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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000년대 소설과 비평의 향방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최경계의 글쓰기-배수아 소설집 『훌』」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1. ‘새로움’에 강박된 비평

 

거듭되는 문학위기론과 평단을 떠들썩하게 한‘문학의 종언’론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듯 온갖 경향의 작품과 비평을 쏟아낸다. 작금의 한국문학에는 새것과 옛것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공존하는데, 이 가운데 새것다운 새것이 있고 겉만 새것이지 속은 낡은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옛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이 있고 겉도 속도 낡아버린 것이 있다. 천차만별인 작품과 비평의 실제를 가늠하는 데는 이 네가지 분류법도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문학의 활력 속에 상당한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 거품을 제거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한국문학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새로움’과‘낡음’의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저마다 자신이 진정한 문학임을 자임하고 나설 때일수록 비평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비평가’(critic)라는 영어 어원에도 담겨 있듯이 어떤 작품이 가치가 있는가, 어떤 점에서 새로운가를 가려내는 비평작업이‘결정적으로 중요한’(critical) 것이다. 그것은 이 작업에 문학다운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뿐 아니라 삶다운 삶이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는‘준비된 독자’로서 이런 비평작업의 포문을 여는 사람인데, 그 선도적인 역할에 힘입어 작가를 포함한 수많은 독자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의 공간이 마련될 때, 문학은 소위‘문학인’들의 좁은 마당에서 벗어나 동시대 사람들의 소중한 공유자산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상당수 비평가들은 마치‘신상’(품)을 소개하는 홈쇼핑 쇼호스트처럼 작품의 진면목이 아닌 이런저런 서사적 특색에 의거하여 2000년대의 젊은 문학에‘새롭다’는 형용사를 남발한다. 어느 시대이건 새로 등장하는 문학에 새로움을 과도하게 부여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날 상당수 비평가들이 최신 소설에서 발견하는‘새로움’은 강박증적이고‘코드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신예 평론가 강유정(姜由禎)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어떤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혹은 새로운 문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작가들은‘새로움’에 대한 예증이자 주석으로 차용되는 바가 없지 않다. 새로운 작품들이 나타났기에 의미 규정이 이루어진다기보다 새로움을 선언하기 위해 낯선 작품들이 수배되고 있는 형편이라는 뜻이다. 새로움에 강박된 최근의 독법에 각각의 구체적 실재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선언의 도그마는 반성이나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다.‘새로움’에 대한 담론적 조감도만 있을 뿐 작품의 실체가 주석처럼 왜소화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1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논한 (필자를 포함한) 평자들의 행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것이 2000년대 소설에‘무중력 공간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광호(李光鎬)나‘무력한 자아’를 특징으로 내세우는 김영찬(金永贊) 등‘새로움’선언을 선도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판이라면 과도한 면이 있지만,2 그들 이후에 가속화된 새로움 강박증은 이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 최근 평단의 잘못된 관행을 이처럼 야무지게 비판하는 강유정은 한유주(韓裕周)와 김유진을 다루는 자신의 글이 “새로움이라는 미개척지에 대한 또다른 점유라기보다 점유된 영역의 타당성에 대한 반성적 고찰”(36면)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작가의 작품을 분석한 후 “그들이 시도하는 소설의 혁신이나 언어의 갱신이 불가능한 모험일 수도 있다”(51면)고 살짝 꼬집는 것만으로‘새로움에 강박된 최근의 독법’에 어떤 교정효과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강유정은‘새로움’을 남발하면 안된다는 자각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맹렬히 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최근의 소설들은 마치 공모라도 한 듯이 소설의 원리에서‘근대성’을 지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움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축조물을 내파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지적하며, “최근 소설 속에 의도적인 눈감기의 행위가 자주 출몰하는 맥락”에 주목한다.(20면) 이어서 이기호, 박형서, 한유주, 편혜영을 근대소설의 원리를 내파하는 작가로 호명하며‘눈먼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김중혁과 김애란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분석한다. 이로써‘근대성’을 지워버린‘새로운 소설’의 작가 명단이 제시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쯤 되면 강유정 자신이야말로‘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모범사례를 보여주는 격이다.

그런데 낯설고 새로운 소설에 대한‘수배’경쟁에 중견 평론가 손정수(孫禎秀)까지 끼어든 것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일러준다. 손정수는 “새로움에 모든 것을 거는 비평가들의 도박에는 응당 그에 합당한 판돈이 있는 법”3이라면서 그‘도박’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최근 소설의 문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작가(박민규, 김중혁, 한유주, 김태용, 황정은 등)의 명단을 작성한다. 그런데 작품의 가치평가와 무관한 이런 강박증적인 새로움 추구의 이면에는‘허구적’인 낡음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강유정의 경우 그것은 한마디로‘시각 중심의 근대성’이다. 그렇다면 손정수에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손정수가 최근 소설의 동향에 대해 “어느 시점 이후 소설은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지 않고 앞서 존재했던 텍스트들을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투명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상징적 상상이거나 혹은 상상적 상징일 것”(같은 면)이라고 말할 때 그가 내세운 기준은 드러난다. 그에게‘낡음’의 뚜렷한 징표는‘투명한 현실의 재현’인 것이다.

