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이재웅

이재웅 李載雄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와 소설집 『럭키의 죽음』이 있음. woong-novelist@hanmail.net

 

 

불온한 응시

 

 

철호는 대로를 따라 실비집으로 가고 있었다. 실비집은 7번지 인근의 공사판 인부들이 자주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계절은 겨울의 막바지였다. 바람은 찼고, 햇살은 날카로웠다.

대로 옆은 넓은 들판이었다. 그곳은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철호의 얼굴은 사색과 약간의 짜증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가끔 길바닥의 돌멩이나 가로수 밑동에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럴 때, 그의 얼굴은 햇볕에 일그러졌고, 거칠고 검은 얼굴거죽 위로 노란 허무나 무기력 같은 것이 피어오르곤 했다. 햇볕이 눈꺼풀을 누른다.

그는 십여분 만에 실비집 앞에 도착했다. 참새떼가 실비집의 낡은 기와지붕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햇볕을 받아 검은 철편들 같았다. 그것들의 작은 몸체 옆으로 햇볕이 번뜩였다.

철호는 실비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비집 안에는 벌써 여남은의 사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키 크고 홀쭉한 사내가 중앙의 연탄난로 앞에 서서 두 손을 내민 채 온기를 쬐고 있었다. 누군가는 식사를 기다리며 잡담 중이었다. 누군가는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식냄새가 꽉 차 있었고, 주방의 창구 밖으로 놓여진 음식에서는 하얀 훈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철호는 후문쪽 구석진 테이블로 갔다. 그 옆에는 이미 다른 사내가 테이블을 점령하고 앉아 담배를 태우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흙빛이 돌고, 수염과 머리는 지저분했다. 무언가에 지친 기색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가끔 후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후문으로는 강렬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너머의 길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루한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그 길 위를 지나쳐 간다. 아지랑이가 잠시 흩어지고 다시 타오른다.

철호는 테이블에 앉았다. 먼지 낀 바지에서 담배를 꺼냈고, 테이블을 반쯤 적시고 있는 노란 햇볕의 열기에 두 손을 녹였다.

실비집 주인은 철호보다 앞서 들어선 사내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한 사내가 내장탕이 좋은가 김치찌개가 좋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듯이 테이블 건너편의 사내에게 물었다. 건너편의 사내는 대답이 없다. 그런가 하면 그 옆의 사내는 누구든 들으라는 듯이 “아무거나 뱃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야” 하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순서가 되자 그 역시 메뉴를 쉽게 정하지 못하고 벽에 붙은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 곁에 서 있었고, 사내들 중 하나가 주문한 메뉴를 성의 없이 받아 적었다.

철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 연기는 햇볕 속에서 먼지와 함께 하얗게 번져나갔다.

철호 역시 공사판 인부였다. 그의 작업장은 7번지 상가단지 귀퉁이였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는 십장 앞에서 자신의 거친 내면을 까발려버렸고, 그것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십장은 무뚝뚝했다. 그것은 본래 그의 성격이기도 했고,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때로는 작은 사고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하지만 대개는 공사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중에는 인부들의 실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누군가가 철근을 어설프게 엮었다. 그는 그것을 몇번 흔들어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건 다시 처넣어야지” 하고 말할 뿐이었다. 또 인부 하나가 결근하면 그는 연락을 넣고, “그런 사정이면 편히 쉬슈. 사람 하나 없다고 일이 안 돌아가는 법은 없으니깐” 하고 말했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서는 불쑥 큰 소리를 내지르곤 했다. 또 불쾌한 침묵을 머금고, 그만큼의 무게가 담긴 시선으로 인부들 하나하나를 마치 씹어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그것은 작업이 그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작업을 마치려 했다. 하지만 몇번의 예상치 못한 호우가 있었고, 또 무슨 사정인지 레미콘도 이삼일씩 늦곤 했다. 기존 인부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손발이 맞지 않는 인부들이 투입된다.

