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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중혁 金重赫
1971년 경북 김천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이 있음. penguinnews.net@gmail.com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폭발음을 들으면서 2021394200은 우주를 생각했다. 그가 설치한 폭탄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건물의 한 층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후 그 파편을 우주 저 멀리 보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파편이 우주로 날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우주는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해져 있으니 더이상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폭약을 조금 덜 쓸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뒤늦게 들었다.
그는 자동차 안의 거울을 보았다. 두 블록 뒤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로가 긴 사각형 거울이었기 때문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2021394200은 거울을 시계방향으로 90도 회전시켜보았다. 그래도 연기의 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파편이 이미 우주에 닿았는지도 몰랐다. 우주에 도착했다면 되돌아오긴 글러먹은 것이다. 행성의 룰은 되돌아오는 것이지만 우주의 룰은 떠도는 것이니까. 그는 내비게이션을 켜서 두번째 목표물의 주소를 입력했다. 한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2021394200은 거울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시속 20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오후 5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2021394200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2021394199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삼십구만 사천백구십구.
단번에 세개의 숫자가 바뀐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숫자로 된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한시간에 1씩 숫자가 줄어드는 게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숫자로 된 이름을 싫어하지만 2021394199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신체 어딘가가 지워지는 듯한,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얼음을 가득 채운 위스키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자신이 좀더 부드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특별한 사고가 생기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 삼십구만 사천백구십구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깜빡거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라는 신호였다. 2021394199는 고속도로의 표지판을 확인한 후 오른쪽 길로 빠져나갔다. 도로 위는 안개로 가득했다. 뿌연 안개 속에는 붉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나선형으로 휘어진 도로를 따라가는 게 힘겨울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안개등이 비치는 3미터 정도밖에는 볼 수 없었다. 허공에서 희뿌연 안개가 구름처럼 펄럭였다. 2021394199는 잠깐 눈을 감아보았다.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개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오늘밤 안으로만, 아침이 되기 전까지만 모든 작업을 끝내면 됐다. 작업을 하는 데는 안개가 짙은 편이 나을지 몰랐다. 2021394199는 길가에서 식당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안개 속에서도‘커피’라는 네온싸인 글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파는 식당이었다. 불빛의 크기를 보고 작은 식당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내는 아주 넓었다. 30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술을 팔기도 했다. 손님은 20명 정도. 모두 안개를 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2021394199는 치킨 쌘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어디까지 가세요?”
열여덟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에게 물었다. 머리에는 낡은 야구모자를 쓰고 얇은 긴팔 후드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어찌나 몸이 말랐는지 옷걸이에다 옷을 걸어둔 것처럼 보였다. 2021394199는 감추어진 여자아이의 몸을 상상해보았다. 어깨와 쇄골 부분은 옷걸이가 대신하고 있고 척추와 갈비뼈 대신에 두꺼운 철사가 이리저리 얽혀 있는 몸을 상상했다. 그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뼈만 남은 시체의 몸이었다. 야구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 역시 기괴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마에서 턱까지 수십개의 흉터가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작은 촌충들이 스멀거리며 얼굴을 기어다니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누군가가 송곳으로 낙서를 해놓았든가. 왼쪽 뺨에는 10쎈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흉터가 세로로 패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모든 흉터의 우두머리 같았다. 여자아이는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넌 어디까지 가는데?”
“제가 먼저 물어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가는데?”
“몰라요. 다 처음 들어보는 장소뿐이에요.”
“네가 원하는 곳이 어디야?”
“아저씨가 먼저 얘기하세요. 내가 먼저 얘기하면 아저씨가 아무렇게나 다른 이름을 댈 수도 있잖아요.”
“내가 왜 다른 이름을 대지?”
“저를 자동차에 태워주지 않기 위해서요.”
“그럼 내가 왜 널 자동차에 태워야 하는데?”
“태워달라는 얘긴 하지 않았어요.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라면 그때 태워달라고 말하겠죠.”
“우린 아마 다른 방향일 거야.”
“어째서요?”