그런데 손정수의 이 진술은 이중으로 사태를 왜곡한다. 우선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는 소설들이 다수 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삭제한다. 그같은 소설들은 아마‘리얼리즘’소설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둘째 이런 (리얼리즘) 소설들의 특징이‘투명한 현실의 재현’인 것처럼 호도한다.‘투명한’현실의 재현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단련된 작가와 비평가의 상식이거니와, 리얼리즘 작가들이‘재현주의’적 발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예술적 분투의 과정을 소설화한 사례도 여럿이다.4 이론 쪽에서도 리얼리즘의 핵심은‘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르렀는가 여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5

 

 

2.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

 

손정수가 한국소설의‘새로움’과‘낡음’의 분기점을‘투명한 현실의 재현’에서 찾는다는 것은 우리 비평의 일부가 몽매주의 속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그런데 그 연유를 추적하다 보면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근대문학 종언’론의 수용 문제와 맥이 닿는다. 알다시피 카라따니는 한국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쇠퇴에서‘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하고,‘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은 오락에 불과하므로 문학과 결별한다고 선언한다.‘종언’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카라따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6는 권성우(權晟右)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권성우 자신이 그 물음을‘근본적으로’되묻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카라따니의‘종언’론에 기대어 한국문단을 향해 반성과 성찰을 촉구할 뿐 그의 주장(특히‘한국문학 종언’론)의 허실을 꼼꼼히 검토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에 대해 “김원일, 조정래, 황석영, 방현석, 김남일, 정지아, 정도상, 안재성, 공선옥, 전성태 등이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분투하고 있는 문학세계에 해당하는 이 시대 일본작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137면)을 일껏 거론해놓고, 한일 양국의 문화적·문학적 차이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들 작가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황석영(黃晳暎)에서 안재성(安載成)까지 예술적 성향과 수준이 현격한 작가들을 뒤죽박죽 도열시키는 방식도 문제다. 이들이 모두 사실주의적 서사를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할 뿐, 누가 그런 서사로써 우리 시대에‘결정적으로 중요한’예술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는 불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이런 범주화 역시 일종의‘코드화’이다. 권성우가 박민규(朴玟奎)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백낙청의 높은 평가를 무슨 다른 저의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7도 이런‘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탓이 아닐까 싶다.

황종연(黃鐘淵)의 반응은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카라따니의‘종언’론을 1)‘근대문학’개념 2)‘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구도 3)‘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은 오락에 불과하다는 주장, 세 항목으로 나눠 살펴보자. 황종연의 반응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카라따니에게는‘근대문학’이 문학다운 문학인데, 황종연에게는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황종연은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카라따니의 주장이 타당하고 유용한 가설”8이라고 인정하지만 카라따니와 달리‘근대문학’을 문학다운 문학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황종연이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문학은 하찮다는 그〔카라따니〕의 주장은 (…) 개인적·국지적 경험의 무리한 일반화가 아닌가”(197면) 하고 의심하면서,‘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이 오락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간추려보면 황종연은 1)은 받아들이되‘근대문학’이 그렇게 이상적인 문학인지 의심하고, 3)은 거부하며, 2)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2)에서 골치 아픈 것은 한국에서‘근대문학’과‘근대문학 이후의 문학’(탈근대문학)의 분기점을 어디에 설정하느냐이다. 이 문제는 카라따니의‘근대문학’개념 자체와 그것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충분히 검토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 황종연은 서구문학사의 맥락에서 이런 검토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나, 그것이 서구 여러 나라에 두루 타당한지 의문이거니와 무엇보다‘분단체제극복’으로서의 통일을 비롯한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가 남아 있는 우리의 상황에는 명백히 맞지 않는다. 우리 문학을‘근대적’문학과‘탈근대적’문학이라는 두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양자는 카라따니가 설정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거니와 그렇게 단절적일 수도 없다. 많은 뛰어난 작품들이 양자의 경계에 놓이거나 양자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카라따니의 2)의 단절적인 구도를 덥석 접수하면서 그 분기점을 자의적으로 정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비평을‘낡음/새로움’(근대문학/탈근대문학)이라는 도식의 포로가 되게 만든 데 한몫을 한다.

물론 이런 도식에 빠져 있지 않은 비평가들도 있다. 가령 김중혁(金重赫)과 김애란(金愛爛)의 소설에서 탈근대문학 특유의 미덕을 억지로 찾으려는 강유정의 시도에 대해, 신형철(申亨澈)은 “김애란과 김중혁의 소설이 우리에게 인상적인 것은 오히려 그 소설들이 잘 쓰인 근대소설이어서가 아닌가?”9라고 날카롭게 반문한다. 그의 다음 발언은 오늘날 새로움에 강박된 비평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짚는다.

 

우리는 이것이 카라따니의 논법이 갖고 있는 유혹이라고 생각한다.‘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 속으로 일단 들어가면 우리는 근대문학과 탈근대문학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탈근대문학만의 미덕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은 탈근대문학에도 여전히 근대문학의 미덕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일이 아닌가. 김중혁과 김애란의 소설에서 좋은 근대소설의 미덕들을 찾는 일이 더 쉽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카라따니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근대문학’이‘문학’의 세계에서 자신의 지분을 회수하고 철수할 때 우리는‘문학’본래의 지분까지‘근대문학’이 가져가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없다.(279면)

 

그렇다.‘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카라따니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문학적 투쟁도 필패다. 이 프레임은 최원식(崔元植)이 지적하듯 한국의 민족문학운동 또는 민중문학운동의 해체를 촉진하는‘신판 프로문학 해소론’일뿐더러(『한겨레』 2007.10.26), 신형철이 간파하듯 “‘문학’본래의 지분까지” 앗아가는 구조적 함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필패의 함정에서 버둥거리다 문득 문학이 무엇인지, “‘문학’본래의 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카라따니가 한국문학에 베푸는 최대의 공덕이라 할 만하다.

