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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경욱

김경욱 金勁旭

1971년 광주 출생. 1993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 『위험한 독서』, 장편소설 『황금사과』 『천년의 왕국』 등이 있음. zen-22@hanmail.net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김형태는 부동산중개업소 유리문을 열려다 흠칫 굳어버렸다. 손잡이 부근에 구멍이 나고 잠금장치가 풀려 있었다. 구멍 주위에는 불에 그슬린 흔적이 역력했다. 김형태는 뒷걸음으로 물러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은성부동산. 김형태의 미간에 팬 골이 깊어졌다. 김형태는 문을 밀치고 황망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을 여는 손길이 다급했다. 십만원권 자기앞수표 일곱장이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지난 금요일 성사시킨 건으로 받은 돈이었다. 은행 영업이 끝나 임시로 넣어둔 것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뒤 김형태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18K금을 입힌 홀인원 기념 트로피도, 새로 들여놓은 LCD텔레비전도 제자리 그대로였다. 뒤진 흔적도 없었다.

김형태는 소파에 주저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벽이 휑했다. 동네 지적도와 인근 아파트단지 상세도가 걸렸던 자리였다. 김형태는 탁자 아래 선반에서 전화번호부를 꺼내 펼쳐본 뒤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곳은 경찰서가 아니라 열쇠가게였다. 열쇠장이를 부른 뒤 김형태는 사설경비업체의 경비구역임을 알리는 표찰을 문에서 떼어냈다. 근처 저택 주차장 문에서 몰래 뜯어온 것이었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강지선은 누구보다 먼저 교정에 들어섰다. 먼저 온 사람이 한명 있었다. 교장이었다. 교장은 날마다 가장 일찍 출근해 제일 늦게까지 남았다.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교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었다. 겨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교무실로 가기 위해서는 교장실 앞을 지나쳐야 했다. 교장은 누가 언제 출근하는지 제 손금 보듯 훤했다.‘그 일’이 있은 후 강지선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다. 교장보다 먼저 나오지는 않았다. 교장이 자신의 출근시간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교장실 앞을 지나기 전 강지선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교장실 안쪽을 돌아보며 인사도 했다. 교장은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신문을 활짝 펼쳐 읽고 있었다. 흰 면장갑을 낀 채. 교장은 돋보기 너머로 눈을 치떠 출입문 쪽을 일별하고 곧장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교무실에서 나온 강지선은 텅 빈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도 심호흡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가득 찬 교실에 들어서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이들의 게으른 눈빛에서 강지선은 종종 지옥을 보았다. 서른두명의 아이들은 서른두개의 지옥을 의미했다. 강지선은 이번 학년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어 또다른 지옥을 맞닥뜨릴지라도. 시간은 지옥불조차 견디게 하니까. 누군가의 말대로 신은 인간을 채찍이 아니라 시간으로 다스리니까.

기간제 교사인 강지선의 수중에는 채찍이랄 것도 없었다. 강지선에게 허락된 시간은 본래 담임이 출산휴가에서 돌아올 때까지뿐이었다. 아이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애들이 뭘 알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애들의 부모다. 모든 죄악의 근원. 아이들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저희가 안다는 걸 모르더라도 아는 건 아는 것이다. 아이들은‘강지선 땜’이라고 불렀다.‘쌤’을 잘못 발음하는 줄 알았다. 아이들은 혀가 덜 여물었으니까.‘땜’이‘땜방’의 약자라는 사실을 강지선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교실 문 자물쇠가 뜯긴 것을 본 강지선의 눈이 커졌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 제 책상서랍부터 뒤져보았다. 애당초 값나가는 물건은 없었다. 학생신상카드가 사라졌다. 강지선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또 하나의 불행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훔쳐갔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교장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에서 열쇠를 꺼내던 고만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쇠구멍이 휑했다. 숟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가장자리는 불에 그슬려 거뭇거뭇했다. 고만석은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상은 서랍이 열려 있었지만 캐비닛은 멀쩡했다. 고만석은 캐비닛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고 문을 열었다. 위스키 세병, 금 거북 한개, 홍삼쎄트 세개, 씨거 한상자. 캐비닛에 보관해두었던 것은 모두 무사했다. 아파트 시공사와 인테리어업자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아파트 관리비 지출에 관한 서류도 멀쩡했다. 공개되면 곤란한 은밀한 장부까지.

재작년말 신규 입주한 새 아파트단지였지만 하자보수 민원이 꼬리를 물었다. 지하주차장 벽에 금이 갔고 욕실 천장에서 물이 듣는 집이 적지 않았다. 급기야 입주자대표회의가 꾸려졌고 한달 동안의 실랑이 끝에 시공사가 1년 동안 무상보수해주기로 했다. 무상보수 기간 내내 공사소음 잦을 날이 없었지만 여태 고쳐야 할 것이 수두룩했다. 관리비에 특별수선비 항목을 추가해야 했다. 입주민들은 입이 튀어나왔지만 고만석은 재미가 짭짤했다. 업자가 공사비 부풀리는 것을 눈감아주는 댓가를 톡톡히 챙겼다.

