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제10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문학상의 제10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故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되었으며, 상금은 1,000만원입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장편소설상·창비신인문학상과 함께 11월 20일(목) 오후 7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10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김해자 시집 『축제』

 

심사위원

본심: 고형렬 김혜순 염무웅  

예심: 박형준 박후기

 

2008년 10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8년 9월 17일 모임에서 제10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박형준·박후기 2인을, 본심위원으로 고형렬·김혜순·염무웅 3인을 위촉하였다. 예심에서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검토한 결과, 총 12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라왔다.

본심은 10월 20일에 진행되었는데, 대상 시집 모두 다채로운 소재와 감각을 선보이며 저마다의 개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심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정호승 안도현 조용미 김해자 시집을 집중적으로 논의한 끝에 김해자 시집 『축제』(애지 2007)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축제』는 현장과 일상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경험과 소재가 눈에 띄고 무엇보다 꾸밈없이 그려낸 삶의 진경과 진정성이 강력한 파장과 감동을 전해준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 전원은 김해자 시인을 제10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고형렬(高炯烈) 시인

현재 우리 시의 여러 층위는 심오하고 치열하고 복잡하다. 현대시의 완전한 지층조사는 불가능할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시집들을 읽으면서 그 불가능성이 바로 문학의 위의와 경계 바깥‘쪽’을 실감케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김해자 시집 『축제』는 삶의 불행한 예각을 선택한, 너무나도 반어적인 현실 투사(透寫)의‘고발’이다. 점점 오래되어가면서도 개선되지 않는 삶의 관찰 저 끝에 김해자 시를 괴롭히는 그림자들이 숨어 있다. 중심이 없는 이 시절에 애틋한 시의 눈은 경계 밖에서 여전히 불편한 사회의 갈등과 편차의 구조를 거부하지 못한다. 병과 죽음과 노동의 기억이 주조를 이루는 삶의 저 한켠 구석진 곳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고통의 얼굴들이 다른 시집들과 구별되었다. 초월과 장식을 거부한 듯한 이 시집에서 중심이동을 따라가는 정보기술 패러다임의 유비쿼터스 따위가 아니라 과거 혹은 영원한 미결의 시간 속에 남아, 그래서 해결사가 필요할 것 같은 긴 치유의 과정이 계속 유보되는 시상이 경이로웠다. 특히 그의 시는 저 밖에 있는 것으로서 놓쳐서는 안될 꿈들로 다가왔다. 바로 자기 경계‘밖’의 타자들이 동일성의 반대쪽에서 이쪽을 주목한 정치한 시선이 김해자 시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모든 주체도 시간도 흘러간 뒤 새롭고 낯선 이름들로 돌아왔으나 그의 시들은 마음바닥에서 홀로 기억하고 보는, 봉합된 흉터와 달 속의 무늬를 찬란하게 받을(「만월과 초생달」) 줄 알게 된 한 찰나의 경계들로 빛난다. 어쩌면 모든 문학의 대상은 미래보다 과거 쪽을 더 내다본다. 그 과거가 미래로 떠넘겨지거나 환상으로 가공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들이 있는 현재로 귀환할 때 문학은 불편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는 그 불안정과 거북함이 여자의 선재(善才)처럼 많은 이별과 사랑과 죽음을 거치고 난 뒤 문득 아름다워진 불멸의 시정신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김해자의 주제이며 미도착점이며 미학이고 문학적 윤리로 보인다. 감히 우리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삶의 중심 내부를 보여주었다. 먼 곳에 있는 듯한 시인이 백석문학상의 첫 여성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김혜순(金惠順) 시인

예심에서 선택된 12권의 시집들을 읽었다. 시집을 읽는 동안 그 시인의 내밀, 피부의 안쪽을 만져보는 듯한 놀라움이 있기도 했다. 모두 훌륭했고, 모두 안타까웠다. 훌륭한 점은 열두분의 시인이 각기 다른 시세계를 나름대로 지어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고, 안타까운 점은 시라는 것이 어떤 것들과의 경계, 이를테면 관념과 구체, 신체와 질병, 일상과 타락의 경계 등등에 매달려 있는 백척간두에서 쏟아지는 그물일진대, 일상에만 이토록 침잠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집들을 다 읽고 나니 시인들의 집안 사정, 이를테면 자식은 몇이고, 여행은 어디어디를 다녀왔고, 텃밭은 어느 정도고, 아픈 부모는 계신지 안 계신지 등등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인의 남다른 시적 인식, 존재함에 대한 고통, 시의 집인 시 장르를 돌파하려는 의지와 사유는 적고, 잠언을 발견하려는 의지는 강하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본심에서는 각 시집의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들을 동시에 떠올려 논의를 전개한 끝에 김해자의 『축제』를 수상작으로 정했다. 이 시집은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말들, 유장하게 흘러가는 리듬, 꾸미지 않은 성속(聖俗)일 삶의 진경, 유행가처럼 발설되고 속담처럼 곱씹어지는 처절한 현장 묘사의 핍진, 처연한 후일담 등이 시인의 가파른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시집에서 가정사나 신체적 고통, 자연풍경은 피맺힌 운동이나 목청 높은 궐기나 더럽고 아픈 사회적 상처와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 삼투해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후렴처럼, 넘치는 함지박의 물처럼, 흐느끼며 부르는 노래처럼 유장하게 흘러나왔다. 김해자 시인의 시들은 한국 여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일개인인 시인 혼자만이 아닌‘전체’를 품은 품 넓은 여자의 사랑 노래였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인 이 시인의 일상과 시와 혁명을 버무린 비빔밥은 역설적으로 다디달았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때로 목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견디는 일” 같은 익히 있어온 잠언을 많이 썼다. 그것을 구체적 경험에 섞어 녹이는 힘은 강하고 농밀했지만, 이런 깨달음을 드러낼 때‘~것을’‘~걸’하고 늘 같은 어미를 사용한다든지 시의 문장을‘~여자’‘~곳’‘~것’‘~길’‘~사람’하는 명사나 명사형으로 단정적으로 쓰는 것이 거슬렸다. 이런 것들 때문에 거의 모든 시의 리듬이 같거나 비슷해 보였다.

