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싸움의 기술’이 담긴 노종면 PD의 투쟁기
●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 주인공들은 히치하이킹 중 ‘보그 행성’이라 불리는 곳에 불시착합니다. 거기 사는 종족 이름이 보그인데, 그들의 주 업종은 건설업입니다. 행성들을 철거해서 우주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놈들인데요, 그 행성에서는 ‘생각’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 땅속에서 삽처럼 생긴 괴물이 순식간에 솟아올라 말 뱉은 자의 따귀를 힘껏 때리고는 다시 땅으로 쏙 숨어버립니다.
요즘 MB정권을 보면 그 괴물이 ‘생각’납니다(휴… 한대 맞을 뻔했습니다). 언론장악에 안달난 이 정권이 언론의 따귀를 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괴물은 ‘생각다운 생각’을 말로 뱉으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프로그램을 없애고 사람을 징계하고 심지어 해고까지 합니다. ‘세계적 추세’‘경쟁력 강화’ 운운하며 언론장악을 기도하는 이 정권의 유치하고 노골적인 추태가 너무 부끄러워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언론인들이 촛불을 들었고, 저 역시 국회앞과 종각에서 촛불 하나를 들었고, 가까이에서 YTN의 촛불을 보았습니다.
MB정권이라는 괴물이 가장 먼저 아프고 잔인하고 비열하게 따귀를 때린 곳이 YTN이라, YTN 노종면 프로듀서의 글에는 오랫동안 싸워온 사람만이 아는 ‘싸움의 기술’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저 같은 이들에게 참 필요한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생각없는 정권과 맞붙는 데는 역시 촛불만한 게 없다는 것! ‘촛불공장 YTN’의 모습도 기대됩니다. 저도 열심히 초에 불붙이고 다니겠습니다. 올해 펼쳐질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고대합니다.
서정문 MBC 「북극의 눈물」 제작팀 조연출 whomoon06@gmail.com
현실이 바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 지난호 특집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였다. 국내외 문학자, 철학자의 다양한 시각으로 지금의 문학을 근본적으로 사유해보려는 의도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던져진 질문의 성격 탓인지, 몇몇 글은 기획과 무관하게 따로 쓰인 듯 보이기도 했다. 필자들의 독자적인 사유와 논리전개는 흥미롭지만, 토론과 대화의 고리가 마련되었다면 이 특집이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사실, 문학에 대한 모든 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글쓴이의 문학관을 개진하는 답변이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기획의도로 글과 글 사이에 대화의 길을 열거나, 또는 실제로 대담으로 이 기획을 꾸몄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백낙청과 한기욱의 평문은 비교적 지금의 한국문학의 구체적인 현실이해를 돕는다. 특히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자족적인 글쓰기에 매몰된 근래의 한국문학 작가와 평론가들을 꼬집는 백낙청의 견해나, ‘새로움’에 강박된 최근의 문학담론을 비판하는 한기욱의 의견은 경청할 만했다. 새로움과 낯섦을 간판으로 내거는 최근의 작품과 문학담론들이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거듭 반성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암울한 현실에서도 촛불 광장을 밝혔던 네티즌들의 힘있는 글쓰기는 한국문학의 매서운 죽비다.
노대원 naisdw@empal.com
새로운 문학공간의 부재
● 한국문학의 공간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 문학에서 허용될 수 있는 미학적 스펙트럼 자체가 굉장히 협소하다는 것이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분단의 공간에서 ‘민족주의적 리얼리즘’(창비)과 ‘낭만주의적 문학론’(문지)의 스펙트럼 밖에 있는 작품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창비 겨울호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제가 우리 문단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문학적 스펙트럼의 협소함에서 오는 미학적 비다양성에 대한 우려가 아니었고, 오히려 문학적 담론 생산자와 창작자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괴리 문제였다. 이는 그동안 창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왔고 그 자체로는 문제삼을 수 없는 치열하고도 중대한 논의다. 하지만 이런 문제의식이 창작자들의 작품에서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한 채 휘발되어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문단에서 새로움에 대한 집착은 거의 맹목적인 추종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론을 선보인 새로운 작가들에 대하여 문단에서는 마치 새로운 미학적 논의 대상이 나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의 작품은 우리 문학이 가진 미학적 스펙트럼의 협소함을 극복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새로운 문학의 아이콘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세대와 대중에게 어필했고 그간 문학을 멀리했던 독자들을 새롭게 시장에 유입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이것은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문학의 등장이 아니라 미시적인 기술적 변화에 불과하다. 불행한 얘기지만 문학은 스토리텔링적 역할은 영화에, 사회고발의 역할은 『오마이뉴스』에 빼앗겼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반쯤은 시장에 잠식된 한국문학은 왜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치열하게 던지지 않는가? 이러한 논의도 없는 상태에서 단순한 기술적 새로움만으로 시장을 넓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호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김재욱 jaewoogiz@hanmail.net
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제안
● 지난호 대화 주제인 교육에 대해서는 저 역시 오랜 시간 문제점을 느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토론자들의 현실적이고도 신랄한 지적은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습니다. 하지만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시된 해결책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합니다.
이범씨의 말대로 ‘교육 마피아’의 영향력은 거대합니다. 저는 이 영향력이 단기간에 없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밥그릇이 달린 이상, 어떻게 해서든 변화를 막는 게 그들의 생존책이니까요. 좀 소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해결책을 하나 제시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역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들은 학생훈육, 수업 그리고 행정업무, 크게 나누면 이런 일들에 포위돼 있습니다. 이런 업무를 아예 사범대에서부터 전문적으로 분과해 각 분야에 정통한 선생님을 배출해내는 겁니다. 학과 수업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선생님 양성은 현재 사범대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사범대가 아니더라도 청소년 상담이나 심리학, 진로지도를 전문적으로 배운 선생님, 학교 일선의 행정업무를 도맡는 역할을 하는 선생님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전문화된 영역에서 각 부문의 선생님들은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좀더 자율적이며 책임감있는 교육을 담당할 수 있을 겁니다.
2005317029@kw.ac.kr
블로거가 읽는 창비
● 지난호 신예소설가들의 단편소설 중에서, 뭔가 쓸쓸하면서도 결국엔 다 맞는 말이라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것이 2편 있었다. 오성용의 「집에 가, 어린 왕자」는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잘 살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조해진의 「북쪽 도시에 갔었어」 또한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까 나는, 한때 열렬하게 사랑했던 연인들이 그 사랑이 식은 후 다시 만났을 때 갖게 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좋아한다. 이 작품은 그런 감정을 특이한 시점과 서술방식으로 잘 꿰뚫었다.
‘우리더’(wreader.net)의 고은신님 서평에서
● 창비 겨울호에 실린 박민규에 대한 백낙청의 평을 보았다. 나보다 훨씬 중립적인 언어였지만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사실 나 역시 박민규가 탄탄한 기교에다 뛰어난 소설가가 갖추게 마련인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핑퐁』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인류는 생존해온 게 아니라 잔존해온 것이다’인 것 같다. 핑퐁은 아무것도 재생시키지 않는다. 맥없이 잔존시킬 뿐이다. 잔존감에 대한 고통을 다룸에 있어서 투철함도, 비전도 없다. 내가 그에게 권하는 건, 그렇다면 한번쯤 좀더 철저히 잔존하길 거부해보는 것이다.
‘In to the Milky Truth of Kai’님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