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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진정 물어야 했던 것

지난호 특집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손정수 孫禎秀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미와 이데올로기』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 등이 있다. sonjs@kmu.ac.kr

 

 

1. 원론적 물음의 의미

 

현상황에서‘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창작과비평』 스스로가 지난 2008년 겨울호 「책머리에」서 밝힌 이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참된 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고 방향감각을 일깨울 수 있으며, 그런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문학인들 스스로 발본적인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5면)이라는, 그야말로 원론적인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제에 대한 해결의 모색을 다섯편의 글에 분담하여 제시하는 것이 창비 지난호 특집의 구도였다고 파악된다. 실제로는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는 총론에 소설과 시 장르별로 현재 한국문학의 상황을 점검하는 각론을 더하고 여기에 한국문학과 연관된 외부의 두 타자, 그러니까 해외이면서 주변부인 브라질의 경우(한국의 타자인 브라질의 문학)와 인문학 내에서의 인접 영역인 철학의 시선(문학의 타자인 한국의 철학)을 참고항목으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던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씌어진 백낙청(白樂晴)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한기욱(韓基煜)의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진은영(陳恩英)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김상환(金上煥)의 「대과(大過) 시대의 글쓰기」,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의 「주변성의 돌파」 등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후속 논평인 이 글 역시 특집 구도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 논평에서 그 다섯편의 글 모두가 골고루 다뤄지면 좋겠지만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고 제한된 지면을 생각하면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문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의한 백낙청과 한기욱의 글을 주요하게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문제와 관련하여 나머지 세편의 글이 갖는 의의는 글의 마지막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할 것이다.

 

 

2. 초심을 돌아보는 일에 얽힌 미망

 

총론에 해당하는 백낙청의 글에서 이 특집의 좀더 구체적인 의도와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촛불시위를 둘러싼 정치적 국면에 대한 문학적 반응과 그 문제점을 점검하면서 그와같은 현실의 변화에 대응하는 문학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출발한다. 여기에서‘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특집의 제목이 계몽적인 교설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문학의 존재근거를 새롭게 묻는 질문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그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민족문학’논의도 그 참뜻은 이런 물음의 실행에 있었다. “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라는 물음은 곧‘민중 현실이 도대체 어떠하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이기에 문학에 대해 그런 물음을 던지는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있었고, 이 두 물음과 동시에 씨름하면서 그 과정을 작가 또는 독자로서의 문학적 실천을 통해 전진시키려는 것이 당시의 민족문학운동이었다. 물론 시대와 사회현실에 대한 정답을 쉽게 내린 뒤 그로부터 문학에 대한 답을 연역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특히 광주의 참극을 겪고 난 80년대의 급박한 상황에서‘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 각종의 정답주의가 민족문학론의 이름으로 성행했다. 그러나‘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고자 하는 초심을 간직한 민족문학론을 아주 밀어내지는 못했다.(18~19면)

 

이처럼 백낙청은 민족문학에 대한 규정을 주관적인 의도(‘참뜻’)나 의지(‘초심’)로 대치하고 있다. 반면‘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의 경향에 대해서는 그 한 편향을 부각하면서‘정답주의’라고 쉽게 단정을 내리는데, 이런 손쉬운 단정이야말로 자신의 주장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백낙청 식으로 민족문학론을 의도나 의지로 설명한다면,‘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의 주장 역시 민족문학론 못지않은 공공적이고 이타적인 의도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장들에 이런저런 한계가 있었다면 민족문학론의 한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다. 앞에서처럼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에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면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실제로 그는 같은 대상을 두고 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 결과 80년대의 세대론은 상업주의에 의한 활용이 없지는 않았으나, 상업주의의 전면화를 견제하면서 민족문학 담론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동시에 편협한‘진영’담론의 형성에도 일조했으며, 줄곧‘소시민적 민족문학론’으로 공격받은 좀더 유연한 민족문학론으로서는 자기쇄신을 위한 값진 자극도 얻었지만 몹시도 고달픈 연대가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1

 

