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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과(大過) 시대의 글쓰기
김상환 金上煥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해체론 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김수영론』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이 있다. kimsh@snu.ac.kr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이 델포이신전의 경구를 앞세워 시인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호메로스 이래 그리스의 역사적 현실을 조형하던 시적 사유의 입법적 권위를 “너는 너 자신조차 모르잖아” “너나 잘하세요”라는 반어법을 통해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시란,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후 문학의 본질을 규정하는 무수한 정의가 있어왔다.
계몽주의로 구현되던 철인 왕의 이념에 도전하고 시인 왕 이념의 복권을 꿈꾸던 사조가 초기 낭만주의였다. 이 사조의 대변자 슐레겔(J. E. Schlegel)은 자신의 본질로 복귀한 문학을 낭만주의 문학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핵심을 아이러니로 보았다. 여기서 “문학은 아이러니”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물음과 대답이 전도의 가능성 속에 수렴되는 역설의 지대, 그것이 문학의 고유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등식에 도달하는 사색의 여정은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대한 창조적 해석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나를 알려 하지 말라” “나의 비밀은 너의 무지에 있다”는 경고를 돌려준 셈이다. 이후 철학과 문학의 관계는 계속 쫓고 쫓기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철학은 문학을 자신의 무한한 개념적 매개의 능력을 증명하는 마지막 시험대로 삼았다. 반면 문학은 이론적 매개가 불가능한 지점에서만 어떤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문학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은 이런 내기와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철학의 이론적 시선은 계속 문학을 포획하려 하고, 문학은 그때마다 계속 거부하는 몸짓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이런 내기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생각의 방을 바꾸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델포이신전의 지혜와는 다른 지혜의 세계는 없는가?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김수영) 가령 『주역(周易)』으로 전해지는 동양의 지혜는 분명 다르게 가르친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너를 알라”가 아니라 “때를 알라”이다. 이제 알아야 하는 것은 사물의 중심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時中〕”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이다. 앎이 어떤 능력이라면, 그것은 “시간의 한복판에 정확히 자리하기〔中正〕” “시간에 올라타기〔時乘〕”의 능력이다.
『주역』이 가르치는 시중의 논리에서 본질이나 정의는 하나일 수 없다. 하나의 사물이 놓일 수 있는 여러 국면이 있고, 그 국면마다 사물이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는 변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따를 때 진리는 하나로 수렴된다. 그러나 “때를 알라”는 말 속에 설 때 진리는 여러 갈래로 분기(分岐)한다. 문학의 분수나 크기도 마찬가지다. 『주역』의 미학은 여전히 분기의 길들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두가지를 희망할 수 있다. 동양의 인문적 전통의 원천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고전인 『주역』, 바로 이 오래된 책에 담긴 미학을 현대적으로 되살릴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첫번째 희망이다. 사실 서양이론을 쫓아다니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두번째 희망은 『주역』의 미학을 이 시대의 문학을 반성하는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오늘날 문학이 처한 운세를 『주역』에서 묻는다면, 점을 친다면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묻고자 할 때 『주역』은 반드시 먼저 묻는다. 어떤 때의 미래인가? 길을 묻는 자는 어떤 시간 위에 올라타고 있는가?
1. 대과 시대
21세기초의 역사적 현실은 보통 세계화시대라 불린다.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시기인데, 이런 단일 세계체제의 가능성은 두 종류의 보편자에 근거한다. 하나는 화폐/상품이라는 보편자이고, 다른 하나는 테크놀로지라는 보편자이다. 이 두 종류의 보편자는 오늘날 모든 종류의 가치를 번역하는 메타언어가 되었다. 이 메타언어를 통해 사물은 무한히 입자화(粒子化)되는 동시에 무한한 재결합의 가능성 안에 놓이게 된다.
사물이 모래알 같은 입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적인 규정을 상실함을 말한다. 사물이 자연상태에서 지니던 유적 특성, 종적 개성 등은 어떤 차이와 종합, 대립과 공존의 원리였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인연의 끈은 혈연, 지연 등과 마찬가지로 등가적 교환의 문맥이나 기술적 대체의 문맥에서는 무력해진다. 자본과 첨단기술에 의해 번역되었을 때 사물과 사물을 엮던 자연적인 유대는 완전히 사상된다. 이것은 사물들의 고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고립화는 어떤 한계 없는 결합 가능성에 놓이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만남과 결합이 자본의 순환 속에서, 기술의 자기진화 논리 안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처럼 보이던 모든 구별과 차이가 끊임없이 장소와 규모를 바꾼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화시대는 세계가 어떤 단일한 논리의 지배 아래 들어서는 시대이지만, 이것이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종의 차이, 계급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시공간상의 차이, 문화적 차이, 세대의 차이 등등. 이런 차이를 표시하던 경계선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위치와 강도를 바꾸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전치와 변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혼종과 융합이다. 비빔밥의 나물처럼 끊임없이 섞이고 혼동되는 규정성들. 문제는 이런 일반적인 탈-장르의 경향이 자본과 기술의 요구에서 온다는 데 있다. 이 두 보편자가 설정해놓은 역사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속화되는 순환과 대체의 논리에 따라야 하고, 따라서 각 장르의 고유한 내면적 중량과 종적 차이를 잊어야 한다. 그 망각이 생존의 조건인 것이다.
세계화시대가 화폐적 추상성과 기술적 추상성 속에서 종적 차이가 망각되는 시대라면, 이같은 망각은 데까르뜨의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과 더불어 처음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은 이 데까르뜨적 이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국면이다. 사실 근대과학은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인 책”이라는 신념에서 탄생했다. 고대인은 수학을 알았지만 결코 과학에 이용하지 않았다. 사물의 참된 모습은 양적인 측면보다 질적인 측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과 형식만을 갖춘 수학적 대상은 질이나 내용을 결여한 추상적 대상이다. 그런 불완전한 대상을 다루는 수학은 질과 양을 고루 갖춘 온전한 자연적 사물의 탐구에 개입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근대의 몇몇 과학자들은 수학을 과학의 언어로 승격시켰고, 수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과학적 탐구의 가능성 자체와 동일시했다.
