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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서유미 徐柳美
1975년 서울 출생.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이 있으며, 『쿨하게 한걸음』으로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함. kanghansae75@hanmail.net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현관문 앞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그것’이 서 있었다.‘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그것’과 나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화장을 안 지우고 잤더니 피부가 엉망이다. 번들거리는 뺨에 클렌징 크림을 찍어 바르고 문질러보지만 업무와 회식이 만들어낸 고단함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양치를 하는 동안 머리를 감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포기해버렸다.
일분 차이로 출근카드에는 지각 표시가 찍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머리를 감고 나올걸. 한 방향으로 뭉친 앞머리는 불 꺼진 판 위에 남은 삼겹살처럼 뻣뻣하고 기름지다. 손으로 앞머리를 흩으면서 지각 표시를 셌다. 오늘 지각 때문에 다음달 월차는 못 쓰게 됐다.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자고 아이와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이번에도 어기면 아빠한테 보내달라고, 아빠랑 살 거라고 울며불며 떼를 쓸 게 분명하다. 이제는 어디를 건드려야 엄마가 반응하는지 다 알고 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1차만 마치고 잽싸게 빠져나왔는데도 집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였다. 택시는 끔찍하게 안 잡혔고 장거리 손님을 태우지 못한 기사는 운전 내내 구시렁거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말이 회식이지 같이 일하던 웹디자이너가 잘리다시피 그만두는 거라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웬만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아이와 동생이 삼십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대는 통에 진득하게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는 자다가 깼는지 그때까지 안 잔 건지 잠투정을 부리며 징징거렸다.
“엄마. 나 숙제, 그림 숙제.”
아이가 들고 흔드는 알림장을 확인하니 과연 붉은 글자로 엄마와 함께 얼굴 그리기,라고 씌어 있었다. 그 글자를 보자 꾹꾹 눌러두었던 피곤이 확 퍼져나갔다.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열두시까지 봐주는 조건으로 삼만원을 주기로 했더니 동생년은 숙제도 안 봐주고 날라버렸다.
“이모한테 좀 해달라고 하지.”
“선생님이 엄마랑 하라고 했단 말이야.”
“이모랑 하면 어때. 엄마 힘든데. 숙제는 이모랑 해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딨어? 엄마랑 하는 건데. 이모가 엄마야?”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말에 뜨끔해서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스케치북을 폈다. 막상 크레파스를 손에 쥐자 아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눈이 감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그림을 대충 완성하고 나니 새벽 두시가 되었다.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겨우 옷을 갈아입으면서, 이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 순간에는 굳게 닫힌 클렌징 크림의 뚜껑을 열어서 화장을 지우는 일이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옆자리의 구는 벌써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었을 텐데 얼굴이 쌩쌩하다. 화장한 피부도 촉촉하고 새로 말고 온 머리도 컬이 탱글탱글한 게 활기차 보인다.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다음날 아침에는 머리와 화장, 옷까지 완벽하게 쎄팅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구만의 능력이다. 함께 일하는 동안 화장 안한 얼굴은 물론이고 화장이 들뜬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생일과 기념일에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배달시키는 지극정성 애인 말고도 뭇 남자들의 대시가 끊이질 않는다.
“선배. 얼굴이 왜 그래?”
“어. 좀 피곤해서.”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화장은 좀 하고 다녀. 서른 넘으면 화장하는 게 예의거든.”
“너도 혼자 애 키워봐라. 그게 말처럼 쉬운가.”
“요즘 일 잘하고 애 잘 키우고 자기관리 끝내주게 하는 씽글맘들도 얼마나 많은데. 선배도 생각을 좀 바꿔봐.”
빈정거리는 구의 말을 뒤로하고 커피부터 탔다. 진하고 단 커피가 필요했다.
출근하려고 공동 현관문을 나서는데 우편함에 흰 봉투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매끈매끈하게 코팅된 봉투는 자신이 청첩장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전 남편의 이름은 희귀 성(姓)을 가진 여자의 이름 위에 씌어 있었다. 예식일은 한달 뒤 토요일 오후 세시. 청첩장은 적당한 때 도착했으나 자신의 딸을 키우는 전처에게 알려주는 재혼 소식치고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여러모로 피로가 가중되는 아침이었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자 폐차 직전의 자동차에 겨우 시동이 걸렸다. 이대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지, 불시에 확 퍼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버텨내겠지 싶었다.