2000년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백낙청이 “‘민중적 민족문학’‘민주주의 민족문학’‘노동해방문학’‘민족해방문학’등 다양한 이름으로 제기된 80년대의 세대론적 성격을 겸한 급진운동론”에 대해 내린 이같은 평가가 이번 글에서의 그것보다 오히려 균형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초심을 되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주체에게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주관적인 감격이 무의식적으로 동반되곤 한다. 이 글이 진정으로 발본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했다면 초심을 돌아보는 순간에 발생하는 그와같은 미망까지도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한편 윤영수(尹英秀)의 『소설 쓰는 밤』과 박민규(朴玟奎)의 『핑퐁』에 대한 감상을 기술하는 뒷부분은 그렇게 설정된 물음에 대응하는 최근 한국문학의 대표적 사례들을 분석하는 자리로 의도된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례를 내놓지도,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수행하지도 못한 채 소설의 줄거리를 산만하게 제시하거나 환상문학에 관한 최근 평론들을 길게 논평하는 등 자주 논점을 빗나가고 있다. 독서과정의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객관적 지평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의도했던 목적과 달리 독자들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단편적인 감상의 집적과 나열처럼 느껴지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는데, 백낙청의 이 글 역시 그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기존 입장의 요약과 재확인을 거쳐 그의 논의가 도달하는 지점은 논리의 비약을 감수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차원의 현실인식과 전망이다.

 

아무튼 촛불이 한국과 한반도에서 후천개벽의 진행을 실감케 했다면 미국에서 시작된 2008년의 금융시장 파탄과 전지구적 경제위기는 선천시대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확인해준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분야에서‘다음은 무엇?’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모색할 때이며, 이런 시대에 문학이 과연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 물을 때이다.(38면)

 

여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예언가적 현실파악도 구체적인 근거를 결여한 채 주관적 판단에 의거한 막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다시 문학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그 과정에 다소간의 논리적 비약을 포함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2 가령 촛불시위가 최근의 정치적 상황변화에서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반도에서의 후천개벽의 진행을 실감케 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처럼 타당성에 대한 점검도 이루어지지 않은 전제로부터 성급하게 논증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논리적 추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식의 현실진단과 대안 탐색이 과연 그가 주장하는 리얼리즘의 태도와 부합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문학 분야에 한정해서조차 무슨 예언을 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3이라고 그 역시 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무비판적 수용의 댓가

 

백낙청의 글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에 대한 방어적 성격이 강한 반면, 한기욱의 글은 창비진영 바깥의 비평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두 글이 설정하고 있는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백낙청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을 재확인하면서 리얼리즘 계열 소설의 성과(윤영수)를 제시하는 한편 최근의 실험적 경향의 소설(박민규)을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한기욱 역시 자신이 제시한 바 있는 이른바‘6·15시대의 문학’론을 자기변론하면서 리얼리즘 계열 소설의 성과(공선옥, 정도상)를 확인하는 한편 최근의 실험적 경향의 소설(강영숙, 김사과, 황정은)에서 리얼리즘적 요소를 찾아내려 한다. 백낙청이 80년대 세대의‘정답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면, 한기욱은 2000년대 세대의‘새로움에 강박된 비평’을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구도의 동일성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을 보자.

 

권성우가 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백낙청의 높은 평가를 무슨 다른 저의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도 이런‘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탓이 아닐까 싶다.(46면)

 

한기욱의 글은 백낙청의 주관적 성향이 농후한 판단이 창비 내부에서 마치 객관적이고 반성될 수 없는 것처럼 공고화되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앞의 인용에서 한기욱이 권성우(權晟右)를 비판하는 근거는‘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권성우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이 논증할 필요조차 없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박민규 소설에 대한 백낙청의 평가를 의심하면 그는‘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된다. 정작‘코드화’되어 있는 것은 이런 식의 무반성적인 의식구도에 갇혀 있는 한기욱 자신이 아닐까. 민망하게도 이 한 대목만 그런 것이 아니다.

