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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오끼나와가 동아시아에 던지는 질문

 

 

토리야마 아쯔시 鳥山淳

오끼나와의 진보잡지 『케시까지(け-し風)』 편집운영위원, 오끼나와대학 강사. 편서로 『전후 초기 오끼나와 해방운동 자료집』 제1권(공편), 저서로 『오끼나와, 물음을 세우다』(공저)가 있다.

* 이 글의 원제는 「沖繩をめぐる‘構造的差別’」(오끼나와를 둘러싼‘구조적 차별’)이며, 심포지엄 발표문에 본지를 위해 참가후기를 덧붙인 것이다-편집자.

 

 

1. 계속되는 억압

 

오끼나와(沖繩)의 일본‘복귀’로부터 3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끼나와에서 발행되는 5월 15일자 신문 지면에는 매년‘복귀’후의 발전과 과제를 총괄하는 기사가 실리는데, 그 규모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 의한 점령통치라는 부정적 유산이 착실하게 해소되어,‘복귀’의 의미를 되물을 필요성이 줄어든 것일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점령이 불러온 억압은 부분적으로 형식을 바꿔가며, 하지만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

1972년 5월 15일에 실현된 오끼나와의‘복귀’란, 국제정치 용어로 풀이하면 시정권(施政權, 신탁통치지역에 입법·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권한)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된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복귀’라는 말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념이나 정념(情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핵심에는‘본래의, 당연한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있지만, 오끼나와를 둘러싼 역사적 경험에 눈을 돌린다면 그 말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분명 군사점령을 종식시키고 자치를 획득한 것은‘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으로‘돌아감’으로써 그‘당연한 모습’이 실현될 것이라는 바람에는 너무나 많은 아찔한 모순과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일찍이 아라사끼 모리떼루(新崎盛暉)는 『일본이 된 오끼나와』라는 절묘한 제목의 저서에서‘복귀’후에 표면화된 일본과 오끼나와의 긴장관계를 묘사한 바 있다.1 오끼나와로서‘복귀’란 바로‘일본이 된다’는 경험이지,‘복귀’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것 같은 예정조화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올해 5월 15일 신문 지면에는 오끼나와 북부의 시정촌(市町村, 일본의 행정단위)에 대한 재편교부금 교부액 결정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미군 재편이라는 미명하에 오끼나와에서는 신기지 건설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기존의 미군기지에서는 육상자위대의‘공동사용’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 일본정부(방위성)는 기지 확충책에‘협력’하는 정도에 따라 시정촌에 교부금을 분배하는 수법으로 “새로운 기지 부담에 반대하면 재정위기에 직면한다”는 구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지 피해는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기지 확충책에 대한‘협력’을 요구하고, 일본정부에 의해서 그것이 금액으로 환산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의 뜻을 표명하더라도, 정부와 시정촌 사이의 불투명한 협의로‘절충점’이 찾아지고 그것이‘지역의 합의’로 발표된다. 이같은 사태가‘복귀’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군사점령이 초래한 부정적 유산을 청산할 의지가 없으며, 오히려‘도서(島嶼) 방위’를 주창하고 오끼나와 기지의‘공동사용’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점령과 미일안보체제에 의해 고착화되어온 오끼나와 기지는 향후 미군만이 아니라‘자국 군대’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고착화되어갈지 모른다.

 

 

2. 오끼나와 점령과 함께 정착된 ‘구조적 차별’

 

1879년 일본정부는 류우뀨우(琉球)왕조를 강제로 해체하고, 오끼나와현(縣)을 설치했다. 근대국가의 형성을 서두르던 일본정부로서 류우뀨우의‘양속(兩屬)’상태는 시급히 해소해야 할 과제였는데, 류우뀨우왕조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결국 일본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위협함으로써 병합을 강행한 것이다. 류우뀨우의 사족(士族) 중 일부는 이에 불복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류우뀨우 복속은 청일간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이 외교갈등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류우뀨우의 복속을 둘러싼 교섭이 불필요해짐에 따라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후 일본정부는 오끼나와 사회의 본격적인 변혁에 착수하여 1910년대까지 정치·사회제도의 차이를 해소해갔다. 이것이 오끼나와가‘일본이 된’첫 경험이다.