 

 

3. 문학과 시대적 과제

 

2000년대 문학의 성격을 우리 시대의 중대한 변화와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필자는‘6·15시대의 문학’이라는 발상을 제시한 바 있다.10 이에 대해 창비 안팎에서 열띤 비판이 쏟아졌는데, 그에 감사하고 대체로 수긍한다.11 각각의 비판에 일일이 답하기보다 자기비판을 겸해 필자 나름으로 입장을 가다듬고자 한다. 필자가‘6·15시대의 문학’이라는 발상을 제시한 동기는 이광호의‘무중력 공간의 글쓰기’라는 세대론적인 발상과 IMF사태를 2000년대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꼽는 김영찬의 입장에 대한 반론의 일환이었다. 우리 시대 문학을 시대적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겨 읽되, 최근 한국사회의 변화를 한반도 남녘의 사건 중심으로만 파악하기보다 한반도 전체의 획기적인 사건을 주목해서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이런 취지 혹은 문제의식 자체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문제는 시대론과 문학론의 차이, 중요한 개념이나 사건의 적용단위의 차이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6·15시대 문학론’을 개진한 데 있었다. 가령 IMF사태와 6·15선언을 비교하면서 “양자 모두 충격적인 사건인데, 한반도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쪽은 전자이지만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은 후자”(졸고 209면)라는 필자의 판단은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IMF금융위기는 주로 남한사회가 해당단위가 되는 거고, 6·15시대라는 건 한반도 전체가 일차적 단위”(백낙청·이명원 인터뷰 중 백낙청의 발언, 548면)라는 것, 즉 두 사건의 적용단위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문학 논의의 주된 범위가 한국문학, 즉‘남한’문학이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불철저한 인식 때문에 6·15시대가 한국문학과 맺는 관계도 훨씬 더 우회적이고 그 성과가 장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고려하지 못했고, 그런 탓에 무리가 생긴 면도 있다. 특히‘경계넘기’의 활용법이 도마에 올랐는데, 가령 “2000년대 문학에 나타난‘경계넘기’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좀더 복합적일 필요가 있다. 한편, 경계의 외연이 지나치게 넓은 것도 문제”(진정석 211면)라는 지적12이나 “세계화라는 변수를 언급하고 지나갈 뿐, 6·15와 관련짓지는 않지요. 양자의 관련성과 길항을 다 짚어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김영희(金英姬)의 논평(김영희·김영찬·박형준·이장욱 좌담 199면)은 그 허점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이런 개념상의 잘못을 바로잡으면‘6·15시대 문학론’은 좀더 정교해지겠지만 그 입지는 축소될 듯하다. 6·15시대는 남북간의 국가연합이 성립될 때까지의 이행기이다. 이 한시적인 시기 동안 남북간의 인적·경제적 교류는 늘어나더라도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 시기 특유의 경험이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결실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며, 상당수 걸작은 남북연합 시대에 가서야 나올 공산이 크다.‘6·15시대 문학’이란 것이 이렇게 협소하다면 그 범주가 따로 필요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6·15시대 문학’의 개념적 효용성은 일차로‘6·15시대’특유의‘경계넘기’경험과 그 경험과 결부된 사유와 상상력의 전환을 담아내는 데 있다. 가령 탈북 경험을 다룬 소설은‘통일시대 문학’보다는‘6·15시대 문학’에 어울린다. 또한 국가연합을 이루기 위해 민족이나 국가 같은 범주들을 강화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상대화하는 것이 6·15시대의 역사적 요구라면,‘6·15시대 문학’은 민족주의(국가주의)와 탈민족주의(탈국가주의) 양극단을 중도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소중한 준거점이 되리라고 본다.

6·15시대가 예상외로 험난해질 때‘6·15시대 문학’이 어떤 특별한 소용이 있을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이 계속 외교적 무능과 이데올로기적 반발로 점철된다면, 그의 재임 동안 남북의 국가연합이 실현되기는 힘들 듯하다. 게다가 미국의 금융위기로 말미암은 한국의 경제위기가 남북관계에 대한 변변찮은 관심마저 흩뜨리는 면이 있다. 한국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사이의 함수관계에 사로잡혀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분단체제의 메커니즘을 망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 시대에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다시 절실하게 떠오른다. 필자는 이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 2008)에 등장하는 공사판 노동자‘대위’의 말에서 삶다운 삶, 문학다운 문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암시 같은 것을 받는다. 대위는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라며 일인칭 화자‘준’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거기 씨팔은 왜 붙여요?

내가 물으면 그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신나니까…… 그냥 말하면 맨숭맨숭하잖아.

고해 같은 세상살이도 오롯이 자기의 것이며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257면)

 

이때‘오늘을 산다는 것’은 그저 현재를 산다는 뜻이 아니다. 충만한 순간을 산다는 것이고 그 순간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오늘’은 시간 개념만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삶의 경지’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삶다운 삶이 실현되는 것인데, 이게 무슨 고상하고 세련된 삶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고해 같은 세상살이’속에서도‘살아 있음’자체가‘생생한 기쁨’임을 깨닫는 사심 없음의 경지랄까. 문학이란 이런 삶다운 삶이 실현되는‘시적’인 순간의 설렘과 떨림을, 고해 같은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아닐까. 이때‘씨팔’은 그런‘시적’경지에 따르기 마련인 고양된 감흥을 표현하면서 그것을 이상화하지 않고 다시 속세의 삶으로 되돌리는‘산문적’태도이다. 요컨대 문학은 어떤 역할이나 도구이기 이전에 삶의 진리가 드러나는 예술형태인데, 문학이라는 예술의 남다른 비범함은 그런 진리가 드러남과 동시에 시대적 과제나 임무 같은 실천적인 지평이 더욱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4. 국경을 넘는 몇가지 방식

 