캐비닛을 닫은 후 고만석은 외투 안주머니에서 로또복권을 꺼냈다. 옆동네 편의점에 일부러 들러 산 것이었다. 일등 당첨자가 세번이나 나온 곳이었다. 새로 산 로또복권 번호로 캐비닛 비밀번호를 바꾸고 책상서랍을 정리했다. 입주민 주차스티커 발급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돈이 될 리 없는 물건이었다. 고만석은 서랍을 다시 샅샅이 뒤졌다. 사라진 게 돈 되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철저히 체크했다. 찾을 수 없었다. 고만석은 가져간 사람보다 가져간 이유가 더 궁금했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사내는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 먼저 전화를 넣은 곳은 퀵써비스 사무실이었다. 몸이 불편해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니, 몸은 늘 불편했다. 오후만 되면 다리가 퉁퉁 붓고 눈이 침침했다. 요즘은 대낮에도 눈앞이 어둑어둑할 때가 있었다. 며칠 전 마포대교를 건널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스쿠터를 세우자 경적과 욕설이 쏟아졌다. 차가 밀리는 다리 위라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몸이 불편하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말이라 가뜩이나 일손이 달리는 판에 당신까지 그러면 어쩌느냐는 푸념이 따가웠다. 오후에라도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사내는 어렵겠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언제 끝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벌이는 일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을까?‘끝’운운하는 자를 사내는 믿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시작한 분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두번째로 전화한 곳은 학교였다. 아이가 아파서 갈 수 없겠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니, 계집애는 늘 아팠다. 천식을 앓았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사내는 답이라도 구하려는 것처럼 계집애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집애는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비인형을 꼭 쥐고.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아들이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사내는 계집애가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았지만 깨어 있기도 했고 눈을 뜬 채 졸기도 했다. 의사는‘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말했다. 어려운 말이었다.‘피티에스디’라고도 했다. 역시 어려운 말이었다. 가운을 입은 자들은 말을 어렵게 했다. 상대가 제 말을 단박에 알아들으면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처럼.

‘외상’거래는 일절 안한다고 사내는 항변했다. 거짓말이었다. 계집애는 외상을 밥 먹듯 했다. 하루는 동네 슈퍼 여자가 사내를 불러 세우고 외상값은 언제 갚을 거냐고 다그쳤다. 무슨 소리냐고 사내가 반문하자 슈퍼 여자는 두툼한 공책을 들이댔다. 외상장부였다. 이틀에 한번 꼴로 거래내역이 적혀 있었다. 초코우유, 꿀맛 꽈배기, 가나안 초콜릿, 딸기맛 캐러멜, 알프스캔디…… 단것 일색이었다. 일찍이 괴멸을 맞은 세상에 창궐했던 죄악의 이름 같았다. 사내는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든 사달라고 조르는 법이 없던 아이였다. 아이에게 어찌 외상을 터주었느냐고 사내는 버럭 소리쳤고 엄마가 갚을 거라 했다며 슈퍼 여자는 언성을 높였다. 사내는 말문이 막혔다. 며느리는 아이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본래 약골이었다. 사내가 보기에 계집은 앓기 위해 태어난 족속 같았다. 그날밤 사내는 한동안 입에 안 대던 소주를 한병 비웠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아버지, 오늘은 좀 취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마귀가 들러붙은 것 같습니다.

 

사내는 전화를 끊고 계집애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계집애는 한참 만에 기척했다. 이번에는 자고 있었던 것이다. 계집애의 눈꼬리에 졸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오늘은 학교에 안 가도 돼.

사내가 말했다. 계집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밥 먹자.

개다리소반을 옮기며 사내가 말했다. 계집애가 눈을 부비며 개다리소반 앞으로 다가와 젓가락을 집었다.

- 뭐 빠뜨린 것 없니?

계집애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젓가락을 손바닥 사이에 끼운 채. 사내는 눈을 감고 신께 기도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사내와 계집애는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말은 없었다.‘그 일’이 있은 후 계집애는 말을 잃었다.

계집애는 깨작거리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약 먹으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해.

사내는 계집애 앞에 놓인 그릇에 밥을 두 덩이 덜고 국자로 라면국물을 떠주었다. 면 위에 얹혀 있던 계란노른자도. 숟가락으로 터뜨리자 덜 익은 노른자가 밥알 사이로 흘러내렸다. 계집애는 노른자가 흘러내리는 모양을 멍하니 지켜봤다. 하품도 했다.‘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말했던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은 뒤로 계집애는 시도 때도 없이 졸았고 깨어 있을 때도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 밥도둑 줄까?