웹마스터와 구는 만들어 쓰는 화장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방부제 걱정도 없고 나한테 딱 맞는 화장품을 쓸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웰빙이 대세잖아. 만들어서 선물했는데 다들 좋아하더라고. 화장 지우는 것도 귀찮아서 쩔쩔매는 신세다 보니 스킨과 크림을 만들어 바른다는 그들의 취미가 몹시 생소했다. 그게 화장품이어서가 아니라 생산적인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구. 혹시 보약 같은 거 먹어?”
“보약은 무슨. 선배 나 아직 젊거든.”
“그러지 말고 몸에 좋은 거 있으면 소개 좀 해봐.”
“아무것도 안 먹는다니까. 내가 사무실에서 뭐 먹는 거 봤어?”
“그런데 왜 그렇게 쌩쌩해?”
“내가 뭘 쌩쌩해. 에너자이저는 저기 따로 있는데.”
구의 턱짓에 간부회의를 마친 홍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재킷 위에 씰크 스카프를 두른 차림이다.‘성공하는 그녀를 위한 스타일’같은 제목의 화보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느슨했던 커피타임이 오전업무 모드로 신속하게 전환되었다.
구뿐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에너자이저.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데다 주말에도 나와서 서너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 그 와중에 친구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해서 월 천만원의 매출까지 올린다고 하니, 슈퍼히어로 수준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별명이 홍길동일까. 공과 사의 구별이 명확해서 인간미가 없다는 평이 있지만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데다 통솔력까지 갖춰서 통합디자인팀의 팀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빈틈없는 스타일에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까지, 그녀만한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나와 동갑이지만 사회적 지위나 재력 쪽은 그녀가 훨씬 어른스럽고 신체나 피부 나이 같은 건 내가 이모뻘쯤 되지 않을까 싶다.
“디자인팀 통합이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아요. 아시겠지만 그렇게 되면 인원감축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맡은 업무에 더욱 충실해주시고 근태에 신경 좀 써주세요.”
통합과 감축에 대해 말하는 홍의 목소리는 몹시 사무적이었다. 이럴 때 홍의 팀에 속해 있는 것이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로 작용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회의수첩에 홍의 말을 두서없이 받아 적었다.
회의는 다음달에 있을 L그룹의 홈페이지 리뉴얼 작업과 신규 브랜드의 홈페이지 구축 쪽으로 넘어갔다. 홍이 말할 때마다 구가 민첩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회식 다음날인데도 두 사람 다 자세가 꼿꼿하고 의욕이 넘쳤다. 커피를 한잔 더 마셨지만 내 머릿속에 낀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회의 내내 나는 열등인, 낙오자의 심정으로 구와 홍을 우러러봤다. 두 사람 다 어제 호프집 감자탕 노래방으로 이어진 회식의 풀코스를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해장국으로 마침표까지 찍은 다음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는데, 피곤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나는 하품 때문에 쩍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무래도 저들과 나는 종(種)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연달아 터져나오는 하품 때문에 눈물이 찔끔, 비어져나왔다.
“당분간 야근해야겠죠?”
구의 말에 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의수첩에 야근,이라고 쓰고 그 옆에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라고 썼다. 그렇게 쓰고 나니 불현듯 가방에 쑤셔넣은 청첩장이 떠올랐다. 청첩장의 빳빳한 모서리가 속을 확 긁고 지나갔다.