 

오끼나와의 지리적 위치

 

하지만 1945년 오끼나와전쟁의 결과, 일본정부의 행정권은 정지되어 오끼나와 사람들은 미군 점령하에서 새롭게 출발해야만 했다. 한창 오끼나와전쟁이 진행되던 중에 대일전쟁의 거점으로서 거대한 기지를 구축했던 미군은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서태평양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군사거점으로 오끼나와를 자리매김하고, 배타적인 보유를 지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끼나와를 일본에서 분리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는 뒤늦게‘일본이 된’오끼나와의 역사가 호재였다.

1947년 6월, 더글러스 매카서는 “오끼나와인들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오끼나와 점령에 일본인이 반대할 일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그 발언은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해 9월에는 그것이‘천황(天皇)의 메씨지’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쇼오와(昭和) 천황은 국무성 정치고문에게 시종(侍從)을 파견하여 미군의 오끼나와 장기점령을 희망한다는 취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명목상의 주권을 일본에 두고 미국이 조차(租借)하는 방식을 취하면 일본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해 9월부터 10월에 걸쳐서 당시 아시다 히또시(芦田均) 외무장관도 연합군사령부(GHQ)에 대한 요청을 정리하여 극비리에 전달했다. 아시다 외무장관이 작성한 문서에서는 “일본의 바깥이지만 일본에 접한 지역의 몇군데 전략지점에”(on certain strategic points in areas outside of but adjacent to Japan)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소련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다며, “평시의 대치는 오끼나와와 오가사와라(小笠原)2에 주둔하는 미군으로 대신하고, 유사시에만 일본 본토에 미군의 진주를 허가하는” 방식을 취하면, “일본의 독립을 손상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without compromising Japan’s independence)라고 설명했다.3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오끼나와 정책은 배타적 보유로 굳어지고, 1951년 대일강화회의에서 결정된 오끼나와의 처리방법은 명목상 주권은 일본에 두면서 일본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미국이 계속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오끼나와의 미군으로 소련을 견제하면서 일본 본토의 미군 주둔은 피하겠다는 구상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강화조약 발효 후에도 미일안보조약으로 일본 각지에 미군기지가 잔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는 결과적으로 아시다 히또시가 제안했던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 특히 토오꾜오나 오오사까 등 대도시권에 있던 기지는 차례로 반환되어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 면적은 1955년부터 1960년 사이에 4분의 1로 격감했다. 1957년의 미일정상회담에서는‘지상전투부대 철수’가 발표되어, 해병대는 오끼나와로 그리고 육군은 한국으로 주둔지를 옮기는 방침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오끼나와에서는 그때까지 주둔하지 않았던 해병대의 주둔지 이전을 목적으로 캠프 건설이나 훈련장을 위한 토지수용이 시작되어, 1955년부터 1960년 사이에 미군기지 총면적은 1.8배로 증가했다. 그럼으로써 오끼나와 본섬의 20% 이상이 군용지가 되었다.

이같은 변동에 대해서 일본사회가 어떠한 시선을 보였는지는 검증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며, 1957년의 좌담에서 요꼬따 키사부로오(橫田喜三郞, 국제법학자)의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오끼나와는 일본과 지위도 다릅니다. 오끼나와에서 군대가 사라지면, 미국의 원조를 받으려 해도 시간이 걸려요. 국제정세가 아주 개선되었다면 다른 문제지만,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오끼나와로 이전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내지(內地)에 있으면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테니 이것은 철수하는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일본의 방어도 생각해야 할 텐데, 자위대의 증강이라는 것도 대략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역시 일단 오끼나와로 이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끼나와에서 철수하는 거죠. 오끼나와의 지위 문제도 있고, 일본의 감정 문제나 국제정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만.4

 

요꼬따는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테니” 일본에서 철수되어야 한다면서도, 미국 본토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가까운‘오끼나와로 이전하는’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그 발상은 10년 전 아시다 외무장관이 제시한 구상과 대단히 흡사하다.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천황의 메씨지’나 아시다 구상이 오끼나와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거나, 요꼬따의 발언이 오끼나와에 미군기지를 집중시키는 계기를 촉발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확인해두고자 하는 점은 오끼나와를 제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는‘구조적 차별’이 미군의 전략과 결부된 형태로 확실하게 존재했다는 것이다.5

 

 

3. 온존하는 ‘구조적 차별’

 

1972년의‘복귀’는 오끼나와가‘일본이 된’두번째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내실은 오끼나와에 대한‘구조적 차별’을 교묘하게 온존시키는 것이었다. 1971년 6월에 오끼나와 반환협정이 조인되었을 때, 일본정부는‘비핵·본토 수준의 반환’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본토 수준’이란 미일안보조약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데 지나지 않았고, 또한‘비핵’은 표면적인 발표일 뿐 비밀협정에 의해 긴급상황에서의‘재유입’이 보장되었다.