이런 수리자연학의 계획이 일반화될 때 오랫동안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해온 존재론적 구도가 무너져야 했다. 고대인은 자연이 무수한 종(種, species)이나 유(類, genos)들로 이루어졌고, 이 유들은 어떤 위계적 구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에는 상하귀천이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수학적 알파벳과 문법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신념에서 이런 수직적 구도의 세계관은 무너져내리고, 대신 수평적 구도의 세계관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모든 종적 차이나 유적 차이, 모든 질적 차이는 가상으로 전락하거나 양적 차이로 환원된다. 양의 차이, 수적인 차이가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원리가 된다. 자연에 있는 것은 수라는 하나의 게노스뿐이다.
화폐와 기술은 모든 가치와 대상을 수적 연산의 가능성 안에서 재현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보편수리학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 재현한다는 것은 재규정한다는 것이다. 데까르뜨는 자연적 사물 일반을 연장(延長)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정의했다. 이 단순한 정의와 더불어 자연적 사물이 가졌던 특수한 규정들은 그림자가 되었다. 연장이라는 것은 수적 차이를 지니는 어떤 것임을 말한다. 사물은 어떤 것이든 이제 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은 이런 존재이해를 일상의 세부에까지 관철시키고 있다. 19세기의 최고 인간학이던 골상학(骨相學)은 말했다. 정신은 뼈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학은 말한다. 정신은, 당신은 수다. 세계화시대는 수학적 언어가 자신의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펼쳐가는 시대이고, 수학적 언어의 무한한 지배력 안에서 모든 종류의 차이가 끊임없이 전치·전도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모든 차이는 한없이 부유해야 할 운명이고 무한한 교환과 대체의 문맥 속에서 자율적이고 안정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수학적 언어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혼종”과 “무중력 공간의 탄생”(이광호)은 자연언어의 진화과정에서도 똑같이 관찰할 수 있는 귀결이다. 모든 언어는 특정한 발전단계에서 사물의 중력을 박탈하는 장소를 만들어낸다. 니체는 서구문화를 지배해온 플라톤주의와 기독교가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통찰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만이 허무주의 속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론, 사상 혹은 언어는 상승의 마지막 단계에서 허무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된다. 허무주의 혹은 냉소주의는 모든 성장의 역사가 완결되는 종착역이다. 우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특히 소외된 정신의 문화적 성숙(Bildung)을 서술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암시를 읽을 수 있다. 헤겔은 문화적 교양이 진화하여 극치의 세련성을 구가하는 시기를 분열의 시기라 불렀다. 그 시기는 사물이 지녔던 자연적인 규정이 왕성한 관념적 상상력과 조작 속에서 자유롭게 뒤바뀌는 시대, 따라서 사물의 고정된 정체성이 흔들리는 시기이다.
『주역』에서 이름을 찾자면, 이런 시기는 대과(大過)의 시기라 부를 수 있다. 28번째 괘인 대과의 괘(011110)는 아래가 나무(011)이고 위가 연못(110)으로 이루어져 있다.1 연못에 물이 너무 넘친 나머지 나무까지 모두 잠겨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나무란 조직하는 질서, 제도, 정착된 규칙 등을 말한다. 연못의 물은 원시적인 생명력이자, 활력적이지만 아직 무질서한 에너지에 해당한다. 대과의 시기는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쳐 한 사회가 획득한 왕성한 잠재력이 기존의 제도적 질서 위로 범람하는 때이다. 가령 우리 시대의 역사적 현실을 “흔들리는 분단체제”(백낙청)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분단체제의 근간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역』의 시각에서 접근하자면, 그것은 그 체제의 여백에서 불쑥불쑥 자라난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에너지에 있다. 이 신생의 잠재력은 그 체제의 신진대사를 통해 창출되었지만, 그 체제의 조절장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방향과 리듬을 띠고 마침내 그 체제에 동요를 가져온다.
『주역』에서 대과 괘는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이(頣) 괘(100001) 다음에 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동요는 그 체제가 어떤 절정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운명임을 암시한다. 오늘날 분단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사회가 일정한 역사적 주기의 정점을 지나 새로운 주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미국에서 시작되어 세계 전체에 충격을 가져온 금융위기에 대해서도 유사한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던 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의 분비물 자체에 의해 맞이하는 범람의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국내의 분단체제든, 세계자본주의체제든 그리고 중국의 부상으로 정치경제학적 지형이 크게 변하고 있는 동아시아체제든 모두 대과의 시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면 대과 시대의 문학은 어떤 형태를 띠고 또 어떤 미래를 모색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주역』에서 물어야 할 점이다.
2. 천문의 글쓰기
이론적 언어의 위력이 증명을 추구하는 데 있다면, 문학적 언어의 마법은 극화(劇化)하는 데 있다. 문학적 언어는 극적인 장면의 연출에서 자신의 설득력을 완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주역』은 이론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주역』의 64괘는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장 기초적인 상황들을 각기 한편의 드라마로 연출하고 있다. 괘들은 언제나 6효로 구성되는데, 이 효 하나하나도 이미 인간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세부 사건의 장면이다. 『주역』은 64채널의 드라마 상자다.
『주역』에서 인-문학적 글쓰기를 포함한 예술적 창조 일반을 장면화하는 괘는 22번째의 비(賁) 괘이다. 꾸밈의 괘인 비 괘(101001)는 아래에 밝게 빛나는 불(101)이 있고 그 위에 높은 산(001)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인문이라는 말 자체가 이 괘에 붙인 공자의 단사(彖辭, 판단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늘의 무늬〔天文〕를 관찰해서 때의 변화를 살피며, 사람의 무늬〔人文〕를 관찰해서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어나간다.” 여기서 무늬〔文〕는 탁월한 나타남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탁월하다는 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변화에 걸맞은 적절한 행위를 유도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있어야 할 마땅한 조치의 신호라는 의미에서 탁월한 기호이다. 비 괘는 탁월한 나타남의 형식인 천문과 인문의 일반적 원리와 분기의 상황들을 연출하고, 그 상황들마다 요구되는 미학적 태도를 암시한다.