모두가 그 상황을 알고 있었고, 십장도 그랬다. 하지만 십장은 십장인 것이다. 그는 상부에 이렇다 저렇다 보고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무엇인가 계책을 내야 한다. 하지만 계책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부들 중 몇은 하급인생들답게,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십장의 안색을 살필 줄 알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안다. 그들은 왜 십장이 더이상 그들에게 친근한 농담을 건네지 않는지를 이해하며, 그의 불쾌한 침묵이 담긴 시선 앞에서 묵묵히 움직인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한사람 한사람이 움직여서 일을 진척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합리적인 노동의 감각을 익혔다. 서둔다고 모든 것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늦어진 일을 이틀 앞당길 수는 있지만 일주일 전체를 앞당길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노련한 인부들은 몸이 예전 같지 않고, 패기도 그렇다.

모든 것이 십장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 불편한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십장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철호 같은 미숙한 인부들뿐이었다. 불만이 하나둘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철호는 이번달 들어 내내 그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둘 그를 향한 말수가 적어진다. 갑자기 화를 내고, 그가 무엇인가 의견을 내면 동료들은 담배를 문 채로 무엇인가를 가늠하듯이 그의 두 눈을 쳐다본다. 가끔은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쳐준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무섭도록 냉정해진다.

철호는 이것이 인생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도 알지 못할 어떤 살의에 사로잡힌 채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는 매일매일 몸이 무겁고, 그런데도 두 다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 고무호스가 찢어지고 또 물을 끌어오는 펌프도 고장나버린 것이다.

십장은 입을 다문다. 조금도 기다릴 수 없다는 자세로, 무엇인가를 노려보듯 철호를 지켜본다. 공사판 인부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갈 뿐이다. 기계에 노련한 박씨가 있었다면, 그가 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박씨는 나흘째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뚱뚱하고 굼뜬 사십대 중년의 사내가 인부들과 손발을 맞추고 있다. 인부들은 가끔 들판의 황새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돌려 철호를 바라본다.

철호는 어째서 자신이 고무호스며 펌프를 책임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것을 지시한 적이 없고, 또 철호도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그 옆을 지나칠 때 그 두가지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고, 그가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그것을 모른 척한다면, 십장과 인부들의 시선은 더욱 따가워질 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 옆을 서성거린다. 십장의 시선은 그의 뒷덜미에 닿아 있다. 인부들은 침묵한다. 등에서는 땀이 오르고, 얼굴은 분노와 수치로 달아오른다.

일의 발단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십장은 꽥 소리를 질렀다. 펌프 앞에 서 있는 철호의 등 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철호를 옆으로 밀어내더니, 작동이 멈춰버린 펌프 앞에서,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떡 버티고 서서 인부들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자신이 조금만 신경을 늦춰도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애새끼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듯 모든 것을 돌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인부들의 자존심을 긁는 것이었다. 모두가 불쾌한 침묵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십장과 함께 철호를 힐끔거린다.

철호는 십장의 고함소리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철호는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자신조차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당혹스러운 수치에서 벗어났을 때, 그래서 그의 머리가 명쾌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밝아졌을 때, 그는 십장에게 개자식, 하고 낮게 쏘아붙였다. 그것은 그의 완전한 진심이었던가?

십장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눈이 작아지고, 두 눈동자가 천천히 철호에게 향한다.

만약 그가 몇년만 젊었더라도 당장 철호의 멱살을 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철호는 서른두살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런 상황에 얼마만큼은 이골이 난 경험자이기도 했다.

이성이 두 사람을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험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두려움과 흥분을 조절하고 있었다. 숨소리는 잦아들었다가 거칠어지곤 한다. 공사판 인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그런데도 발걸음에는 의연함이 있다.

그 짧은 순간 철호는 무기력한 수치를 느꼈다. 그는 십장을 모욕한 동시에 자신을 모욕한 것만 같았다. 그는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싸움에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것에 지쳐갔을 뿐이었다. 그는 십장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고, 침을 뱉었고, 공사판을 떠나왔다. 십장의 눈도, 인부들의 눈도 철호를 뒤쫓는다.

철호는 담배를 식당 바닥에 떨어뜨리고 비벼 껐다. 고개를 돌려 후문 쪽을 바라본다. 아지랑이는 계속 피어오르고 있다.

그가 후문 쪽을 바라보는 사이 주인이 왔다. 그는 슬프고 피곤한 듯 축 처진 눈과 합죽이처럼 나온 입술로 그저 철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한다. 철호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또 자신이 실비집에 와서 자리를 잡고 담배를 태울 때까지 음식 생각은 까마득히 접어두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천천히 메뉴판을 훑는다. 모두가 지겨운 음식들이었다. 붉은 글씨들, 더러운 음식냄새.

