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만해문학상 발표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3년 창비가 제정한 만해문학상 제23회 수상작이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2008년 11월 26일(수) 오후 6시 30분 프레스쎈터 국제회의장에서 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장편소설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23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윤영수 소설집 『소설 쓰는 밤』
심사위원
백낙청 이혜경 정희성
2008년 7월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2008년 5월 28일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백낙청, 정희성, 이혜경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제23회 만해문학상 심사를 시작했다. 만해문학상의 운영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시-나희덕 박형준 이장욱, 소설-백지연 유희석 진정석)에서 올라온 후보작은 시 14권, 소설 8권, 평론 2권에 달했다. 이 가운데 예심위원들의 복수 추천을 받은 문인수 『배꼽』, 장옥관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2종의 시집과 공선옥 『명랑한 밤길』, 윤대녕 『제비를 기르다』, 윤영수 『소설 쓰는 밤』, 정지아 『봄빛』 4종의 소설집을 중심으로 7월 9일 첫번째 본심을 진행했다(2권의 평론집도 본심에 올라왔으나 복수 추천작은 없었음). 1차 모임에서 주요 후보로 압축된 것은 문인수 시집, 공선옥 소설집, 윤영수 소설집 등 3종이다.
7월 21일의 2차 본심에서는 심사위원 각자가 솔직한 견해를 주고받으면서 점차 소설 분야로 화제가 집중되었고, 정지아 소설집 『봄빛』도 재론에 부치면서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고른 소설적 기량으로 특유의 건강성과 통찰력을 한층 무르익힌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 노년의 생활정서와 현대사에 연루된 굴곡진 인생사의 그늘을 진솔하게 담아낸 정지아의 『봄빛』의 성과를 심사위원 모두 기쁘게 보았으나, 연작형식의 무게감에 더해 욕망에 쫓겨 살아가는 현대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정교한 구성과 예리한 시선으로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해 윤영수 소설집 『소설 쓰는 밤』을 제23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시에서는 예심위원들로부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문인수, 장옥관 시집 외에 엄원태 『물방울 무덤』과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도 1차 심사에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2차 모임에서는 문인수의 『배꼽』을 집중 검토하면서 소설 분야의 후보들과 비교해보자는 제안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배꼽』이 가령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와 비교할 때 온갖 사물과 풍경을 관조하며 시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솜씨를 공유하면서도, ‘관조’를 넘어 생명의 넉넉함과 강인함, 또는 그 처절한 절규를 들려주는 능력이 한발 앞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파냄새」와 「비닐봉지」가 그러하고 공단 주변에 자라 오르는 쑥들의 ‘소란’을 담은 「엉덩이 자국」, 중무장한 비무장지대를 온통 ‘개판’으로 만드는 「녹음」 등도 그렇다.
소설 쪽에서는 정지아의 『봄빛』,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 등 세권의 소설집으로 논의가 모아졌다. 그중 수록작품들의 수준이 덜 고른 편인 『봄빛』이 먼저 제외되었지만, 「봄빛」 「풍경」 「순정」 「세월」 등 노인들을 다룬 작품이 월등한 가운데서도(특히 「세월」은 가위 절창이다), 저자 세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양갱」은 노인 이야기와 저자 세대 이야기의 어울림을 성공적으로 이뤄냈고, 더욱 젊은 세대가 끼어든 「스물셋, 마흔셋」은 대담한 결말을 별다른 자의식 없이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명랑한 밤길』을 통독하면서 공선옥이 우리 시대의 참으로 소중한 작가임을 거듭 실감했다. ‘변두리 인생’의 거의 절망적인 삶들을 끈질기게 그려내기 때문에 고지식하거나 투박한 작가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실은 섬세하고 예리하며 경쾌하기조차 한 것이 공선옥의 미덕이요 진정한 건강성이다. 작중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찾아내곤 하는 반전이 성공하는 것도 통찰력과 재치가 병존하기 때문일 터이다. 게다가 이번 소설집에는 딱히 태작이랄 만한 작품이 없다.
그렇긴 해도 이런 이야기들이 장편 규모로 엮이거나 적어도 연작형태로 응집력을 높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은데, 윤영수 소설집이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물론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읽는 재미가 더해진다는 것만은 아니다. 서두의 「무대 뒤의 공연」에서 마치 먼 앞을 내다보는 포석(布石)을 하듯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깔아둔 뒤, 이어지는 네편에서는 각기 중심인물과 화법을 달리하면서 이미 선보였거나 언급된 인물들 사이의 기묘한 인연을 풀어낸다. 이렇게 전개된 여러 사연이 마지막 단편에 와서 깔끔하게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일면 자연스럽지만, 「소설 쓰는 밤」에서 작가는 소설가라는 수상쩍은 관찰자 겸 해설자를 새로이 등장시켜 독자의 그러한 기대를 깨뜨리고 어정쩡한 마무리로 끝맺는다. 나는 이것을 이 연작소설의 결함이라기보다 독자의 지속적인 성찰을 유도하는 창안이요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작가의 시선이 시종 냉철하면서도 인간의 온기를 결한 냉소와는 다르다는 점 또한 주목을 요한다.
시집과 소설집을 일대일로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건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사랑하라, 희망 없이』 『착한 사람 문성현』 등 초기작으로 한때 각광을 받았다가 상당기간의 공백 끝에 『소설 쓰는 밤』으로 돌아온 윤영수씨가 수상자로 모자람이 없다는 데에 동료 심사위원들과 기꺼운 합의를 이루었다.