백수 동생은 일도 못하는 주제에 꽤 많은 보수를 요구했다. 이참에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런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검색창에‘가사 도우미’라고 치자 관련된 파견업체 목록이 쭉 나왔다. 까페에 들어가서 도우미를 썼던 경험자들의 조언과 사연을 꼼꼼히 읽어봤다. 글을 읽다 보니 도우미를 써서 편하고 좋았다는 글보다 잘못 쓴 도우미 하나가 얼마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고발 같은 게 더 많았다. 자꾸 뭘 집어가는 것 같아요, 내 돈 내고 쓰는 건데 뭐 하나 시키려고 해도 눈치가 보여요, 도우미 아줌마가 온 후로 애가 욕을 하고 행동이 거칠어졌어요. 그래서 까페에 올라온 대부분의 글이 좋은 도우미를 구합니다, 가족처럼 일해주실 분 구함,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파견업체의 문구는 화려했다. 전문인력 완비, 당신이 원하는 완벽한 도우미, 친정엄마 같은 꼼꼼함, 당신에게 딱 맞는 맞춤형 써비스…… 홈페이지만 보고 제대로 된 업체를 골라낸다는 건 포장지 속에 든 선물이 뭔지 맞히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로봇 도우미의 세계’라는 이름의 싸이트를 발견한 건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클릭한 후였다. 싸이트 주소는 맨 마지막 페이지 중간쯤에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주소를 클릭하고 싸이트를 훑어봤다. 내 흥미를 끈 건 회사의 소개글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도우미를 쓰고 계십니까? 검증받지 못한 가사 도우미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로봇의 신개념, 진화된 청소로봇, 요리로봇, 베이비씨터 등 각종 로봇이 당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삶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비밀리에 이 혜택을 누리고 계십니다.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모든 써비스는 회원가입 후에 이용 가능했다. 문의사항은 메일로 접수했지만 답변은 가입된 후에만 받아볼 수 있었다. 회원가입을 누르자, 저희 회사의 가입기준은 매우 까다로우며 엄격한 심사기준을 거친 분에 한해서만 로봇 도우미의 세계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입이 거부된 것에 대한 문의는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과연 비밀리에 누릴 만한 혜택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회원가입에 필요한 사항을 입력하고 신청 버튼을 눌렀다. 로봇 도우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메일도 보냈다. 연봉이나 부동산에 대한 항목 때문에 가입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삼십분쯤 후 회원번호와 함께‘가입승인, 답변완료’라는 문자메씨지가 도착했다.
일종의 싸이보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인간과 유사하며 특화된 프로그램 장착으로 업무수행 능력은 일반인보다 뛰어납니다. 하나의 싸이보그로 가사 도우미, 베이비씨터는 물론 간단한 사무부터 디테일한 업무까지 가능합니다. 싸이보그의 종류에는 일반 싸이보그와 주문자를 그대로 본따 만든 트윈 싸이보그가 있으며, 트윈 싸이보그의 경우 발급기준이 더욱 까다롭습니다. 로봇 도우미를 통해서 새로운 기계문명의 세계를 접하시기 바랍니다.
기계문명의 세계라…… 로봇이니 당연히 기계겠지만, 기계라는 게 괜찮을까 싶었다. 인간미가 없다거나 기계문명의 삭막함이 싫다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기계라는 게 결국 인간이 관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관리를 못하면 더 골치 아파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씨스템이나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오류 때문에 싸이보그가 실수를 저질러서 생활이 엉망으로 변하는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확확 지나갔다.
업체측은 내 걱정이 기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로봇 도우미의 세계’에 있는 싸이보그들은 기계라기보다 분신의 개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업체와는 여러차례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내게 트윈 싸이보그 발급가능 판정을 내렸다.
그사이 몇군데의 도우미 알선 전문업체에서 보낸 여자들이 우리 집을 거쳐갔다. 한명은 청소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명은 아이가 무서워했으며, 다른 한명은 아이의 일주일치 간식을 하루 만에 먹어치웠다. 그래서 안 도와주는 남편보다 일 잘하는 도우미가 낫고, 말 많고 뺀질거리는 도우미보다 잘 만들어진 청소로봇이 낫다는 업체측의 말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슬슬 로봇 도우미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우울증을 앓던 도우미가 아이를 토막 내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 세상이 시끄러워진 것도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어차피 반복되는 일을 시킬 거라면 로봇이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업무만 잘해낸다면 차라리 로봇 쪽이 낫지 않을까. 업체와 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들은 내게 트윈 싸이보그 씨스템을 권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 피곤해하지 않고 여러가지 일을 잘해내서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 갑자기 정신 차리고 완벽하게 변한 사람. 이런 사람을 의심해본 적 없습니까? 그분은 저희 회사의 트윈 싸이보그를 이용하고 계실 확률이 높습니다. 트윈 싸이보그 씨스템을 이용하시는 고객 중에는 유명한 사업가나 연예인, 사회 각층에서 인정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트윈 싸이보그의 용도는 무궁무진하며, 많은 분들이 비밀리에 이 혜택을 누리고 계십니다.