“된장찌개나 하나 줘요.”

그는 딱딱한 무엇인가를 내뱉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것을 메모지에 끼적이고는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철호는 다시 담배를 빤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냐.”

철호가 담배를 태울 때, 두 테이블 건너의 공사판 인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갑진인가, 갑철인가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짱또리라고 불렀다. 왜,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무엇인가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급히 국밥을 뜨고, 입 밖으로 국물이 흐르자 손등으로 닦았다. 그러고는 또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예전의 그 말을 반복했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마주 앉은 사내들은 말이 없다. 그저 그들 중 한명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고개를 주춤주춤 들었다가는 그대로 내려놓는다. 밥숟갈을 뜨고 입을 벌린다.

그 옆에서는 한 노인이 두명의 젊은이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노인은 만철 영감이었다. 그는 예순다섯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는 뒷방으로 물러앉아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나이의 늙은이도 물러설 줄 모른다. 물러설 곳이 없다.

그는 늙은이답게 조금만 힘쓰는 일을 해도 골골거린다. 실제로 그가 맡은 일은 현장의 허드레 청소 같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다른 인부들과 십장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벗어나기만 하면, 자존심 강하고 입심 좋은 노인이다. 그는 꼬장꼬장하고, 잔소리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우리들 때는 말이다. 너희들보다 몇배는 곯고 살았단 말이다. 시래기죽 하나라도 감지덕지였단 말이야. 하지만 저놈의 바위를 옮겨야겠다 하면 반드시 그렇게 돼버린단 말이다. 왜냐? 그것이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이다.”

만철 영감은 떠들어댔다.

두명의 젊은이는 묵묵히 듣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일 뿐이었다. 그들은 전문대학을 다니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의 몸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꿈을 꾼다. 아무도 그것을 붙잡아둘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그들의 욕망은 거칠고 잔인하고 또 어린애처럼 순진하며 평화롭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식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숙여진 얼굴은 어둡고, 서늘하며, 비웃음을 참고 있다. 철호는 언젠가 식당 후문 쪽으로 나가다가 그 두 젊은이가 양지맡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철호는 지나쳤다. 젊은이 중 한명이 말했다.

“개 좆같다. 저것들은 어떻게 저렇게 평생을 사냐?”

그것은 비난할 만한 것이던가? 세상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가시들은 도처에 숨어 있다. 복병처럼 숨어 있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그것들이 기어나오고 발목을 휘감는다.

두 젊은이 옆에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가끔 비위가 상한 듯 만철 영감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는 밥을 어거지로 밀어넣듯 역겨운 식사를 계속할 뿐이다.

그 옆테이블에서는 두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네명의 한국인 인부들과 함께 막 식사를 시작한다. 두 외국인 노동자 중 한명은 아랍계이고, 한명은 동남아시아계이다. 아랍계의 머리와 어깨에는 흰 먼지가 앉아 있다. 그의 털 많은 손에도 앉아 있다. 아랍계는 무엇인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검은 구릿빛 손을 물수건에 닦는다. 그때 옆좌석의 한국인 인부 하나가 어깨를 툭 치고 “마늘 먹을 줄 알아? 마늘?” 하고 장난을 걸듯 말한다. 그는 마늘을 입으로 가져가 씹는다. 그의 얼굴에는 힘센 아이들이 자신의 권위를 확인했을 때 나타나는 순박하고 어리석으면서도 잔인한 웃음이 떠올라 있다. 아랍계 인부는 말이 없다. 그저 씁쓸히 웃는다. 그리고 우연인 듯, 혹은 눈치를 살피듯 정면에 앉아 있는 동남아시아계 인부를 바라본다. 그의 검은 얼굴은 무표정하다.

이러한 소음과 개성이 식당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음식냄새처럼 떠돈다. 누군가가 웃는다. 누군가가 떠든다. 누군가는 개탄하고, 누군가는 빈정거린다. 어디에선가 “야, 이 자식아” 한다. 또 어디에선가는 음모를 꾸미듯 낮은 목소리로 “그것이 조금만 옆으로 갔어도” 하고 말한다. 모든 것이 새떼 같고, 하품하는 강아지떼 같다. “찌르면?” 누군가가 묻는다. 낮고 점잖은 목소리가 빈정거리듯 대답한다. “죽어.”

