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 시선과 시선
통일을 열어가는 문학의 길
6·15민족문학인협회 『통일문학』 창간호
한분순 고인환
길이 없는 곳에 글이 있다
『통일문학』 발간의 막전막후
한분순(韓粉順)│시인
하늘에서 쏟아지는 푸른 뜨거움을 받아 마음까지 타는 듯 더운 나날이다. 열정과 갈증의 두 면을 지닌 여름날. 이것은 『통일문학』 창간호를 만들며 거쳐온 여정과도 흡사하다. 싱그러운 녹음 앞에서 서늘한 가을 단풍을 떠올리는 것도 『통일문학』 발간의 첫걸음을 내딛던 날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2006년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에 참석하러 가던 길에 마주한, 가을을 거느린 금강산의 단풍. 그 고운 자태는 북으로 향하는 굽이진 산길을 수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볼수록 어딘지 말간 슬픔이 배어나와 더욱 눈에 들던 단풍의 아름다운 매무새. 하지만 현실은 군사분계선으로 차갑게 채색되어 있었고, 분단 60년 만에 처음 남북 작가들이 함께 문학잡지를 만드는 것은 고단함이 동행하는 여정이 되었다. 이런 까닭이었을까. 그날 금강산 기슭에 내려앉은 가을 햇살도 가슴 저리게 서글픈 빛이었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매캐한 공기에 휘감긴 낯선 타국에서 『통일문학』 창간기념식이 열린 것은 올해 2월이었다. 문학으로 하나된 마음이 분단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남북 어느 곳도 아닌 중국의 낯선 도시, 션양(瀋陽)이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인천공항에 모인 남측 작가들은 6·15민족문학인협회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나와 부회장 신세훈 시인, 현명한 유머와 활달함을 지닌 정도상 소설가, 넘치는 얘깃거리로 좌중을 즐겁게 하는 김형수 시인, 부지런한 활력과 찬찬한 성품의 윤석정 사무국장 등.
션양공항에 마중나온 안내원을 따라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엔 바람을 타고 도시를 휘감은 황사가 머리를 무겁게 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내려다본 션양 거리는 누런 먼지와 매캐한 석탄 가스 냄새에 감싸여 있었으며, 중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도시인만큼 뿌연 시야 사이로 높다란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다.
남북 작가들이 설레는 심정을 품고 기념식을 치른 곳은 션양의 조선족 거리 서탑가에 있는‘모란관’으로, 평양에서 운영하는 소박한 한식당이었다. 반년간(半年刊) 발행을 목표로 평양인쇄공장에서 제작되어 2008년 2월에 첫선을 보인 『통일문학』. 경색이 거듭되는 남북관계의 변화 속에 여러 난관을 넘어 드디어 벅찬 결과물로 완성된 분단 60년사 최초의 남북 공동의 문학지였다. 책의 목차 뒤엔‘2005년 민족작가대회 평양선언 합의를 이행하는, 참다운 문학교류를 위한 잡지’라는 창간사가 실렸고,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위원장 안경호(安京浩),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백낙청(白樂晴)의 축하글이 게재되어 있었다. 이튿날은 『통일문학』 제2호 편집회의가 열렸다. 창간호는 서로 수용 가능한 내용을 맞추려 예전 작품들 위주로 구성했으나, 제2호는 신작을 다루되 남북의 문인들이 어느 한쪽에서 수록을 부결하면 토론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션양의 서탑가는 많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인만큼 반가운 한글 간판들이 가득했다.‘전주집’‘설운도 노래방’‘홍윤복 담배점’같은 간판이나‘모란 삼계탕 48원! 평양 토종닭 삼계탕 맛보세요!’같은 문구도 쉽사리 눈에 띄었다. 비록 생경한 도시에서 만나야 했으나, 함께한 남북 작가들을 둘러싼 것은 참으로 낯익은 우리 언어였다.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이념일 뿐, 낯익은 글과 말의 힘으로, 나뉘어진‘이즘’을 넘어서는 소통이 열리고 있었다.
벅찬 뭉클함에 고단한 여정도 달콤히 느껴지던 창간기념식과 다음날 바로 이어진 제2호 편집회의까지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통일문학』 창간호를 기다렸다. 남측이 제작비용 2천만원을 부담키로 하고, 총 5천부(남북 각 2천부, 해외 1천부)를 발행하여 2천부가 평양과 개성을 거쳐 육로로 서울에 당도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뒤에 도착한 것은 반가운 창간호가 아니라 정부의 냉담한 반입보류 소식. 남측 제안이 이행되지 않고 북측 작가의 소설과 시에 금기 단어가 들어간 탓에 반입이 보류된 것이다. 다시 북측과 협의에 들어가고 두어달이 지나서야 겨우 반입이 허가되었다. 마침내 남쪽의 독자들 앞에도 잡지가 선보이게 되었으나 또다른 난항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작비 지원 중단. 결국 제작비는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회장단이 일인당 50권 이상, 집행위원들이 30권 이상에 달하는 비용을 충당하여 마련하게 되었다. 권당 1만원으로 서점 판매도 하지만, 부족한 비용의 대부분은 남측 임원들의 희생으로 보전(補塡)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통일로 가는 통행료가 아닐까?