사내의 말에 계집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쪽방 문을 열고 나가 부엌 선반에 놓인 봉지를 가져와 계집애의 밥 위에 주둥이를 대고 가볍게 흔들었다. 깨를 섞어 볶은 김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사내로서는 대단한 선심이었다. 밥을 든든히 먹여야 했다. 계집애에게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계집애가 그릇을 비우자 사내는 바나나도 까주었다. 계집애는 바나나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야금야금 먹었다. 뜻밖의 행운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 봐 눈을 희번덕거리며. 무리 잃은 원숭이 새끼 같았다. 바나나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평소와 달리 약도 선선히 삼켰다. 파란 약 두알, 빨간 약 한알, 노란 약 한알. 파란 것은 천식약이었고 나머지는‘외상’어쩌고저쩌고 했던 의사가 처방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냐고 사내가 묻자 의사는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배웠다는 놈들은 늘 그런 식으로 말했다. 뱀 같은 혀. 미꾸라지 같은 말. 사내도 알약을 먹었다. 혈당강하제였다.

 

사내가 계집애의 눈앞에 카드를 한장씩 내밀었다. A4용지 크기의 빳빳한 카드 한귀퉁이에는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내는 계집애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폈다. 동공이 커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계집애의 눈동자를 그리 가까이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검정인 줄 알았는데 갈색이었다. 불에 구운 흙처럼 검붉은 색깔. 제 어미의 눈동자처럼. 제 머리털과 색이 다른 눈동자를 가진 가엾은 종자들.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프랑스 군대가 주둔했던 열대의 나라에서 숱하게 보았던 죽음의 빛깔. 말라붙은 피의 색깔.

어떤 사진 앞에서 계집애의 눈동자가 부풀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백주에 모습을 드러낸 악몽. 갈색의 악몽. 사내는 카드를 오른쪽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왼손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열다섯장의 카드를 모두 보았을 때 계집애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사내는 계집애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사내는 계집애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웅얼거렸다.

-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싼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서언물을 안 주신대. 싼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가슴팍에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계집애가 먹은 것을 게워냈다. 계란노른자를, 밥도둑을, 바나나를. 계집애는 뱃속을 비우고 나서도 한동안 기를 쓰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더 게워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사내는 다시 잠으로 달아난 계집애를 내려다보았다. 계집애는 누에고치처럼 웅크린 채 색색거렸다. 오른손 엄지를 입에 문 채. 병든 짐승처럼 잠만 잔다고 하자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잠으로 달아나는 거라고. 사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글로 달아나고 땅굴로 달아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잠으로 달아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무엇이 무서워 달아나는 거냐고 묻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 알아봐야죠.

며칠 후 다시 찾아갔을 때 의사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도화지에 검정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다. 검게 칠한 원통의 양끝에 갈퀴가 무성했고 갈퀴와 원통 한쪽 끝을 가르는 긴 선이 그어져 있었다. 무엇을 그린 것 같으냐고 의사가 물었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 같기도 했지만 사내는 자신이 없었다. 사내가 머뭇거리자 의사는 가로로 놓인 도화지를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리며 말했다.

- 나무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그렸더군요.

아이는 딴 세상의 나무를 그린 것일까. 사내는 그런 나무를 본 적 없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빚어진 피조물이라고 말했던 것은 대학물 먹은 분대장이었다. 포격으로 초토가 된 숲에서 홀로 푸르게 서 있던 나무를 사내는 본 적 있다. 나무는 부활한 예언자처럼 멀쩡하게 서 있었다. 기적이었고 계시였다.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전투헬멧을 벗었고 화염방사기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었다. 사내의 울음은 많은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유령처럼 일어나는 잿더미와 콩 볶는 듯한 총소리, 폭발음과 열기, 척추까지 파고드는 뜨거운 통증, 사내의 등에 돋아난 붉은 잎사귀들. 그리고 군의관의 말.

- 운 좋은 줄 알아. 화염방사기를 지고 있었다면 통구이가 되었을 거야.

나무는 기적이고 계시다. 아니다. 기적은 나무고 계시 또한 나무다. 사흘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사내는 분대장의 말을 믿게 되었다. 뱀처럼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사내는 이런 질문을 분대장에게 던졌다. 왜 나무는 다리가 하나이고 인간은 다리가 둘인가. 분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무는 다리가 하나라서 뿌리내릴 수 있어. 인간은 다리가 둘이라서 떠돌아야 하는 거야. 죽음을 맞을 때까지 떠돌다 어느 나무 아래 묻히는 거지. 한줌 거름이 되기 위해.

분대장의 말은 언제나 수수께끼였다. 틈만 나면 수첩에 뭔가를 적던 분대장은 수류탄 파편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고 귀국선에 올랐다. 어딘가에 뿌리내리기 위해.

사내는 계집애의 그림을 망연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나무. 나뭇잎 하나 피워내지 못한 검은 나무. 아이는 갈색의 악몽이 아니라 검은 악몽을 꾸는 것인지도 몰랐다.

- 이 나무는 병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검정은 죽음이나 슬픔을 의미합니다. 특이하게도 땅속의 뿌리까지 그렸군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은 하나도 그리지 않았네요. 불모. 마음이 황폐해졌다는 뜻입니다. 가지와 뿌리가 아주 흡사합니다. 그림을 백팔십도 돌려보면 까맣게 칠한 줄기도 땅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근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있습니다.

