안적인 조직과 인물을 형성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주요 선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촛불항쟁에 어른거리는 대안적 사회에 대한 비전이 가다듬어질 기회가 열려 있다. 이 기간에 촛불항쟁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심화시켜나갈 수 있다. 6·10항쟁이 그랬고 탄핵 반대시위가 그랬듯이, 시민사회의 혁신의 힘이 선거를 계기로 정당체계에 투입되는 동시에 정당체계가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재보수화되는 방식을 넘어서,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정치사회의 재구조화를 요구하는 이념과 정책들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촛불항쟁이 가진 급진적 탈중심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에 함축된 대안적 사회의 비전이 어떻게 가다듬어질지는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촛불항쟁이 생명의 의제로 출발하여 공생의 비전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 공생의 비전이 제도적 모형과 그것을 향한 이행의 길을 구상할 수 있다면 한반도에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이 공적 대의와 사적 행복을 매개하는 제도적 비전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87년체제는 사회 성원들의 개인적 합리성과 자기이익에 입각한 행동양식, 민주적 감수성 모두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 체제가 더 심화된 민주화로 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안이 사회 성원들의 계몽된 자기이익 추구에 호소할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이 현체제의 게임규칙을 바꾸는 실천과 매개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개인적 적응과 체제의 모순 극복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비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87년체제를 통해서 개혁진영은 보수적 헤게모니에 굴복하여 극복 없는 적응에 경사될 때가 많았고, 진보진영은 적응 없는 극복을 외쳤을 뿐이다. 그 결과는 대중을 극복 없는 적응의 길로 이끌었다. 이 궁지에서 벗어나 극복/적응의 이중과제를 구현하는 제도적 비전을 마련할 수 있다면,18 그리하여 대중이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이 체제와 그 체제의 환경 속에서 적응하면서 극복하는 길, 극복을 성취하는 적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촛불항쟁은 지금 그렇듯이 87년체제의 보수적 재편에 제동을 거는 것에서 더 나아가, 87년체제를 민주적으로 재편함으로써 긴 교착의 상태를 끝낼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기쁘게 87년체제의 종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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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더 자세한 논의는, 졸고 「87년체제와 진보논쟁」,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 참조.↩
- 사회 성원의 가치관과 선호체계를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라는 두 요소의 혼합만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요소가 여타 가치나 선호들을 연계하는 중심요인인 동시에 사회체제의 제도적 설계와 관련된 핵심요인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 필자는 이와 비슷한 취지로 이른바‘386세대’의 문화적 보수성을 분석한 바 있다. 「공적 대의와 사적 행복 사이에 길을 내자」, 『창비주간논평』 2006.11.7.↩
- 여기에 더해 서울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집회와 시위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여기는 태도가 2002년 한일 월드컵,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2004년 대통령 탄핵 반대시위 등으로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 collective intelligence는 몇몇 학자와 언론에 의해서‘집단지성’으로 번역되어 촛불항쟁의 양상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적절한 번역은‘집합적 지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번역할 때만 집단지성이라는 표현에 깃든 거대주체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동시에, 촛불항쟁을 특징짓는 분권화되고 탈중심화된 소통과 의지형성의 특징을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 이런 대중의 유쾌한 축제성을 잘 포착한 글로는 김어준의 「美 쇠고기, 닥치고 재협상!」, 『한겨레』 2008년 6월 4일자 참조.↩
- 주인됨의 자세를 보여주는 또다른 예로, MBC 「100분토론」에서 “그렇다고 대통령을 바꾸겠습니까?”라고 한 나경원 의원의 말에 대해 아고라‘100분토론 게시판’에 오른 한 누리꾼의 “아니, 그럼 국민을 바꿔요?”라는 댓글을 들 수 있다.↩
- 대선 전 최장집(崔章集)은 남북교류와 관련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갈등을 격렬한 듯 보이지만 수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평가했고, 손호철(孫浩哲)은 대선을 통해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다고 해도 남북문제에서 변할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우려를 “두려움의 동원”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지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이명박정부의 냉전적 외교는 이들의 판단이 단견이었음을 보여준다.↩
- 이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는, 박영도 「세계화 시대의 민주주의: 그 딜레마와 전망」, 『경제와 사회』 2000년 봄호 참조.↩