식당의 여직원이 치킨 쌘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왔다. 치킨 쌘드위치는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질 정도였다. 식빵은 누렇게 변질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낀 양상추는 녹색이 아니라 노란색에 가까웠다. 2021394199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맛도 형편없었다. 2021394199는 막대봉지에 든 설탕을 커피에 부었다. 설탕이 새까만 커피 속으로 유성처럼 쏟아졌다. 그사이 여자아이는 2021394199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어째서 다른 방향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2021394199는 찻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다. 검은 수면에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까만색 커피 한가운데 있던 하얀 거품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 혹시 블랙홀 체험관에 가본 적 있니?”
“아뇨.”
“모두들 블랙홀 체험관을 싫어하지만 난 한달에 한번 꼭 거길 가. 가보면 알겠지만 거긴 무시무시한 곳이야. 한번 가본 사람은 다신 안 가.”
“왜요?”
“겁나니까. 겁나게 무서우니까. 아마 오줌이 찔끔 나올걸.”
“아저씬 거길 왜 좋아하는데요?”
“거기엔 모든 게 있거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내 눈엔 별의별 것들이 다 보여. 죽음, 우주, 별, 탄생, 혼돈, 살인, 심지어 쎅스하는 사람들까지 보여. 아니, 쎅스하고 있는 내가 보여.”
“오르가슴 같은 걸 느끼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
“나한테 그 얘길 왜 하는 거예요?”
2021394199는 여자아이의 손목을 가리켰다. 뼈밖에 남지 않은 손목에 커다란 시계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너한텐 시간이 별로 없구나. 너도 그걸 알고 있고…… 얼굴의 흉터도 그 때문에 생긴 건지도 모르지. 억울해서, 화가 나서, 웃고 있는 네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멍청했어. 너는 거울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겠지.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다, 나는 이제 곧 죽는다.”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블랙홀 체험관에 가보면 도움이 될 거야. 인생을 압축해서 체험할 수 있으니까. 구질구질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지.”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난 시력이 좋은 편이야. 앞으로 100시간 남았구나. 그 정도 시간이면 뭐라도 할 수 있어. 이상한 아저씨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남자친구랑 쎅스라도 한번 더 하는 게 낫지 않겠냐.”
“웃기고 있네. 뭔가 잘못돼서 그러는 거야.”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네가 운이 없는 것뿐이야. 카드를 잘못 받은 거지. 혹시 쎅스할 만한 상대가 없는 거냐? 남자친구가 없으면 내가 소개해줄까?”
“난 안 죽을 거야.”
“확실하게 말해줄게. 넌 죽을 거야. 물론 나도 죽을 거고. 차이가 있다면 너한테는 백시간이 남았고 나한테는 삼십구만 사천백구십구시간이 남은 거지.”
“개새끼.”
여자아이는 탁자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낡은 야구모자가 흔들렸다. 2021394199는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 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렸다. 오후 6시였다. 2021394198은 선 채로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아이의 몸은 더욱 작아 보였다.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같았다.
“이제 99시간 남았네. 축하해, 두자릿수 진입을.”
2021394198은 쟁반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갔다. 손도 대지 않은 치킨 쌘드위치를 쓰레기통으로 밀어넣었다. 냅킨 한장을 꺼내 손을 닦았다. 식당 문을 나서려는 순간 여자아이가 문을 가로막고 섰다.
“좋아요, 그럼 데려다 주세요.”
“어딜?”
“블랙홀 체험관.”
여자아이 눈의 흰자위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눈이 비정상적으로 커서 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미안하지만 난 그쪽 방향이 아냐.”
“99시간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그 정도도 못해줘요?”
“네가 지금부터 걷기 시작하면 99시간 안에는 충분히 도착할 거야.”
“시간을 아껴야죠.”
“난 지금 꼭 가야 할 곳이 있어. 네 시간이 아무리 소중해도 내 방향을 바꿀 순 없어. 내가 거길 들렀다가 블랙홀 체험관에 가면 적어도 세시간은 낭비하는 거야. 너의 두시간, 나의 한시간. 그래도 내 차에 탈 거야?”
“물론이죠. 걷는 것보다는 빠르니까.”
“다른 차를 얻어 타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일 것 같은데.”
“아뇨. 전 아저씨가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2021394198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99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여자아이를 차에 태운다고 해서 작업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아이에게는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몰랐다. 여자아이가 죽은 다음에 어떤 세계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2021394198은 안개 짙은 거리로 나섰다. 안개는 더욱 짙어진 것 같기도 했고, 옅어진 것 같기도 했다. 안개의 농도가 균일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99는 모자를 눌러썼다.