 

‘투명한’현실의 재현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단련된 작가와 비평가의 상식이거니와, 리얼리즘 작가들이‘재현주의’적 발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예술적 분투의 과정을 소설화한 사례도 여럿이다. 이론 쪽에서도 리얼리즘의 핵심은‘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르렀는가 여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44~45면)

 

이 단락의 끝에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8면 참조. 백낙청은 여러 군데서 리얼리즘 예술의 핵심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님을 분명히했는데, 자세한 논의로는, 백낙청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1996년 하반기호 참조.(45면 각주 5)

 

이것은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이론 쪽에서도 리얼리즘의 핵심은‘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르렀는가 여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에 달린 주석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이론 쪽’이란 표현은 백낙청의 글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셈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어떤 이론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론이 백낙청의 글 속에 있다는 믿음이 그의 무의식에까지 잠복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1991년 한 잡지사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대한 보충토론으로 제출된 4면 분량의 짧은‘단상’인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실천문학』 1991년 겨울호)은 그런 이론적인 글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글에서 백낙청이 말하는‘시’란 바로 『논어』에 나오는‘시삼백 일언이폐지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에서의 그‘시’이고 따라서‘시의 경지’는‘사무사’의 객관정신이 투철하게 관철된 경지를 이르는 것이다.‘좁은 의미에서의 시’의 경우 전형성과 현실반영 같은 장편소설의 기준을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글에서의 백낙청의 주장인데, 그는 소설과 시의 장르적 차이를 관통하는 리얼리즘의 본질을 추구하면서‘지공무사(至公無私)’나‘사무사’같은 동양적 개념을 끌어들였고 그것을 통해 좁은 장르적 테두리에 집착하는 관념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 글에서‘좁은 의미로서의 시’를 따로 구분해두고 굳이 작은따옴표를 써서‘시’혹은‘시의 경지’라고 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비유적으로 제시된‘시’라는 개념의 유효성이 그것이 발언된 맥락을 떠나면 온전하게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그 맥락이 변화함에 따라 개념의 내포가 굴절되는 현상은 백낙청 본인에게서도 확인된다.

 

서두에 말했듯이 평론 「외계인 인터뷰」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시에 대한 논의를 소설로까지 확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소설 또한‘시의 경지’에 달할 때 비로소 언어예술의 한 장르로서 그 고유한 몫을 다할 수 있다는 나의 지론과도 통한다.4

 

이장욱 평론의 매력이 자신의 지론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낙차는 미처 메워질 겨를이 없다. 이 단락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평균성과 다른 전형성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작품의 유기적 일부로서만 주어지며 그 성패는 바로 작품이‘시의 경지’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느냐는 문제 자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졸고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8면)5

 

백낙청의 최근 글에 다시 등장한‘시의 경지’라는 개념이 시간의 격차로 인해 그 원래의 맥락에서 조금 벗어난 사정을 언급했는데, 그것이 한기욱에 의해 차용되면서 원래의 맥락은 약화되고 오히려 부차적인 맥락이 그것을 대신하는 사태가 초래되고 있다. 그가 글의 중반에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두고 “‘고해 같은 세상살이’속에서도‘살아 있음’자체가‘생생한 기쁨’임을 깨닫는 사심 없음의 경지랄까. 문학이란 이런 삶다운 삶이 실현되는‘시적’인 순간의 설렘과 떨림을, 고해 같은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아닐까”(52면)라고 이야기할 때는‘시적 경지’라는 개념이 불안하게나마 그 비유적 내포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최근 소설의 성과를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서의‘시’가 백낙청이 애써 구분한‘좁은 의미의 시’로 단순화되어 적용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한기욱이‘이론 쪽’의 논의를 그 맥락과 더불어 비판적으로 살폈다면‘시적 경지’란 개념을 그처럼 일면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소설을 분석하기 위해 작품 속에서 시적 요소를 찾는 에피소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정은은 시인처럼 언어의 경제성, 운율과 주술적 효과, 활자의 배치와 모양새에 빼어난 감각을 지녔다. 황정은 소설의 새로움이 있다면 아직은 주로 여기에 머물러 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소설들이 얼마간‘시적 효과’를 지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분적으로‘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과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른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황정은 소설 가운데 후자에 육박하는 작품은 산문적인 요소와 시적인 요소, 냉철한 현실인식과 주술적인 언어구사가 매끄럽게 결합된 「무지개풀」이다.(61면)

