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창비신인시인상 발표
우리 문단을 이끌어갈 참신하고 역량있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창비신인시인상’의 2008년 수상작이 아래와 같이 결정되었습니다. 상금은 500만원이며, 시상식은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장편소설상과 함께 11월 20일(목) 오후 7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8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백상웅 「각목」 외 4편
심사위원
김수이 문태준 박형준
2008년 10월
시 |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은 총 734명이 응모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응모작들의 수준도 높았다. 한국시단의 저변이 넓고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다. 창작된 시의 세계가 얼마간 협소하고 또 얼마간 현실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무차별적인 줄글로서의 시, 지적 유희의 의상(衣裳)을 요란스레 입은 시도 꽤 있었는데, 꼭 그러해야 할 불가피하고 절박한 이유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심사는 두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두번째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이현미의 「카모메 식당」 외 6편, 최설의 「밀항」 외 5편, 우림의 「내 발목에 차오른 바다」 외 5편, 백상웅의 「각목」 외 4편이었다.
이현미의 「카모메 식당」 외 6편은 고민을 많이 하게 한 작품이었다. 동명(同名)의 일본영화를 시적 모띠프로 삼은 「카모메 식당」 연작은 수작이었다. 삶, 그것의‘곳곳의 상처’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읽을 때는 맥을 놓게 했다. 슬프고 아름다웠다. 언어에는 낭창낭창 탄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연작에 비해 다른 시편들은 여러모로 차이를 보였다. 시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수준의 낙차를 극복하길 바란다.
최설의 「밀항」 외 5편은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 매우 단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 때문에 안정되었으나 갇힌 느낌을 주었다. 체험적 세계가 좀더 유입된다면 시의 성량(聲量)이 훨씬 풍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림의 「내 발목에 차오른 바다」 외 5편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들이었다. 사소한 일상의 사건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확장해나가는 솜씨는 아주 개성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쳐났다. 다소 거칠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다. 그러나 “색소반증 앓는 얼루기”“찰찰한 파원”“찌르하게 감전되어 오는” “짜르한 병실” 등의 표현은 뜻이 모호하고 비문법적이어서 시적 허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결국 오랜 토론 끝에 백상웅의 「각목」 외 4편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백상웅의 시편들은 자연 서정의 세계를 독특하고도 빼어나게 그려냈다. 순수 우리말의 음색과 빛깔을 잘 살린 그의 서정시들은 인간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하고자 했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고 순연(純然)한 상상력이 여전히 자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발상과 화법이 시편마다 엇비슷한 궤로(軌路)를 갖고 있어 단선적인 느낌을 주었고, 세계와 대상에 대한 대결의지가 좀더 필요해 보였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자신만의 고유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키워나가길 바란다. 이 신예의 귀한 등장을 크게 반겨 축하한다.
김수이 문태준 박형준
수상소감
백상웅
1981년생.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
노트북이 죽었다. 시를 써서 난생 처음 받은 상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모서리가 지저분한 중고였지만 가방에 쏙 들어갈 정도로 가벼워 기동성을 갖춘 노트북이었다. 자주 키보드를 두드렸다. 코끼리를 죽이거나 굴뚝을 세웠다. 터널을 파거나 나무를 용접하고 밭을 일구거나 물길을 텄다. 공친 적도 있었고 용돈을 번 적도 있었다. 그런데 노트북이 죽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십년 동안 기다리던 전화였다. 실감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심사위원 흉이나 볼 작정이었다. 나는 아직 부족했고 게을렀고 미련했다. 이젠 힘들다는 핑계로 도망가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을 켰다. 쇠 긁는 소리를 냈다. 나는 노트북 쇼핑몰을 드나들었다.