트윈 싸이보그 씨스템에 대한 업체측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발급가능 판정을 받고도 누리지 않는 건 손해라고 했다. 싸이보그에게 집안일을 맡긴다고 해서 인생의 시름이 반으로 줄어든다거나 삶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흥미가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홍보문구에 나오는 그런 사람이 돼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게다가 일반 씨스템과 가격대가 비슷했기 때문에 부담도 적었다. 나는 트윈 싸이보그 씨스템 이용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발송했다.‘트윈’이라는 말은 복제라는 말보다는 확실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트윈 싸이보그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서류와 사진을 제출해야 하며 그들이 제작한 질문지에 상세히 답변해야 했다. 첨부파일의 양은 방대해서 책 한권 분량에 가까웠다. 가족, 교우관계부터 가정환경, 기질과 성격, 성향에 대한 질문까지, 그것은 거의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해 묻고 있었다. 질문의 세심함에 뭔가 제대로 만드는가 보다, 믿음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인권침해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성의없는 답변 때문에 싸이보그를 만드는 데 오류가 생길까 봐 심혈을 기울여서 답했다. 만약에 대비해 회사 조직도와 주로 하는 업무에 대한 상세파일, 동료들의 사진, 성격과 주의사항까지 보내야 했다. 질문 중에는 사진 찍을 때 어떤 포즈를 자주 취하는지, 배추김치를 썰어놓으면 어느 부분부터 먹는지, 하는 것까지 있었다.
현재 고객님의 싸이보그를 제작중이며, 사용장소와 시간, 업무내용을 미리 알려주시면 좀더 편리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문내용은 언제든 변경이 가능하며 하루 전에 미리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변경시 복장과 헤어스타일, 주의사항 등을 자세히 알려주셔야 차질 없이 이용 가능하십니다.
이틀 후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내가 아닌‘어떤 것’이 우리 집에 도착했다.‘그것’을 보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서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사진이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손님을 대하듯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라고 해야 할지 물건을 대하듯 번쩍 들고 들어와야 할지 몰라서 나는 멍하게 있었다.‘그것’은 민첩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현관문 안으로 쏙 들어왔다.
업체에서 보낸 유의사항에는 싸이보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주변 사람에게 들키지 말 것, 들켰을 경우 쌍둥이라고 둘러댈 것, 특히 가족을 조심할 것…… 기계의 결함이 아닌 경우 회사는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며…… 등의 내용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개인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인터넷 쇼핑몰에 가입할 때‘동의함’이라고 체크해야 하는 이용약관과 비슷했다.
아무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그것’은 내가 출근한 다음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고, 나는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한 후에 집에 들어갔다.‘그것’은 확실히 가사업무에 능숙했다. 집은 아이가 갖고 노는‘인형의 집’쎄트처럼 깔끔해졌다. 씽크대에는 물방울 하나 남아 있지 않고 욕실 바닥은 맨발로 들어가도 될 정도로 보송보송해졌다. 베란다 창문은 반짝거렸고 세탁물은 섬유유연제 향을 풍기며 반듯하게 개켜져 있었다. 이를테면‘그것’은 최고의 청소로봇이자 완벽한 식기세척기, 구김방지 스팀 기능은 물론 개킴 기능까지 추가된 세탁기였다. 요리 솜씨도 뛰어나서 한식은 물론 케이크와 쿠키까지 척척 만들어냈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할 일이 생길 경우 하루 전, 급한 일은 한시간 전에 업체측에 연락하기만 하면‘그것’이 잡음없이 처리해주었다.