먼저 천문의 논리를 알아보자. 다시 공자의 단사에 따르면, “비 괘(101001)의 아래쪽은 부드러운 선이 와서 강한 선을 꾸미므로 형통하고, 위쪽은 강한 선이 나뉘어 올라가 부드러운 선을 꾸미므로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우니, 이것이 하늘의 무늬다〔賁 柔來而文剛故 亨, 分剛上而文柔故 小利有攸往, 天文也〕.” 여기서 부드러운 선은 외양이나 형식을, 강한 선은 실질이나 내용을 의미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조형하는 것과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을 조성하는 것, 다시 말해서 형식이 내용을 조형하는 것과 내용이 형식을 조성하는 것, 이것이 천문이 일어나는 두가지 패턴이다.
① 먼저 형식이 내용 속에 무늬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여백의 미학을 함축한다. 이것은 비 괘가 21번째의 서합(噬嗑) 괘(100101)로부터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읽어낼 수 있다. “서합은 합하는 것이니, 사물이 꼭 합해 있지만은 못한다. 그러므로 비로 받는 것이다.”(「서괘전序卦傳」) 형태상 비 괘(101001)와 대칭적으로 전도되어 있는 서합 괘(100101)는 위와 아래의 턱이 딱딱한 것을 씹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문왕(文王)은 이 턱의 운동을 형벌로 불법과 죄를 다스리는 모습으로 보았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이질적인 것을 끊임없이 동질화하는 것을 말한다. 앞의 문장에서는 그것을 합(合)이라 했다. 그것은 분리, 일탈, 위반의 요소를 어금니로 씹듯 계속 부수고 이겨서 기존의 것과 같게 만드는 것이다. 비 괘는 그런 맹목적인 내용 집적이 한계에 이를 때 일어나는 형식적 움직임에 대해 말한다. 그 조형화는 당연히 합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이 나눔, 차이 내기. 이런 절차 없이 그저 합쳐지기만 하는 내용은 혼돈으로 떨어지거나 무의미로 전락한다. 형식적으로 조형한다는 것은 내용을 혼동의 위험이나 무의미화 가능성에서 구제한다는 것과 같다. 내용은 비만해질수록 분리와 상실을 받아들임 없이는 자신의 동일성을 지킬 수 없다. 무늬는 게걸스러웠던 내용의 운동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금욕주의적 자각이다. 무늬가 어떤 정신적인 것의 상징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천문은 시공간 속에 의미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경계선이다. 이 테두리는 사이와 차이의 존중에서 온다. 이것이 “부드러운 선이 와서 강한 선을 꾸민다”는 공자의 말에 담긴 뜻이다. 이 말은 두번째 선을 중심에 놓고 있는 아래의 불 괘(101)를 염두에 둔 판단이다. 이 괘는 강한 선 사이로 부드러운 선이 와서 분리와 차이를 만들고 있다. 이런 사이 나눔이 천문이 기록되는 한 패턴이다.
② 반면 “강한 선이 나뉘어 올라가 부드러운 선을 꾸민다”는 것은 위의 산 괘(001)를 염두에 둔 판단이다. 이 괘의 위쪽(오른쪽)에 있는 강한 선은 원래 아래의 불 괘(101) 가운데 있는 부드러운 선과 자리를 바꾸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비 괘(101001)는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태(泰) 괘(111000)의 변형이다. 태 괘의 두번째 강한 선이 부드러운 선에 자리를 내주며 꼭대기로 올라와 위쪽의 부드러운 선들을 꾸미는 것이 비 괘이다.
『주역』에서 불이 빛과 눈 등을 상징한다면, 산은 고요와 정지를 상징한다. 비 괘에서 고요는 형식적 유희가 미처 넘볼 수 없는 높이와 관련이 있다. 정지는 그 높이에 이르지 못하는 형식적 유희의 한계를 말한다. 산은 형식적 조화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음을 알리는 숭고한 대상이다. 여기서 복잡한 형식적 유희와는 다른 미학적 가능성이 출현한다.
이 새로운 미학의 핵심은 「잡괘전(雜卦傳)」의 “비(賁)는 무색(无色)이다”라는 짤막한 논평에 언급되고 있다. 형식이 내용에 무늬를 가져와 의미를 창조하거나 보존할 때가 있다. 그러나 형식화가 번잡할 때는 다시 무의미가 입을 벌린다. 그 무의미의 아가리에 떨어졌을 때 의미는 내용이 형식에서 해방되어 소박한 상태로 복귀하는 운동 속에서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복귀는 형식의 환원과 소거 속에서 일어나고, 그 마지막은 무색의 경지이다. 무색은 있을 수 있는 최고의 단순함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형식적 보충도 거부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분비하는 내용의 자기 함량운동을 볼 수 있다. 절대적 소박성 혹은 소박한 절대성. 현대예술에 밝은 사람이라면 말레비치(K. Malevich)의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경지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문학에 밝은 사람은 백색의 글쓰기를 추구했던 말라르메(S. Mallarmé)나 블랑쇼(M. Blanchot)를 떠올릴 것이다. “강한 선이 부드러운 선을 꾸민다”는 공자의 말은 내용이 형식적 번잡을 나누고 제거하는 가운데 순수한 잠재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하늘은 이같은 두가지 절차로 자신의 의미를 기록한다. 그러나 천문의 글쓰기는 다시 이 두 절차를 통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자는 내용과 형식의 상호 맞물림을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빈빈의 미학 속에서 읽을 때 『주역』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형식미도 아니고 내용미도 아니다. 그것은 내용의 맹목 속에 빛을 선물하는 형식적 유희와 형식적 왜곡에서 벗어난 내용적 함량운동 사이의 갈등과 타협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따라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화해와 균형의 실현이다. 멋있는 것은 신산(神算)의 가능성을 맛보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사실 아름다움보다 더 정치적인 것은 없다. 정치가 타협의 기술이라면 이상적인 타협은 아름다움 속에서 완성된다.
3. 인문의 글쓰기
공자는 천문에 이어 인문을 이렇게 서술한다. “문명한 가운데 그치므로 사람의 무늬이다. 하늘의 무늬를 관찰해서 때의 변화를 살피며, 사람의 무늬를 관찰해서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어나간다〔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
인문을 정의하는 첫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침과 억제이다. 『주역』에 한계를 모르고 무한정 퍼져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강유교착(剛柔交錯) 속에 있고, 그 교착이 만드는 결이 하늘의 무늬이자 인간의 무늬이다. 무늬는 무한정한 주장과 고집을 억제하는 한계이지만, 그 한계 속에서 사물은 무의미로부터 구제되고 어떤 규정된 분수를 얻는다. 『주역』이 어떤 이론이라면, 그것은 본질의 학이 아니라 분수의 학이다.
