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비정규직의 눈으로 본 문제의 해법
● 전체 임금노동자의 54%가 비정규직이고,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까지 고려하면 지난호 박태주-오건호의 대화는 의미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기업 중심의 사고방식과 투쟁전술이 보인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도 대기업이나 공기업 구조조정의 산물로 탄생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예의 대기업 투쟁 정도로 보인다. 이제까지 한번도 노조가 자기 근처에 다가와준 적이 없는-원래부터 민주노총과 인연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하는-영세사업장, 중소기업, 써비스업 노동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산별·연맹 사무처 산하에 미조직·비정규 부서를 두거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산별·연맹에서 재정과 인력을 지원하고 시민사회단체나 지역단체와 공동으로 독립적 기구를 만드는 것이 산별노조 시대에 걸맞은 일이라 생각한다.
서울동부비정규노동쎈터 문종찬 sdcontingent@hanmail.net
‘관습적’ 문학제도 속의 본격문학과 장르문학 구분
● 지난호 특집‘장르문학과 한국문학’에서는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현주소를 솔직하게 짚어내려는 의지와 성실한 논의가 반가웠다. 논의의 방점은 주로 문학 그 자체가 아닌‘본격문학’쪽에 찍혀 있다.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도 장르문학의 마니아보다는 그 반대지점에 있는 이들이리라. 어쩌면 둘의 경계가 무화되어가는 것이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정영훈이 이영도의 말을 빌려 쓴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특별히 기뻤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모든 문학이 관습에 의존해 있는 한”, “보통 독자”인 나도‘본격문학’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으니 읽기의 영역에서도 이 모호한 경계는 여전히 강력하다. 지난호 특집은 지금의 경계 구분도 위기의식도 모두‘관습적’문학제도 내에서 암시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허정은 foggy10@hanmail.net
하나의 방법으로서 장르문학을 수용하자
● 지난호 장르문학 특집에서 박진은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이 함께 진화해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대안을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근본적인 모순일 텐데, 전자의 문제는 “상업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은 아니다”(김항)라는 것이고, 후자는 관습화된 이야기 구조에서 벗어나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정영훈)는 것이다.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이라는‘시빗거리’에서 벗어나 하나의 방법으로 장르문학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진화해나간다면, 그것만큼 한국문학이 이뤄낼 커다란 결실은 또 없을 것이다.
김새봄 taejang21@hanmail.net
쉬우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 이승우의 단편 「오래된 일기」를 반갑게 읽었다. 예전에 그의 대표작 「생의 이면」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 단편은 모든 면에서 역시 작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다.‘규’와‘나’라는 두 인물로 대비되는 삶의 아이러니가 재미있게 그려져 있으며, 인간의 원초적 심리와 내면세계, 종교적 신앙과 사유, 리얼하게 묘사된 현실세계 등 작가의 주특기가 잘 망라되어 있었다. 평이한 듯한 문체는 오히려 친근하면서도 잘 읽히는 장점으로 돋보인다. 작가는 이번 단편에서 지문과도 같은 자신만의 소설을 다시 한번 구사했다. 이승우는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을 쓰는 몇 안되는 작가 중 하나가 아닐까.
장우상 jws05@hanmail.net
금지된 것들에 대한 발화
● 고백이라는 테마에 시대상을 날렵하게 입힌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소설이다. 주인공‘곽’은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소위 고백의 일인자, 그래서 별명 역시 고백의 제왕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우리가 일전에 경험한 적 있을지도 모르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속앓이의 한 단면이기도 하고, 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다른 이들에게서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될까 두려워 차마 뱉지 못하는 금지된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 미뤄온 고백을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줄이 늘어놓는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인상적이다.
배주리 cre744@empal.com
블로거가 읽는 창비
●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발표 못했겠구나 싶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한국의 언론자유’라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쎅시’했기 때문에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읽어보면, 이 시는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은 무척이나 담백한 시다. 김수영이 진실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로지 무엇이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검열의 왕국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해제에서 김명인도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밝혀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金日成萬歲’」를 그대로 실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무너지거나 권위가 떨어졌을 것인가 하는 가정이다. 한국사회가 이 시를 용인하지 못했던 것은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당시에 이 시가 발표될 수 있었다면 국가체제는 물론이고 권위 역시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김수영은 언젠가 「‘金日成萬歲’」가 발표될 날이 오리라 믿었던 것일까.
Endy님의 블로그에서
●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서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김수영의 글을 그냥 김수영이려니 하고 읽었던 것 같다.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는 글을 눈으로 읽고 있었다. 뒤에 해설이 두 편이나 붙어 있지 않았다면, 그 문학사적 의의를 깨닫지도 못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아, 그게 그런 글이었어! 누군가 해석해주지 않으면, 그 글의 가치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문예지는 읽어서 무엇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괜히 『창작과비평』을 읽으면 있어 보여서 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읽자. 속이 빈 강정이면 채우면 되지.
Veronika님의 블로그에서
● 신문광고를 보고 이번호는 재미있겠다 싶어 외출 나간 김에 서점에 들러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샀다. 복귀했더니 후임이 묻더라.
“『창작과비평』은 월간지입니까?”
“아니, 계간지야.”
“개간지! 역시 『창작과비평』은 개간지(멋있고 폼난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편집자)가 흘러넘치는구나.”
물론 알고 한 말이었지만 둘 다 폭소.
그래서 나는 지금 개간지가 흘러넘치는 『창작과비평』을 읽고 있다.
‘인생은 팡타지’님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