철호는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고 들으며, 자신이 주문한 음식이 식탁에 놓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왁자지껄한 소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소음의 한쪽이 잠잠해졌고, 그곳을 진원지로 왁자지껄한 소음 전체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긴 천자락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부드러운 반전은 한 인부가 식당 한편에 놓인 TV수상기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고, 그쪽 테이블의 인부들이 마치 원숭이떼가 흔들리는 바나나에 시선을 집중하듯이 TV화면에 시선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응시하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전염성을 지닌 채로 그 옆테이블로, 그다음에는 그 옆테이블로 번져간다.

이제 식당 안의 모든 인부들은 잠잠해졌다.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의아해하면서도 또한 순응한다.

TV에서는 총선 투표결과와 그 분석이 한창이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자극적이지 않게 흐르고, 몇몇 정치인의 얼굴이 비쳐지며, 그래프가 들어서고, 자막이 떠오른다.

인부들은 그것을 학자들처럼 진지하게, 반쯤은 얼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왜 그것을 바라보게 되었는지, 또 왜 바라봐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다.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유성의 난폭한 추락을 지켜보듯 그것을 지켜본다. 누군가는 흐음 하고 입에 머금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술잔을 쥔 채로 멎어버렸다. 누군가는 담배를 끼운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다. 담배연기가 마치 갑자기 멎어버린 영화의 한 장면에서 홀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제 카메라는 다시 아나운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아나운서는 마치 카메라를 통해 인부들을 지켜보듯 카메라를 똑바로 힘있게 응시하고 있다.

“여기도 한나라당이군.”

누군가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흥이라도 돋울 듯이, 하지만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리듯 말한다.

“잘되았다. 한번 된서리를 맞아놔야.”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식중에 떨어져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묘한 침묵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누군가는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감각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마치 독사에게 물린 상처와 곧 짓눌러 죽여버릴 독사를 바라보듯이 절망과 허무가 담긴 잔인함으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그들은 며칠 전 분명 투표용지의 명확히 구획된 칸 위에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모호하며 기표소 그 좁은 공간 안의 투명한 확신은 불결해진다. 무엇인가에 기만당한 듯한 기분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무엇인가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내어준 듯한 기분이다.

철호 역시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 감각에 동조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달 전 어느 하루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지금처럼 이 식당 한쪽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은 지금보다 더 훈훈했다. 음식냄새는 독했다. 담배연기가 공중을 뿌옇게 흐렸고, 칠장이 정씨는 그의 옆테이블에서 페인트 얼룩이 잔뜩 묻은 검푸른 작업복을 입은 채 입으로 국밥을 거칠게 밀어넣고 있었다. 숟가락이 입에서 떨어지면 그의 홀쭉한 두 볼이 불룩거린다.

그때도 역시 이 식당 안은 왁자지껄했다. 만철 영감은 그때도 두 젊은이에게 일장연설을 쏟아붓고 있었다. 누군가가 웃는다. 누군가가 쳇 하고 고개를 돌린다. 침을 뱉는다. 누군가는 그때 이미 낮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어떤 울분에 휩싸인 듯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하고 내려쳤다가 다시 얌전해지고, 다시 쿵 하고 내려치곤 했다. 누군가가 대단한 권세라도 있는 양 호언장담하듯 제법 크게 말했다. “그 자식은 암것두 아냐. 내 한마디면.”

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 두어 사람이 먼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중년 여성이 식당 문을 반쯤 연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제법 부유한 계층임에 틀림없었다. 털코트와 팔에 낀 핸드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굴에 드러난 부자들 특유의 섬세함과 자부심 같은 것들이 그랬다. 그녀는 길고 흰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뒷머리를 들어올렸었다. 그 머릿결은 시골 아낙들이나 생활에 찌든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공사판 인부들에게 이런 신분의 여성이 실비집 문을 연 것은 무척 희귀하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어명이 인기척에 반응하듯 고개를 돌렸지만, 나중에는 식당 안의 모두가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비집의 웅성거림은 점점 잦아들고 나중에는 완강한 침묵에 사로잡혔다.