왕필(王弼)은 공자의 문장에 이런 주석을 붙였다. “사람을 그치게 하되 힘으로 하지 않고 문명으로 제어함이니 사람의 문채이다〔止物不以威武 而以文明 人之文也〕.” 이 주석에서는 문명이 무력적인 폭력, 위무(威武)와 대립하는 말로 풀이되고 있다. 이런 대립구도에서 이해할 때 문명은 헤겔적 의미의 인륜(Sittlichkeit)과 가까운 어떤 것이다. 따뜻한 풍속과 밝은 도덕 그리고 이 둘 속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법이 문명을 이룬다. 이런 문명의 핵심을 공자는 사랑, 인(仁)에서 찾았다. 물론 이 사랑을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랑은 어원 그대로 두 사람(二)이 한 사람(人)이 되는 조건을 말한다. 그 친밀의 조건이 어질다는 뜻의 사랑이다. 동양적 의미의 사랑은 소원한 거리와 막힘의 장애를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슬기를 포함한다. 인문이란 사랑과 슬기 속에 펼쳐지는 인륜의 무늬이다.
공자는 비 괘(101001)의 형상 전체로부터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산 아래 불이 있는 것이 비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뭇 정사를 밝히되 함부로 옥사를 결정하지 않는다〔山下有火 賁, 君子 以明庶政 无敢折獄〕.” 아름다움의 형상을 거울삼아 세세한 정사를 밝힌다는 구절은 예술과 정치, 시적 조형과 정치적 실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은 이상적인 타협과 소통의 자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다. 정의는 아름다움 속에서 나타나고 아름다움은 정의의 상징이다. 정치는 정의를 구현하되 아름다움의 형상 속에서 순화되어야 한다.
공자가 비 괘에서 끌어내는 또 하나의 결론은 “함부로 옥사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자제의 덕이다. 이는 왕필의 주석처럼 무력적인 위협이 아니라 사랑과 인륜으로 다스리고, 따라서 가혹한 형벌을 피한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공자의 말에서 “옥사의 결정〔折獄〕”은 앞의 “세세한 정사〔庶政〕의 밝힘”과 대립을 이룬다. 이 대립은 칸트적 의미의 규정판단과 반성판단의 대립을 대신한다.2
이때 규정판단이란 이미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개념에서 출발하여 사물을 규정(분석, 환원, 설명, 정의)하는 판단이다. 가령 판사는 공유된 법전 조항에 근거해서 죄의 유무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판사는 자동적으로 법률을 적용할 수 없는, 오히려 기존 법률의 기원을 되묻는, 불법적이지만 정의로운 사안과 마주칠 수 있다. 이런 반어법적인 사안은 법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게 하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명명과 입법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반성판단이다. 칸트는 이론적 판단을 규정판단으로, 시적 판단을 반성판단으로 분류했다. 공자의 문장에서 “세세한 정사의 밝힘”은 규정판단의 상황에, “옥사의 결정”은 반성판단의 상황에 해당한다. “함부로 옥사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법률을 활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사안의 요구에 부응하여 끊임없이 법률의 정당성을 돌아보고 새로운 법률을 고안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仁)의 시적인 차원이 암시되고 있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의식 아래 있을수록 정치적 판단은 반성판단을 끌고 가는 시적인 상상력에 머물게 된다. 인문의 기술인 정치는 디자인의 기술과 겹치게 된다. 플라톤이 증언하는 것처럼, 호메로스 시대에 작시(作詩)는 정치와 이음동의어였다. 이 오래된 등식은 역사가 출렁일수록, 과거의 패러다임이 붕괴되는 시기일수록 다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공자 역시 시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의 수렴 가능성과 근원적 동일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높은 산 아래 밝은 불이 퍼져나가는 비 괘(101001)의 형상에서 출발한다. 칸트식으로 풀이하자면, 아래의 불(101)은 밝고 우아한 형식을 창조하는 상상력의 유희이고, 위의 산(001)은 복잡해져가는 상상력의 유희를 한없이 압도하는 신비한 크기이다. 불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산은 숭고의 상징이다. 불과 산이 함께 이루는 비 괘의 형상은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이, 숭고 속에서 정의가 시적인 입법과 명명을 호소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 시적인 입법과 명명의 조건이 천문과 인문의 관찰이다. “하늘의 무늬를 관찰해서〔觀乎天文〕 때의 변화를 살피며, 사람의 무늬를 관찰해서〔觀乎人文〕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어나간다.” 위대한 주석자 빌헬름(R. Wilhelm)은 이 문장에 나오는 관(觀)을 모든 욕망과 정념에서 해방된, “고요한 평정심 안의 순수 관찰(die Ruhe der reinen Betrachtung)”3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그리스적이거나 기독교적인 해석이다. 『주역』에서 본다는 것은 그리스적인 테오리아(theoria)처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시선처럼 육체와 분리되는 초월적 상승의 경험도 아니다. 『주역』에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사실 『주역』의 8괘는 원래 점복을 위해 고안되었고 오늘날까지 상수역학(象數易學)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점은 행복과 불행에 대한 염려, 우환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괘를 갖추어놓고 상을 관찰하며 계사를 지어 길흉을 밝힌다〔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계사전繫辭傳」 상 2장)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계사는 점사(占辭)의 일부이다. 길흉을 밝히는 점사로서 계사는 궁극적으로 교정과 치유의 언어이다. 계사가 전제하는 관찰(관상)은 가치중립적이고 무관심한 관찰도, 수동적인 반영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이익의 추종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요구를 헤아리는 관찰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사물의 얼굴이 아니라 그 눈빛을 보는 것이며, 그 눈빛에서 자라나는 기대와 경고 혹은 축복과 거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눈빛을 볼 때 우리는 일종의 사물화를 경험한다. 그것은 곧 그 눈빛의 대상이 된다는 것과 같다. 사물의 시선을 볼 때 주체는 객체로 전도된다. 사물의 눈빛을 보고 거기서 어떤 기대와 요구를 본다는 것은 미처 가릴 수 없는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봄은 보임과 같다.