이외에도 정호승의 『포옹』,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최종적으로 논의했다. 정호승의 시적 화자가 이전의 시집에서 보다 더 깊어진 시선으로 생의 바닥을 천착하는 모습, 안도현이 농익은 문장과 시적 상상력으로 신화를 풍경에 포함시키는 능란한 표현력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염무웅(廉武雄) 문학평론가

내가 주목한 두권의 시집, 조용미의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과 김해자의 『축제』는 전혀 다른 개성이 산출해낸,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한 시집들이다. 한 시집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시집이 보이지 않고, 반대의 경우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한 시의 세계란 늘 타자와의 비교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자기완결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는 그것이 태어난 시대의 숨결과 빛깔을 반사하며 시대의 요구에 호응하는 숨은 열망을 내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지금처럼 한권의 수상작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조용미의 시집은 시인 자신의 말대로 사물이나 풍경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일깨우는 시선의 힘을 느끼게 한다. 꽃, 나무, 새, 절터, 시골마을 등 수많은 자연의 대상들이 면밀하게 관찰되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시적 성취라고 부름직하지만, 시인이 정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상의 외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는 존재의 미묘함, 생성과 소멸, 죽음과 운명 같은 어떤 근원적 신비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인 듯하다. 이 내향적 침잠의 자세와 단단한 견인주의가 은은한 감동을 주지만, 동시에 그 폐쇄성이 시를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김해자의 『축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 시대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 변변한 직업도 없어 제대로 노동자의 호칭도 얻지 못하는 뜨내기들, 노인들, 병자들의 팍팍한 삶이다. 그리고 그들의 한스러운 죽음이다. 달과 나무 같은 자연풍경이 더러 다루어지는 수가 있지만, 그 경우에도 그것은 인생사의 고통을 가리키는 비유이거나 배경이다. 요컨대 김해자의 시는 동시대의 사회적 현실을 정면으로 조준한다.

어떤 점에서 그의 시는 흔히 말하는 노동시 또는 참여시이다. 그러나 김해자의 시에서 소재적 측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시대의 수많은 소외된 삶에 진정으로 동지적인 공감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언어로 자본권력의 횡포에 항의한다. 『축제』는 이 자본주의 승리의 시대, 즉 극단적 양극화의 시대에도 체제에 순치될 수 없는 영혼의 소유자들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는 시적 보고서이다.

이 시집에서뿐 아니라 박영근이나 백무산의 근년의 작업에서도 확인하는 바이지만, 지난 시대 민중운동의 열광을 통과하고 나서 잔치가 끝났다는 듯이 천지에 적막감이 감도는 시점에 오히려 진정으로 깊이와 무게를 갖춘 민중시 내지 참여시가 나오는 것은 역설이다. 민중운동의 쇠퇴 속에서 민중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해자의 이번 시집에서 언어의 밀도 내지 형식적 치밀성의 측면에서 얼마간 느슨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시대적 의의가 달성되었다고 믿고 기꺼이 이 시집을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지지한다. 힘든 길을 걸어온 김해자와 그의 동료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수상소감

 

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고려대 졸업. 미싱공으로 일하며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고, 같은 해 소설 「최명아」로 제8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 『축제』가 있다. 현재 산골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먼 데 남의 이야기인 양 들려온 황송한 소식이 오던 날, 비가 내렸습니다. 몇달째 가물어 갈라터진 땅에 비가 내리고 저는 산골서 농사짓는 친구의 콩밭에서 콩을 주웠습니다. 주웠다기보다 콩을 캤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농사를 9년째 지으면서도 서리콩은 서리 내릴 때 따는 것이라 굳게 믿고, 고추 따랴 벼 베랴 콩 튀듯 팥 튀듯 뛰어다니던 친구의 콩들은 이미 꼬투리가 벌어져 바닥에 구르고 메말라 갈라터진 구멍 속으로 숨어들어가 있더군요. 조심조심 협곡에 손을 집어넣어 서리태를 캐니 비에 젖은 서리콩 같은 눈망울들이 또록또록 되살아납니다.