철호 역시 다른 인부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에 잠긴 채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처음에 그 집단적인 침묵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울렸다가 사라지는 싸이렌 소리 같았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그 침묵 속에서 호기심과 함께 어떤 적의가, 어떤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등장으로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가난하고 더러우며 미래에 대해 불안으로 득실거리는 정체성을 느끼고 만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사내들의 집단적인 붉은 욕정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담배를 태우며, 국밥을 천천히 먹으며, 점점 적나라해지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은 당황한 듯 그 침묵의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잘못 왔네” 하고는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인부들의 시선이 정문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좇는다.

“흥, 다 똑같은 것들뿐이야. 다 똑같아.”

누군가가 말한다. 그리고 이제 인부들은 하나둘 TV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가난하고 불안하며 털털한 사내들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유쾌하게 떠든다. 식당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사이 실비집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나르고, 몇몇 테이블을 거쳐 철호에게도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철호는 조금의 즐거움도 없이 어떤 고된 의무를 진 사람처럼 식사를 시작한다.

그동안 실비집 안의 인부들 수는 점점 늘어났다. 공사판에서 인부들이 밀려드는 것보다 식당에서 빠져나가는 숫자가 적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식사 후에도 주인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눈다. 누군가는 술을 마신다. 노란 안전모를 가져온 축들은 그것을 카운터 옆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 숫자가 하나둘 더해가고, 그만큼 활기도 거세진다.

그런 분위기에서, 철호와 함께 일하는 인부들도 실비집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넷이었다.

두명은 키가 작았다. 그들은 H와 D로 갓 쉰에 접어들고 있었다. 둘 다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H는 얼굴이 둥글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몸이 지치면 금세 우울해하고, 땀과 우중충하고 번들거리는 기름을 흘리곤 했다. D는 3주 전 이곳에 왔다. 그는 전에는 택시기사였다. 그는 스트레스로 따지자면 택시기사보다 막노동이 훨 낫다고 떠들어댔다. 택시는 높은 사납금 때문에 정작 몇푼 남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팔과 다리가 가늘고 선천적으로 막노동의 거친 일과 언어에 숙달되기 힘든 예민한 사내였다. 그는 금방 지친다. 그는 무엇이든 한번 힘을 되게 쓰면 그다음에는 완전히 풀이 죽어버린다. 아주 때때로 그는 공사장 옆을 지나쳐 가는 택시를 어떤 적의를 품고 바라다본다.

한명은 러시아계 노동자였다. 그의 얼굴은 더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키와 체격이 컸고, 팔에는 노란 털이 자라 있었다. 그의 머리는 무리들 중에서 돛대처럼 솟아 있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내로 몸이 지쳐 있을 때면 십장이든 누구든 비열하게 바라보곤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린애 같은 순진함과 낙천성을 지니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마지막 한명은 T였다. 그는 이제 막 사십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무리들 중에서 막노동 경험이 가장 많았고, 십장이 없을 때는 일종의 리더였다. 그는 과묵했고,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태우는 버릇이 있었다. 팀원들이 자신의 뜻에 차지 않게 움직이면 그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미친 황소처럼 격렬한 몸놀림으로 일을 직접 해치워버리곤 했다. 그러고는 물을 거칠게 들이켜고 또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태웠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들이 앉을 자리를 물색했다. 그리고 곧 철호와 철호 옆의 빈자리를 확인하고는 그리로 하나둘 몰려갔다.

철호는 식사 중에 그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들은 점차 가까워지고, 철호는 묘하게 잔인해진다.

이윽고 그들은 철호의 옆좌석에 하나둘 모여 앉았다. 모두가 주위의 눈치와 철호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지난 몇달 동안 줄곧 실비집을 이용했는데도 마치 낯선 곳에 도착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철호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은 익숙한 분위기를 찾아갔고, 두런거리며 이야기했다.

“어저께 만호 형을 봤는데, 얼굴이 말이 아닙데.”

D는 말했다. 그러자 H가 말했다.

“별 수 없지.”

그때 T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일었다 사그라든다. T는 무엇인가를 만만하게 바라보듯이 동료들을 훑고는 철호를 힐끗 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되는 듯 다른 동료들도 철호를 힐끔거린다. T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오늘도 그 작자 왔지?”

이번에도 D가 물었다. H는 대답 없이 두 손을 비비고, 얼굴을 훔친다. 하지만 곧 그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알 게 뭐야.”