시정권 반환에 동반하여 일본정부에 부여된 역할 중 하나는 군용지 제공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소유자와의 임대계약 절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점령하에서 강제적으로 사용되어온 군용지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큰 반발이 일어나 계약에 응하지 않는 토지소유자도 적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에 근거하여 토지제공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윽고‘반전지주(反戰地主)’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군용지 대금을 큰 폭으로 올려 회유를 꾀하는 한편, 1972년부터 오끼나와의 군용지만을 대상으로 하는‘공용지법(公用地法)’을 시행했다. 그 법에 따라 소유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5년간 강제로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그 적용기간을 1982년까지 연장했다. 그리고 1982년부터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미군용지 특차법(特借法)’을 꺼내들어 현재까지 강제사용을 계속해왔다.

그러한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며 오끼나와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었던 것은 미군에 의한 성폭행사건이 오끼나와 사회에 충격을 던진 1995년이었다. 당시 그 상징으로 여겨졌던 사건이 오오따(太田) 지사의‘대리서명’거부이다.‘미군용지 특차법’에 따른 강제사용의 인정절차 중에는 토지소유자가 현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입회서명’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토지소유자의 기지내 입장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서명을 거부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럴 경우 종래는 시정촌의 기관장 혹은 지사가‘대리서명’을 하여 그 절차를 밟았으나, 1995년에는 시정촌의 기관장 및 지사가 그것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강제사용 절차가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강제사용 기한이 종료되어 미군의 토지사용은 불법점거가 되기 때문에, 그같은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일본정부가 직무집행 명령을 청구하여 오끼나와현 지사를 제소하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제소된 지사는‘미군용지 특차법’에 의거한 강제사용은 미군기지의 고착화를 초래하는 것이며, 지사로서 그 절차에 가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50년 동안의 기지사용으로 인한 고통을 상세하게 호소했다. 이때 오끼나와현이 제시한 통계 중에 1972년부터 1994년까지 미군기지 면적의 변화가 있다. 그 통계에 따르면, 일본 본토에서는 1972년 시점의 미군기지(전용시설) 중 59%가 1994년까지 반환되었는데, 오끼나와에서 반환된 것은 15%에 불과했다.6

시정권이 일본으로 반환되어 군사점령이 종결된 뒤에도 오끼나와에 대한‘구조적 차별’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어왔으며, 그 결과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75%가 오끼나와에 집중해 있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 상황은 약 반세기 전에 아시다 외무장관이 그렸던 구상, 즉 오끼나와에 미군이 주둔하여 비상시를 대비하지만 일본에는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일본의 독립을 손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태에 아주 근접하다. 대부분의 일본 국민에게 미군은 가시적이지 않은 존재였으며 미군기지가 낳는 폭력을 가깝게 느끼는 일도 없다.

1995년 오끼나와에서 돌출된 이의제기는 반세기에 걸친‘구조적 차별’을 청산하고 일본과 오끼나와의 관계를 재구축하기 위해서 지극히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남짓 일본정부는 기지문제를 오끼나와에 계속 강요하여, 오끼나와의‘부담 경감’을 위해서는 오끼나와에‘대체시설’이 필요하다는 도착적인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미일동맹’이라는 말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연호되는 오늘날, 미일안보체제는 변질되어 곧 오끼나와는 미일 양군이 공동작전을 전개하는 군사거점이 될지 모른다.