“이거 피워도 돼요?”
99는 계기판 위에 놓인 담배를 가리켰다. 작은 천조각에 담배 두개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2021394198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99에게 건넸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로 씨거잭을 가리켰다.
“아저씨는 안 피워요?”
“난 작업할 때 외에는 안 피워.”
“무슨 작업인데요?”
2021394198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9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99가 내뱉은 담배연기가 안개에 뒤섞였다. 99는 씨디 플레이어를 켰다가 다시 껐다. 피아노 소리와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안개가 점령한 길은 어디나 똑같아 보였다. 노란 차선, 불빛에 드러난 검은 아스팔트, 뿌연 공기가 전부였다. 안개 때문에 목적지에 2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잠깐만 기다려. 한 30분쯤 걸릴 거야.”
“작업하시는 거예요?”
“응.”
“여기, 담배.”
99는 천조각에 놓여 있던 담배 한개비를 건넸다. 2021394198은 웃으며 담배를 받아들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조수석 앞 사물함에 있는 걸 피워. 99시간 일찍 죽고 싶으면 저 담배를 피워도 상관없지만.”
“어떻게 되는데요? 독약 같은 게 들어 있어요?”
“비밀을 알아내는 재미를 내가 뺏을 수는 없지.”
자동차 문이 닫히자 99는 씨디 플레이어를 켰다. 사라졌던 피아노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나타났다. 천조각에 놓인 담배 하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았다. 특별한 담배 같지는 않았다.
2021394198은 담배를 셔츠 왼쪽 주머니에 꽂고 주머니에 있던 가죽장갑을 낀 다음 깍지를 껴서 장갑을 손에 꼭 맞게 만들었다. 그리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움직임은 간결했다. 걸을 때도,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을 때도, 벽을 타고 3층의 창문으로 들어갈 때도 움직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장애물을 파악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의 뇌에는 세상의 모든 장애물이 표시된 지도가 들어 있었다. 그는 모든 장애물을 피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실내는 행성의 그늘만큼 어두웠다. 2021394198은 눈을 감고 가슴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작은 라디오 스위치였다. 양쪽 소매에 붙어 있던 소형 스피커에서 윙,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는 공기를 가로지르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가 벽에 부딪친 후 다시 돌아왔다. 그는 반사된 소리를 들으면서 실내의 크기와 장애물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가구가 많지 않은 집이었다. 대부분의 소리들이 매끄럽게 되돌아왔다. 그는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장애물의 위치를 파악했다. 어둠 속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였다. 2021394198은 멈췄다. 그가 멈췄는데도 공기가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손목시계의 알람 소리가 어둠을 흔들었다. 손목시계의 숫자가 2021394197로 바뀌었다. 그는 몸을 뒤틀며 칼을 피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찔렀다.
노엘-42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 깨어났다. 밝아진 게 못마땅한지 눈과 코와 입을 찌푸렸다. 빛이 그의 온 얼굴을 뒤덮었다. 2021394197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모든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집 안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2021394197이 걸을 때마다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안방의 전등 두개, 거실의 전등 두개, 드레스룸의 전등 한개, 작은 방의 전등 한개, 부엌의 전등 두개, 베란다의 전등 한개를 모두 켰다. 바닥의 먼지와 발자국과 짧은 머리카락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식탁 전등을 길게 내려뜨리는 스타일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식탁과 음식은 밝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전등갓 위쪽은 지나치게 어두워지잖습니까. 저는 전등갓 위쪽의 어둠을 바라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거든요.”
2021394197은 손을 뻗어 전등갓 위의 먼지를 닦아냈다. 먼지는 많지 않았다. 노엘-42도 전등갓 위쪽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불빛이 많아서 전등갓 위쪽이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노엘-42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날 죽일 겁니까?”
“아뇨.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간단하게 집만 폭파시킬 겁니다.”
“나는 어떡하고요?”
노엘-42는 뒤로 묶인 두 손에 힘을 주어 똑바로 앉았다. 눈자위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눈물도 조금 맺혀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타협이나 거래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돈 같은 것도 필요없어?”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BT도 당신이 죽였지?”