- 남근이라면?

- 남자의 성기 말입니다.

- 자지를 무서워한다고요? 내 손녀가?

- 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 왜요?

 

사내가 따로 치워둔 카드는 석장이었다. 열다섯장 중 추려낸 석장. 사내는 한장씩 유심히 살폈다. 카드 한쪽 상단에 붙은 사진을 노려볼 때 사내의 미간에 환형동물의 잘린 토막 같은 골이 꿈틀댔다. 세명의 사내애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악의라는 것을 품어본 적 없는 자들이나 지을 법한 미소. 열살짜리가 어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천진한 미래. 사내는 종잡을 수 없었다. 혹시 아이는 제 맘에 드는 놈들을 고른 게 아닐까. 계집애는 엄지를 입에 문 채 끙끙 신음을 내뱉었다.

- 괜찮아. 이젠 괜찮아.

사내는 계집애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계집애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으로 불려갔다. 알파벳이 새겨진 색색의 고무판이 바닥에 깔리고 한쪽 벽을 통째 차지한 수납장에 온갖 장난감이 가득한 방이었다. 가운을 입은 여자가 계집애와 인형놀이 하는 것을 사내는 밖에서 지켜보았다. 가운 입은 여자가 남자 어른 모양의 인형을 들고 바비인형에게 말을 붙였다. 계집애가 바비인형의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바비인형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인형이 잔뜩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였다. 가운 입은 여자가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인형을 꺼낼 때마다 계집애의 바비인형이 도리질쳤다. 바비인형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가운 입은 여자의 손에는 사내애 인형이 들려 있었다. 이제 사내애 인형이 바비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계집애가 굳은 얼굴로 사내애 인형까지 움켜쥐었다. 사내애 인형이 바비인형의 치마를 들추고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가운 입은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집애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계집애는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사내애 인형을 두개 더 꺼냈다. 천사 같은 얼굴의 인형들.

 

카드에는 많은 것이 적혀 있었다. 아이의 신상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주소, 연락처, 보호자의 이름과 직업, 가족, 친구, 장래희망. 사내애들은 모두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사내는 동과 홋수를 쪽지에 적었다. 재작년 새로 들어선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아파트단지. 멀쩡한 마을을 부수고 지은 새로운 마을. 사내가 살고 있는 쪽방촌에도 새 마을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구청에서 통보한 퇴거시한이 지난 지 보름이었다. 엊그제 가스가 끊겼다. 조만간 전기를 끊을 거라는 소문이 가파른 골목까지 꾸역꾸역 기어올라왔다. 그래도 버티면 물을 끊을 것이다. 궁전을 지어 올리기 위해. 아들놈도 어디선가 궁전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아들은 취중에만 전화했다. 아들에게는 휴대전화가 없어서 연락해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전화할 때마다 거처가 바뀌었다. 용인이라고도 했고 동탄이라고도 했고 신탄진이라고도 했고 의정부라고도 했다. 사내는 몸은 성하냐고 물었고 계집애는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사내에게는 죄송하다고 했고 계집애에게는 미안하다고 했다. 용인에서도 동탄에서도 신탄진에서도 의정부에서도 죄송했고 미안했다.

교장이 주선한 자리에서 가해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사내에게 죄송하다고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사내자식들이 호기심에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고 계집애가 칠칠맞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도 했다. 떠들어봐야 계집애의 장래에도 득 될 게 없을 거라고도 했다. 너무 당당해서 사내는 자신이 죄를 짓고 불려온 것 같았다. 보호자들 중 한명이 흰 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성의를 모은 거라면서. 보호자들의 차 앞유리에는 똑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에서 발부한 주차스티커였다.

그날밤 사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흰 봉투에는 백만원권 자기앞수표 여섯장이 들어 있었다. 새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전기도 물도 끊길 염려가 없는 곳. 사내는 흰 봉투를 앞에 두고 소주 두병을 비웠다.

-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시험을 내셨으면 답도 주셔야지요. 두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행운의 숫자가 나오면 이 돈은 제 것입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모서리가 반질반질한 두개의 주사위. 하나는 눈이 모두 육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모두 일이었다. 분대장이 주고 간 것이었다. 이런 말과 함께.

- 이 주사위의 비밀을 모르는 자에게 칠이라는 눈은 행운이겠지만 그것을 아는 자에게는 의지라네. 실은 주사위를 만든 자의 의지라고 할 수 있지. 주사위를 만든 자의 의지가 주사위를 던진 자의 손을 통해 드러나는 셈이야. 세상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네. 행운에 목매는 자, 의지를 맹신하는 자, 더 큰 의지의 도구임을 깨닫는 자. 이 전쟁은 행운에 목매는 자들과 의지를 맹신하는 자들이 벌이는 싸움이야. 행운에 목매는 자의 목이 맨 먼저 달아나지. 그다음에는 의지를 덜 믿는 자의 차례고.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 같나? 의지를 가장 맹신하는 자? 아니야. 더 큰 의지의 도구임을 깨닫는 자야.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우니까. 책임감이 없는 자들은 가족을 파괴하지만 책임감이 과도한 자들은 이 세상을 파괴하지. 나는 확신을 얻었네. 신은 이 전쟁의 무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내 한쪽 다리를 앗아갔다는 확신 말이야.