‘국경을 넘는 일’을 다루는 소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등장했지만, 최근에는‘탈북’이 하나의 모띠프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가령 강영숙(姜英淑)의 『리나』(랜덤하우스 2006)는 탈북소녀 리나의 거듭되는 국경 넘기를 통한 탈주의 여정을 추적하고, 황석영의 『바리데기』(창비 2007)는 탈북이라는 수난의 경험을 세계화시대의 난민문제와 결합한다. 정도상(鄭道相)의 연작소설 『찔레꽃』(창비 2008) 역시 세계화로 인한 난민과 이주노동의 문제를 후경으로 깔되, 탈북과 유랑이라는 분단체제 해체기의 특수한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찔레꽃』은 앞의 두 작품과의 연관성과 더불어 탈북자 자신이 구술하거나 집필한 탈북자문학과도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13

그런데 외국이론으로 무장한 요즘 비평은 탈북이나‘국경 횡단’의 서사를 다룰 때 남북한이 분단국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며, 따라서 분단체제적인(6·15시대적인) 관점에 도통 관심이 없다. 가령 정은경(鄭恩鏡)은 『찔레꽃』의 해설 「키치에 맞서는 비정성시(非情城市)」에서 시종일관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저자 아감벤(G. Agamben)의 이론을 적용한다. 그 결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해설’이 소설 자체보다 훨씬 어려워지는 아이러니가 빚어진다. 아감벤의 이론이 이 소설의 문맥에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아감벤은 근대의 주권권력이‘시민’의 이름으로‘법에 의한 법 자체의 중단’이랄 수 있는‘예외상태’-가령 난민/수용소-를 만들어내는데, 이‘예외상태’가 도리어 규칙이 되어‘시민’과‘난민’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상황을 문제삼는다. 『찔레꽃』에도 이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탈북과 유랑의 경험은 남북한이 분단된 탓에 벌어지는 비극의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해석이나 비평에 외국이론을 활용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가령 아감벤의 이론은 최인석(崔仁碩)의 「스페인 난민수용소」(『현대문학』 2008년 5월호)에는 딱 들어맞는 듯하다. 백지은은 이 소설이 아감벤의 주권권력에 관한 “인식을 체현한 하나의 사례처럼 읽힐 수도 있을 만큼”14 아감벤의 중요한 논지와 아귀가 맞는다고 반기는 듯하다. 그런데 오히려 바로 그 점이 찝찝한 것 아닌가? 어떤 소설이 이론에 맞아떨어져서 좋은 작품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작품인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우리는 모두 난민’이라는‘아감벤’적인 메시지를 남기는 「스페인 난민수용소」는 국가와 인종과 민족의 경계를 모두 넘어서는 급진성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급진성은 이 소설에서‘국경을 넘는 일’(영천에 온갖 나라의 난민수용소가 생겨나고 마침내는 영천시 자체가‘영천 난민수용소’가 되는 일)이 아무 문제없이 뚝딱 이뤄지는 관념적인 방식과 동전의 양면이다.

국경을 넘는 여러 방식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은 「스페인 난민수용소」처럼 관념으로(머리로) 넘는 것이다. 그다음 쉬운 방식은 물리적 국경을 몸으로 넘되 마음속의 경계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리나』는 전자에, 『찔레꽃』은 후자에 가깝지만 양자는 모두 편한 방식에서 탈피하려고 분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리나』는 사변적이되 몸의 감각을 총동원한 사유의 모험을 통해 정신/몸, 남성/여성, 국민/난민, 자본/노동, 정주/탈주의 경계를 돌파하여 나아간다. 주인공 리나는 자본의 재영토화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탈주하는‘노마드적 인물’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근대 가족의 최종 진화형태인 일부일처제 핵가족과 판이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다. 이 가족은 리나와 이국의 늙은 가수 할머니, 리나의 동료이자 연인인 이국청년‘삐’, 함께 탈북한 동료이자 동성애 연인인 봉제공장 언니, 봉제공장 언니와 아랍계 남자 사이에 태어난 농아로 구성되어 있다. 혈연과 국적과 인종과 성별·성애를 넘어서는 이 “대안가족은 매우 급진적”15이며 “지극히 윤리적인 가족”16이기도 하다. 이런 탈근대적 대안가족의‘급진성’과‘윤리성’이 순전한 관념의 소산은 아니지만 그것의 형상화에 현실의 요소가 얼마나 작동하는지, 그리고 작가의 탈근대적‘소망충족’욕구가 얼마나 투여되어 있는지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탈근대서사 모띠프의 보고(寶庫)와도 같은 이 소설이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선형서사를 거부하는 예술적 의도 때문만은 아니고, 사유와 현실 사이의 긴장감이 풀어진 탓도 있다.

『리나』에 비해 『찔레꽃』은 서사방식과 경계넘기 양면에서‘급진적’인 것은 차치하고‘진보적’인 느낌도 주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려고 많은 밤을 속절없이 끙끙거리며 보냈지만 수없이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작가의 말」 243면)는 발언에서 보건대, 주된 서사방식이 순진한 사실주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모사론적 재현주의에 갇혀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오산이다. 사실주의 필치의 소재주의에 기운 듯한 대목도 더러 있지만, 온몸을 긴장케 하는 명편도 있다. 가령 「얼룩말」이 그렇다.