깃발을 세우겠으니 나를 믿고 따르라, 소리 지르던 선배가 있었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낄 때도 있었지만 선배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승철선배에게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옆집과 옆집의 옆집에 살며 식량을 나눠주던 성우 형과 영철 형에게 조금이나마 신세를 갚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한 계절, 한방에서 살을 눕히던 성철 형에게도 술을 한잔 사야겠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가 없었다면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라며 털털하게 웃으신 정양 교수님, 제자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하시는 안도현 교수님, 못난 제자를 이해해주신 송준호 교수님, 학생들에게 꿈의 무대를 빌려주신 곽병창 교수님, 조곤조곤한 산문 같으신 김병룡 교수님, 동네 형 같은 박성우 교수님께 큰절을 올린다.
밤새 나를 괴롭히는 문창과 후배들과 시륜 동인들에게 야식을 크게 한번 사야겠다. 삼례 후정리 제일복사 아저씨와 아주머니, 우석대학교 우체국 직원분들을 너무 귀찮게 했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 『창작과비평』 겨울호를 선물로 드릴 생각이다.
이들 모두에게 노트북을 죽인 혐의를 드린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조카에게 이 자리를 빌려 사랑한다는 말을 몰래 전한다. 시 쓰는 사람들 중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윤희에게 내가 지나온 길을 잠시 맡긴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마음으로 시를 쓰라고 닦달하신 안도현 교수님, 나는 이제 스승을 죽여야겠다. 다시 한번 안도현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족한 시편을 예쁘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어떤 신인보다 열심히 쓰겠노라고, 노트북을 몇번이고 죽이겠노라고 진심으로 약속드린다.
제15회 창비신인평론상 발표
우리 문단을 이끌어갈 참신하고 역량있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창비신인평론상’의 2008년 수상작이 아래와 같이 결정되었습니다. 상금은 500만원이며, 시상식은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장편소설상과 함께 11월 20일(목) 오후 7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15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이경진 「속물들의 윤리학-정이현론」
심사위원
김명환 임규찬
2008년 10월
평론 | 심사평
총 19편의 응모작을 놓고 예년보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설득력을 갖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들려주는 신인다운 패기가 아쉬운 느낌이다. 좀 멀리 보자면, 현실에서는 사람다운 삶을 가꾸기 위한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사유가 구석으로 몰리고 있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부정의 정신은 안팎으로 희귀해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무명에 가까운 예비평론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더욱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심사자들이 최종적으로 추려 책상 위에 올린 응모작은 서이안의 「자본과 싸우는 육체 혹은 탈주하는 알레고리-강영숙의 『리나』를 읽는다」, 이경진의 「속물들의 윤리학-정이현론」, 신철규의 「상처의 재현과 재현의 상처-김선우론」, 차선일의 「오독(誤讀/惡讀/汚讀)의 서사, 비극(悲劇/卑劇)의 윤리」였다.
서이안의 강영숙론은 『리나』에 대한 관습적인 독법을 파열시키려는 적극적 자세와 나름의 치밀한 분석이 돋보였다. 그러나 작품에 나오는‘P국’을 실마리삼아‘P’를 첫글자로 하는 영어단어들을 활용하는 논리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아직 작품의 진상에 충실한 이론적 논의를 펼치기에 불안정한 측면이 많다고 판단했다.
신철규의 글은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위에서 시간을 들여 곰삭힌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상처의 재현’과‘재현의 상처’라는 구도가 말의 유희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설정한 탐구과제를 감당할 만큼 구체화되었는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차선일은 권여선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이 오늘 우리 문학의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며 그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천착한다. 하지만 욕망이나 오독 등 낯익은 개념의 구사가 진부한 문장을 낳는 대목들이 아쉬웠으며, 오독의 세가지 의미 층위도 작품의 결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이경진의 글은 더 다듬어야 할 면도 많다는 점에서 심사자들을 고심하게 했다. 속물성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기준의 폭과 깊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거나, “찬란히 빛나는 상품들의 기표 속에서 메마른 공허와 강박의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은닉하고” 있다는 정이현 문학에 대한 자기 나름의 관점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느냐에 유보사항을 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이현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 혹은 무비판적 상찬 모두를 넘어서는 진정한 소통을 향한 작가의 고투를 발견해냈다는 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여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무엇보다 작품분석의 밀도와 집중, 여러 인문학적 소양을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 그리고 과장없이 차분하게 논리를 펼쳐가는 문장력 등이 다른 응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다른 응모자들도 모두 예비평론가로서 부딪힐 현실의 험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치밀하고 투철한 가운데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여유있는 자세로 정진하기를 빈다.