거기 아버지 면상에 식칼을 휘두르는 아들의 희번득한 눈망울이 있습니다. 거기 서슬 피해 비명 지르며 도망친 고주망태 아버지가 있습니다. 다리에 팔뚝에 피가 낭자한 그의 팔뚝과 종아리 부어오른 눈두덩이 있습니다. 소스라치면서 피 묻은 그를 벽장에 감추고 약을 찾는 어린 여자가 있습니다. 거기 어디쯤에 맞은편 단칸방에서 하루 걸러 들려오는 앳된 애기엄마의 비명소리가 있습니다. 살 맞은 짐승의 울음소리와 구타소리를 듣는 어린 여자가 있습니다. 철창에 갇힌 이리처럼 좁은 방 안을 어슬렁거리다 귀를 막고 이불 뒤집어쓰다가 종내는 뛰쳐나가 남자에게서 여자를 빼앗아 안고 둥그렇게 몸을 말고 함께 어깨를 들썩거리는 어린 여자가 있습니다. 지하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가스폭발로 화상을 입고 발가벗겨진 채 화농뿐인 살갗을 북북 문지르는 고통을 모음뿐인 신음으로 감당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의사도 하루에 몇번 못 들어가는 중증환자실에 갇혀 꺼져가는 의식으로 공중에 안락사를 간절히 그려 보이는 지극히도 아름다웠던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화상 몇밀리도 떼어 제 몸으로 가져오지 못한 채 밖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며칠째 강행되는 야근중에 미싱대에 머리를 처박고 앉은 채 열반에 든 듯한 부황 든 얼굴들이 있습니다. 말라비틀어져 비에 젖은 서리태 같은 눈망울들이 고랑에 눕고 갈라진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돌아보면 시는 제게 환희기도 했습니다. 갈라터진 내 속에 갇혀 어두운 나를 밖으로 끌어내고 기쁨과 충만과 아름다움으로 나를 환한 밖으로 이끌고 나와 내 밖의 존재에 눈뜨게 하는 불가사의한 선물이었습니다. 작은 나를 좁은 나에 갇힌 번뇌와 슬픔을 잊고 떨면서 타자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동시에 시는 제게 죄이기도 했습니다. 타자의 아픔과 슬픔을 먹고 사는 존재가 시인이 아닐까, 분명 타자이되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정신과 하나가 된 순간들 앞에서 일성을 지르다 이리저리 궁굴려 시라는 누더기를 직조하는 미싱공은 아닐까. 몇밀리도 안되는 나를 감싸는 피부를 경계로 나라고 불리는 이 물건과 저것들이 구별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내 밖은 무엇인가, 자기와 타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나의 이념적 화두이자 시적 질문이었습니다. 한치도 어긋남 없는 대상과의 일치를 통해 타자와의 동일성에 이를 때, 삼투막을 통해 더 아픈 대상에 내가 빨려들어갈 때, 나는 이미 없습니다. 나와 타자라는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가 될 때 슬픔이나 고통마저 이미 그 얼굴이기를 그칩니다. 하지만 환희와 슬픔과 하나 된 고통과 구원의 순간도 시적 순간이 끝나면 떨림도 공명도 희미해진 비루한 나로 되돌아오는 것. 다만 그 순간 가로막힌 나와 너의 경계를 벗어던져 훠워이 훠워이 무한광대한 존재가 되게 하는 시적 순간을 늘릴 수 있을 뿐입니다.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 긴 두루마리, 늘 첫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저 헛것, 바람의 경전처럼,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입니다.

석유보다 물이 많은 것은, 물은 동물도 식물도 대지도 먹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금보다 돌이 많은 것은, 돌보다 바스러진 흙이 많은 것은 흙이 생명을 품어 키우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수많은 나의 거울인 사람이 헤일 수 없이 많은 것은 나보다 그들이 크기 때문입니다. 무량한 그들이 나를 거두고 키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밖으로 세운 안테나를 접고 안에 숨어 있는 비굴과 비루와 굴욕과 어둠을 보는 것은 세상의 욕망과 슬픔과 비참함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시를 받들고 세상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남이라는 광대한 존재이자 그것의 합인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차오르는 어떤 형상은 모두 타 존재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황송한 이름의 이 상, 제가 마주친 비에 젖은 서리태 같은 눈망울들에 주시는 걸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많이 모자라고 성긴 시집에 큰 상을 내려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늦깎이로 시 공부 하면서 밤새워 읽던 시 속의 시인들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