처음 한번 놀라운 대면이 있은 후로‘그것’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와 똑같이 생긴 무언가가 아이와 함께 지내고 집 안을 돌아다니며 일한다는 기묘한 으스스함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아이와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어린이집 알림장에는 아이가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서인지 울고 짜증 부리는 일이 많이 줄었으며 어린이집 생활도 잘하고 있다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집안일과 아이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덕에 나도 회사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복되는 야근에도 지각하지 않자 구가, 선배 요즘 보약 먹어? 하고 물었다. 보약은 무슨.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청첩장 받았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 남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에서 깨자마자 대화를 나눠야 할 상대가 전 남편이라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 남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재주도 좋아. 그사이에 청첩장을 다 찍고.”
“빈정거리지 마. 저번에 말했잖아.”
하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땐 청첩장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석달 전인가 놀이공원에 가겠다고 아이를 데려가더니 늦었는데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어디야?” 전화를 걸자 “현관문 좀 열어” 했다. 아이를 안고 문 앞에 서 있는 전 남편은 놀이공원에서 아이에게 시달려서인지 오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내가 쳐다보자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애가 자서 어쩔 수 없이 올라온 거지” 했다. 변명을 늘어놓은 것과 달리 “커피 한잔 주라” 하더니 들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물을 끓이고 잔을 꺼내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아이가 자도 공동 현관문 앞에서 지윤이 데리고 올라가라고 전화했을 것이다. “좀 올려다 주면 어때서? 남의 애냐?” 내가 한마디 하면 “거길 뭐 하러 올라가”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이면 발목이 잘리기라도 할 것처럼 유난을 떨더니 그날은 웬일로 애를 안고 들어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없냐? 애한테는 부모가 다 있어야 하는데. 며칠 전에 걸려온 시어머니의 전화도 그렇고, 혹시 저 인간이 수 쓰는 거 아니야? 의심이 생겼지만 모른 척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결합은 절대 안할 거다, 결의를 다지면서.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전 남편은 손바닥을 마주 대고 천천히 비볐다. 쩍 벌린 무릎 근처에서 마주 닿은 두 손은 깍지를 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비벼지고 있었다. 그건 뭔가 은밀하게 할 말이 있다는 표시다. 결혼 전에 별 볼일 없는 프러포즈를 할 때도 이혼 이야기를 꺼낼 때도 그는 그렇게 손바닥을 비볐다. 마치 그의 고백은 손바닥의 예열에서 시작된다는 듯. 헤어진 마당에 전 남편의 버릇 같은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구질구질했지만 그런 건 헤어졌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다.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지만 전 남편은 커피 한잔을 다 비울 때까지 멀뚱거리며 손바닥만 비볐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좀 기다려봐. 넌 꼭 그렇게 서두르더라.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
뜸 들이는 네 버릇은 어떻고? 나는 인상을 쓰고 쳐다봤다. 전 남편은 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내려놓고 다시 손바닥을 비비적거렸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결혼 말도 오가고, 진지해.”
“이혼한 거 그쪽이 알아?”
전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는? 애 있는 것도 알아?”
“말할 거야.”
네가 참 말하겠다. 양육비 보낼 때마다 속 썩이고 자주 들여다보지도 않으면서. 만남은 진지할지 모르지만 애 얘기를 꺼내면 쉽지 않을걸.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비웃음의 밑바닥에는 재결합 제의를 거절할 기회를 놓쳤다는 낭패감과 저 인간이 진지한 만남을 가질 동안 나는 뭘 했나, 하는 열등감이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나를 비웃듯 청첩장이 도착했고 결혼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청첩장 봤지? 지윤이 늦지 않게 보내.”
청첩장의 아래쪽, 약도 부분에는 분홍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결혼식 때 지윤이를 화동으로 세우고 싶은데 괜찮지? 의미 있잖아. 집사람도 좋다고 하고. 드레스 고르게 토요일날 보내.
화동이라는 글자보다 집사람이라는 글자 때문에 기가 차서 코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기대하지 마.”