 

황정은 소설을 분석하는 마당에 시인과 같은 감각을 지녔다거나 시적인 요소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그 평가의 근거로 제시하는 뜬금없는 상황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공선옥(孔善玉)의 소설 「영희는 언제 우는가」를 고평하면서 “여러 인물의 말들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화음 효과에, 산문의 언어와 운문의 언어가 어우러져 음악성을 획득하는 현상에 주목”(64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소설에서 시적인 요소와 특성을 분석하는 작업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 그러한 방법은 장르의 관습을 넘어 개성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기욱의 경우처럼 백낙청의 논지를 오해하여‘시적 요소’의 현시가 리얼리즘의 불가결한 요건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그가 권위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 주체적이지 못한 댓가일 것이다.

 

 

4.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낙청의 글과 한기욱의 글은 창비가 직면한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데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방향 설정을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창비가 다양성을 증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획일적·폐쇄적이 된 탓이 크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 과정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90년대 후반 진정석씨의 문제제기(96년 11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주최 학술대회 발표 「민족문학과 모더니즘」 및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모더니즘의 재인식」)로 촉발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은 제법 세인의 관심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윤지관·김명환씨 등의 결연한 리얼리즘 옹호가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론의 획기적 자기쇄신이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힘들며,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한국의 모더니즘 운동에 대한 관심의 환기라든가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의 모더니즘론의 도입을 크게 넘어서는 공헌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민족문학이 문자 그대로 사이비 국제주의에 휩쓸려버리는 사태까지는 안 갔어도, 민족문학론의 문제의식이 흐려진 것이 사실이다.6

 

90년대 후반에 리얼리즘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논의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시각 설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을 평가하는 백낙청의 관점이 이 인용에 나타나 있다. 그는 창비 내의 혹은 창비에 동정적인 입장을 가진 젊은 비평가들이‘세인의 관심’속에서‘결연한’태도로 수행했던 이 일련의 논쟁을 두고 리얼리즘의 쇄신이라는 측면에서도 성과가 미약했을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오히려 민족문학론의 문제의식을 흐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식의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는 창비 내부에서의 활발한 의견 개진을 장려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창비의 대응은 구성원들 사이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서라기보다 백낙청 한 개인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요구가 뒤따르는 건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인용자)은 90년대적 탈주서사의 한 극점이라고 할 만하다. 자, 이 작품은 과연‘분단시대 민족문학’의 깊이와 넓이 안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일까. 백낙청의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좀더 분명히해주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아쉬움 때문에 이 글에서의 창비적 체취의 부재를 들추어 말한 것이다.7

 

사실 배수아(裵琇亞)나 박민규는 창비가 기존에 추구해온 문학적 방향에 비춰보면, 물론 반드시 대치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리 자연스럽게 수용되기 쉬운 작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갖춘 상황이었다면 배수아나 박민규의 소설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자유롭게 제출되고 그에 대한 논의도 충분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낙청이 배수아, 박민규를 고평하면서 그들의 소설을 민족문학의 성과로 추인하는 과정에서 그같은 의견 개진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배수아의 경우에는 앞서와 같은 김명인(金明仁)의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백낙청의 반응은 다음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의 창비적 체취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있는 김명인이니만큼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나는 『책상』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김영찬이 상정하는‘창비 고유의 독법’에 딱 들어맞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찬은 “이 소설의‘서사(敍事)’를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 보여준” 나의 자세한 읽기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것이 예의 창비적 독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소설에 대한 과람한 대접은커녕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이 과연 작품에 대한‘충분한 대접’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8

 