「얼룩말」에는 두가지 관점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어른의 관점으로, 여러 성향의 탈북자들과 선교사 간의 대거리에 초점을 맞추면서‘기획입국’프로그램이 지닌 기만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또 하나의 관점은 엄마와 헤어진(사실은 사별한) 후에‘동물의 왕국’에 푹 빠져 사는 어린아이 영수의 시선이다. 작가는 여리고 순진한 아이의 관점을 과감하게 차용함으로써 몽골 국경을 건너는 여정을 마라강을 건너 쎄렝게티 초원으로 나아가는 얼룩말의 생사의 여정과 겹쳐놓는다. 이 두 관점이 동시에 가동되면서 자아내는 복합선율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다. 탈북여성‘충심’의 여정을 시시콜콜 따라갈 때 더러 느껴지던 지루함이나 구질구질함 같은 것이 일거에 날아가면서 곧장 탈북난민의 비극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듯하다. 「풍풍우우」의 서두에서 미친‘미향’이 자연만물과 대화하는 인상적인 장면도 이 소설이 재현주의에 갇혀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정도상이 사실주의 서사방식으로 이런 새로운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데는 탈북자의 비극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하는 순정한 마음이 큰 몫을 한 듯하다.‘충심’의 형상화에도 작가의 이런 애틋한 연민이 스며 있다. 가령 탈북과 유랑으로 상처입은 정체성을 온전하게 지키려고 분투하는 충심에게 작가는 따뜻한 공감을 보낸다. 그런데 이것이 예술적으로 반드시 좋은 효과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리나는 마음속 여러 경계들을 연거푸 돌파하여 매춘과 마약밀매와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반해, 충심은 심양에서 안마사 생활을 할 때 손님이‘장군님’을 조롱한다고 팩 토라질 정도로 여전히 순진하다. 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가짐이나 사랑, 성별/성애 등에서 가부장적인 모형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아 충분히 근대적이지도 않은 듯하다.

충심의 형상화 문제를 공정하게 평하려면 탈북사태가 근대 주권권력의 폭력적 지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라기보다 남북이 원만한 근대적 국가를 성취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북의 사회는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노동의 의무를 지우면서도 강력한 가부장제를 활용하는데 이는 분단체제로 인한 기형화와 관련이 있다. 『찔레꽃』에서 북의 가부장제적인 모습을 슬쩍 비추곤 있지만, 작가가 문제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17 가령 험난한 유랑생활에서도 정절을 지켜온 충심은 남한에 와서 북에 남은 어머니와 이모에게 목돈을 부쳐주기 위해 몸을 파는 선택을 한다. 충심의 효심은 가상하지만 이런 결단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적인 행동이 되지 못하는데, 작가는 비판보다 연민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충심이 좀더 당당한 여성주체로 성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찔레꽃』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고통스런 소수자랄 수 있는 탈북여성의 삶을 충실히 그려내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싶다.18

 

 

5. 낯선 언어의 세계

 

2000년대에 등단한 젊은 여성소설가들 가운데 김사과와 황정은(黃貞殷)은 이전에 보지 못한, 그렇기에 낯설고 새로운 서사를 보여준다. 촛불항쟁에 앞장선 여고생들, 젊은 여성들의 진지하고도 재기발랄한 언행이 조금은 낯설듯이 이들의 언어와 세계는 낯설어 보인다. 적어도 외형적으론 그렇다. 필자는 전래의 소설형식을 깨는 듯한 이런 낯선 서사에 대해‘새롭다’고 환호하기보다 그 낯섦이나 새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짚어보려 한다. 한유주를 제외하는 것은 앞의 두 작가의 소설은 낯설지만 상당한 재미가 있는데, 그의 소설은 완독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작 「재의 수요일」(『세계의 문학』 2008년 여름호)이나 『달로』(문학과지성사 2006)에 수록된 소설들을 통해 이 작가가 현대문명에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지극히‘윤리적’인 작가라는 것, 타자의 타자성을 완벽하게 존중하려는 작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윤리적’인 태도와‘새로운 소설 쓰기’시도가 소설 서사의 부자연스러운 변형을 초래할 뿐 예술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김사과의 데뷔작 「영이」(『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는 새롭다거나 낯설다기보다 괴상망측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래의 소설형식이나 가족윤리를 난도질하며 발광하듯 울부짖는 언어는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이 점에서 김사과의 데뷔작은 김민정(金뗀廷)의 잔혹시와 상통한다. 이 소설의 주된 특징으로, 우선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 눈에 띈다. 영이가 하나가 아니라 영이를 바라보는 친구의 수만큼 많으며‘영이의 영이’(나중에‘순이’)도 독립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둘째, 음주와 폭행을 일삼는 아빠를 엄마가 삽으로 개 패듯이 패고, 나아가‘개새끼’같은 아빠가 정말로 개가 되는(“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276면) 장면을 그려놓을 만큼 아버지 혐오증이 극에 달한 상태라는 것, 엄마에 대한 감정도 비슷해서 가족이 푸근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지옥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내용만 따져보면 두 특징 모두 그리 새롭다고 할 수 없다. 근대적인 자아 개념, 즉 자기동일적 주체가 하나의 신화라는 것은 소설의 효시로 꼽히기도 하는 『돈 끼호떼』의 주된 테마였거니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오면 인간 내면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음은 상식이자 과학이 된다. 분열된 자아를 분신처럼 별개의 존재로 독립시켜놓는 방식도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닌데, 다만 「영이」에서는 이런 수법이 생경하고 미숙하게 구사된다. 아버지가 죽거나 없어지기를 바라는 부친 살해/부재 욕망이나 가부장제 가족에 대한 저항도 문학의 해묵은 주제이고, 90년대 이래 우리 여성작가들의 작품에 줄곧 나타난 것이다. 김사과만의 새로운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혼신의 힘으로 부르짖는 그 강렬한 어조에 있다. 가령 이런 대목이 그렇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 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 초간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270면,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은 무슨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작가인‘나’가 독자인‘당신’한테 대놓고 하는 말이다. 김사과는 문장의 힘(‘파워’가 아닌‘포스’)을 믿는데,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문장의 양을, 즉 절규의 크기를 그만큼 증폭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런‘유물론적’발상은 1980년대 노동문학이나 민중문학 이후 자취를 감췄는데, 2000년대의 신예 작가가 어떻게 이런 발상을 갖게 된 것일까. 기존의 점잖은 문학언어와 양식화된 방식으로써는 작금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을 실감나게 말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김사과의 장편 『미나』(창비 2008)는 그‘고통스러운 광경’이 벌어지는 현장이 어디인지 명백히 보여준다.