이것은 “사람의 무늬를 관찰해서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어나간다”는 공자의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교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계몽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몽하되 감화시켜 계몽하는 것이고, 감화시키기 위해서 보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찰 자체를 주제로 하는 관(觀) 괘의 몇몇 계사에서 분명해진다. 이 괘에 붙은 단사에 따르면, 본다는 것은 “아래에 있는 사람이 보고 변하기〔下觀而化〕” 위해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열기 위해서 자신을 무차별한 시선의 초점에 내맡긴다는 것이고, 마침내 어떤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관 괘(000011)의 마지막 이어진 선(맨 오른쪽 선)의 효사는 이를 “관기생(觀基生)”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는 다른 효사에 나오는 “관아생(觀我生)”과 대립하는 말인데, 왕필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관아생’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보는 것이요,‘관기생’은 백성에게 보임을 당하는 것이다. (…) 그는 천하에 보여지는 자이다.”‘관기생’이란 말은 세상 전체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대상화하여 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4. 백비(白賁)의 글쓰기
오늘날 시인은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문학적 시선의 고유한 차원은 어디로 향하는가? 문학적 언어의 본질적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언어 일반에 생기와 활력을 선물하는 요소는 어디에 있는가?
시적인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시, 모사,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내면성과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주관적 유희에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또 과학이나 철학과 경쟁하기 위하여 세계 전체의 내용을 복잡한 은유적 연락망에 담아내는 데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형식적 실험이 시에서 일차적인 것일까? 일차적인 것, 그것은 어쩌면 『주역』의 계사가 지녔던 것과도 같은 예언과 치유의 능력에 도달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시(詩)의 시(視), 시인의 눈은 『주역』의 시선처럼 사물의 눈과 교감하여 타자의 눈을 여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차원이 사라질 때 시가 거느릴 수 있는 다른 여러 차원들은 어떤 탐닉이나 무의미에 빠질 것이다.
『주역』이 말하는 인문의 글쓰기, 인-문학적 글쓰기는 응시의 교차를 기록하는 글쓰기이다. 그것은 사물의 응시에 자신을 내맡기는 글쓰기이며, 타인의 시선을 열기 위해서 자신의 시선을 사물화하는 글쓰기이다. 그것은 응시하지 않는 응시, 거울이 되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 글쓰기가 어떤 예언과 치유와 보살핌의 힘을 갖는다면, 그 힘은 자신이 스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보게 하고 사물과 타인이 보게 하며 타인과 타인이 서로 보게 하는 데서 온다. 『주역』이 어떤 분수의 학이라면, 그 분수란 이런 상호-객체적이고 상호-타자적인 시각을 가져오는 능력의 크기이다. 간-사물적인 시선, 간-타인적인 지각 그리고 거기서 유발되는 상호 습합(習合), 이것이 문학이 연출하는 최고의 장면인지 모른다.
눈, 시선은 『주역』에서 불 괘(101)로 표시된다. 이 불 괘 위에 산 괘(001)가 놓이면 비 괘(101001)가 되지만, 다시 불 괘가 중복되면 밝은 시선의 극치를 상징하는 이(離) 괘(101101)가 된다. 그렇다면 밝은 시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상호-객체적인 시선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고, 이 점을 말하는 것이 「설괘전(說卦傳)」의 짤막한 논평이다. “이는 밝은 것이니 만물이 모두 서로를 바라본다〔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주역』이 말하는 궁극의 시선은 모든 사물이 눈을 열어 서로 바라보는 경지에 있다. 모든 사물이 서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바라보이고, 서로 빛을 발하면서 다시 깨뜨리는 경지. 이 괘가 상징하는 밝음은 무한히 반복되고 확장되는 그런 응시의 교차와 교대, 깜박임들 속에서 발원한다. 아름다움의 괘인 비 괘에는 이미 이런‘만물개상견(萬物皆相見)’이 빚어내는 광명이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 괘에서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서로 바라보고 있는가?
①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비 괘(101001)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2효와 6효이다. 두번째 끊어진 선은 내용을 분화, 조직하는 형식적 유희의 주인공인데, 여기에 엮인 효사는 이 선을 턱수염에 비유한다. “수염을 꾸민다.” 공자는 덧붙인다. “수염을 꾸밈은 위와 더불어 흥한다는 것이다〔賁基須 與上興也〕.”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수염과 턱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이 구절은 보통 형식이나 장식의 이차적 지위를 언급하는 말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빈빈(彬彬)의 미학은 형식이나 외양이 내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내용도 형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형식과 내용은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 앞의 계사들은 형식의 부차적 지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내용에 관계하는 올바른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즉 수염이 턱의 운동에 따라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형식적 유희는 내용의 운동과 리듬에 맞추어 펼쳐져야 한다. 형식은 내용에 외재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질료적 변이에 따라 전개되어 마치 질료 안에서부터 내생적으로 발생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해야 한다. 형식적 유희가 나눔의 운동이라면, 그것은 질료의 내적 필연성을 만족시키는 나눔이어야 한다.