청첩장을 어디다 처박아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화동이고 뭐고, 아빠는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단다, 엄마랑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다시는 만나게 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점점 더 전 남편을 닮아갔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물에 불린 미역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몸살이라도 걸려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아파서는 안되는 때가 있다. 내 인생이 그런 절묘한 타이밍과 극적으로 불화하며 진행되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디어 회의와 업무분담이 있는 날 몸살에 걸릴 줄은 몰랐다. L그룹은 우리 회사의 VIP고객인데다 그 홈페이지의 리뉴얼 작업 결과에 따라서 생사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회의에 꼭 참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불덩이고 팔다리는 반쯤 녹은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수습이 안됐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고도 홍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아프단 말이에요?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늦어도 열시 반까지 출근하라는 말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트윈 싸이보그를 신청했지만 회사에 보내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리만 채우면 되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능력있는 사업가와 연예인들도 사용한다는데 별일 없을 거야. 업체에 주문을 넣으면서도 고열과 불안함 때문에 벌벌 떨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동안, 꿈속에서‘그것’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사무실 밖에 버려졌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겼다.
다음날 출근하자 홍이 나를 자료실로 불렀다.
“메인 페이지 맡길 테니까 어제 말한 대로 진행해봐요. ……평소에도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로 참여하면 좋잖아. 꼭 인원감축이라는 극약처방이 있어야만 실력을 발휘할 거예요? 이번에 L그룹건 기대할게요.”
홍의 그윽한 눈길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중대한 회의, 잘못하면 잘릴지도 모름’이라는 주문 속에는 아이디어를 내라거나 실력을 발휘하라는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위기상황이 닥치자‘잘릴지도 모름’이라는 말 때문에‘그것’이 나선 모양이었다. 업체로부터 어제의 상황을 전달받았다. 그래서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분신이라는 겁니다. 담당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메인 페이지를 따냈다는 사실보다‘그것’이 사고를 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안도했다. 어제 회의의 여파로 사무실은 술렁거렸다. 홍뿐 아니라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나의 활약에 놀란 눈치였다. 이 작업에서 밀려난 동료의 표정이 어두웠다. 생각할수록‘그것’이 홍의 신임을 얻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문제는‘그것’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내가 도저히 표현해낼 자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기대하는 아이디어를 버리고 쉬운 방향으로 갈 수도 없고, 이제 와서 사실 그건 내가 내놓은 의견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었다. 업체에서는 이 웹디자인 작업을‘그것’에게 맡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일단 회사에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담당자가 보낸 문장은 담담했다.
다음날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집에 와서 대충 청소를 해놓고 회사에 들러서‘그것’과 교대했다. 웹구축 능력도 뛰어나고 플래시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라‘그것’이 일하는 한 내가 잘릴 염려는 없어 보였다. 교대라고는 하지만 일을 한다기보다 일의 진척을 확인하는 정도라서 회사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열흘 정도면 디자인 작업은 마무리될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휴가가 생겨서 신날 줄 알았는데 묘하게 공허했다. 여유가 생기면 구처럼 화장품도 만들고 청첩장을 찍을 만큼 진지한 만남도 가질 수 있겠지, 막연한 기대를 품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집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안일에 매여갔다. 부지런히 움직여도 욕실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고 씽크대 밑에서는 바퀴벌레가 기어나왔다. 시간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주면 아이는 맛없어, 저번에 해준 거 그거 먹고 싶어, 하면서 투정을 부렸다. 좋은 점이라고는 월차를 쓰지 않고도 아이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유배지에 와 있는 죄인처럼 회사에 복직할 날만 기다렸다.
업체 쪽에서‘홈페이지 작업 완료’라는 메씨지를 보내왔다. 가사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차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출근했다. 아침 내내 흥얼거리던 노래는 L그룹 쪽에서 수정작업을 의뢰하는 바람에 뚝 끊어졌다.
“오전중에 가능하죠?”
홍이 수정할 부분을 체크해서 가져왔다.‘그것’을 불러서 교대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시간도 촉박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정을 시작했다.
결과물을 본 홍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거 수정한 거예요? 어떻게 수정 전보다 더 안 좋아. 오늘 왜 그래요? 자기답지 않게.”
내가 고개를 숙이자 홍이 가까이 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동안 과로해서 피곤한 거 같은데 일찍 들어가서 쉬고 내일 제대로 마무리해줘요.”
그 말은 마치 교대할 시간을 줄 테니‘그것’을 데려오라는 은밀한 주문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대화창이 떴다. 구였다.