김명환 임규찬
수상소감
이경진
1982년생.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저에게 독서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독서는 유익한 것이죠. 하지만 독서가 위험하다는 것은 사상통제를 자행하는 국가기관만의 견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보바리 부인이나 돈 끼호떼의 사례에서도 입증된다고 하니까요. 연애소설에 빠져 달콤한 공상에 몸과 재산을 탕진한 보바리 부인이나, 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앞뒤 분간을 못하게 된 돈 끼호떼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책이 언제나 유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근시가 심했던 저는 안과에서 제가 크면 클수록, 책을 가까이하면 가까이할수록 눈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무시무시한 선고를 듣고,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눈이 안 보이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눈이 안 보이면…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죠. 한편의 글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한땀 한땀 언어의 수를 놓아 이루어지는 것인지, 얼마나 많은 퇴고와 잔손질을 거쳐 세상에 공개되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저 뛰어난 착상을 말로 풀어내고, 그것을 누군가 받아적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글짓기대회 나가서 상 한번 탄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이죠.
이 생각은 말 그대로 공상(空想)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또는‘돼지가 하늘을 난다면’처럼 불가능을 뜻하는 저만의 관용적 표현이 되어버린 거죠. 그렇지만 독서 자체에는 치명적인 매력을 느꼈나 봅니다. 위험하고 금지된 것에 기어코 손대고 마는 철없는 아이처럼, 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책을 읽는 데 눈을 혹사했습니다. 거의 중독이라 할 만큼 세상의 모든 읽을 수 있는 글자를 읽어내겠다는 극악스런 집착으로 책을 읽다 보니, 결국에는 대학원까지 가서 독서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죠. 그러다 글을 쓰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덜컥 창비신인상이라는 큰 상까지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저에게 독서는 위험한 것이었나 봅니다. 타고난 글재주도 없는 저에게‘작가’라는 망상을 심어준 것도 독서요, 그렇다고 부족한 필력을 채워보려니 독서량은 미진하고, 읽을 책들은 아득하며, 눈은 침침해가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수상의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제 자신도, 제 글도, 제 모든 것이 너무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부족한 글에 상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울대 독문과 선생님들, 특히 임홍배 선생님과 최윤영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를 늘 염려하시는 부모님과 언니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와 즐겁게 수다를 떨며, 각기 힘든 시기를 버티는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소설 |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소설상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응모한 428명의 작품 847편을 나누어 한달여를 정독하고 11명의 작품 23편을 선별하였다. 최종심에서 수상자를 내려고 머리를 맞댔으나 응모자들이 보낸 소설에 대한 열정과 관심에 부응하지 못한 듯해 착잡하기만 했다. 몇몇 작품을 놓고는 당선에 초점을 맞춰 깊이 토의했지만, 작품의 허점과 수상자의 미래를 생각해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대부분은 일별하기에‘블로그식 글쓰기’가 연장된 느낌이 강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아진 오래된 이야기다. 극히 사변적인 언술들이 공허한 독백처럼 쏟아져 문학이 오직 자기만족의 유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글쓰기를 즐기되 그 효용은 이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요구된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응모자 절대 다수가 여성이었고 따라서 여성의 일상과 내면세계에 집중한 소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지만 눈여겨 공감할 만한 여성성을 창조해낸 작품은 극히 드물었다. 소재만으로 여성들과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았다. 작품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거개가 기성문단의 여성작가들이 보여준 성과를 갱신하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지금 우리 소설은 급격히 판타지로 도피해버리는 형국이다. 소설의 일상이 싸이버공간은 물론 우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상상력의 확장을 도왔던 몇몇 예민한 작가의 시도들이 문단 안팎에 신선한 감흥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매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버리고 우주로의 여행만 꿈꿀 수는 없는 일이다. 시류를 좇는 글쓰기 유형으로밖에 읽히지 않았을뿐더러 경험과 사유와 상상력의 빈곤이 낳은 퇴행이라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윤주진의 「그들만의 유희」, 장리가의 「타인의 식탁」, 정나란의 「자주」, 채영신의 「나는 이야기다」, 이해니의 「라이카의 고향」 다섯 작품이었다.