그후로도 그들은 속삭이듯이 혹은 무슨 음모를 꾸미듯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끔 그들의 테이블 위로 다른 테이블의 말소리가 섞여든다. 그들은 그쪽을 바라보고, 다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손을 비비거나 머리를 긁적거린다. 그것은 무료하면서도 차분하다. 철호는 무슨 까닭인지 그것이 신경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뜨거운 국물에 지친 듯 잠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러시아계 인부와 눈이 마주친다. 러시아계 인부는 아무런 감정 없이, 어떠한 의도도 없이 철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두 눈동자는 반짝이고, 이성을 되찾고, 슬픈 듯하다가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움직인다.

이윽고 D와 H의 대화도 끝나버렸다. 그러자 한순간의 강한 추위에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그들은 얼어붙었고, 테이블 위에는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감정을 감춘 채로 버티고 있다. 시간은 흐른다. 그들은 이제 하나둘 담배를 입에 물고 옆테이블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옆좌석에는 세명의 인부가 앉아 있다. 그들 중 한명은 소리 없이 혼자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다. 두명은 무슨 음모를 꾸미듯이 작게 이야기한다.

“발각되면 말짱 도루묵이지.”

“어차피 도루묵이야.”

“질러볼까?”

“그전에……”

그들은 속삭인다.

만철 영감은 계속 일장 훈계 중이었다. “어려서 고생을 안해본 것들은 늙어서 다 그 모양 그 꼴인 게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단 말이야. 고생을 해봐야 인간이 되는 게야.”

두명의 고학생은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로, 시선을 피한 채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명이 옆의 고학생을 힐끔 바라보고, 나머지 한명도 그렇게 한다. 그 옆의 사십대 중반의 사내는 이제 식사를 다 마쳤다. 그는 쩝쩝거리고, 담배를 태우고, 비웃음을 띤 채로 만철 영감을 바라본다. 만철 영감은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고, 그런데도 일장 훈계는 더 강경해진다.

실비집 입구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는 누군가가 화를 낸다. 왁자지껄한 소음을 자르듯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날카롭다.

“그 자식들이 잘했으면!”

누군가가 타이른다. 그 목소리는 낮고, 실비집의 소음에 토막토막 묻힌다.

“세상사가 그렇지. 누가 그 잡도리를 해.”

그 건너편에서는 웃음소리가 파도가 몰아치듯 터진다. 얼굴을 가리고, 웃음으로 크게 벌어진 입 밑의 침을 닦는다.

그 건너편에서는 다시 목소리가 크다. 그들은 무엇인가로 시비가 붙었다.

“아주 왜 염병한다고 하지.”

상대방이 대들듯 말한다.

“추잡스러서 그려. 추잡스러서.”

철호와 철호의 동료들은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에 철호의 식사는 마침내 끝이 나버렸다. 철호는 이제 천천히 고개를 든다. 무엇인가를 참는 듯이 국물을 들이켜고, 벌게진 얼굴로 동료들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시선을 피한다. 누군가는 애초에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고 T는 같잖다는 듯이 똑바로 그를 주시한다.

철호는 천천히 담배를 물었다. 손가락은 경직되고, 팔은 떨린다. 그는 불을 댕긴다. 그것은 쉬 붙지 않고, 모두가 그것에 집중한 듯한 분위기 속에서 틱칙, 틱칙 하고 헛돈다. 불꽃이 인다.

철호는 이제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만만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욕설을 삼키듯 마른침을 삼킨다.

철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런 철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가 D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번에 동식이가 왔데?”

그리고 얼버무리듯이 덧붙였다.

“그 자식은 잘 사나? 전에 제대로 사고가 나서 다리 하나가……”

그 말에 H는 무료한 표정으로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약간 숙이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큰 목소리 하나가 실비집 전체를 경직시킨다.

“야, 이 새끼야. 그게 붙어먹는 게 아니면!”

그는 소리쳤다. 그는 형덕이라는 사내로 덩치 크고 괄괄한 성격이었다. 그는 마흔이 갓 넘었을 것이다. 그는 전에는 산 40번지에서 빌라를 지었다. 지금은 시내 외곽의 아파트단지를 짓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사납기로 유명했다. 몇몇은 그에 대해 “그 자식은” 하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곁눈질과 투덜거림에 그친다.