분대장의 다리를 날려버린 수류탄은 겁에 질린 신참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사내는 주사위를 높이 던졌다. 주사위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광대한 신의 섭리 안에서 길을 잃고 유전(流轉)하는 부박한 어떤 운명처럼. 주사위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개는 눈이 육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눈이 닳아서 지워졌다. 사내는 눈이 지워진 주사위를 집어 살펴보았다. 다른 면의 눈은 모두 건재했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버지, 마귀의 유혹에 귀가 솔깃했던 어린양을 용서하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무섭게 사내는 학교에 찾아갔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교장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교장은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신문을 활짝 펼쳐 들고 있었다. 흰 면장갑을 낀 채. 사내는 흰 봉투를 교장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돋보기 너머로 교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액수가 작아서 그러느냐고 교장이 물었다. 얼마가 들었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사내는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했고 교장은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내는 가해 아이들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구했고 교장은 펄쩍 뛰었다. 교장은 이런 말도 했다.

- 형제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거룩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어린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행한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뭐라 하셨습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나이다. 형제님, 부디 모든 것을 용서하시어 주님의 금과 같은 뜻이 이 땅에 찬란히 빛나도록 하십시오. 할렐루야.

교장은 사내가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뒷조사를 한 것일까. 교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장기판에 놓인 하찮은 적수의 말을 바라보는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치울 수 있는. 사내도 그걸 느꼈고 교장도 사내가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내는 교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저 바리새인을 용서하시더라도 저놈의 더러운 주둥이는 용서치 마소서. 저자는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백댄서, 성형외과 의사. 카드에 적힌 사내애들의 장래희망이었다. 사내는 나머지 카드더미에서 계집애의 것을 찾았다. 장래희망 난에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라고 적혀 있었다.

 

벌이 없으면 죄도 없다. 교장실을 나서는 사내의 마음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끓었다. 소득 없이 경찰지구대를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 열네살이 안된 아이에게는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죄는 있는데 벌은 없다니. 이것은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아니다. 사내의 심장은 용서가 아니라 폭주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벌떡댔다. 열대의 정글 어딘가에 부비트랩처럼 도사린 굴 앞에 섰을 때처럼.

땅굴 입구가 발견되면 굴 안쪽으로 수류탄을 굴려넣었다. 뭐든 새로 이름 붙이기를 좋아했던 분대장은‘군밤’이라 불렀다.‘군밤’이 굴 안쪽에서 터지면 다음은‘불나방’이 날아오를 차례였다. 깊은 어둠을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으면 더 깊은 어둠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열대의 눅눅한 어둠과 그것이 감춘 것들이 타는 냄새. 심장이 타는 냄새를 맡기도 했다. 온몸에 불이 붙어 새카맣게 타버린 주검. 작고 호리호리했던 남자는 맨발이었다. 한쪽 발에 엄지발가락이 없었다. 잘려나간 자리가 뭉툭했다. 모든 것을 태운 화염도 표정을 태우지는 못했다. 죽음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자의 허무하고 쓸쓸한 표정. 죽음 앞에도 죽음 뒤에도 다만 죽음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생이나 사랑 같은 것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 꾸는 백일몽이라고 말하는 듯한.

사내는 엄지발가락이 없던 발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부모를 욕되게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여자를 등쳐먹었을 테지.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쓰다 발가락을 잘렸을 거야. 손가락 대신 발가락을 잘라달라며 질질 짰겠지. 병신새끼. 사내는 꿈속까지 쫓아오던 발을 몰아내기 위해 남자가 저질렀을 악행의 연대기를 밤마다 머릿속에 적어 내려갔다. 남자가 엄지발가락이 없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확신하게 될 때까지. 남자는 사내가 죽인 첫번째 적이었다. 지옥 끝까지 밀쳐냈다고 믿었던 전쟁은 바로 등 뒤에 붙어 있었다. 어쩌면 사내 자신이 지옥 끝으로 밀려난 것인지도 몰랐다. 한가지는 분명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행운에 목매는 자들은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은 의지를 맹신하는 자의 몫이다. 벌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의지를 벼리며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자는 전쟁을 벌이려는 자다. 벌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도가 없으면 전쟁도 없다. 사내는 자신의 심장에서 소용돌이치는 신의 분노를 느꼈다. 이제 사내는 자신이 더 큰 의지의 도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내의 수중에는 두장의 지도가 있었다. 먼저 동네 지적도를 살폈다.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이름의 아파트단지 진입로와 출입구를 확인했다. 경찰지구대와 소방서에 붉은 펜으로 가위표를 쳤다. 눈이 침침했다. 눈앞에 거대한 가위표가 쳐진 것 같았다. 사내는 탄식을 내뱉었다.