이혜경(李惠敬) 소설가
1차 심사를 거쳐 논의하기로 한 작품은 문인수 시집 『배꼽』과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 윤영수 소설집 『소설 쓰는 밤』 세권이었다. 다시 읽으며, 여기서 어느 작품이 수상작이 되든 기쁘게 동의할 수 있겠다 싶었다. 2차 심사에서는 이에 더해 정지아 소설집 『봄빛』이 다시 거론되었다. 그러나 세월에 의해 해체되는 노인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에서 보이는 전라도 사투리의 질펀한 가락에 실린 이 작가의 웅숭깊음이, 상대적으로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편차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배꼽』의 시편들은 갈수기 끝의 마른 땅을 토닥토닥 적시는 빗소리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일상의 한순간에서 홀연 발견한 삶의 비의. 시인의 맑고 고요한 시선에 비친 정경이 담박한 언어를 거치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에 너덜난 영혼들을 위무한다.
『명랑한 밤길』의 인물들은 여전히 척박한 환경에 머물면서 삶에 날것으로 대응한다. ‘살 만해진’삶들이 돌아보기조차 싫어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인간성의 바닥을 들여다본 심연을 거치고도 살기 위해 애처로운 낭만에 기대는 인물들의 저 처연한 활기를 그려내는 공선옥의 입심이 귀하다.
연작형식의 단편집인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의 인물들은 서로 이어져 있지만, ‘물론 그는 모른다’는 식으로 반복되는 서술 속에서, 그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의 욕망을 좇기에 바쁘다. “개미들은 1차원의 세계에서 산다고 합니다. 자기가 가야 할 외길만을 기억할 뿐 좌우 평면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던 길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갈팡질팡 헤맨다고 합니다.” 라디오방송 멘트를 배음처럼 깔고 있는 각 단편의 인물들이 살아가고 지어내는 아수라를 지켜보는 작가 특유의 냉철한 시선이 한겨울에 들이켜는 한 사발의 냉수처럼 서늘한 위안을 준다. 지어낸 이야기가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말참견하며 곬을 트는 말미의 단편에서 얼핏 느껴지던 산만함도, 작가의 치밀한 전략일 것이라는 다른 심사위원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실존을 직시하는 윤영수 선생의 명철한 눈길이 우리 소설을 좀더 확장해주리라고 믿는다.
정희성(鄭喜成) 시인
심사위원들은 7월 9일의 1차 심사에서 시집 한권과 소설집 두권으로 범위를 좁혀서 읽고 7월 21일 인사동에서 두번째 심사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 중 한분이 예선에서 올라온 소설집 가운데 한권을 추가해 검토할 것을 제의하여 이에 다른 심사위원들도 동의하고 2차 심사에 들어갔다. 소설집 세권에 시집 한권이 최종적인 검토대상이었다. 네분 가운데 누가 수상자가 되더라도 좋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으나 누구도 선뜻 이 작품이다! 하고 내세우기 또한 어려웠다. 모든 작품은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에 수록된 「명랑한 밤길」 「빗속에서」 「비오는 달밤」 「지독한 우정」을 재미있게 읽었고, 소위 ‘운동권문학’으로 인식되어온 그의 문학이 좀더 보편적인 주제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정지아 소설집에서는 「풍경」 「순정」 「세월」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이야기보다 노인들의 이야기에 놀라울 정도의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윤영수 소설집 『소설 쓰는 밤』은 우선 재미있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사건을 여러 화자를 통하여 다각적으로 조명해내는 솜씨와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문인수 시집 『배꼽』은 완성도가 높은 수작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 시인은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경을 묘사해내는 데 특장이 있어 보인다. 주로 연상과 비유를 통해 제시하는 풍경이나 인생의 어떤 국면은 독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가운데 소설 쪽은 윤영수 연작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세권의 소설집 가운데 윤영수의 소설이 연작형태로 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우연성이 빈발하는 것이 흠으로 지적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이야기 전개에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시집과 소설집 가운데 어느 하나를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장르가 다른 두 작품을 단순 비교하는 문제는 어느 한쪽에서 양해를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윤영수 소설집 『소설 쓰는 밤』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수상소감
흔들림을 잡아준 따뜻한 손길
윤영수 尹英秀
195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90년 단편 「생태관찰」로 『현대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사랑하라, 희망 없이』 『착한 사람 문성현』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 『소설 쓰는 밤』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 등이 있다. 1997년 중편 「착한 사람 문성현」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만해문학상을 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한편으로는 겁도 났습니다. 그 안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 육중한 문 앞에 선 기분, 아아, 이제는 꾀부리지 못하겠구나, 어디로 숨을 구멍도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등단한 지 18년, 이제야 저는 소설가임을 실감하는 모양입니다.
연작소설집 『소설 쓰는 밤』은 저의 네번째 책입니다. 1997년에 세번째 창작집을 내고 햇수로 9년 만에 묶었습니다. 느지막한 나이에 등단했으면서도 저는 주변사람들에게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뱉곤 했습니다. 소설 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학청년 시절도 없었고 습작기간도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짧았기 때문입니다. 책 세권을 낸 후 그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마음을 대변하듯 몸도 시원찮았습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때부터 저는 등단하기 전에 거쳐야 했던 과정을 겪은 듯합니다. 작업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바로 몸이라는 사실도 절실히 깨달았고, 어쭙잖은 장편들을 썼다가 없애기도 하면서 제 삶에서 소설이 무엇인지, 제가 과연 소설가로서 자질이 있는지 깊이 의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게 관심과 격려를 주신 문단 안팎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이 내밀어주신 따뜻한 손 덕분에 더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겪은 후 낸 『소설 쓰는 밤』이기에 이 수상은 제게 특별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욕심낼 수 없는 큰 상, 만해 한용운 선생님을 기리는 상이기에 더욱 의미가 큽니다. 선생님의 보석 같은 시와 문장들을 새로 음미하면서 한국문학에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선생님보다 훨씬 더 편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다시 한번 반성했습니다.
다음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남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