두번째 부드러운 선이 수염이라면, 그것이 붙어 있는 턱은 그 위의 세번째 강한 선이다. 비 괘(101001)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3효는 상하(좌우)의 부드러운 선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그 둘러싸인 모습은 물 괘(010)를 이룬다. 『주역』에서 물은 위험의 상징이다. 이 3효는 윤택한 수식이 지나쳐 질퍽한 사치(탐미주의)로 빠질 위험이 기다리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꾸미는 것이 푹 젖을 정도니 오래도록 바름을 지키면 길하다〔賁如 濡如 永貞吉〕.” 형식적 유희가 왕성하면 내용을 적실 정도가 된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 번잡해지면 내용을 훼손하고 왜곡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바른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좋다는 것이다. 이 선의 효사는 과도한 형식적 유희에 탐닉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② 2효가 형식미의 대변자라면, 6효는 내용미의 대변자이다. 여섯번째의 강한 선은 형식적 기교가 더이상 무의미해지는 지점에서 내용이 외재적인 무늬를 지워가는 운동을 표시한다. 효사에서 이 소거의 운동은 희게 되기로 묘사된다. “희게 꾸미면 허물이 없다〔白賁 无咎〕.” 여기서 희다는 것은 색이 없다는 것, 무색(無色)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색과 무늬 혹은 형식이 최소화된 단순함의 상태를 뜻한다. 사물이 어떠한 외적 형식에 의해서도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최후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백비(白賁)의 상태이다. 이 선은 위 괘인 산 괘(001)의 꼭대기(맨 오른쪽)에 위치하는데, 비 괘 전체에서 그것은 어떠한 형식적 유희와 상상으로도 포착되기를 거부하는 높이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효사에 공자는 “위에서 뜻을 얻는다〔上得志也〕”는 말을 덧붙였다. 형식적 유희가 번잡하다 못해 스스로 지쳐 떨어져나갈 때가 있다. 그런 한계지점에서야 비로소 순수한 내용이 지닌 신비한 높이가 그 모습을 나타낸다. 물론 이것은 내용이 외적인 형식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빈빈의 미학에서 형식과 내용은 언제나 상호 의존적이다. 여기서 내용의 높이나 깊이는 형식적 유희가 소멸하는 운동 속에서만 현상한다. 단순함은 극복된 복잡성이다. 소박성은 탐닉에 대한 후회이고 사치로부터의 복귀이다.
이런 후회와 복귀는 그 아래의 5효에 의해 상징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선은 아래쪽의 탐닉과 사치의 장소에서 벗어나 위쪽의 백비의 선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위해 점차 불필요한 외양과 허식을 버리는 위치에 있다.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동산의 공원에 치장함이니 비단 묶음이 작으면 인색하나 마침내 길하리라〔賁于丘園 束帛梛梛 吝終吉〕.” 동산의 공원은 임금이나 제후 정도가 되어야 갖출 수 있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사치와 탐닉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제 공원의 주인은 과거의 호사를 버리고 검소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백비의 단순성이 그 신비한 의미작용 속에 현상하기 위해서는 그런 작별과 복귀가 전제되어야 한다. 복잡화의 정점을 통과했던 경험과 매개되지 않은 단순함은 추상적인 단순함이다. 구체적인 단순함은 형식적 기교가 극단화되는 지점에서 되찾아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단순한 것의 의미는 허식의 환멸 속에서 비로소 분명히 경험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지리철학의 일부로 선(線)의 존재론을 펼친 바 있다.4 이 선의 존재론에는 세 종류의 선이 등장한다. 딱딱한 선, 부드러운 선 그리고 탈주선이 그것이다. 딱딱한 선(현실성의 선)은 관습과 제도에 의해 코드화된 선을, 부드러운 선(잠재성의 선)은 자유로운 변용과 전치의 선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탈주선은 앞의 두 종류의 선에 의해 조직된 영토에서 벗어나 마침내 탈영토화의 운동 속에 놓인 선이다. 그것은 어떤 미지의 잠재력, 미지의 대지를 창조하는 선이다. 들뢰즈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이 세 종류의 선으로 구성된 어떤 사구체(絲球體)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 이 첨단의 존재론은 『주역』을 다시 읽을 과제를 던지고 있다. 『주역』 역시 모든 현상을 강한 선과 부드러운 선의 복합체로 상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역』에서 탈주선을 찾을 수 없는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주역』에서 탈주선은 다른 두 종류의 선과 구별되는 별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강한 선이나 부드러운 선이 다른 선들과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자격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위치에 놓임에 따라 『주역』의 선들은 들뢰즈적 의미의 강한 선이 될 수도, 부드러운 선이 될 수도 있으며, 드디어 탈주선이 될 수도 있다. 비 괘의 다섯번째 효는 그 자체로는 부드러운 선(음효)인데, 위상적인 기능에서도 들뢰즈적 의미의 부드러운 선에 해당한다. 이 선은 기존의 경직된 관행이나 통념에서 벗어나 나름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아직 스스로 새로운 대지를 창조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아직 탈주선이라 불릴 수 없다. 비 괘에서 탈주선은 다섯번째 선이 아니라 네번째 선에서 시작된다.
5. 분열의 글쓰기
비 괘(101001)에서 2효와 3효가 호응하고 6효와 5효가 상응하듯, 이제 남은 1효와 4효가 서로 짝을 이룬다. 효사를 보면 이 두 선은 복잡한 우여곡절 끝에 혼인관계를 맺는 연인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처음의 이어진 선은 허례허식을 모르는 젊은 사내이다. “발을 꾸미니 수레를 버리고 걷는다〔賁其趾 舍車而徒〕.” 왜 수레를 버리는가? “의리가 올라타지 않기 때문이다〔義弗乘也〕.” 발을 꾸민다는 것은 최소한의 꾸밈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 사내는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나서고 있고, 그 긴 여행을 위해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다. 수레를 이용할 수 있지만 거절한다. 여기서 수레는 부유한 가문에서 제공하는 편의일 수도, 기존의 제도화된 관행이나 판에 박힌 수법일 수도 있다. 이 사내는 재물도 권력도 신분도 없는 청년이다. 있는 것이라곤 넘쳐나는 패기와 자발성밖에 없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는 아무리 큰 이익이라 해도 흔쾌히 거부하는 수컷이다.
이 첫 효가 대변하는 아름다움은 자연미이다. 이 자연미는 마지막 6효의 백비의 미 혹은 소박미와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자면 백비의 아름다움은 어떤 극도의 형식적 유희와 번잡한 사치에 탐닉한 다음 그것을 소거한 뒤에 오는 단순미이다. 여기서 단순한 것은 허례허식으로 가득 찼던 과거에 대한 후회 속에서 무한히 이상화, 이념화되고 있다. 반면 첫 효가 대변하는 자연미는 아직 질퍽한 심미적 세계의 마술적 구속력을 경험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직접적 자연미에 해당한다.