형덕과 대치하고 있는 사내는 A였다. 형덕은 벌떡 일어서 있었고, A는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급히 몰아 피운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양쪽의 어금니는 분노로 꽉 악물려 있다.

“이 새끼가 어디서!”

형덕은 계속 소리친다. 그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고, 상대방이 조금만 움직여도 멱살을 쥘 태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무엇인가에 겁을 집어먹고 있고, 또 주변의 눈치도 살핀다.

실비집 인부들은 두 사람의 대치에 갑자기 모든 활기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무료하고, 불쾌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곳곳에서 담배연기가 소리 없이 피어오른다.

그러자 형덕은 기세가 눌려버렸다. 그는 이제 고개를 돌려 건너편 테이블을, 실비집 안 전체를 천천히 훑어본다. 고요, 눈동자들 그리고 꼿꼿이 세워져 있는 얼굴들.

철호와 철호의 동료들도 그렇게 형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삽시간에 분노해버린다.

형덕은 천천히 다시 의자에 앉는다. 무언가에 계면쩍다는 듯, 분노를 완전히 삭이지 못했다는 듯 술잔에 소주를 채우고 단숨에 들이켠다. A는 여전히 어금니를 꽉 악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담배만 뻐끔거린다.

상황은 삽시간에 일어났고, 삽시간에 종료되어버렸다. 다시 실비집과 인부들의 일상이 흐른다. 주인은 다시 주문을 받고, 누군가는 다시 술을 마시며, 또 누군가는 식사를 끝마친 채로 담배를 태우거나 실비집 밖 어딘가를 바라본다.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주인을 부른다.

실비집은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비온 뒤 들판에 피어오르는 생기들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멈춰졌고, 다시금 침묵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인부들 중 누군가가 또다시 TV리모컨에 손을 댔고, 그래서 TV의 화면이 바뀌었으며, 그 전환된 TV프로그램에 수많은 정치인들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방금 전 형덕이 일으킨 소란처럼 강렬하지 않다. 그것은 조금도 직접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부드러운 힘으로, 조금도 입체적이지 않은 평면적인 힘으로 인부들 하나하나의 시선을 붙잡으며, 그것을 당기며, 그들의 관심을 테이블과 그 테이블 앞의 동료에서 브라운관 너머의 어떤 세계로 이끈다.

인부들은 이제 하나둘 그곳으로 얼굴을 돌린다. 누군가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한 자세로, 누군가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거만한 자세로. 누군가는 완전히 몰입했다. 누군가는 콧방귀를 뀐다.

TV속의 정치인들은 무리를 지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모두가 양복을 입었고, 모두가 표정이 심각하고,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몇몇 주요 정치인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들은 불쾌한 시선으로 이쪽 세계를 힐끔거리듯 카메라를 힐끔거린다. 보도국 기자는 끊임없이 떠든다.

실비집 안은 점차 싸늘해져갔다. 그것은 반감과 질투, 동경과 비웃음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들은 저쪽 세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다.

“종로도 그렇다지?”

누군가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하지만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심각해졌고, 모두가 음모가들처럼 비밀스러워진다.

누군가가 잔기침을 했다. TV화면은 바뀌었다. 이제 정치인들은 회의석상에 앉아 있고, 피곤하면서도 집요함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회의석 건너편의 정치인을 응시하고 있다.

철호는 다시금 개인적인 고민을 잊었다. 그는 고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TV의 상황에 완전히 동화된 채로, 카메라 기자가 비추고 있는 한 정치인의 얼굴과 금테 안경과 붉은 물방울무늬 넥타이 그리고 마이크와 물병을 바라보고 있다. 정치인은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누구도 쉽게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검지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고 있다.

철호의 동료들 역시 철호처럼 TV화면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다. 그때의 그들은 실비집의 가난한 인부도, 가난뱅이도, 막노동꾼도 아니다. 그들은 신분을 잊고 있었고, 인간 대 인간으로 정치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완전히 순수한 응시의 시간은 한동안 계속됐다. 심지어는 실비집의 어수룩한 주인마저 자신의 일을 망각한 채로, 한 테이블 앞에 서서, 그 테이블의 인부들과 함께, 그들처럼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응시의 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호기심과 흥미는 일상으로 녹아든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정체성, 그들의 신분, 그들의 의식은 찝찝하고 혼란스러운 기지개를 켠다. 그것에서 완전히 눈을 뗄 수도 없고, 그럼에도 머릿속은 이미 TV밖으로 걸어나와 복잡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철호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담배를 빨았다. TV에서는 한 정치인이 우리들에게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철호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표정과 언어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려고 노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적인 고통을 느끼고 생각한다.