“네.”
“토드는?”
“여기 일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들를 겁니다.”
2021394197은 식탁 의자에 앉아 상의 왼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바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한모금을 깊게 삼킨 다음 눈을 감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담배가 다 타는 데 한 1분 정도 걸릴 텐데, 그동안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당신한테 일을 시킨, 그 빌어먹을 놈한테 이렇게 전해. 우리를 없앤다고 진실까지 덮을 수는 없다고. 언젠가는 그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질 거고, 그때가 되면……”
“죄송합니다. 저는 말 같은 건 전해드리지 못합니다. 그냥 들어드릴 뿐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느냐뇨?”
“당신이 전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다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유감입니다. 저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것이니까요.”
“대화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러면 제가 얘기를 하죠.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요. 지금은 힘드실 겁니다. 죽음의 공포란 무섭죠. 압니다. 저도 그런 공포를 많이 겪었습니다. 제 일의 특성상 삶과 죽음을 자주 넘나들다 보니 저에게는 이상한 병이 생겼습니다. 우주증후군이라는 건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우주증후군이 밀려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제가 갑자기 저를 빠져나와요. 일종의 유체이탈 같은 거죠. 빠져나와서는 지구를 벗어나고 은하계를 벗어나고 또 먼 우주를 벗어나서 어디론가 아주 멀고 크고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먼지보다도 작고 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존재가 되는 거죠.”
2021394197은 입술로 담배를 물고 연기 한모금을 뱉은 다음 양손을 벌려 커다란 우주를 묘사했다. 노엘-42는 벽에 등을 기대고 어디에도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다음이 멋진데요, 갑자기 어디선가 줌인이 되기 시작해요. 밖으로 빠져나갔던 제가 엄청난 속도로 현재의 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놀이공원의 프리드롭보다 더 빨리 지구 속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항성과 행성과 우주의 먼지와 태양과 달이 빠른 속도로 제 곁을 지나갑니다. 빠져나갔던 반대 순서로 모든 게 보여요. 하나님의 고성능 카메라로도 그 정도 줌인은 못할 거예요. 어찌나 빠른지 처음에는 먹은 걸 모두 토했을 정도니까요.”
“죽어서라도 복수할 거야.”
“제 생각에 죽는다는 건 그냥 줌아웃되는 걸 거예요. 아득히 멀어지는 거죠. 고통스럽지는 않고, 그저 모든 게 멀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부디 편하게 가시길 바랍니다.”
2021394197은 피우던 담배를 식탁 전등갓 위에 올려두었다.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가면 필터에 든 폭약에 불이 붙을 것이다. 폭약은 이 집의 모든 것을 창밖으로 밀어낸 다음 허공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아주 높이, 우주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구쳐 오르게 할 것이다. 담배 폭약의 장점은 그 층에 있는 사람을 빼고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1394197은 계단을 걸어 내려온 다음 자동차로 갔다. 차문을 열면서 노엘-42의 집이 있는 3층을 보았다. 3층 전체가 환했다. 어둠 속에 펼쳐놓은 사각의 치즈케이크처럼 환한 빛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안개는 모두 걷혔고, 바람이 선선했다.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작업은 잘 끝났어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98이 물었다.
“잘 끝나고 말고 할 게 없지.”
2021394197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300미터쯤 전진했을 때 바닥이 흔들리면서 굉음이 들렸다. 새하얀 빛이 사방에 퍼졌고 멀리서도 불꽃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몇초 후 2차 폭발음이 들렸다. 공중에서 몇줄기 빛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우와, 멋져요. 저거 아저씨가 한 거 맞죠?”
98은 고개를 돌려 불타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붉은 덩어리가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멋진 일은 아니야. 사람이 죽는 거니까.”
“죽을 만한 사람이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저씨처럼 말하는 사람이 무턱대고 아무나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요.”
“편견이 심하구나.”
“근거가 있는 편견들이죠.”
“세상에 죽을 만한 사람은 없어.”
“모든 사람은 죽을 만해서 죽는 거예요. 저처럼.”
“그저 운이야. 나는 운이 좋은 편이고, 너는 운이 없는 편이고.”