그에 저항하는 운동의 장은 군대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인권, 환경보호, 동아시아의 역사경험, 선주민(先住民)의 권리 같은 우회로를 전하면서 국경을 넘어 넓어지고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은 이미 오끼나와와 일본이라는 관계만으로 표현될 수 없다. 하지만 또한 오끼나와와 일본의 관계를 문제제기하지 않고 반세기가 넘는‘구조적 차별’을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그리고 다양한 우회로 속에서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4. 후기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전체 주제로‘화해의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거기에서 논의되어야 할 세가지 문제로서 대만과 중국의‘양안 문제’, 남북한 문제 그리고 오끼나와 문제가 설정되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화해’라는 말로써 주최측이 우선 상정한 것은 대만과 중국, 한국과 북조선 그리고 오끼나와와 일본이라는 세가지 대립관계인 듯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끼나와에 관해서는 다른 두 경우와 차이가 있어 대립관계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심포지엄에서 오끼나와를 독자적인 발신주체로 보고 참가를 요청한 배경에는 일본과 오끼나와를 우선은 대립관계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같은 형태로 오끼나와에 주목하는 태도가 생겨나고 있다는 점은 새로운 인식의 출발로서 우선 매우 흥미롭다. 물론 오끼나와(류우뀨우)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다룬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는 청(淸)왕조부터 국민당 정권으로 계승되어온 역사를 지니고 있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오끼나와에 대한 시선이 오직 류우뀨우왕조 시대의 역사적 관계에 의거했던 것에 비해서, 지금 생겨나고 있는 관심은 현대 동아시아라는 시야 안에서 미군의 존재와‘분단체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터무니없는 오해와 무리한 해석이 존재할지 모르나, 그것까지 포함해서 동아시아의 어떠한 문맥에서 오끼나와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면서 논의해갈 의미는 있을 것이다. 또한 거꾸로 오끼나와로부터 동아시아를 향해서 어떠한 관점이 생겨나고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오끼나와와 한국의 관계에 한정해서 보자면, 군사기지를 둘러싼 경험이 접점이 되어 최근 10년 동안 서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데, 대만이나 중국과의 관계 및 대화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제 막 도정에 들어선 단계라는 인상이다.

내가 심포지엄의 논의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을 짧게 밝히자면, 오끼나와는 일본과의 대립관계를 체현하는 존재로만 논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오끼나와가 동아시아에서 일국적인 주체로서 인식될 것인지 여부도 문제의 중심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끼나와라는 발신주체가 일본이라는 국가 안의 지역(local)이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근현대에서 국가형성의 단위가 되지 못했던 오끼나와의 경험과 현재를 검토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화해’의 문제를 국가·국민이라는 차원에 일면화하지 않는 논의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중국대륙에서 민간인 살해를 거듭해온 부대가 전쟁 말기에 오끼나와에 배치되어 전장에서 주민에게 총검을 들이댔다는 역사를 삽입해볼 때, 일본과 중국 사이의 역사인식 문제는 어떠한 논의로 전개될까.

마지막으로, 이 심포지엄에서 강렬하게 느낀 것은 동아시아라는 공동경험을 스스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정열이었으며, 솔직한 논의를 교환하는 관계를 소중히하려는 자세였다. 심포지엄 전체를 기획한 천 꽝싱(陳光興)은‘이매진’(imagine)이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여‘분단체제를 흔들기’위한 논의의 장을 설정하려고 시도했다. 가속화하는 자본의 움직임은 이미 동아시아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고, 서로 닮은 경제적인 경험을 낳고 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의 우회로로부터 동아시아를‘상상’하기 위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다.

번역: 박광현 / 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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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新崎盛暉 『日本になった沖繩』, 有斐閣新書 1987.
  2. 토오꾜오에서 남남동쪽 태평양에 위치한 제도(諸島)로서, 태평양전쟁 때 격전지로 잘 알려진 이오오시마(硫黃島)를 비롯해 무꼬지마(聟島), 찌찌지마(父島), 하하지마(母島) 등으로 이뤄졌다. 1876년에 일본 영토에 포함되었다가 태평양전쟁 후 미국의 시정권하에 놓였으나, 1968년에 일본으로 반환되어 지금은 토오꾜오도(都)에 속해 있다-옮긴이.
  3. 三浦陽一 『吉田茂と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上卷), 大月書店 1996, 78~83면.
  4. 「座談會-安保條約·行政協定の改廢をめぐって」, 『時の法令』 240호 17면.
  5. ‘구조적 차별’이라는 표현은 아라사끼 모리떼루의 “현대 일본사회에서의 구조적 차별로서의 미일안보”(『日本社會の差別構造2』, 弘文堂 1996)에서 차용한 것이다.
  6. 『沖繩-苦難の現代史』, 岩波書店 1999, 102면. 이에 대하여 1996년 8월 최고재판소(한국의 헌법재판소에 해당)에서는 지사의 서명 거부는‘공익을 해한다’고 해서 오끼나와현의 패소를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