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발표
참신한 상상력과 힘찬 서사로 한국소설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의 수상작이 아래와 같이 결정되었습니다. 상금은 3,000만원이며, 시상식은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신인문학상과 함께 11월 20일(목) 오후 7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슬로우 잼』
심사위원
구효서 김영희 신경숙 진정석
2008년 11월
심사평
최근 한국문학을 둘러싼 안팎의 우울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 분야만은 특별한 활기를 띠고 있다. 장편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가 여전한 가운데, 작가들이 장편 창작에 더욱 주력하기 시작했고 각종 장편공모를 비롯한 제도적 지원도 점차 본격화되는 추세이다. 물론 한국소설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형성된 단편미학은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장편의 활성화만으로 침체에 빠진 한국소설에 새로운 활로가 개척되리라는 것은 순진한 기대에 가깝다. 그러나 전체를 조감하는 시야로 인간과 사회를 깊이있게 성찰하는 문학의 능력이 장편소설 분야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문학이 아직까지 진정한‘창조적 장편의 시대’를 가져보지 못했다면,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와 성원은 좀더 지속되어도 좋을 것이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하는 창비장편소설상에는 무려 177편에 달하는 응모작이 접수되어 높은 관심과 열기를 보여주었다. 응모작들 상당수가 양극화와 청년실업, 가족과 교육 문제 등 세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추리나 SF, 역사물 등의 장르적 관습을 빈번하게 활용하는 저간의 특징도 여전하다. 특히 최근 장편소설의 유력한 트렌드인 이른바‘칙릿’에 뒤이어 십대 고교생 주인공의 성장서사가 새로운 흐름으로 뚜렷하게 부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응모작을 나눠 읽고 김현민의 『칠드런 크로싱』, 박이채의 『백악기의 추억』, 정강철의 『블라인드 학교』, 권하은의 『여기에 있다』, 노현정의 『밖으로 나선 자』, 한재호의 『슬로우 잼』 등 6편을 추천했으며, 최종심에서는 이 가운데 뒤의 3편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권하은의 『여기에 있다』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한 남매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결핍을 보상하려는 시도를 다룬다. 오빠 정현은 모든 관계에 위악적인 냉소를 보내고 여동생 정희는 끊임없이 진정한 관계를 희구하는데, 상반된 두 태도는 우진이라는 고아 소년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남매의 형상부터가 상투적인 인물형을 답습했다는 느낌을 주며, 특히 우진의 매개자적 역할이 불투명해 두 방식간에 뚜렷한 대조나 교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지한 문제의식과 선명한 구도, 뛰어난 집중력 같은 이 작품만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인물의 요령있는 형상화와 문장의 자연스런 호흡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노현정의 『밖으로 나선 자』는 레즈비언 부부 슬하에서 자라난 한 고등학생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점차 세상에 눈뜨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예외적인 가족사 때문에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을 갖게 된‘나’가 마주치는 이런저런 사건과 경험을 통해,‘정상적’성인남자의 윤리도덕으로 구성된 이 시대의 인간과 그 관계의‘정상성’에 관한 소박하지만 필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동성애와 가족해체라는 얼핏 진부한 소재를 독특한 설정으로 구체화한 착상이 돋보이며, 사건을 적절히 배치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 작품은 무거운 소재를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과 명랑한 어조로 그려내는데, 이는 작품을 잘 읽히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지만 주제의식의 깊이를 제한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주요 인물 가운데 이성애자가 별로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설정을 취하고 있음에도 동성애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여기서 비롯된 특별한 상황을 수용하고 처리하는 방식에만 집중하는 편향도 지적되었다.
한재호의 『슬로우 잼』은 우리 시대의 첨예한 사회적 현안 가운데 하나인 청년실업 문제를 재기발랄한 착상과 경쾌한 어조로 그려낸 작품이다. 청년백수인‘나’가 한 평범한 동네 주민의 비범한 행적을 우연히 전해듣고 그를 미행하는 지극히 평이한 스토리가 서사적 골격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얼핏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지루한 사건을 미묘한 반복과 변주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거듭되는 미행 속에서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서울이 지닌 다층적인 면모가 드러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주민들간의 건조한 관계가 풍부한 암시로써 새롭게 조명된다. 초월과 구원의 가능성이 봉쇄된 요지부동의 현실에 섣불리 분노하거나 쉽게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유해내는 능력은 이 작품만의 개성적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허술한 측면도 없지 않다. 어색한 비유나 문장이 가끔 보이고 결말 처리가 상식적이며, 사건의 적절한 연관을 통해 소설적 흥미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사회적 감각에 충실하지만, 그것이 씨스템 자체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동반한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논의 끝에 오늘날 소설이 처한 곤경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이를 돌파하는 소설적 방법론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슬로우 잼』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가 소설 속 한 인물의 명명을 통해 경의를 표한 미국 작가 찰스 부코우스키처럼 기성질서와 주류적 가치의 이면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예외적인 개성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구효서 김영희 신경숙 진정석
수상소감
한재호
1979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예정.
내가 이 소설을 쓰던 곳은 광화문 부근 스타벅스였다. 그곳은 시장바닥처럼 늘 시끌시끌했다.
간혹 소설이 벽에 부딪힐 때면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그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그러다 때로는 그중 한명을 미행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미행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걸었다.
걷고 쓰고, 걷고 쓰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작품이 완성됐을 땐 남모르게 뿌듯했다. 게다가 수상으로 이어졌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수상 소식을 듣기 전부터 종종 수상소감을 써보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땐 참 쉽게 썼던 것 같다.
그러다 진짜 수상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두더지나 백곰의 고약한 장난이라 확신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진짜’창비의‘진짜’장난이었다.
진짜 수상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도, 설마 누군가의 장난일까, 모든 게 의심스럽다.
그러면서도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고 있다.
수상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피치 못하게 뒤늦게 소식을 접하게 될 이들에게도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작품이지만, 그 이상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다음 작품에선 이번에 다루지 못하고 아껴둔 얘기들을 표현하고 싶다.
아마도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