원시적인 자연미로 넘쳐나는 첫 효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회의와 분열의 상황에 빠져 있는 네번째의 끊어진 선이다. “꾸몄다가 소박하게 했다 하며, 흰 말이 날개를 단 듯 달려오니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려는 것이다〔賁如跎如 白馬翰如 匪寇婚媾〕.” 이 여인은 상류계급에 속하여 고급한 교양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환경의 관례와 분위기에 따라 아름답게 꾸며야 할지 아니면 그 모든 허식과 진부한 형식을 버려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이 여인은 “의심하는 위치에 처해 있다〔當位疑也〕.” 그런데 갑자기 흰 말이 저 멀리 앞에서 여러가지 장애와 위험을 넘어 내달려온다. 그 달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빠른지 도둑인지 구혼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은 습관적인 규모와 리듬을 완전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런 꾸밈 없이 돌진해오는 말은 어떤 파격적인 형식의 돌연한 나타남을 상징한다. 이런 파격성 때문에 이 흰 말을 탄 자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약탈자인지 구혼자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다.
원시적인 것, 그것은 처음에 추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세련된 문화적 교양과 전통에 일탈과 위반을 가져오는 충격으로 경험된다. 도덕적으로 위험하고 혼돈을 초래하는 침입자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그런 약탈과 침입처럼 일어난다.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들의 적대자인 니체도 처음에는 모두 무례한 약탈자처럼 취급되었다. 여기서 횔덜린(F. Hölderlin), 아르또(A. Artaud) 같은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위대한 작가들은 대부분 거지 같은 깡패처럼 등장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그런 깡패들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새로운 가계의 원조가 되었다. 비 괘의 네번째 유약한 선은 새롭게 돌출한 위반의 미학과 마주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상황의 출발점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환경의 질서에 안주하지 못하고 어떤 의심과 일탈의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결국 진부해진 과거와 결별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긍정하여 미래의 출발점에 도달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된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의 문법에 균열을 가져오면서 미지의 잠재력을 창조하는 어떤 탈주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 괘의 4효가 연출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탈주선이 궤적을 그리며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 조건은 주인공이 빠져든 회의와 분열에 있다. 주인공이 서 있는 이 회의와 분열의 위치는 문학 자체의 위치가 아닐까? 그것은 적어도 대과 시대의 문학이 서 있는 혹은 설 수밖에 없는 위치가 아닐까?
우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이 4효의 상황과 유사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18세기말 혁명 직전의 프랑스사회를 서술하는 대목이다. 혁명 전야의 프랑스는 어떤 절정의 시기를 대변하는 장소이다. 그것은 야만적이었던 게르만족이 숲에서 나와 유럽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그리스-로마인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을 내면화해가는 고통스런 성숙과정이 완성되는 국면이다. 중세 귀족이 유럽의 정치경제학적 체제를 구축해가는 동시에 인문적 교양과 문화적 감수성을 터득해가는 기나긴 도야의 역사에서 마지막에 찬란하게 빛나는 절정기. 헤겔은 이 절정기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언어의 차원에서 분석했고, 당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를 “분열의 언어”(Sprache der Zerrissenheit)라 불렀다.5 문학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헤겔적 의미의 분열의 언어가 아닐까?
헤겔적 의미의 분열의 언어, 그것은 문화적 성숙과 세련된 교양의 극치를 구현하는 언어다. 성장을 꿈꾸는 인문적 지혜는 마지막에 이르러 최대의 모순과 분열 속에서만 자신의 온전한 힘을 자각하고, 공존 불가능한 규정, 어조, 관점, 리듬 들을 자신의 언어 속에 함께 엮어나가면서 자신의 통일성을 의식한다. 그것은 무한한 차이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증명하고 무한한 불일치 속에서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입증하는 지혜다. 그런 불일치 속의 일치를 통해서만 자신의 참된 본성을 자각하는 정신, 그런 고도의 정신이 구사하는 광적인 언어가 분열의 언어다.
분열의 언어는 현실을 자유로운 변용과 재구성의 가능성 안에서 재현한다. 현실을 무한한 패러디, 무한한 전치와 압축의 가능성 안에서 장면화하는 언어. 그것이 최고 단계의 성숙에 도달한 정신의 언어이다. 정신의 관념적 위력을 표현하는 이런 언어 속에서 사물이 원래 가졌던 개념적 규정은 구속력을 잃어버린다. 모든 개념적 규정은 경량화되는 나머지, 언제나 반대의 규정으로 전도될 가능성 안에 놓여 있다. 성장의 역사를 마친 정신은 원근법과 초점, 관점과 시각을 제한없이 변경할 수 있을 때만 자신의 시선을 정상으로 의식한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사물을 아무런 제한 없이 자의적인 규정 속에 가두거나 다시 거기서 해방하는 정신적 유희의 언어이다. 통념상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저속한 것을 숭고한 것으로, 고귀한 것을 가소로운 것으로 전도시키는 “전능의 힘”을 얻을 때의 언어. 죽음과 생명, 최고음과 최저음, 극단의 쾌락과 고뇌를 동시에 소리내어 마치 수십가지의 아리아를 한번에 연주하는 듯한 언어. 사물을 자유롭게 희롱하는 이 마술적 기교의 언어는 왜 분열의 언어라 불리는가? 그것은 이 언어 속에서 사물이 어떤 인식론적 무중력상태에 빠지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규정과 통념을 마음대로 뒤바꾸는 전능의 힘 속에서 결국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마저 분열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언어는 결국 이런 분열의 언어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정신적 과잉의 위치를 통과하면서 문학의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문학적 언어의 본질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있다면, 이 극적인 장면화의 주술적 마력은 상식적인 규정을 자유롭게 해체, 전도해 복수의 규정을 낳는 데 있을 것이다. 문학의 고유한 공간, 그 무한한 전도와 분열의 공간은 자연적인 언어 사용의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문학은 분열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공간, 자신의 고유한 바깥을 창조한다. 문학은 이런 광적인 단계를 통과할 때만 다른 종류의 언어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지평에 도달한다.