-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전에 우리 지식계에서 유행한 탈민족주의 논의가, 민족주의의 폐해와 역기능을 지적함으로써 민족주의의 성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점을 제외하면 얼마나 정치적 맥락에 어두운 것이었는지 드러난다. 탈민족주의 논의는 민족주의가 분단된 한반도에서 가진 진보성을 고려할 때 탈맥락적일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좀더 일반적인 맥락에서도 정치적 유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탈민족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도전하는 담론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 최장집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 어떻게 볼 것인가」, 긴급 시국 대토론회‘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 2008.6.16.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강한 논지의 글로는, 박상훈 「운동이 정치체제 대신 못해… 보수독점 강화할 수도」, 『오마이뉴스』 2008.7.8 참조.↩
- 촛불항쟁을 보는 최장집의 관점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비판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글로는, 손우정 「촛불정국의 방향은?‘정당정치’vs‘거리정치’: 최장집 교수의‘대의민주주의론’비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홈페이지(eplatform.or.kr) 2008.6.26 참조.↩
- 예컨대 공론장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서 대중은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에 대하여 광고주 압박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운동은 정당체제의 강화로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아마도 최장집이나 박상 훈은 민주파가 집권하고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탁월한 정치를 수행한다면,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의 위력은 자연히 감소되고 그에 따라 공론장이 정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만일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정치적 리얼리즘이 결여된 생각이다.↩
- 여정민 「“광화문 뒤덮은 촛불물결 보며 절망했다”: 〔인터뷰〕 파업 1년 맞은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 『프레시안』 2008.6.24.↩
- 졸고 「촛불이 갈 길」, 『창비주간논평』 2008.7.9.↩
- 다른 한편 정부의 진지전에 대응하는 투쟁뿐 아니라 개헌이나 대통령 신임 국민투표 등으로 단번에 현재의 국면을 돌파하려는 보수진영의 기동전에 대해서도 대중의 경계와 준비가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평준화를 해체하려는 이명박정부의 교육정책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급식문제를 매개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저항하는 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해줄 중요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주경복 후보의 낙선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이 선거는 적어도 세가지 교훈을 준다. 우선 강남벨트의 투표결집뿐 아니라 강남이 가진 헤게모니적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몇몇 신문들이 강남벨트의 투표를‘계급투표’라 부른 사실에서 보듯이, 일부 잠식되긴 했지만 그들이 현체제의 게임의 규칙에서 승리한 자들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나오는 헤게모니적 힘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들의 노선은 다수에게‘쎄이렌의 노래’처럼 유혹적으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강한 문화적 혁신과 성찰을 통하지 않고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다음으로 주경복의 패배가 보수언론에 의해 짜여진 프레임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전교조의 패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반이명박 전선의 패배라는 점이다. 전교조는 87년체제의 민주적 성과이자 그 보루의 하나임에도 그간 교원평가 반대 같은 방어적 투쟁에 몰두함으로써 교육개혁의 적극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대중적 지지를 크게 상실했다. 이런 중요한 지식인 노동자조직이 새롭게 사회적 신뢰를 얻지 못하는 한, 교육개혁을 향한 투쟁이 큰 힘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이명박 전선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모자란 바가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어떤 선거에서도 반이명박 정서는 작동하겠지만, 그 선거는 이명박에 대한 선거가 아니라 새로운 인물에 대한 선거이다. 보수층은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정책의 기대감으로 반이명박 정서를 희석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건은 예견되는 이명박정부의 실정과 무능이 아니라 대안의 조직화이다.↩
- 백낙청은 근대성 문제를 논하며 극복/적응의 이중과제론을 제기했는데, 이런 이중과제를 제도적 비전과 현실정책 내에서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극복/적응의 이중과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로는, 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참조. 그리고 생태적인 쟁점과 관련된 이중과제론을 다룬 최근 글로는,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이중과제론’에 대한 김종철씨의 비판을 읽고」, 『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