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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역할과 가능성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세교연구소 소장.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lee87@skhu.ac.kr
- 이 글은 지난 9월 19일 열린 세교연구소 2008년 공개 심포지엄‘기울어진 분단체제, 대안을 만들 때다-남북연합과 한반도 선진사회 건설’의 발표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 머리글
최근 통일운동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1 백낙청(白樂晴)은 2006년 5월‘한반도식 통일과정과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한반도식 통일은 곧 시민참여형 통일이라고 규정하고 “점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의 참여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뿐 아니라,‘과정’과‘종결점’의 구분 자체가 모호한 상태에서 그 과정의 실상에 따라, 즉 사람들이 얼마나 참여해서 어떻게 해나가는가에 따라 통일이라는 목표의 구체적 내용마저 바뀔 수 있는 개방적 통일과정”이라고 시민참여형 통일의 의미를 설명했다.2 한반도식 통일과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그의 문제의식은 최근 시민사회 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 7월 22일 한겨레평화연구소 창립 기념 쎄미나에서 박순성(朴淳成)이‘남북관계의 변화와 시민사회’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고, 9월 4일에는‘남북관계에서의 시민사회 역할과 진로모색’이라는 주제의 학술토론회가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쎈터의 공동 주최로 열렸다.
시민사회와 통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당위론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즉 한반도에서의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이 단순히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합치는 감성적이고 회고적인 목표가 아니라 한반도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뒤늦은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당위론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고,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6·15정상회담 이후 NGO들이 남북협력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정부, 기업에 이어 또다른 통일사업의 주체로 등장해왔다. 통일부에 등록된 통일 관련 법인 수가 증가한 것이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통일 관련 법인은 1990년까지 16개에 불과했으나, 1991~95년에는 22개, 1996~2000년에는 44개가 추가로 등록되는 등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05년에는 83개, 2006~07년 2년 동안 37개가 새로 등록되는 등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 더욱 빠르게 늘어왔다. 다른 형식으로 통일 관련 사업에 참여하는 단체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3 따라서 통일과정에서의 시민사회의 역할이 최근 들어서야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 오히려 의외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발전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특히 시민운동 내에서 지난 10월 1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시민평화포럼’이 창립되는 등 통일의제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상층 중심의 활동이고 시민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통일의제와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적극성도 그리 높지는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분위기에는 다음의 두가지 견해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남북관계의 미래와 관련하여 통일보다는 평화를 더욱 중요시하고 평화운동이 시민사회의 지향과 더 부합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사업에서 정부에 비해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두가지 견해들이 지닌 문제점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2. 평화 vs. 통일?
평화통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요구했을 뿐 아니라 남북 당국도 합의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원칙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통일보다는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최장집(崔章集)의 다음 주장이 대표적이다.
남북한간의 이상적인 관계는 얼마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장기간에 걸쳐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북한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남한과 같이 자족적인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단일민족→분단→통일된 국가로의 복원이라는 명제는 자동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1민족 2국가’의 다음 단계는 완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평화는 통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이다.4
이러한 판단은 통일은 근본적으로 두 정치적 단위를 하나의 체제와 가치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정의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이다. 통일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당연히 적극적으로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일방의 존재를 위협하게 되고 결국 평화를 위협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며, 평화를 통일로부터 구원해낼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백낙청이 지적한 것처럼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이같이 경직된 통일에 대한 정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과정이다.5 즉 한반도식 통일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달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국제정세의 변화로 갑작스럽게 오는 것도 아니다. 점진적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여, 남과 북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켜가며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그 첫단계가 낮은 수준의 남북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연 이러한 과정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에서는 이미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한 과도기적 특수관계를 발전시켜가는, 그리고 6·15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동독의 갑작스러운 붕괴나 베트남 같은 전쟁이 출현할 가능성보다는 새로운 한반도식 통일의 가능성을 더 높이 쳐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통일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통일은 평화를 위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평화공존과 경제협력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단계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한 단계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뿐 아니라 평화와 통일의 분리는 평화운동이나 통일운동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평화라는 가치가 적극적으로 재해석되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 의미가 있다.