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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주제 싸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 2002
‘눈’은 왜 존재하는가
윤이형 尹異形
소설가 janejones@naver.com
2009년 대한민국에서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참혹한 경험이다. 그것은 마취제도 없이 수술대에 올라간 환자가, 제 환부가 잘리고 뜯겨나가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목도해야 하는 것과 같다. 백색 실명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원인이 잠재했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으나 지난해 이 나라를 휩쓸며 표면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해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우리는 이 책을 펴는 순간 데자뷔(déjà-vu)처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온세상 사람이 모두 눈이 멀고 만다는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 정영목 옮김)의 설정은 참으로 완고하고 요령부득인 신의 심판처럼 보인다. 이 신은 마치 구약의 하나님처럼 뜨거운 분노에 차 있지만 그것을 숨긴 채, 모든 인간을 실명이라는 평등한 재앙에 밀어넣고 현미경을 통해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한다. 사람들은 두 눈이 멀쩡하던 때는 알지도 못했던 사실-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의 90퍼센트 이상이 실은 시각이라는 한가지 감각에 의존해왔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 절대적인 재앙 앞에서 단지 발가벗겨진 채, 울고 신음하고 피 흘리며 네 발로 기어다닐 수 있을 따름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습관이어서, 최초의 공포와 충격이 잦아들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을‘보는’자신의 시선만큼이나 자신을‘보아주는’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고 숨 쉬는 존재다. 삶을 향한 그들의 희망이 얼마나 숭고하든 간에 그 숭고함을 목격하고 확인해줄 시선이 사라지자 그들은 조금씩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며 부끄러움을 잃어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실명 바이러스를‘처리’하기로 한 정부에 의해 눈먼 자들과 보균자들이 각각 격리수용되면서, 또한 더 많은 환자들이 수용소에 몰려들어오면서 약탈과 폭력, 강간과 죽음, 비위생과 질식할 듯한 독기로 점철된 본격적인 지옥도가 펼쳐진다.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배설물이 온 복도를 가득 뒤덮은 수용소에서, 수치심이 생존보다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과연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이제 사람들은 옆 침대에 누워 있다 죽은 사람들을 묻고 나서 음식을 먹을지 아니면 음식을 먹은 다음에 묻을지를 결정해야 하며, 옆 병동의 깡패들에게 강간의 상대로 자기 아내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식량을 얻어내야 하는 수준으로까지 추락한다.
후속작 『눈뜬 자들의 도시』와 달리 주제 싸라마구(José Saramago)는 이 작품에서 사회나 조직보다 개인에 집중한다. 사람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찌나 집요하고 도저한지, 한명의 독자로서는 이 시선을 따라가 타인의 더러워진 나체, 비굴한 선택들과 생존에 대한 은밀한 욕망들을 만나는 일이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96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들이 실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잔인한 지옥을 창조해낸 작가는 선함 속에도 반드시 악함이 있듯, 악함 속에도 반드시 선함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한다. 눈먼 자들은 자신 속에 들어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목격당한 적 없던 의외의 면모들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 보인다. 도덕적으로 가장 문란할 것 같았던 자가 가장 크게 수치심을 느끼고, 가장 교육받지 못한 자가 가장 지혜로운 말을 하며, 전혀 매력이 없던 노인이 이성에게서 가장 사랑을 받고, 가장 연약해 보이던 사람이 강철 같은 용기를 드러낸다. 또렷한 시선과 냉정한 이성, 명징한 언어라는‘이름’들이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그들은 실명과 두려움, 그리고‘쉬운 말로도, 어려운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즉 이름 없는 상태 속에서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눈멀고, 성당의 성상들조차 붕대로 눈이 가려져 눈이란 눈은 모두 없어진 자리에 대신 생겨나는 것은 손이다. 눈먼 자들은 타인의 도덕성을 면밀히 검토해 투표를 할 수도 없고 유기적인 조직을 만들 수도 없지만, 세명씩 두 줄로 서서 어린아이와 약한 사람들을 안쪽에 넣은 대형을 만들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째서 손을 잡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손으로 서로를 만지고 확인하며, 빗물 속에서 서로를 씻어주고, 말없이 옆 사람의 등을 밀어주고, 또한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나아가는 동안 가장 악하고 마귀처럼 보이던 사람들도 실은 자신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고는, 그들이 더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시선과 이성과 언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후에야‘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423면)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은 역시 이 실명의 재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제외되어 있는 의사의 아내일 것이다. 그녀는 작가에 의해 강제로 NPC(Non-Player Character, 롤플레잉 게임 등에서 게이머가 아니라 게임 개발자에 의해 제어되는 캐릭터)의 능력을 부여받고 이 던전에 밀어넣어진 플레이어이며,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자, 눈을 찌르기 직전의 오이디푸스이기도 하다. 보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축복일 수도 있는 많은 광경들을 혼자서 고스란히 보아야 하는 그녀는 갈등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저주하고,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그럼에도 쉴 새 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그녀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뜨거운 인간애와 강인한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그녀가 쏟아내는 진술들은 설교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461면)
눈을 뜨라니, 각성하라니. 그것이 처음에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뜻했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얼마나 식상해진 메씨지인가. 그러나 사실상 작가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진술이 낡은 운동권 구호처럼 교조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생각해볼 점들이 있을 것 같다. 그녀는 타인들을 지도하고 명령을 내리는 대신, 다른 눈먼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에 스스로를 두고자 했고, 한번도 자신의‘눈’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민에서 눈을 돌리거나 감아버리지 않았다. 수용소에 들어올 때 그녀에겐 가위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수염을 잘라주려고 가져온 그 가위를, 마치 그것으로 제 눈을 찌르고 목숨을 끊기라도 할 것처럼 몇번이나 바라본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세계로부터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타인들과 단단히 묶어놓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는‘눈먼’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워진 사회다. 의사의 아내가 던지는 질문은 미디어의 발달로 모든 이가 잠들지 않는 수천개의 눈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2009년의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우리는 정말 눈, 이 많은 눈들을 뜨고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으로 누구를,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눈에 비치는 혼란은 정말로 우리의 외부에서 온 것일까? 작가가 그려 보이고자 한 것은 실은 분노하는 신과 심판받는 죄 많은 짐승들이 아니라, 건강한 눈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반성하며 스스로를 조직하려고 애쓰는 인간, 또한 눈을 맞추고 서로를 응시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