윤주진의 「그들만의 유희」는 두 노인과 그들을 돌보는 환갑을 눈앞에 둔 딸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뇌관을 슬슬 달래가며 저절로 용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폭탄” 같은 집안이다. 이 구접스럽고 극성맞은 삶을 다큐멘터리‘인간극장’처럼 전하는 문장은 활력있고 유머러스하다.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데도 그늘 너머의 생명스러움까지 잡아내는 필력이 만만찮게 느껴졌다. 특히 폭소와 한숨과 먹먹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대미가 압권이다. 또다른 작품 「목련에 들리다」에서도 일상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매우 넉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설의 뼈대라 할 플롯이 전형성에 빠진 점이 지적되었고, 감각이 실험적이고 현대적이지 못해 신선함이 부족했다.
장리가의 「타인의 식탁」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독특한 설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가족을 다루는 방식이 개성있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장이 자연스럽고 촘촘하다. 이런 특징은 또다른 응모작 「비밀 언어 교본」에서도 마음껏 발휘되고 있다. 다만‘그녀’가 고안해낸‘관계를 찾는 장치’가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비슷한 소재로 소설을 발표했던 기성작가가 떠오르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사진기는 멋지고 독창적인데 그것으로 찍어낸 사진은 낯익다. 사진이, 현실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양보한다면 모를까.
정나란의 「자주」는 뚜렷한 사건 없이 일상의 편린들과 내면을 이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섬세한 감각을 소유한 작가임이 분명하다. 인생의 알 수 없는 어느 가닥을 잡아내는 게 단편미학이라고 한다면, 신인소설상의 취지에 가장 근접한 소설을 쓴 작가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퇴고 없이 흘러와버린 듯한 소설은 곳곳에서 정련되지 못한 문장을 보여줘 좀더 수련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채영신의 「나는 이야기다」는 끝까지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아 있던 작품이었다. 작중인물‘나’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며 레스또랑의 유리 부스 안에서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런‘나’를 중심으로 해서 극단적인 상상력으로 밀어붙인 서사는 그로테스크하며 그로 인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강렬한 소재가 궁극적으로 담고자 하는 삶의‘속살’, 이를테면 견딜 수 없는 삶의 허위들은 금세 증발해버리고 만다. 일련의 에피소드가 작위적이고 서로 유기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선한 소재만 남아버린 어느 탐미주의자의 매력이 아쉬울 뿐이다.
이해니의 「라이카의 고향」은 채영신의 작품과 함께 끝까지 논의된 작품으로서, 문학을 품은 젊은 세대가 무엇을 탐닉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문장이 위트 넘치고 활력있으며 상상력은 만화적이고 진부하지 않다. 특히 아버지의 유골을‘망고젤리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대목은 인물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방식으로서 신선했다. 그러나 작가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전유를 누리는 데는 실패했다. 작품에는 기성작가, 특히 젊은 세대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몇몇 젊은 소설가의 감성도 함께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류에 편승한 나머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장점을 잃어버리는 듯해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이밖에도 본심에 함께 오른 원성도, 장이정, 하명희, 양순신, 조선영, 임부경 등도 건필을 바란다. 내년에는 심사위원들의 편견도 거뜬히 뛰어넘을 신인의 등장을 기대하며 올해 창비신인소설상의 전과정을 갈무리해본다. 지난하고 고된 시간을 거쳐 원고를 보내신 응모자 모두에게 다시 감사의 말을 드린다.
백가흠 백지연 윤성희 전성태 정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