“일찍 죽는 게 운이 좋은 걸 수도 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아뇨. 아니에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블랙홀 체험관.”
“일이 다 끝났어요?”
“아니. 네 시간을 더 뺏고 싶지 않아서.”
“전 괜찮아요.”
“나도 블랙홀 체험관에 가고 싶어졌어. 8시 30분이면 문을 닫으니까 지금 출발해야겠다.”
2021394197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에 블랙홀 체험관을 입력했다. 그리고 자동운행장치를 켰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싶었다. 너무 환한 빛을 보고 나면 언제나 눈이 피곤했다. 주위가 환해지는 폭파장치 말고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폭파장치가 있다면 큰돈을 들여서라도 구입할 작정이었다. 2021394197은 반경 몇킬로미터의 공간이 완벽한 암흑으로 바뀌는 폭파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단 한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것이다. 그는 차창을 내리고 눈두덩에 차가운 바람이 닿게 했다. 바람이 동그란 눈알을 지그시 눌렀다. 98 역시 차창을 열고 모자를 조금 들어올린 다음 바람에 눈을 갖다 댔다. 양쪽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차내에서 부딪쳐 뒷자리로 흘러갔다. 두 사람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바람이 코끝을 지나갔다. 2021394197은 썬루프를 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아요.”
“다음 장면은 내가 오른쪽으로 한바퀴 구른 다음 너에게 키스하는 거고?”
“혀를 거절할 생각은 없어요.”
“키스하려다가 네 야구모자에 이마 부딪칠 걸 생각하니 벌써 창피해지는데.”
“제가 모자를 벗으면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걸요.”
“지금도 키스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삶이 98시간밖에 남지 않은 아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어때요? 구세군 냄비에 동전 넣는 기분으로 혀를 넣어보세요. 지폐면 더 좋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좋아지니?”
“아뇨. 별로예요. 제가 유혹하면 넘어가주실 거예요?”
“아마 아닐걸.”
“모자를 벗어도?”
“옷을 벗는 것보다는 낫겠네.”
어두운 하늘로 작은 불빛 하나가 천천히 지나갔다. 불빛은 반딧불처럼 계속 깜빡이며 움직였다. 느린 속도로 어둠 속에다 선을 긋고 있었다. 비행기인지 유성인지 알 수 없었다. 2021394197의 눈동자는 불빛을 따라 움직였다.
블랙홀 체험관의 마지막 입장은 8시였다. 2021394197과 98은 8시 1분 전에 블랙홀 체험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표를 끊고 돌아섰을 때 두 사람의 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2021394197은 2021394196으로 바뀌었고, 98은 97로 바뀌었다.
“시계가 너무 정확하니까 얄밉지 않아요?”
“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언제 처음 알게 됐니?”
“열다섯살 생일에 아빠에게 들었어요. 이 시계를 선물로 주더니 아빠가 울기 시작했어요.”
“많이 울었어?”
“아빠요, 나요?”
“너.”
“그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죠.”
“언제 실감이 났어?”
“지금도 실감이 나지는 않아요. 가끔 메갈로씨티의 라이프 컨트롤 쎈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말고는 대체로 평안해요.”
“컨트롤 쎈터를 부숴버린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지.”
“알죠. 그래도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결해?”
“폭죽을 쏴요.”
“사람을 향해 쏘는 건 아니지?”
“하나님이 사람이고, 저 위에 산다면, 사람에게 쏘는 거죠. 처음에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그런데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소리는 들리지 않고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어요.”
“아름답지.”
“네, 아름다워요.”
블랙홀 체험관 입구에 도착하자 안내원이 두 사람에게 입체안경을 건넸다. 한쪽은 빨강, 한쪽은 녹색 쎌로판지가 붙어 있는 조잡한 안경이었다.
“완전 구식이네.”
“구식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야.”
두 사람은 안경을 쓰고 2인용 소형열차에 앉았다. 에어백이 장착된 안전틀을 내리자 열차가 출발했다. 2021394196은 입체안경을 썼다. 97도 안경을 썼다. 열차는 곧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먼지보다 가느다란 빛들이 반짝였다. 터널 속은 수많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주의 입구 같았다. 열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런 변화가 없잖아요.”
“기다려봐.”
“한참 기다린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해.”
“지루해요.”