『미나』는 허술한 점이 많다. 가령 주요 인물인 수정, 미나, 민호 간의 관계가 원만하게 형상화된 것 같지 않다. 수정과 미나가 한 존재의 두 분신이라 해도 혹은 각각 독립된 개체라고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대화체의 생동감에 비해 서술체 문장은 희곡 지문처럼 기술적이어서 소설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미나』는 살벌한 입시경쟁에 내몰린 여고생들의 메마르고 뒤틀린 삶에 내장된 광기어린 폭력성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김사과 소설에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절규의‘포스’(force)에 있다. 이 절규에는 문학이 우리 시대에 가장 억압받는 집단(「영이」와 『미나』에서는 여고생들)의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거센 항의가 담겨 있다. 그는 하드고어를 불사하는‘열렬한’소설가이다. 다만 『미나』의 어떤 대목은 너무 장황해서 작가의‘포스’가 작품의‘포스’로 전달되는 것 같지 않다.

그에 반해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 2008)를 출간한 황정은은 웬만한 일에는 시큰둥하고 심드렁하며 항시‘서늘한’소설가이다. 또한 대단한 스타일리스트이며 언어를 다루는 단수가 높다. 이를테면 황정은은 김사과처럼 아빠를 개 패듯이 패거나 피 칠갑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모자로 바꿔놓고 가끔 지나가면서 무심결에 발로 차거나 남들이 보기 전에 가방 속에 구겨넣을 뿐이다(「모자」).

멀쩡한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다는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발상은 전래의 소설형식을 위반함으로써 튀어보려는 수법일까? 그런데 황정은의 「모자」의 경우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모자’로 변하는 충격적인-그러나 작중에서는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가 아주‘쿨’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가령 여러 가족의 목격담을 통하여 변신 자체보다 변신의 경위라든지 변신에 대한 반응이 부각되면서, 가족 중에서 과중한 부담을 짊어졌으되 무기력한(고부갈등을 끝장내려고 기세 좋게 이불장을 업고 나가다가 대문에서 모자로 변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모습이 차츰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일, 고부갈등에서의 난처한 입장, 실직시절에 첫째자식한테 무시당한 일, 아내의 투병생활 때 둘째의 뺨을 때린 일이‘변신’을 전후한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모자」는 한국의 가족사에서 아버지가 무력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되어가는 것을 증언하는 한편, 그 아버지를 측은히 여겨 돌봐주는 무심한 듯 애틋한 자식들의 태도를 담고 있다. 이는 90년대 여성소설 이후 빈번히 등장한 아버지 살해/부재 욕망의 최종판으로서, 김사과의 하드고어 버전이나 김애란의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반짝이는 야광바지’를 입혀 달리게 하는) 재기발랄 버전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모자’라는 것이 환상이냐 상징이냐 알레고리냐 심지어‘외계인’이냐의 논란이 있는데, 그 무엇이든‘모자’와‘아버지’의 상통하는 심상을‘시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모자의 이미지가 무기력하고 거추장스런, 그러나 잘 챙겨야 하는 아버지상에 합치되는만큼 “아버지의 삶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19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황정은은 시인처럼 언어의 경제성, 운율과 주술적 효과, 활자의 배치와 모양새에 빼어난 감각을 지녔다. 황정은 소설의 새로움이 있다면 아직은 주로 여기에 머물러 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소설들이 얼마간‘시적 효과’를 지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분적으로‘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과 소설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른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황정은 소설 가운데 후자에 육박하는 작품은 산문적인 요소와 시적인 요소, 냉철한 현실인식과 주술적인 언어구사가 매끄럽게 결합된 「무지개풀」이다. P와 K는 풀을 가지고 싶다는 멋진(‘환상적인’)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마트에서 파는 4만 5천원짜리 별 모양의 무지개풀을 사서 좁은 아파트 공간의 거실에 설치한다.‘풒풒풒풒’하면서 열심히 바람을 불어넣고 물을 채워 잠시 몸을 담그기도 하지만 거실 전체를 차지하는 풀 때문에 일상적인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은 결국‘환상적’인 계획을 중단하고 환불을 결심하며, 대신 P는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를 본다. 이 작품은 초자연적인 설정 없이 자연스럽되 그로테스크해지는 일상적 삶의 이야기를 통하여 환상의 용법과 사용능력을 묻고 있다. 그 물음의 결과는 통념을‘깨는’이야기이다. 환상 역시 현실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환상은 현실의 일부라는 것 등의 암시가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황정은은 예리한‘리얼리스트’이다.

 

 

6. 살아 있는 말들의 향연

 

앞의 논의에서 최근 소설의 성과가 만만찮음을 확인한 바 있지만, 빼어난 소설들을 다 언급하지는 못했다. 원로의 작품을 제하고도, 적어도 배수아의 『훌』(2006), 박민규의 『핑퐁』(2006),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2006), 이혜경의 『틈새』(2006),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2007),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2007),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2008),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 등을 고려하지 않고 한국소설이 최근에 거둔 성취를 정당하게 평하기 힘들다고 본다. 이 가운데 공선옥(孔善玉)의 소설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흔히‘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서사방식을 공선옥만큼 뚝심있게 밀고 나간 작가는 찾기 힘들다. 시대가 그런 양식을 낡았다고 돌아보지 않을 때, 공선옥은 그것을 버리거나 다른 양식들과 결합시키지 않고 오히려‘리얼리즘’의 더 깊은 안쪽으로 걸어들어간 듯하다. 공선옥의 소설에도 슬럼프나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연작소설집 『유랑가족』(실천문학사 2005)은 IMF사태로 초토화되어 죽음과 한으로 가득한 절망의 대지를 보여준다. 다섯편의 연작을 이어주는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기자‘한’이 방방곡곡을 누비며 듣는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IMF사태로 인해 비닐하우스 재배를 망친 농사꾼, 그 농사꾼과 아이들을 팽개치고 가출하여 외간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 그 아내를 찾으러 아이들을 방치하고 서울에 올라온 남편. 남편이 감옥 간 사이 다른 남자의 애를 낳은 아내, 감옥을 나와 그 아내를 노상 패는 남편,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집을 나간 딸, 그 딸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엄마.