김명인의 비판을 백낙청이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인용에서 감지된다. 그는 자신의 논지에 대한 김영찬(金永贊)의 비판을 가지고 김명인으로부터의 물음을 덮어두고는 김영찬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으로 바로 넘어가버린다. 결과적으로 좀더 분명한 해명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같은 과정은 창비가 현재의 경색된 의사소통 상황에 도달하게 된 원인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창비 내부에서의 비판적인 의견 개진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또다른 논자들에 의해 종종 지적되었던 것처럼, 전체적인 논의의 폭 역시 서로 관련되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하고 있다기보다 크게 대립되는 두 방향이 불편하게 동거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다.9 그리고 이런 분열은 창비의 정체성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5. 허구적인 이분법의 구도

 

창비의 논자들이 자꾸만 이분법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그와같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관념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적인 문학과 비현실적인 문학,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 새것에 강박된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 등등의 대립구도를 계속 생산해내면서, 자기 자신을 그 구도의 한쪽 극에 위치시키는 한편 다른 문학적 경향을 한꺼번에 그 반대편에 집어넣고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와같은 이분법적 구도는 지금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기욱은 이번 글에서 이른바‘새로움에 강박된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혐의를 씌우고 있는데, 사실 그 자신이 분석하는 작가들의 목록 역시 그가 비판하는 다른 비평가들의 글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10

넓게 보자면 새것에 대한 강박은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봐야 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점에서는 창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느 시점 이후 창비라는 출판자본의 운영방식이 그렇고, 백낙청의 배수아나 박민규 소설에 대한 편향 역시 넓게 보면 그런 강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걸린 비평가들과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을 대립시키는 구도는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소거한 후에야 가능한 허구적인 것이다. 최근 소설의 한 경향이‘한국소설은 항상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단선적으로 이행한다’고 생각하는 선조적인 인식을 해체하고 있다는 나의 진단(「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 『자음과 모음』 2008년 가을호)을 한기욱이 정반대로 오독한 것 역시 그가 이런 허구적인 구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의 대립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허구적이다. 한기욱은 그의 글에서 내가 리얼리즘을 투명한 현실의 재현으로 규정한다고 엉뚱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 글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더니즘도 그렇고,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더더욱 더이상 한 작가나 유파에 독점적으로 귀속된다고 보기 어려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일이 주를 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한국소설은 이미 남성 지식인 중심의 사회적 시각을 벗어나 다양한 계층과 성별, 연령의 목소리를 담는 방향으로 이행해나가고 있고, 고립된 자아의 내면적·내성적 미의식을 통과하여 소통과 공존의 가치를 탐색해나가고 있다. 물론 이 새로운 경향 역시 이전 시대 문학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요소가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영역을 굳이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라는 고전적 권위의 틀에 다시 가둘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한편 현실적인 문학과 비현실적인 문학의 구분은 어떤가.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남성 지식인들이 마주했던 공동체의 사회적 현실과 다른 층위의 현실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표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왔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그와같은 현실/비현실의 대립은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새로운 어법,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과 발명은 이전 것들을 부정하며 감성적 불일치를 주장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충분히 격렬한 것이 아니었다”(진은영83면)고 반성되어야 할 여지가 2000년대의 한국시뿐 아니라 소설과 비평에도 함께 있을 것이나, 거기에서도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문학 텍스트와 다른 사회적 텍스트의 끊임없는 접합’이 시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배수아, 박민규 소설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문학관의 대립이라기보다 이렇듯 주체가 놓인 다른 상황으로부터 발원한 현실의식과 미적 감수성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입장에 놓인 의식에는 바라보는 대상이 다른 경우가 많고 설사 같은 대상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이 차이는 현실적인 근거로부터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자세히 읽기’의 독법 같은 것에 의해 쉽게 장악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야말로 대화적 관계를 위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차이가 나고 때로 대립되는 비평의식은 특정 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각자의 관심과 지향에 따라 문학의 서로 다른 부면을 밝힐 수 있다. 반드시 하나가 되거나 같아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창비야말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해야 한다거나 모든 좋은 작품을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비평적 관심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육성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국문학의 정치적·사회적 잠재성을 실현하는 데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6. 진정 물어야 했던 것