“지루한 게 우주야.”
“오르가슴을 느낀다더니 이런 식으로 느끼는 거예요? 아저씨 변태죠?”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수많은 빛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입체안경에 비친 먼지 같은 빛들은, 입체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씩 반짝일 뿐이었다. 열차는 그 속을 천천히 지나갔다. 걸어가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중간에 내려도 돼요?”
“우주 미아로 살아도 상관없다면.”
“실제 우주가 아니잖아요.”
“실제 우주가 아닐까? 확실해? 확신할 수 있어?”
“그럼 여기가 실제 우주란 말이에요?”
“그건 나도 모르지.”
“내릴래요.”
“조금만 더 참아봐.”
열차가 조금 빨라졌다. 점점 빨라졌다. 97은 더이상 투덜대지 않았다. 2021394196은 안경을 고쳐썼다. 열차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안경에 비친 풍경은 여러 겹의 우주였다. 공간 속에 또다른 공간이 있었고, 축구공처럼 보이는 사각형이 있었고, 바닥과 천장이 붙어 있었고, 시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97은 바닥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닥과 천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97은 오른손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다시 써보았다. 안경을 쓰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안경을 벗으면 모든 것이 평면적이어서 오히려 더 어지러웠다. 열차가 어딘가의 모서리를 돌았다. 그리고 작은 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97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은 점점 작아졌다. 97은 안경을 벗고 싶었지만 열차가 너무 빨라 안전틀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97은 눈을 감았다.
“어땠어?”
“끝난 거예요?”
“눈을 감았지?”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처음엔 눈을 감았으니까.”
“눈을 감으면 안되는 거였어요?”
“안되는 건 없어. 점점 익숙해지는 거지.”
“자주 와야겠네요.”
“맘에 들어?”
“구식이고, 엉터리 같은데다 조잡하기까지 한데, 마음에는 들어요.”
“다행이다.”
“한번 더 탈래요?”
“우리가 탄 게 마지막이었잖아.”
“맞다.”
97의 눈앞에 작은 점이 어른거렸다. 자꾸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휘 내저었다. 수많은 점들이 97의 눈앞에 잔영으로 남아 있었다. 2021394196과 97은 블랙홀 체험관 뒤쪽의 공원으로 갔다. 두 사람 모두 차를 탈 기분이 아니었고, 말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기도 했고, 어디선가 힘을 얻은 것 같기도 했다. 100이 된 것 같기도 했고, 제로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원의 작은 길을 계속 걸었다. 2021394196이 2021394195가 될 때까지, 97이 96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문자메씨지 도착하는 소리가 울렸다. 2021394195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메씨지를 확인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폴더를 닫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작업에 대한 얘기야.”
“작업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요. 아저씨 표정이 무서워졌어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자, 그럼 여기서 헤어질까? 블랙홀 체험관이 너의 최종 목적지였으니까.”
“아저씨한테 하나만 더 부탁하면 안돼요?”
“안될 거야. 너 때문에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까.”
“시간이 들지 않는 일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은 없어.”
“우주가 보고 싶어졌어요.”
“보고 왔잖아, 지금.”
“진짜 우주요.”
“나한테 뭘 부탁하고 싶은 건데?”
“우주로 보내주세요.”
“내가 어떻게?”
“아저씨는 그냥 폭죽을 터뜨리면 돼요. 제가 알아서 우주로 갈게요. 아저씨는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아저씨 하는 일이니까.”
“우주로 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화성 목성 패키지투어 신청하는 곳에 가봐.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96시간 남은 사람에게 우주여권이 발급될 것 같아요?”
“돈이 있으면 뒷구멍으로 들어갈 길이 있을 거야.”
“뒷구멍으로도 96시간 안에는 못 들어갈걸요.”
“시간낭비 하지 마. 부탁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거야.”
“시간낭비는 아니에요. 만약 아저씨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저는 당장 공중전화로 갈 거예요. 아저씨의 차 번호와 인상착의를 경찰에 얘기한 다음 지금 막 세번째 살인이 일어날 예정이라고 할 거예요.”
“믿지 않을 거야.”
“절 믿으세요. 경찰이 믿게 만들 거예요.”
“치사한 방법인데.”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수도 있어.”