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후 평화통일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명제였지만, 분단체제가 강하게 유지되던 시기에는 남북 누구도 평화통일이라는 원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초보적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한내 민간통일운동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했지만, 당시 시대적 조건에서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성격이 강했지 평화통일을 위한 현실적 실현방도가 갖춰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평화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평화를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진보적 가치와 결합되는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정세변화를 거치면서 평화는 점차 현실적인 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냉전체제의 와해는 한반도에서도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했다. 당국자 차원의 대응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이어졌다. 이처럼 냉전 해체로 분단체제가 동요하는 것에 대응하여 남과 북이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기 시작하자, 평화체제 구축이 통일로 나아가는 데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제기됐다. 그리고 1994년 이후 북핵문제가 심화되면서 한반도문제의 해결이 평화체제 수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남한 내에서도 다양한 평화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6 그런데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한 평화운동은 과거 통일운동이 가졌던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평화의 과제와 통일의 과제를 분리시키는 또다른 편향을 보였다. 여기에는 탈민족주의적, 탈국가주의적 경향과 강하게 연관된 서구 평화이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객관적 요인도 존재했다. 북한이 대외정책에서 핵카드를 사용하고 대내적으로 선군(先軍)체제를 주장하는 등 체제유지를 위해 군사적 수단에 대한 의존도를 높임에 따라 평화운동세력은 북한을 상대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평화운동은 남한 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는데, 이는 일견 현실적인 대응인 듯했지만 실제로는 평화운동의 동력 자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한내 의제에 초점을 맞춘 평화운동은 한반도적 차원에서 보면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한 내에서 평화라는 의제가 부각된 것은 단순히 냉전체제 해체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니고 한반도에서의 정세변화, 특히 남북관계의 변화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단체제가 공공연하게 유지되던 시기에 남한 내에서‘평화’라는 의제는 곧 북한위협론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직면하곤 했다. 민간의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탄압받았던 것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북한의 위협이라는 논리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남한만의 평화운동은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평화운동의 공간 확장과 통일담론의 확장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후 분단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특히 6·15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면서, 정치적 구호로서의 통일운동이 아니라 현실적 과제로서의 통일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평화통일이라는 원칙을 재해석하고 평화와 통일의 선순환을 추구하는 새로운 통일운동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전환기에 평화운동적 감수성은 통일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도록 촉진하는 동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까지 기존의 통일운동 영역에서 이러한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일과 평화가 별개의 과제이자 별개의 운동세력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은 평화운동의 발전을 제약할 뿐 아니라, 복합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다양한 경로로 발전해갈 수 있는 통일을 어떤 선험적인 틀로 재단하여 통일과 관련한 다양한 상상력이 펼쳐질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했다. 즉 평화담론과 통일담론의 분리는 창조적 분화라기보다 평화담론은 이상주의적 평화주의로, 통일담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로 취급받는 양패구상(兩敗俱傷)의 구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7 이러한 결과는 어느 입장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따라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민의 역할을 높일 수 있는 어떤‘현실적’인 방법에 접근하려면‘평화’와‘통일’의 결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겠다.
3.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가능한가
평화운동이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지향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데 겪는 어려움은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평화와 통일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현실인데,8 실제로는 통일을 이루어가는 사업에서 시민들 혹은 시민사회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주로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발전해온 평화운동 측에서 통일을 자신의 과제로 삼기 어려웠고, 평화와 통일이라는 과제의 분리를 관성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통일운동의 역설’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과거 분단체제가 공고히 유지되던 시기의 통일운동은 민간이 주도했다. 그런데 막상 6·15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남북 당국자들 사이에 여러 대화채널이 생기고 정부 주도하에 남북협력사업이 진행되면서 남북협력과 통일사업의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하자, 민간이나 시민사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현단계 통일사업에서 정부보다 시민사회의 역할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정부는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서 민간이나 시민사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또한 북핵위기에서 드러나듯이 한반도문제는 매우 복잡한 정치·군사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에 민간이나 시민사회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마지막으로 북한에 남한 시민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세력이 부재한 점도 한몫했다.