- 아버지, 아직은 안됩니다.

사내는 문갑 서랍을 열고 만년필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채혈기였다. 일회용 바늘이 담긴 비닐팩도 꺼냈다. 비닐을 뜯고 바늘을 꺼내 채혈기 말단에 밀어넣었다. 뚜껑을 끼우자 바늘 끝을 덮고 있던 플라스틱 탭이 떨어져나갔다. 채혈기 몸통에 달린 작은 레버를 밀어 바늘이 파고들 깊이를 정했다. 바늘을 점점 깊이 찔러넣어야 했다. 피가 끈끈해져 사지의 말단에까지 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눈이 어두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 했다. 채혈기를 손가락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했다. 서랍에서 스톱워치처럼 생긴 물건도 꺼냈다. 혈당측정기였다. 일회용 채혈지를 꺼내 혈당측정기의 주둥이에 끼워넣고 피를 묻혔다. 피가 혈당측정기 안으로 빨려들었다. 삐 소리가 나더니 액정에 숫자가 떴다. 345. 사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문갑 서랍에서 인슐린 앰풀과 일회용 주사기를 꺼냈다. 마지막 인슐린이었다. 노란 고무줄도 꺼냈다. 왼 소매를 걷어올리고 팔뚝에 고무줄을 감고 이와 오른손으로 매듭을 팽팽하게 조였다. 앰풀의 목을 따고 주사기로 인슐린을 뽑아올렸다. 주먹을 쥐자 정맥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바늘을 깊이 찔러넣고 약을 주입했다. 약은 많은 것을 주었고 더 많은 것을 앗아갔다. 혼곤한 여유를 주었고 두려움과 죄의식을 앗아갔다. 열대의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내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아파트단지 상세도를 내려다보았다. 적의 근거지에 크게 가위표를 쳤다. 사내의 분노는 지도 바깥에 있었고 전쟁은 지도 안에 있었다. 의지로서의 전쟁은 지도 안에만 존재했다. 지도를 바꾸려는 외곬의 의지. 지도 바깥에는 행운을 기대하는 자들의 불행과 불행에 익숙한 자들의 불행만 있었다.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조차 죽음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육체적 죽음이든 영혼의 죽음이든. 언제나 그랬다.

 

사내는 연탄구이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얼마 만의 외식인지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소주만 비웠고 계집애는 고기만 집어먹었다. 사내는 연탄을 한줌 떼어내 비닐봉지에 담았다. 빈 소주병도 배낭에 넣었다. 사내는 계집애를 집에 데려다주고 홀로 정찰에 나섰다.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스쿠터도 집에 두고 갔다.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아파트단지 안으로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초소는 두개였다. 아파트 입구 쪽에 하나 뒷문 쪽에 나머지 하나. 경비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풀린 듯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지켜야 할 것은 제 목뿐인 것처럼. 지하주차장은 두개였고 입구에는 초소가 없었다. 사내는 주차장 안으로 잠입했다. 주차장은 거대한 땅굴 같았다. 서늘한 어둠, 띄엄띄엄 세워진 굵은 콘크리트 기둥, 천장 구석구석에 박힌 감시카메라. 사내는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를 쪽지에 적었다. 두개의 공격목표물 위치도 확인했다. 지하에 하나 지상에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아직 복귀 전이었다.

 

마침내 심판의 어둠이 밝아왔다. 사내는 계집애를 일찌감치 재웠다. 사내가 재운 것이 아니라 잠이 재웠다. 어쩌면 약이 재웠는지도 몰랐다. 사내는 부엌에 쭈그린 채 빈 소주병에 깔때기를 꽂았다. 등유가 든 플라스틱통 주둥이를 깔때기에 기울였다. 한병을 채우자 동났다. 사내는 석유풍로 위에 얹힌 냄비를 치우고 주유구의 마개를 돌려 떼어냈다. 석유풍로를 들어올려 주유구가 깔때기 위에 오도록 기울였다. 검붉은 녹이 섞인 등유가 줄줄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등유를 지켜보는 사내의 표정이 진지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실험에 몰두한 고대의 연금술사 같았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입고 있던 메리야스를 찢어 소주병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네개의 소주병을 나란히 세워놓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내가 확보한 차번호는 세개였다. 네번째 소주병은 교란용이었다. 등유가 가득 담긴 네개의 소주병은 난쟁이들이 세워올린 거대한 전쟁기념비 같았다. 부엌 한쪽에 치워뒀던 아들의 휴대용 산소용접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토치 끝에서 파란 불꽃이 너울너울 춤췄다. 전쟁을 앞두고 치르는 의식처럼. 담배를 천천히 빨았다. 의식은 계속됐다. 사내는 방으로 들어가 비키니옷장에서 군복을 꺼내 입었다. 옷이 헐렁했다. 벨트를 바짝 조였고 펄렁거리는 바짓단을 양말 안에 우겨넣었다. 점퍼를 다시 걸치고 배낭을 챙겨 방을 나섰다.

