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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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알랭 드 보똥 『여행의 기술』, 이레 2004

‘다름’의 위로, ‘이동’의 위안

 

 

이병률 李秉律

시인 kooning@empal.com

 

 

여행의기술

삶이 그러하듯 여행의 하이라이트 역시 전체 여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짤막한 한순간, 눈과 심장이 한꺼번에 시원해져오는 어느 한순간에 몰린다. 어느 낯선 골목, 시장에서의 후각적인 인상, 교회 첨탑과 노을과 내가 서 있는 언덕의 삼각구도, 십분이거나 한시간 혹은 한나절의 흥분이 두고 온 현실과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그것으로 권태는 위로받는다. 착란 혹은 분열 직전의 상황들까지도.

알랭 드 보똥(Alain de Botton)의 『여행의 기술』(정영목 옮김)은 기존의 여행산문과 같으면서 또한 다르다. 당연히 여행자의 시선으로 글쓰기를 출발한다는 점, 여행을 통해 발견되는 작가적 자기애를 여행의 에너지로 끌고 나가며 적고 있다는 점, 역사 속의 예술가들을 등장시켜 밀도높은 여행의 정의를 제안한다는 점이 그렇다.

프랑스에서 ‘여행예술’(Lart du Voyage)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한국에서 ‘여행의 기술’로 번역되었는데, 원제가 품고 있는 엄숙함이 적당해 보인다. 진정한 여행은 곧 예술이라는 등식을 증명해 보이고 있으며, 엄연히 하나의 장르이기도 한 ‘여행예술’이 가진 정신적인 깊이와 풍요로운 측면을 잘 녹여 요약했다는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불안·혼잡·질투·욕망이 덩어리진 ‘이곳―지금’에서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작가 자신의 진솔한 모습에서부터, 역사 속에서 무수히 떠났던 선배들(여행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떠남으로써 존재했던 모범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지구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떠나고 싶어하는 자(그러면서도 다행히 떠나지 않고도 살아지는 자), 떠남 자체를 의미 이상, 혹은 감상적으로 여기는 자(본능에 의해 떠나더라도 여행의 소득과 만족, 두 면에서 심히 불편한 자), 떠나는 자, 떠나서는 안되는 자. 이 책은 네 부류의 사람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인간과 여행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동은 불안전을 전제로 한다. 이동은 불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며 또한 인간을 가장 불확실한 상태로 몰아 자신감과 기대감에 구멍을 내게 하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기질 따위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 오묘한 상태에 놓인 채로 잠깐이나마 달콤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행의 다른 이름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소설가 위스망스(J.K.Huysmans)의 소설 『거꾸로』의 인물 데제쌩뜨를 빌려와 ‘여행–이동’이 의식 속에 자리한 한 인간이 어떻게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짐을 끌고 기차역에 도착한 데제쌩뜨는 여행을 떠나면 얼마나 귀찮고 익숙하지 않은 일들로 부대낄까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돌아와 별장에 살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물건들로 방과 주변을 채우며 살아간다. 이렇듯 여행이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선망’이 아니라 ‘거리’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책의 말꼭지를 열고 있다.

떠남에 대해 변덕스럽고 양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항구나 기차역 같은 떠남과 도착이 있는 장소를 사랑했던 보들레르, 데쌩은 여행과 같아서 그냥 눈을 뜨고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면에서 깊은 이해와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한다는 영국의 미술평론가이자 사상가 존 러스킨. 자연 덕분에 시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행복하다고 노래했던 윌리엄 워즈워스와, 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살면서 그 호기심 모두를 역사 속의 위대한 결과물로 만들어냈던 훔볼트. 그리고 “정말이지, 서른다섯이나 먹어서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물다섯에 이 땅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255면)라고 외치며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남프랑스를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했던 반 고흐의 등장도 반갑다.

저자가 각 장에서 안내자라고 부르며 등장시켰던 이 인물들은 여행과 삶을 하나의 일치된 행동으로 몰아간 이들이다.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 폭식을 즐기는 이들이었고, 그 새로움 속을 마음대로 내달린 시선이 담아온 것들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보고한 이들이었다.

저자는 여행지에서의 시들한 자신의 일상과 선배들의 여행에 얽힌 실화들을 교차편집해 보이면서 여행의 개념 앞에서 인간은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물론 그들의 너그러운 등장은 전람회에서 사실주의 그림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그의 편을 들자면, 여행은 “끈적끈적한 껌 같은 느낌을 주는 접합제를 손톱으로 후벼파고 싶은 유혹”(48면) 같은 것이고,“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61면)하게 하며 비로소 솟구치게 해주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바대로 여행은 상자나 활자나 상징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다. 저자 식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되”듯(295면) 무엇이든 만나 껴안는 일이 여행이다. 무엇이든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피곤하며 고단할 뿐이며,“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83면)는 그의 말처럼 자기심문의 시간을 회피한다면 떠남은 되돌아오고 싶은 것이 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여행은 현실의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무엇일 뿐, 현실의 정반대에 존재하는 대단한 개념은 아니다. 맛으로 치면 짧고 급으로 치면 끝이 뻔한 현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가 아니라면! 그들 속에 얼굴을 묻고, 그들 냄새로 힘을 회복하고 싶은 유혹을 실컷 느낀 다음, 결국 돌아올 것 아닌가. 여기로!

갈수록 뻑뻑해지는 가슴에 이 책은 투명한 자극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을 가진 술(酒)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