 

현재 한국문학은 이전 시대의 문학에 비해 사회성·역사성이 매우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 경향에서 생산된 작품에 부여되는 상징적 가치는 약화되었고 한국문학이 보유했던 현실 참여의 적극성 역시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러한 기형적인 사태에 대한 책임이 과연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소설적 실험에 주목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던 평론가들에게만 있을까? 그들을 비판하느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 역시 그 새로운 경향을 좇아가느라고 허둥대는 동안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념적 방향에 부합하는 작가와 작품 들의 가치를 해명하고 부각하는 일을 돌보지 않은 창비의 잘못이야말로 결코 작지 않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창비의 지난호 특집은 기왕의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의 공적을 확인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외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데 치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창비 내부와 외부의 비판을 되짚어보면서 창비와 한국문학의 문제점을 자성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것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창비에 소통의 의지는 분명하게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효과적이었는지 점검해볼 필요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창비 내부와 외부의 논쟁을 통해 오히려 대화적 관계가 증진된 경우보다 결과적으로는 기왕에 공유하고 있던 영역조차 증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분화된, 변화한 사회적 상황에서 문학의 위상은 예전과 같지 않다. 제한된 영역에서 작은 차이를 키워가며 편을 나누어 소모적인 논쟁을 공전시키기보다 문학이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좀더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을 위한 의견을 모으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창비를 비롯한 한국문학을 담당하는 모든 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발전시켜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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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낙청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15면.
  2. 백낙청 비평에 논리적 비약이 잦다는 점은 일찍이 이광호(李光鎬)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다. 이광호는 백낙청의 주장이‘이데올로기적인 선문답’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그러한 태도가 “문학 텍스트의‘현실성’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은, 다시 말하면 2000년대 문학의 최소한의‘물질성’에 기초하지 않은‘무중력의 비평’”(이광호 「‘2000년대 문학 논쟁’을 넘어서」, 『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256면)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종교적 틀까지 사용되면서 그와같은 성격이 오히려 강화된 면이 있다.
  3. 백낙청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211면.
  4. 백낙청 「외계인 만나기와 지금 이곳의 삶」,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 334~35면.
  5. 같은 글 335면 각주 11.
  6.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22면.
  7. 김명인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266면.
  8. 백낙청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창작과비평』 2004년 겨울호 261면.
  9. 이광호 「‘2000년대 문학 논쟁’을 넘어서」 255면 각주 13; 김형중 「부재하는 원인, 갱신된 리얼리즘」, 『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272면, 각주 11 참조.
  10. 사실 강영숙, 김사과, 황정은 소설의 문제성은 이미 그가 비판하는 비평가들에 의해 앞서 발견되고 더 구체적으로 분석된 바 있다. 그는 그 분석들을 비판하면서 “낯선 서사에 대해‘새롭다’고 환호하기보다 그 낯섦이나 새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짚어보려 한다”(57면)는 의욕을 밝혔지만 실제로는 “한유주를 제외하는 것은 앞의 두 작가(김사과와 황정은-인용자)의 소설은 낯설지만 상당한 재미가 있는데, 그의 소설은 완독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57면)이라는 식의 주관적인 분류를 기초로 해 “김사과 소설의 새로움이 있다면 이 절규의‘포스(force)’에 있다”거나 “황정은은 웬만한 일에는 시큰둥하고 심드렁하며 항시 서늘한 소설가이다. 또한 대단한 스타일리스트이며 언어를 다루는 단수가 높다”(60면)는 식의 소박한 감상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11. 그런 의미에서 창비의 지난호 특집에 실린 나머지 세편의 글은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위한 방향을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진은영의 글에서 제시된 자끄 랑씨에르의 감각적 분배의 재편에 대한 사유는 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에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고 생각된다. 김상환의 글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다양한 대상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창조적인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호베르뚜 슈바르스의 글은 주변부가 공유하는 문학적 특징에 착목함으로써 새것에 대한 강박에 경사되지 않으면서 우리 고유의 궤도를 차분하게 찾아나가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