선배. 오랜만에 홍한테 깨졌네. 그동안 죽이 척척 맞아서 일하더니. 근데 웬일이야? 실수를 다 하고.
빈정거리는 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메씨지를 보다 보니 구가 빈정거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홍에게 깨진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속상한 건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구와 홍에 대한 험담으로 친목을 도모했던 동료들도 나를 노골적으로 피했다. 그들 중 한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몇사람도 감원 대상으로 결정됐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오늘 좀 이상하네,라는 말을 몇번 더 들었다.‘그것’이 회사생활을 어떻게 했을지는 뻔했다.‘갑자기 완벽하게 변한 사람, 여러가지 일을 잘하는 사람.’업체가 자랑하는 그대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막막했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그건 지금 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의 업무가 바뀌는 것에 대하여 업체측의 입장은 명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뛰어난 분야에서 활약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은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현재 상황이나 회사의 분위기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충고했다.
내 메일에는‘그것’의 출근과 퇴근 시간, 일일 업무보고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이는 잔뜩 흥분했다. 내일 안 가면 안돼?라고 했다가 드레스 너무 예쁘지? 집에 갖고 와서 입어도 돼? 하면서 떠들다가 겨우 잠들었다. 침대에 누운 나는 오래오래 뒤척였다. 전 남편의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것도, 일자리를‘그것’에게 내준 요즘의 생활도 다 믿어지지 않았다. 실타래는 엉켜 있고 가위로 싹둑 자를 용기도 없었다.
드레스를 입고 뛰어다니는 아이를 얼러서 밥을 몇숟갈 먹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 남편의 결혼식에 가서 박수를 치고 밥을 먹을 정도로 속 좋은 인간은 못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이만 보낼 수도 없어서 업체에 연락했다. 주문내용은‘전 남편의 결혼식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복장과 태도.’주문을 할 때마다 내 인생의 밑바닥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까발려지는 것 같아 참담했다.
베란다에 서서‘그것’이 아이와 함께 차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정말‘그것’이 엄마라고 믿는 걸까. 엄마와‘그것’이 다르다는 걸 전혀 모르는 걸까. 왜? 왜 모르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을 틀었지만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에 갈 수도 없었다. 거기에는 대리로 승진한‘그것’이 처리할 일만 쌓여 있었다. 집 안을 서성거리다가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 썼다. 잠깐 보고 온다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아는 얼굴을 만날까 봐 사람들 틈에 숨어서 결혼식을 지켜봤다. 화관을 쓰고 드레스를 입은 아이가 바구니 안에 든 꽃잎을 뿌리면서 입장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사람들을 보면서 생긋생긋 웃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다. 아이 때문인지, 결혼하는 게 신나서 그런지 뒤따라 들어가는 전 남편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그 둘의 얼굴이 몹시 닮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지만, 드레스를 입은 아이의 모습은 공주처럼 예뻤다. 보고 있자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이가 꽃잎이 다 떨어진 바구니를 하객 쪽으로 던지는 바람에 식장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당황한 아이가 두리번거리자‘그것’이 번개같이 출동해서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나는 튀어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엄마가 나타나서 구해주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이는 하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손짓에 한복을 입은 노인네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자신의 전 남편이 아니라서 그런지‘그것’은 순서가 끝날 때마다 오늘의 주인공인 부부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식이 끝난 후에는 다정하게 인사까지 나누었다. 아무래도‘전 남편의 결혼식에 가는’이라는 주문이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입력된 것 같았다.‘그것’의 행동은 할리우드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전처의 축하에 전 남편 부부는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저런 행동이 나답지 않다는 걸, 나라면 절대로 저럴 수 없다는 걸 저 인간은 정말 모르는 걸까. 달려가서 따지고 싶었지만‘그것’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식장을 빠져나왔다.
걷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한참 동안 걸었다. 화창한 토요일인데다 주변에 예식장이 몇군데 더 있어서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과장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그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객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다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여자는,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여자는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거리를 좁혀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지? 생각하는데 나를 발견한 여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그리고 존재를 감추려는 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여자가 허둥대며 내 옆을 지나갈 때 누구인지 떠올랐다. 반쯤 지워진 얼굴로 걸어가는 여자는 바로, 홍과 똑같은 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