여기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통일운동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고 있다는 판단이 과연 적절한가의 문제이다. 과거 통일이 민중운동진영의 주요 강령 중 하나였다고 해서 당시의 통일운동이 현재보다 발전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의 통일운동은 문익환(文益煥) 목사, 임수경(林秀卿)씨의 방북 같은 개별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남한 내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반통일세력” 사이의 대결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남한 내의 반통일세력을 무너뜨리고 나면 남북의 통일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이러한 통일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러한 접근이 반독재투쟁을 넘어서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통일운동은 독재정부를 민주정부로 교체하는 것을 촉진함으로써 분단체제의 일각을 허물고 분단체제의 극복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지, 본격적인 분단체제 극복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재 통일운동에서 시민사회가 담당하는 역할은 증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최근 통일사업에 참여하는 민간조직이 빠르게 증가해왔다. 물론 그 사업이 정치적 제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북지원단체만 해도 식량, 의료, 축산, 기술협력, 삼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의 활동이다. 비록 북에서는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생각하겠지만 공동사업 진행과정에서 정치적 금기가 깨지는 상황들이 출현했고,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에 작지만 의미있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도 했다.
정부간 협력의 제도화와 협력규모의 증가, 경우에 따라서는 시민사회가 접근하기 어려운 군사적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남북관계의 변화 등에 의해 시민사회의 역할이 가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6·15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발전해왔다. 즉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부간 협력과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서로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향후 정부간 관계가 더욱 진전된다면 시민사회의 역할이 더욱 증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미 낡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진행중이며 남북관계가 역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경쟁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시기에 따라서 누가 앞서고 주도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시민사회가 정세와 주체적 조건에 맞는 통일운동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가 여부이며, 앞으로는 이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고 실천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4. 시민참여형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자
이제 본격적으로 씨름해야 할 문제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이다. 현재까지 남북협력사업에 대한 NGO들의 참여가 꾸준히 증가해왔지만, 이러한 추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북지원사업의 경우 긴급한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고 남북의 신뢰를 증진시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통일운동이 지원사업 같은 범주에 제한되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지속적 발전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한반도에서의 통일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통일에 대한 좋은 그림을 그려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가지 측면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발전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이다.
첫째, 통일은 지난한 과정이 될 테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통일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남북관계의 진전 없이는 평화라는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소극적 의미에서도 통일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다. 분단체제가 기울어져가고 이를 수리하여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이러한 소극적 의미의 필요성도 과거에 비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통일이 현실의 문제가 된 지금은, 통일과정이 한반도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통일지상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가져다줄 기회에 더욱 민감해져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미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통일의 모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한반도 내에서는 남북 당사자의 합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6자회담 프로쎄스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진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잖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냉전체제 붕괴 이후 여러 행위자들의 여러 시도가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결과라는 점에서, 몇몇 주관적 의지에 의해 되돌릴 수 있는 추세는 아니다.9
따라서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흡수통일하는 식이 아니라 남과 북이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서 통일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며,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역량도 만들어지고 있다.10 앞으로 이러한 변화 가능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질수록 시민들의 통일사업 참여의지도 높아질 것이다.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번에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후보가 당선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냉전체제 해체 이후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1994년, 남북정상회담과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M. Albright)의 방북이 이뤄진 2000년에 이어 세번째의 전략적 전환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앞선 두차례의 전환점은 한반도 정세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내외의 여러 장애요인으로 인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영변 핵시설 불능화 같은 실질적 성과가 만들어지는 등 북미 양자가 그 어느 때보다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관련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면 북미관계의 변화가 한반도문제 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공간을 넓혀줄 것인바, 시민사회 진영은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와 