‘한’이 듣는 슬픔은 끝이 없고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이제 신선한 이야기가 되지도 않는다.‘한’이-그리고 작가 공선옥이-봉착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취재해서 그 아픈 삶의 진실을 전해주고 싶은데, 자신을 고용한 사보의 편집팀장은 그게‘어둡고 부정적’이고‘상투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얘기라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요? 엄마가 집 나가고 아이들은 불쌍하고…… 너무 상투적이에요. 상투적인 그런 얘기 새삼스레 할 필요 있나요? 그런 건 피디수첩에서도 안 다뤄요.(54면)

 

팀장이 가난한 삶을‘상투적’이라고 보는 데는 중산층의 편견이 개입된 탓일 수 있다. 가령 가난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가난이 삶에 새겨넣는 각양각색의 고통의 문양과 결을 구분할 수 없다. 외국인을 외국인으로만 보면 각각의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듯이 말이다. 중산층에게 가난의 얼굴은 다 똑같이‘어둡고 부정적’이며‘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한가지 이유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작가가 가난의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그 각양각색의 문양과 결을 세심하게 보여주지 않을 때이다. 또한 가난한 삶이라고 해서 슬픔과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닌데, 마음이 상하여 예술적 분투를 멈출 때 가난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다.

‘한’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유랑가족』이 이런 상투성에 빠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에다 할머니까지 잃어 의탁할 데를 찾아 헤매는 초등학생 영주의 사연을 그린 「남쪽 바다, 푸른 나라」는 생생한 자연묘사와 아울러 대견해질 수밖에 없는 아이의 처지를 돋을새김하듯 새겨놓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소설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짙은 슬픔의 정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때로는 그로 인한 상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당시 공선옥은 희망을 잃고 자신의 예술적 자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듯하다.

『명랑한 밤길』에 오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우선 소설의 관심대상이 파산한 농민, 이주노동자, 공사판 노동자 등 전통적인‘민중’(노동자-농민) 계층뿐 아니라 미혼모, 뇌성마비 장애인, 유방암 수술 후 우울증에 걸린 여성 등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에게까지 넓어진다. 접근방식도 다양해지고 슬픔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 유희와 조롱, 아이러니 등 다양한 감정이 펼쳐진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살아 있는 말들인데, 그 지역, 계층, 세대, 성(性)에서 실제로 쓰이는 말들이 소설 곳곳에 보석처럼 흩뿌려져 생기를 불어넣는다.

가령 「영희는 언제 우는가」에서 여러 인물의 말들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화음 효과에, 산문의 언어와 운문의 언어가 어우러져 음악성을 획득하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일인칭 화자와 영희는 한때 전자공장 여공으로 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이다. 서울 사는 화자는 노름꾼 남편과 매일같이 살벌한 싸움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영희의 남편상(喪)에 참석하러 광주로 내려간다. 버스간에서 동석한 남자는 나중에 보니 영희의 남편‘창석’과 친구 사이이고 화자와 한때 서로 호감을 나눈 적이 있다.

이야기는 크게 화자의 이야기와 영희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영희가 남편상을 당하고도 울지 않는 것이 영희 이야기의 긴장을 팽팽하게 죄는 요소이다. 화자‘나’가 보기에도 영희의 굼뜬 행동거지와 무덤덤한 반응이 답답하다. 영희의 시고모한테 이런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아이고를 안혀, 아조 안해부러. 그것이 뭣이간디, 창색이 가는 길에 축수허는 것이여. 저승길이 綃헌 길이 아녀. 그런디 그 속이 뭔 속인가 그것을 갖다가 안해부러.”(54면) 노파의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는 소설에서 선명한 곡조를 이루는데, 그 반대편에는 그 못지않게 또렷한 영희의 어린 딸 소담이의 똑 부러지는 소리가 있다. 소담은 “울 아빠 돌아가셨어도 우린 살아야 하니까, 개밥도 퍼주고 들에 나가 하우스도 살펴야 해요. 오늘 우느라고 아무것도 못했거든요”(44면)라고 한다.

이런 대견한 딸에 비해 상여가 나가고 문상객이 다 가도록 울지 않는 영희가 너무한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영희는 소복을 힘차게 벗어버리고 화끈하게 울어젖힌다. 제대로 울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시고모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앵, 인자서 우는가비. 그려, 울어라, 울어. 하먼, 밥 묵고 살라먼 울어야제. 울어야 밥맛 나고 묵어야 심이 나제. 별것이나 있간디. 암것도 없어. 태나서 우는 놈이 사는 벱이여. 울어야 산목심이여. 그저 내 울음이 내 목심줄이여. 뜨건 눈물 퐁퐁 쏟아가매, 팥죽 같은 땀 펄펄 흘려가매.”(56면)

이 울음 잔치에 화자도 합류한다. 화자는 버스간에서 만난 남자와의 실낱같은 인연이 이어지길 간절히 기대했지만 그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에 기가 막혀 울되, 우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맘껏 울어젖혀지지가 않는다.”(55면) 그러다가 영희의 화끈한 울음과 시고모의 추임새에 자극받아 드디어 “쪼그리고 우는 울음 말고 온몸 버둥대는 울음”을, “세상천지 집어삼키고도 남을 울음”을 울기 시작한다.(56면)