새로이 만들 제2호는 양측이 서로 맺은 약속을 제대로 지켜 이러한 걸림돌과 마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잡지는‘통일문학’이라 하여 통일 관련 내용만 다루는 것이 아니며, 이념을 넘어 작가의 마음으로 교감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시, 소설, 평론, 수필까지 다양한 순수문학을 아우른다. 그렇게 문학의 힘으로 가로막힌 길을 열어 서로에게 다다르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길이 없는 곳에 글이 있다는 믿음으로, 글로써 한길을 만들어간다.
서로를 의식하는 소통의 물꼬를 트다
『통일문학』에 실린 북측의 단편소설들
고인환(高印煥)│문학평론가
북의 문학을 접할 때마다, 남과 북이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의 장을 모색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와, 남측의 관점에서 북측의 문학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조건이 충돌하곤 한다. 텍스트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 당위는 현실에 슬그머니 자리를 내어준다. 하여 북의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늘상 그들의 문학이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곤 한다. 남측에서 통용되는 문학의 이념을 북측에 강요하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는 셈이다.
『통일문학』을 펼치자 균등하게 배분된 지면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냉혹한 자본의 논리를 넘어 남과 북의 문학이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적·형식적 조합의 성격이 강하다는 인상이 들기도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터, 일단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문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작품 선정에서부터 배치에 이르기까지 함께 고민했다는 점이 퍽이나 고무적이다. 물론 이들이 지닌 대표성의 문제, 작품 선정기준에 작용한 편향성 그리고 『통일문학』 편집위원회의 지속성 등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통일문학』의 창간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문학이 서로를 의식하면서 소통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학교류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통일문학』에 수록된 북측 소설의 면면을 되짚어보면, 인민들의 소소한 일상이 스며든 작품이라는 점이 시선을 끈다. 이러한 단편들이 이념적 성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실제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북의 현실을 유추할 수 있는 주석 역할을 한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개인의 세속적 욕망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주체사상과 미묘하게 갈등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장기성의 「우리 선생님」(1979)은 학생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내는 성실한 선생님의 모습과, 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의 내면을 포개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사제관계는‘과연 이러한 작중현실이 실현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남측의 교육현실을 되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의 헌신적 사랑이 체제의 장벽을 넘어 진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리라.
변창률의 「영근 이삭」(2003) 또한 비슷한 구조로 전개되는데, 홍화숙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다층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원칙주의자인 모범일꾼 홍화숙은‘홍말썽’이라 불릴 정도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킨다. 그녀를 지켜보는 주변인물들의 의식 편차가 다양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홍화숙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는 소극적 인물(작업반장 석근)에서부터 홍화숙의 주장이 원칙적으로는 옳으나‘집단의 화목을 존중하는’현실적 입장에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조원들, 나아가 홍화숙의 원칙주의적 태도에 피해를 입고 그녀를 적대시하는 인물(3분조장과 3분조 모판관리공)들에 이르기까지 그 면모가 다양하다. 특히 홍화숙을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면서 개인의 잇속도 차리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한 댓가가 개인에게도 충분히 보상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대변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개방정책, 즉‘새로운 경제관리체계’(2002년 7·1조치)의 요구에 직면한 북한의 현실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최련의 「바다를 푸르게 하라」(2003)는 바다자원을 합리적으로 이용하여 국가적 이익을 얻으려는 입장(신철)과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바다를 지키려는 노력(해송)을 맞세우고, 여기에 가정과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내면을 포개놓은 작품이다. 특히 시약(試藥)을 연구하는 연경의 내면적 갈등이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되어 있다. 연경은 자신의 연구성과를‘바다의 래일(來日)’이라는 대의를 위해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시 가정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준다. 이러한 연경을 지켜보는 해송의 목소리에는 여성의 삶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시선이 녹아 있다.
‘2중의 짐…’해송은 속으로 뇌이였다.
‘왜 그 훌륭한 녀인은 남자들과 꼭같은 일을 하면서도 또 하나의 짐을 더 져야 할가. 더 무겁고 더 힘든 짐을… 연경언니는 연구사업의 실패와 고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그래, 그것은 그가 겪는 마음속고통에 비해서는 너무도 하찮은것이야.’(74면)
연경에게 지워진 이‘2중의 짐’은 이념과 체제의 장벽을 넘어 남측의 현실에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리평의 「고려의 아침」(2005)은 역사의 행간 읽기를 시도한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중심으로 포착한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인‘고려’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지금 여기’의 북측 현실(우리민족제일주의)이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작품을 읽는 내내‘고려의 문화 발전을 위해 투신하는 민초들의 보석 같은 마음을 추동시키는 힘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에 개연성 있는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 거대서사(이념)와 거기에 비낀 일상적 삶(욕망)의 역설적 공존을 감내해야 하는 북측 문학의 현실적 과제가 아닐까?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성찰적 시선을 통해 남북 문학의 내면적 소통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때, 『통일문학』은 이제 그 험난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