준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특히 현정부가 이러한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계속 소극적으로 임한다면 시민사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둘째,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통일에 대한 합의가 광범위해질수록 통일운동의 공간이 넓어질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접근은 시민참여의 기회를 확장시키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과거에는 통일과 무관하게 보였던 것이 통일과 연관되고 그럼으로써 활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예컨대 생협운동처럼 현재 자본주의적 질서가 가져온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어떻게 한반도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나 이와 연관된 실천이 당장 가능할 것이다.11 정치적 차원에서는 남북연합으로 형성될 한반도 차원의 분권적 질서와 남한 내에서의 분권적 질서를 연계시키는 설계라든지 남북의 지역간 협력(지리적 인접성을 이용한 속초와 금강산 사이의 협력이나 파주와 개성 사이의 협력, 그밖에 문화·경제적 매개를 통한 지역간 협력)을 추진하는 방안도 있다. 문화적 차원에서는 이보다 더 다양한 사업이 가능할 것이다.12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란 모두가 북으로 가자거나 북에 대한 지원사업에 참여하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 어떤 새로운 실천으로 투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현재 삶의 현장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통일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가 그리고 통일이라는 과정과 결합될 경우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나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강조하지만 통일을 경직된 이론적 틀에 가두어 죽은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되며 그것을 생기있는 창조의 과정으로 만들어가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이 기반이 되어 시민사회가 통일운동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발언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남측 정부는 물론이고 북측 정부도 이러한 움직임을 외면하고 통일을 주장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시민사회는 시민참여형 통일이 바람직한 통일이라는 규범적 요구만으로 제몫을 할 수 없을 것이며, 통일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과 실력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고, 그 가능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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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특정한 규범적 지향을 강조하기보다 국가, 기업과 구분되는 사회조직을 주체로 하는 사회영역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이 글에서‘시민’이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민중’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민중 개념이 1980년대 이후 계급연합적 개념으로 많이 사용되면서 그 외연이 제한된 측면이 있고, 통일과정에는 이러한 의미의 민중보다 폭넓은 주체들이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시민을 주체로 지칭했다.↩
-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과정과 시민사회의 역할-5월에서 시민참여형 통일로」, 전남대 5·18연구소 주최 5·18민중항쟁 제26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민주주의, 평화, 통일과 시민사회’(전남대 용봉홀, 2006.5.23~24), http://www.changbi.com/webzine/content.asp?pID=404에서 재인용. 백낙청의 시민참여형 통일론에 대해서는, 백낙청 「한반도 시민참여형 통일과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한일국제심포지엄‘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국과 일본의 역할’(2006.10.26) 참조.↩
- NGO들의 통일사업 참여추세에 대해서는, 손기웅·김영윤·김수암 『한반도 통일 대비 국내 NGOs의 역할과 발전방향』, 통일연구원 2007.↩
- 최장집 「‘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 참여사회연구소 주최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2005.10.21,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 백낙청의‘한반도식 통일’에 대해서는,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3장 참조.↩
- 구갑우(具甲祐)는 한반도 평화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탈냉전체제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구갑우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후마니타스 2007, 195~96면.↩
- 예컨대 평화운동에서 남한 차원의 선(先)군축 같은 방식을 통해 평화규범 확산을 주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분단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비현실적인 발상으로 간주되기 쉽다. 또한 평화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통일은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개인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러한 문제점은 평화와 통일이 하나의 과정으로 녹아들어갈 때만 극복될 수 있다.↩
- 사실 평화운동을 강조하는 측에서도 평화와 통일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세력의 입장에 가까웠던 진보정치연구소가 발간한 자료에서도 “평화체제는 그 자체로선 통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사실상의 통일단계로의 진입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양자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했다. 장택상 「한반도 평화체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미래공방』 2007년 3-4월호(통권 2호) 67면. 물론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수준에서 이루어질‘과정으로서의 통일’자체를 더욱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이를 단순히 평화체제와 등치시킨 것은 아쉽다.↩
- 지난 몇달 동안 북한 최고지도자의 건강문제와 북한의 급변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남한정부의 경솔한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이 역설적으로는 한반도식 통일에 대한 합의를 만드는 것이 매우 현실적이며 시급한 과제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 통일이 어느 일방의 체제를 택하는 것이 아닌 성찰적 과정이며 남북에서의 변화와 결합된‘과정’이라는 점은 최근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박순성, 앞의 글; 이승환 「6월항쟁 20년, 새로운 통일담론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2007년 가을호 등 참조.↩
- 이일영 「촛불의 경제학: 한반도경제의 미시적 기초」,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 여기서도 남북연합과 이러한 교류사업의 관련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 혹은 통일과정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다면 북한은 이러한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남북연합 같은 한반도 차원의 설계가 필요하다. 2000년 이후 남북간에 진행된 다양한 협력사업은 사실 정부간 통일을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합의의 진전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