이런 문학의 공간은 그것을 냉소할 바깥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극복 불가능하다. 분열의 언어로서 펼쳐지는 한에서 문학의 언어는 정직과 냉소, 순수와 오욕이 식별되지 않는 어조를 띤다. 여기서 냉소는 사물을 어떤 고정된 가상의 이미지 속에 무한히 대상화하고 그 저편으로 달아나는 초월의 제스처이다. 어떤 역사적 기억이나 상처도, 어떠한 호명도 그저 그 달아남의 기술을 막을 수 없다. 반면 정직은 동일한 냉소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대상화하고 장면화하는 제스처이다. 현실에 침을 뱉을 때 또한 자기 자신에게 침을 뱉는 언어. 그런 분열의 위치를 통과하는 언어는 주어와 술어(목적어)가 언제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는 무한판단의 형식을 띤다. 이런 언어는 자신을 희롱할 또다른 차원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율적이다. 문학의 언어에 코웃음치고 문학의 언어를 처단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언어뿐이다. 김수영(金洙暎)은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라고 했고, 김지하(金芝河)는 이것을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로 옮겼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성숙을 꿈꾸는 한에서 문학의 언어는 풍자로서 완성된다. 풍자로서 완성되는 문학의 언어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문학밖에 없다. 문학이 의미있게 죽는 방식은 자살밖에 없다.
6. 풀돗자리 텍스트를 위하여
알랭 바디우(A. Badiou)는 첼란(P. Celan)의 시에서 서양문학이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 파괴하는 시기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를 보았다. 이런 진단은 하이데거(M. Heidegger) 이후 유럽철학이 취해온 제스처가 불가능해졌음을 말하기 위한 포석이다.6 바디우에 따르면, 영미 분석철학이 진리 모델을 과학에 두었고 맑스주의가 참된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동했듯이, 현대 유럽철학은 진리의 사건을 오로지 시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시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미래의 사유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과 이정표를 찾으려 했지만, 시 자체가 자신의 특권을 해체하고 있는 마당에 더이상 그런 계획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언어의 심각한 변형이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국내 문학작품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자신의 언어와 지위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가? 그런 파괴와 변형은 무슨 귀결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런 버거운 물음 앞에서 자신있게 예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에서든 헤겔의 현상학에서든 분열은 새로운 시작을 배태하고 있다. 헤겔의 현상학에서 분열의 시대는 루쏘(J.-J. Rousseau)와 더불어 끝난다. 극도의 인문적 기교는 원시적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주역』에서 비 괘의 4효와 5효에서 나타나는 전회의 운동과 일치한다. 이 두 효는 과도한 심미주의와 극단적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연미로 복귀하는 위치에 있다. 인문적 교양이 최고의 세련성을 획득하는 시대에 언어는 자연적 규정성을 무한히 전도시키는 분열의 언어로, 분열의 언어는 다시 번잡해진 형식적 기교를 스스로 소거하는 복귀의 언어로 탈바꿈한다.
특히 비 괘의 4효는 이것을 심미주의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회의와 파격적으로 나타나는 원시적 자연 간의 결혼으로 장면화하고 있다. 이것은 대과 괘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혼돈스런 시대에 미래가 준비되는 사건은 서로 이질적인 것 사이의 만남에서 일어난다. 이를 말하는 것이 대과 괘(011110) 2효의 효사이다. 이 효사는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결혼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른 버드나무에 싹이 나고 늙은이가 처를 얻는다.” 공자는 여기에 덧붙여 “늙은 남편과 젊은 아내의 결혼은 지나친 불균형 속에 일어나는 상호 만남〔過以相與〕”이라 했다. 대과 시대의 탈주선은 보통의 시대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결합이 일어나면서 창출된다.
과도한 차이를 건너뛰는 이런 결합을 혼종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주역』에 충실하자면 그 혼종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대과 괘의 2효가 늙은 남자라면, 이 남자가 장가드는 젊은 여자는 1효이다. 효사는 이 끊어진 선을 제사 때 까는 풀돗자리에 비유한다. 대과 괘(011110)는 맨 아래와 위에 유약한 선이 있고, 그 사이에 이 두 선이 미처 감당하지 못할 중량을 표시하는 네개의 강한 선이 있다. 첫번째 끊어진 선은 호화로운 제물을 밑에서 떠받치는 풀돗자리이다. 여기서 풀돗자리는 미미한 것, 음지에 있는 것,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중대한 사안이 풀려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물건을 의미한다. 대과 시대의 탈주선은 그런 음지의 미미한 사물 속에서 잉태된다.
이것은 비 괘(101001)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탈주 역량을 간직한 것은 4효와 결혼하는 1효이다. 그것은 재물도 권력도 신분도 없는, 있는 것은 다만 순수한 젊음과 패기뿐인 남자이다. 인문적 번잡성에 질려 있는 4효의 여자에게 미래를 수태시키는 것은 이 남자의 원시성이다. 대과 시대의 글쓰기는 마술적 기교의 끝까지 도달했던 언어가 아무런 장식을 모르는 단도직입적인 언어와 함께 엮일 때에야 비로소 막을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렇게 엮이는 텍스트는 어떤 눈부신 광명 속에서, 어떤 중요한 기억이나 상처와 더불어, 역사적 호명 속에서만 짜여진다기보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음지에서, 비루하고 사소한 것들과 더불어, 전혀 무의미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을 통하여 무늬를 만들어갈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주역』은 우리 시대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미미해 보이지만 호사스런 역사의 의미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풀돗자리 같은 텍스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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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은 모든 사태를 부드러운 선과 강한 선, 끊어진 선과 이어진 선, 음효(陰爻)와 양효(陽爻)라는 두가지 선의 복합체로 표시한다. 철저한 선의 존재론. 우리는 그것을 계사(繼絲/繫辭)존재론이라 명명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표기의 편리성을 위해 끊어진 선을 0으로, 이어진 선을 1로 표시하고 원래 괘의 맨 아래선을 맨 왼쪽에 표기한다. 이는 김인환의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김인환 옮김 『주역』(나남출판 1997) 참조. 이 글에서 대본으로 삼은 책은 임채우 옮김 『주역 왕필주』(길 2000)이다.↩
-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석윤 옮김 『판단력 비판』, 박영사 1992, 서론 4절 참조.↩
- Richard Wilhelm, I Ching. Das Buch der Wandlungen, Düsseldorf/Köln: E. Diederichs 1923, 제1/2권, 67면.↩
- 들뢰즈·가따리 지음, 김재인 옮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8장 참조.↩
-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1988, 634~47면 참조. 여기서 헤겔의 언어분석을 인도하는 모델은 디드로(D. Diderot)의 『라모의 조카』이다.↩
-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철학을 위한 선언』, 백의 1995, 4~7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