사내는 연탄쪼가리를 잘게 부숴 양은사발에 담았다. 그 위에 꿀을 떨어뜨리고 조물조물 버무려 얼굴에 발랐다. 계집애의 손거울을 보며 구석구석 발랐다. 거울에 비친 사내는 북구의 동화에 등장하는 암흑의 전사 같았다. 인간의 무기로는 죽일 수 없는 흑마술의 전사. 사내는 안전모를 쓰고 고글과 마스크도 착용했다. 아들이 용접할 때 쓰던 물건이었다. 이제 사내는 동화 속 암흑의 전사가 아니라 세계이성의 역사가 끝장난 뒤 벌어진 인류 최후 전쟁의 탈영병 같기도 했다. 사내는 소주병을 배낭에 넣고 어깨에 둘러멨다. 배낭이 묵직했다. 화염방사기라도 짊어진 것처럼.

 

공삼시, 어둠이 가장 혹독해지는 시각 사내는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이름의 아파트단지 근처에 당도했다. 아파트단지 입구에서 스쿠터 시동을 껐다. 우주의 모든 별들이 시동을 끈 것처럼 적막했다. 사내는 스쿠터를 세워두고 아파트단지 담벼락에 오줌을 갈겼다. 정글에서 그랬던 것처럼. 출동 전 대원들은 나란히 서서 적진을 향해 바지춤을 내렸다. 분대장의 지시였다. 전장에서 오줌 누다 머리에 총 맞기 싫으면 오줌보를 깨끗이 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줌줄기가 가장 멀리 나가는 사람이 선두에 서기로 했다. 분대장의 오줌줄기가 가장 멀리 뻗어갔다. 매번 그랬다.

사내는 스쿠터를 끌고 아파트단지 안으로 침투했다. 입구 초소의 경비는 책상 앞에 앉아 졸고 있었다. 사내는 어느 동 근처에 스쿠터를 세워두고 되짚어 걸어갔다. 사내에게는 그저‘어느’동이 아니었다. 장래희망이 성형외과 의사인 사내애가 사는 동이었다. 두번째 작전지역.

사내는 장래희망이 프로게이머와 백댄서인 사내애들이 사는 동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건물 앞 주차장에는 목표물이 없었다. 저녁 정찰 때 확인하지 못한 목표물. 둘 중 하나였다. 여태 복귀하지 않았거나 지하주차장에 있거나. 사내는 지하주차장 쪽으로 이동했다. 사내는 어떤 제지도 저항도 받지 않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행운도 의지도 섭리도 아니었다. 99퍼센트의 게으른 무관심과 1퍼센트의 더 게으른 무관심 덕이었다.

사내는 주차장 진입로를 타고 지하로 민첩하게 내려갔다. 주차장은 땅굴 속처럼 캄캄했다. 어둠의 심지에서 적의가 검게 타올랐다. 사내는 손전등을 켰다.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에 손전등을 겨눠 감시카메라의 위치를 재차 확인했다. 사내는 세시 방향으로 열 걸음 걸었다. 단호하고 신속하게. 주차된 차의 번호판을 손전등으로 하나씩 비추며. 열 걸음 뒤 멈추고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감시카메라는 등 뒤에 있었다. 아홉시 방향으로 열다섯 걸음 걷고 멈추며 왼쪽으로 돌아 감시카메라를 등졌다. 정찰 때 확인하지 못한 목표물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열한시 방향으로 아홉 걸음 걷고 콘크리트 기둥 뒤에 숨었다.

기둥 뒤에서 사내는 소주병을 틀어막은 메리야스 쪼가리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사내는 첫번째 목표물을 향해 소주병을 던졌다. 병이 차 전면 유리창에 부딪쳐 깨지면서 불꽃이 피어났다. 요란한 경적이 터져나왔다. 도난경보음이었다. 도난경보음은 사내의 머릿속에도 지도에도 없었다. 지도에 없는 적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사내는 지체없이 몸을 돌려 주차장 입구 쪽으로 퇴각했다. 배낭에서 소주병이 잘그락거렸다. 지상에 올라왔을 때 사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사내는 마스크를 벗고 호흡을 고르며 두번째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다.

장래희망이 성형외과 의사인 사내애의 동 앞에 도착해 주변을 살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사내는 소주병을 틀어막은 메리야스 쪼가리에 불을 붙이고 두번째 목표물을 향해 던졌다. 병이 퍽 깨지면서 불꽃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다 유리창에 수상쩍은 스티커를 붙인 차 앞으로 걸어갔다. 뿔 달린 악마의 얼굴이 그려진 붉은 스티커였다. 악마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악마의 형상 밑에 영어가 적혀 있었지만 사내로서는 요령부득이었다. 이런 문구였다. Be the Reds! 세번째 소주병을 던지고 사내는 돌아섰다. 사내의 등 뒤에서 경보음이 요란했다.