그의 눈은 이제 한 여성 정치인의 얼굴과 목 그리고 그 목에 걸린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다. 그의 머릿속은 십장과 대치할 때 십장의 증오와 환멸이 담긴 눈빛을 더듬고 있다. 카메라가 바뀐다. 그의 머릿속 상념도 바뀐다. 이제 한 정치인은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고, 고개를 숙인 채 회의석의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철호는 이제 어느날 밤, 비에 흠뻑 젖은 채 경사진 골목길을 힘겹게 걸어 오르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때 그는 막 서른에 접어들었고,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그때 이십대의 자신의 모습과 결별하려 하고 있었고, 미래라는 것은 온통 슬픔과 불안, 분노뿐이었다. 정치인은 말한다. “이제 정치적 공방은 그만합시다. 지겹지도 않습니까?” 철호는 입속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뱉어내며 술에 취해 자신에게 말했다. “개자식아 이제 정신 차리자. 응? 지겹지도 않냐?” 그것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벌써 몇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때 그는 무엇을 보았던가?아침의 슬프고도 기쁜 햇살, 오후의 무기력하고도 뒤틀린 소리들, 커피잔, 몇백원의 안도 그리고 지하 단칸방 구석에서의 불안한 잠. 정치인은 말한다. “명확한 것 아닙니까? 명확한 것 아니에요?” 철호의 친구는 어느날 철호에게 말했다. “개 좆도 너나 명확해라.” 그 친구는 전에는 소주를 파는 회사의 영업직원이었고, 이제는 시골 농가의 구석진 방에서 반불수로 누워 있다. “그거 아냐? 사고 나기 전에 말이다. 이거 반병신 되겠구나 싶은 거다. 아니나 다르냐. 이 모양 이 꼴이지.” 달린다. 브레이크 밟는 소리. 한순간에 너무도 명확해지는 운명. 공포와 편안함. 그리고 게임 오버다.

철호는 어느 순간 완전히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피우고 있는 담배가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것을 알아차린다. 손가락에 뜨거운 기운을 느낀다.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게 빨고, 그것을 식당 바닥에 떨어뜨린다. 발로 밟는다.

철호의 동료들 역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이제 TV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의 얼굴에, 실비집의 조악한 풍경과 테이블에 시선을 둔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다. 처음 테이블에 앉았던 것처럼 잠시 철호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금세 그들은 자세를 조금씩 가다듬고, 전처럼 수군거린다. D가 말한다. “일주일이면 끝나겠지?” 그러자 H가 말한다. “끝나겄지. 고것 뭐.”

식당 안의 인부들도 이제 서서히 자신들만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전처럼 떠들고, 웃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철호는 그들 사이에서 묘한 안식과 함께 괴리감을 느꼈다. 그는 그들처럼 단순하고 저급한 언어로 무엇이든 떠들고 싶었고, 그 반대로 도도하고 내밀한 침묵을 유지하고 싶기도 했다.

러시아계 인부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는 두 손을 깍지 껴 마치 기도하듯이 모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무엇인가를 추억하는 눈빛으로, 얼굴 전체에는 어떤 고통을 담은 채 후문쪽 거리를 내다보고 있다.

T역시 말이 없다. 그는 또다시 담배 한 대를 더 태운다. 그는 무료하다는 듯 가끔 주위를 둘러보고, D와 H를 보고, 이제 철호를 바라본다. 철호는 그의 눈빛에서 피로에 젖은 권위를 본다. 그는 무슨 말이든 꺼내고 싶다. 하지만 그는 T가 이미 그를 이해해버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들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함께 자리를 뜨느냐 아니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떠나느냐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쉽게 결정내릴 수 없다. 철호는 이제 T의 시선을 피해, 러시아계 인부와 함께 후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곳에서 어지럽게 타오르는 아지랑이를 본다. 그에게는 하루가 지겹도록 오래 남아 있었고, 또한 그럼에도 금세 지나가버릴 것이다. 누군가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른다. 철호도 말이 없고, 그의 동료들도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