“아저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일 때에도 절차와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거예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좋아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2021394195는 96을 내려다보았다. 96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문에 기댔다. 죽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2021394195는 양손으로 96의 허리를 감싸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간단하게 옆으로 옮겼다. 자동차에 타서 시동을 켰다. 내비게이션에다 마지막 작업대상의 주소를 입력했다. 96은 조수석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맸다. 2021394195는 96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렇게 죽고 싶어하는데 원하는 대로 해줄게.”
“96시간이 남은 걸 아는 사람에게 죽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질문이요.”
“어떤 질문?”
“어떤 질문이든 상관없어요. 답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저한테 필요한 건 질문이에요. 96시간이 저에겐 답이에요. 질문을 알고 싶어요.”
“저 위에 질문이 있을 것 같아?”
“모르죠. 여기엔 확실히 없는 것 같아요. 아까 블랙홀 체험관에서 그걸 느꼈어요.”
문자메씨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2021394195는 메씨지를 확인하고 폴더를 닫았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높인 다음 자동운행 모드로 바꿨다. 내비게이션에서 빨간 불이 깜빡였다. 도착지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2021394195는 셔츠 왼쪽 주머니에 담배를 넣었다. 주머니에 있던 가죽장갑을 꺼냈다. 양손을 깍지 껴 장갑을 꽉 맞게 했다. 양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없어요.”
“가족들에게 할 얘기 없어?”
“오늘 외박할 거예요. 기다리지 마세요.”
“친절하네.”
“농담이에요. 진지하시긴.”
“마음이 바뀌면 소리를 질러. 내가 듣고 있을 테니.”
“우주에 전할 말 없어요?”
“없어. 도착했다. 내 뒤만 잘 따라와.”
2021394195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96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걷고 있었다. 96은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나선형 비상계단을 잡고 옥상까지 올라갔다. 목표물은 3층이었다. 2021394195는 3층과 함께 옥상까지 우주로 날려 보내려면 폭약을 조금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텔레비전 안테나를 가리켰다.
“저걸 붙들고 있으면 꽤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건물에 있는 다른 사람도 다 죽이는 거예요?”
“아니, 목표물과 너만 우주로 날려버리는 거야.”
“목표물은 어떤 사람이에요? 우주로 날아가다 만나면 인사라도 해야겠네.”
“조심해서 잘 가라.”
2021394195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96은 웃으면서 손을 붙잡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리고 시계 좀 맡아줄래요? 아직 96시간은 더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계인데 아깝잖아요. 이것도 가지세요.”
96은 시계와 함께 야구모자를 벗어서 건넸다. 얼굴의 상처가 달빛 아래서 꿈틀거렸다.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2021394195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2021394195는 시계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시계 초침의 작은 진동을 손가락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야구모자는 구겨서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3층 창문은 어두웠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2021394195는 손가락으로 창문 아래쪽을 툭 건드렸다. 작은 구멍이 뚫렸다. 구멍으로 철사를 넣어 간단히 창문을 열었다. 2021394195는 가슴의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소형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리들이 방 안으로 침투했다.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닌 다음 그의 귀로 돌아왔다. 방 하나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2021394195는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내려섰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주방 한가운데를 지날 때 차가운 무언가가 2021394195의 오른쪽 발목을 스쳐갔다. 2021394195는 오래전 얼음물에 발을 담글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얼음물에 발을 넣었을 때도 발은 차갑지 않았다. 물과 공기의 경계선인 발목만 유독 시렸다. 2021394195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주방 불이 켜졌다. 잘려나간 그의 발이 식탁 아래쪽에 놓여 있었고, 그 위로 피가 솟구쳤다. 그의 다리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환영식치고는 너무 거창했나? 앵클 커터의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네.”
토드는 주방 입구에 서서 2021394195에게 총을 겨누었다.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앵클 커터의 스위치를 껐다. 음악 씨디처럼 생긴 앵클 커터는 허공에서 몇바퀴를 더 회전하더니 땅으로 내려앉았다.
“앵클 커터는 기계에 부딪치는 모든 소리를 그냥 통과시키지. 당신이 아무리 소리에 민감해도 그건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바닥 청소하려면 고생깨나 해야겠군요.”
“그런 걱정까지 다 해주다니 고마워. 총이나 이리 던져.”