스쿠터를 타고 아파트 뒷문을 빠져나오며 사내는 중얼거렸다.

- 아버지,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 무섭게 사내가 한 일은 텔레비전을 켠 것이었다. 텔레비전은 먹통이었다. 전기가 끊긴 것이다. 사내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아침뉴스를 듣는 내내 사내의 얼굴은 삼엄했다. 뉴스가 끝나도록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아파트단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이 구겨졌다. 라디오를 끄고 사내는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 먼저 전화한 곳은 학교였다. 아이가 아파서 오늘도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계집애의 몸이 불덩이였다. 전기장판은 식은 쇠처럼 서늘했다. 내일은 방학식 하는 날이니 꼭 와야 한다고 했다. 두번째 전화를 넣은 곳은 퀵써비스 사무실이었다. 몸이 불편해 오늘도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발이 붓고 눈이 침침했다. 몸도 뜨거웠다. 뜻밖에 전화기 저쪽은 잠잠했다.

- 여보세요?

- 영원히 푹 쉬세요.

전화가 끊겼다. 사내는 끙 소리를 내며 부엌에 나가 쌀을 씻어 냄비에 담고 수돗물을 부었다. 죽을 끓일 셈으로 물을 넉넉히 부었다. 냄비를 석유풍로에 얹었다. 풍로 심지에 불을 붙이고 화력조절 레버를 최대로 밀었지만 불꽃은 시득시득했다. 등유가 간당간당했다. 모든 게 간당간당했다. 물마저 끊기면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사내는 풍로 앞에 쭈그린 채 불꽃을 주시했다. 한눈을 팔면 마지막 희망이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계집애의 죽 위에‘밥도둑’을 뿌려주었다.‘밥도둑’도 계집애의 죽을 훔치지는 못했다. 사내는 계집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펄펄 끓었다. 사내의 손이 펄펄 끓는지도 몰랐다.

-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네.

사내가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했다. 당연히 대꾸는 없었다. 애당초 대꾸를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니었다.

 

간밤의 사내에게는 세개의 차번호가 있었고 아침의 사내에게는 세곳의 병원이 있었다. 세개의 차번호 중 두개는 불탔고 세곳의 병원에는 불타는 두개의 몸뚱이가 찾아갈 것이었다. 사내는 계집애를 들쳐 업고 가파른 골목길을 더듬더듬 내려갔다. 먼저 들른 곳은 소아과였다. 늘 가던 병원은 근처 재래시장 입구에 있었지만 무슨무슨 궁전이라는 아파트단지 상가의 소아과까지 일부러 찾아갔다. 사내는 상가로 들어가면서 아파트단지 쪽을 흘끔거렸다.

소아과 대기실에는 털코트를 입은 여자 둘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내는 여자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불’이라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선물’이라는 말은 자주 들렸다. 사내는 계집애에게 주사를 맞히고 약을 받았다. 약을 받으면서 사내는 별일 없었느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별일도 다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리스마스까지 이틀 쉰다며 사흘치를 줬다. 모레가 크리스마스였다. 아들에게서는 온다간다 연락이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동탄인지 신탄진인지 용인인지 의정부인지 헛갈렸다. 전화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가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코앞의 아파트단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간밤에 다녀왔던 곳이 맞나 확인하려는 것처럼. 다음에 들를 곳은‘외상’어쩌고저쩌고 하던 의사가 있는 병원이었다. 버스를 타고 30분 후 하차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에 내려선 사내는 얼어붙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이 어둑어둑했다. 땅 밑이어서 그렇다고 사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사내는 눈앞의 어둠이 걷히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모든 것을 앗아가는 시간도 이번만큼은 눈앞의 어둠을 쉬이 몰아내지 못했다. 사내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영 빛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태어나서 한번도 품어본 적 없는 불길한 생각. 스스로 빛나지 않는 존재인 인간에게 어둠은 언제 찾아오고 언제 물러나는가. 스스로 빛나지 않는 사내에게 어둠은 찾아왔다 물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늘 있었다. 찾아왔다 물러갔다 다시 찾아오는 것은 빛이었다. 사내는 이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무처럼, 한그루 나무처럼. 말을 잃은 계집애를 등에 업은 채.

쇠처럼 단단해지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소리가 돋아났다. 발소리, 구세군의 종소리, 크리스마스 캐럴, 동전 부딪치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 짧게 들이쉬는 숨소리, 길게 내쉬는 숨소리, 눈 깜박이는 소리, 심장 덜컥거리는 소리, 운명의 주사위가 구르는 소리, 지하철에서 쏟아져나온 군중 같은 시간이 어깨를 치며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가냘프고 앳된 목소리.

- 할아버지.

- 그래.

- 할아버지, 괜찮아?

- 괜찮아.

- 할아버지, 누구 기다려?

- 응.

- 누구?

- 누구.

- 힘들어?

- 괜찮아.

- 노래 불러줄까?

- 그래.

-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싼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서언물을 안 주신대. 싼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