‘온몸 버둥대는 울음’ ‘세상천지 집어삼키고도 남을 울음’을 우는 것은‘오늘을 사는’한 방식이다. 소중한 사람을 여의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생생한 슬픔이지만 여기서 작가는 물론 영희와 화자, 심지어 소담이까지‘슬퍼하되 마음을 상하지 않는다〔哀而不傷〕.’공선옥은 『유랑가족』에서보다 한결 여유롭게 다양한 인물에 걸맞은 빼어난 언어를 구사하여 살아 있는 말의 향연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공선옥은 이 작품에서 어둡고 삿된 생각 하나 없이 온몸으로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이 소설은 가난의 상투성에서 훌쩍 벗어나 모든 인물과 말이 살아나면서 어떤 관념의 틈입도 용납하지 않는 삶의 생생함으로,‘온몸 버둥대는 울음’으로 문득‘시적 경지’를 성취한다.

 

앞서 검토했듯이 작금의 한국문학은 창의적 기운을 갖고 있으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럴 때 비평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해지는데, 초심으로 돌아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것이 중요하다. 문학에서 무엇이 새것다운 새것인지를 가리는 문제는 결국‘오늘을 사는’행위와,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귀기울이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외국의 (문학)이론이나 철학이 우리 시대를 해명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으되,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작품의 문양과 결을 세심하게 읽되, 역사적 현실에 열려 있는 비평은 정교한 이론의 적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가 맨몸으로 작품과 시대적 현실을 대면하는 과정이 요구되며, 이럴 때 이론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하여 문학의 새로움은 창조적인 작품에서 발원하되 비평의 분투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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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유정 「Welcome to Nowhere-land-한유주, 김유진의 새로운 소설」, 『오이디푸스의 숲』, 문학과지성사 2007, 35면.
  2. 필자는 이광호의 발상이 2000년대 작가들의 소설을 “실제 이상으로 탈현실적이고 탈역사적인 맥락에서 읽기 쉽다”고 비판하고, 김영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부분의 성향을 전체의 성격으로 확대”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그들이‘새로움’의 발상의 예로 거론한 작가들 가운데 경우에 맞지 않는 작가(김애란, 김중혁, 박민규)도 끼어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작품의 가치평가와 별개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코드화’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14~15면 참조. 이에 대해 이광호는 “‘설정된 글쓰기 주체의 무중력’을‘비평가의 무중력’ ‘독해방식으로서의 무중력’으로 왜곡하는 논법”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필자의 비판은‘글쓰기 주체의 무중력’을 설정하는 데 따른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광호의 반박에 대해서는, 「‘2000년대 문학 논쟁’을 넘어서」, 『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249면 참조.
  3. 손정수 「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 『자음과모음』 2008년 가을호 226면.
  4. 가령 전성태(全成太)의 「퇴역 레슬러」(2000)와 「존재의 숲」(2003)은 재현주의와 반영론의 한계를 묘파하는 작품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참조.
  5.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8면 참조. 백낙청은 여러 군데서 리얼리즘 예술의 핵심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님을 분명히했는데, 자세한 논의로는, 백낙청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1996년 하반기호 참조.
  6. 권성우 「추억과 집착-‘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 『안과밖』 2007년 상반기호 146면.
  7. 권성우 「박민규, 혹은 비평의 운명·1」, 『오늘의 문예비평』 2008년 여름호 참조.
  8. 황종연 「문학의 묵시록 이후-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고」, 『현대문학』 2006년 8월호 196면.
  9. 신형철 「우리가‘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한 말」, 『너머』 2008년 여름호 278면.
  10. 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참조.
  11. 김영희·김영찬·박형준·이장욱 좌담 「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진로를 묻다」,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197~200면; 진정석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같은 책 209~12면; 유희석 「통일시대를 위하여」, 같은 책 227면; 백낙청·이명원 인터뷰 「‘변혁적 중도주의’제창한 문학평론가 백낙청」, 『백낙청 회화록』 5권 547~49면; 이광호 「‘2000년대 문학 논쟁’을 넘어서」 254~60면 참조.
  12. 이광호도 비슷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다만 그 일부는‘6·15시대’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통일한국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적 동일성의 관념에 기초한 단일한 민족국가의 성립을 목표로 한다는 맥락에서, 민족이라는 선명한 경계선의 이념이 작동하고 있다”고 성토하는 대목(이광호, 앞의 글 258면)이 그렇다. 통일지상주의와 분단체제극복으로서의 통일 간의 중요한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진술이다.
  13. 이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수기소설 『평꼬』(1995)와 『국경을 세번 건넌 여자 최진이』(2005) 그리고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2008)를 들 수 있다. 특성상 탈북 후의 유랑보다는 북한에서의 생활, 특히 90년대‘고난의 행군’시절의 궁핍한 삶을 증언하는데,‘꽃제비’라 불리는 북한판 소매치기의 파란의 삶을 다루는 『평꼬』는 보수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거리를 두고 있거니와 소설적 재미와 미덕도 풍부하다.
  14. 백지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최근 한국소설과‘낯선 삶의 출현’」, 『세계의 문학』 2008년 가을호 279면.
  15. 박성창 「문학·국경·세계화-황석영과 강영숙의 소설을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 2008년 봄호 343면.
  16. 김형중 「성(性)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최근 한국문학에 나타난 성·사랑·가족에 대한 단상들」,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59면.
  17. 『평꼬』나 『국경을 세번 건넌 여자 최진이』에서는 가부장제의 모습이 상당히 부각되어 있다.
  18. 충심의 형상화 문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졸고 「요산 문학의 종요로운 유산과 최근 소설에서의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제11회 요산문학제 자료집 87~88면 참조.
  19. 정영훈 「그녀의 골방을 들여다보다」, 『세계의 문학』 2008년 여름호 2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