2021394195는 주머니에 있던 소형 총을 토드 발밑으로 던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담배 한대 피우고 가도 될까요?”
“저런, 미안해서 어쩌나. 며칠 전에 담배를 끊어버렸는데.”
“내 주머니에 한개비가 남아 있을 겁니다.”
“하,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그따위 속임수에 넘어갈 거 같아?”
토드는 식탁에 놓아두었던 스캐너로 2021394195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소형 LCD창에‘안전’표시가 깜빡였다. 주머니 속의 리모컨을 꺼내 앵클 커터를 다시 작동시켰다. 작은 원반이 회전하더니 발목 높이로 떠올랐다. 토드는 바닥의 총을 집어든 다음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혹시 한쪽 발로 움직여볼 생각이라면 포기해. 네가 일어서는 순간 앵클 커터가 달려들 거니까.”
“담배 한대 피우면 그만입니다.”
“좋아, 이제 마지막 시간을 즐기라고.”
2021394195는 비스듬히 누운 채 셔츠 왼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피 냄새와 담배연기가 뒤섞여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토드는 스캐너를 들고 담배연기도 체크했다. 안전 표시가 여러번 깜빡였다. 토드는 2021394195에게 총을 겨눈 채 식탁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담배 참 맛있게 피우네. 하긴, 마지막 담배 맛은 기가 막히지.”
“혹시 우주증후군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유 있네, 죽는 마당에 퀴즈도 내고. 그게 뭔데?”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우주 끝으로 날아가버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겁니다.”
“우주 끝이 어딘데?”
“저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입니다.”
“어지럽겠네.”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겠죠.”
담배가 필터 가까이까지 타들어갔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식탁 전등갓 위 어두운 곳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2021394195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가 흥건했지만 발목의 단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주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이름의 숫자가 줄어들듯 몸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했다. 주머니에서 시계의 알람 소리가 들렸다. 손목시계에서도 알람이 울렸다. 2021394195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95로 바뀌어 있었다. 손목시계도 2021394194로 바뀌어 있었다. 2021394194는 마지막 한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폭파장치의 매캐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토드는 다 타들어간 담배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95는 옥상에서 안테나를 꼭 붙들고 있었다. 2021394194는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핏물 속으로 떨어진 담배에서 치잇,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담뱃불이 꺼지는 소리인지 폭파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95는 왼쪽 뺨의 흉터를 더듬어보았다. 2021394194는 손목시계를 푼 다음 두개의 시계를 창밖으로 던졌다. 두개의 시계는 물결처럼 일렁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시계가 고장나지 않는다면, 시계만 계속 움직여준다면, 우주에서도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2021394194는 생각했다. 95는 손가락 두개로 왼쪽 뺨의 흉터를 벌려보았다. 흉터를 벌리면 그 속에서 이상한 촌충이 기어나올 것 같았다. 담배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토드의 눈이 커졌다. 95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밝아졌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창밖으로 빨려나갔다. 창문이 깨졌고, 유리 파편이 아래로 떨어졌고, 벽이 부서졌다. 토드는 식탁의자에 뒤이어 밖으로 빨려나갔다. 소파와 냉장고가 빨려나갔다. 식탁과 의자들이 빨려나갔다. 창문 아래쪽에 있던 2021394194는 자신의 머리 위로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회오리바람이 집 안을 헤집고 다녔다. 회오리바람은 뭔가 빠진 게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놓아두고 가는 게 없는지 여러번 확인했다. 2021394194는 마지막으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창밖으로 빨려나갔다. 집 안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이 허공에 일시 정지되어 있었다. 토드는 식탁의자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지만 2021394194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고요한 순간이었다. 물건들은 행성처럼 떠 있었다. 2021394194도 하나의 별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95도 옥상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2021394194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이 너무 멀어 보였다. 허공에 떠 있던 것들이 흔들렸다. 2차 폭발이 시작되고 거대한 폭발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미사일이 발사되는 순간 같았다. 허공에 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위로 솟구쳐 올랐다. 별들은 폭죽이 되어 우주로 발사됐다. 폭발음도 별들과 함께 위로 솟구쳤다. 폭발음을 들으면서 2021394194는 자신이 가게 될 우주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