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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산문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이현우│비평가, 인터넷 까페‘비평고원’회원

 

 

나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적 활동의 의의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조감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이런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은 내가 주로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봐야 인터넷상에 블로그(서재)를 갖고 있고, 한 인터넷 까페에 자주 글을 올린다는 것이 내세울 만한 활동 이력의 전부다. 치명적인 건 활동반경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두루 알지는 못한다는 것. 시간적인 제약과 능력상의 한계 때문이지만, 사실 두루 안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하며 또 바람직한 것일까도 의문이다.

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인문학에서조차 자신의 전공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의 이면은 흔히 타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는 오히려 권장된다. 거꾸로 모든 분야에 두루 식견이 있다는 것이‘얄팍한 박식’과 동일시된다.‘국가적인’석학이 아닌 다음에야 깊으면 넓지 못하고 넓으면 깊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통념 아닌가. 새로운 조어를 쓰자면‘인터넷 인문학’에 대한 시각도 그러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싶다.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또 에꼬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한 에꼬의 경우에도 잘 꾸며진 홈페이지를 갖고 있고, 일반독자들은 그에 대한 다수의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터넷은 단편적인 지식과 기계적인 정보의 대명사이자 표피적인 앎의 상징물이다. 가령,‘신지식인’이후 지식인사회에 당혹감을 안겨줌과 동시에 새로운‘놀림감’이 된‘네이버 지식IN’을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다크써클 없애는 데 브로콜리가 효과적인가요?”나 “‘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가 도대체 뭐죠?” 등의 질문에 지식IN은 신속하고도 유익한 답변을 제공해주지만,‘그’는 아직까지 움베르또 에꼬 기호학의 특징과 의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이런 질문은 올라와 있다. “움베르또 에꼬 지금 살아 있나요? 현존인물이에요?”

하지만 이런 표피성이 과연 인터넷 공간 자체의 본질과 연관된 것일까? 그것이‘사용공간’인 한에서 문제는 그 사용자들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편지를 대신하고 있는 건 이메일이다. 전달의 신속성과 편이성에서 편지는 이메일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이메일 또한‘표피적’이며 보내는 이의 정서와 체온을 전달하는 데‘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메일 사용자들은 그러한 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다시금 예전의 편지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메일의 단점보다는 장점과 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학술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변방’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학술행사 소식과 관련 정보들을 우리는 인터넷으로 접하고 또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술저널이 온라인화됨에 따라 우리는 굳이 도서관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고도 집에 앉아서 관심있는 주제의 논문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한 개방성과 공유성이,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의‘깊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문제는 인터넷에 있다기보다 우리가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온라인 인문학’과‘오프라인 인문학’의 대립은 임의적인 유사 대립이다.

알려진 것처럼 국내에서도 각 대학마다 온라인 강좌 혹은 싸이버 강좌가 상당수 개설돼 있다. 수강생이 강의 동영상을 보고 필요한 내용을 숙지한 후 온라인으로 과제를 제출하고 평가받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온라인 강좌는 공익을 위해서 선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 MIT에서 시작된 강의자료 공개가 점차 확산되고 있고, 유튜브는 하바드대학을 포함한 100여개 대학의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비록 영어권 얘기이긴 하나, 학점만 인정받을 수 없을 뿐 누구나 온라인상에서 이름난 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현재 몇개 대학이 시범적으로 학교 홈페이지에 강의 동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학술활동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 의문이다. 둘은 분명 성격이 좀 다르지만 서로 모순적이라거나 대립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각각 장단점을 갖고 서로 보완해준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이러한 온라인 강의가 대학보다 더 활성화된 쪽은 오히려 대학 바깥의‘재야’학술공간들이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등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강좌를 오프라인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과 주부들이 좀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은 온라인 강좌다. 가장 대표적인 온라인 인문학강좌 싸이트인 아트앤스터디(www.artnstudy. com)의 경우에, 유료강의를 듣는 회원만 현재 3만여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2001년 6월 써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300여명과 비교하면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특이한 것은 대학에서는 폐강되기 일쑤인 철학강좌들이 이곳에서는 최고 인기강좌라는 점이다. 한겨레교육문화쎈터가 운영하는 한겨레e한터(www.e-hanter21.co.kr)도 300여 강좌에 이르는 인문학 관련 온라인 강좌를 제공한다. 전문 강사들 외에 대학의 현직 교수들도 다수 강의에 참여하는 점이 특징이다.

인터넷은 이렇듯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누구나 인문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통로이면서 또한 직접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흔히‘대중지성’의 공간으로 지칭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그러한 장으로 활용되는데,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다음까페‘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을 들 수 있다. 8000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인문학 전공의 대학강사나 대학원생들이지만 약사·회사원·군인 등‘비전공자’도 적잖게 참여하여 익명적 공간에서 인문학 전반에 걸친 비평과 담론들을 쏟아낸다. 가령, 『창비주간논평』을 본딴‘화요논평’코너에‘언어현상학과 시차적 관점’에 관한 철학적 입론이 제시되는가 하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라고 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시사적 발언이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지 정밀하게 분석된다. 또한‘비평공간’같은 코너에서는 신간도서에 대한 소개와 서평이 올라오고, 하이네의 시가 가곡과 함께 자세하게 음미되기도 하며 베를린의 노동절 행사에 대한 현장르뽀가‘해외통신’이란 말머리를 달고 당일에 게시된다. 이런 것이‘인터넷 인문학’이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현장성과 순발력이다. 모두 저널리즘이나 학술지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중간지대’의 담론이라 할 만하다.

물론 전체 회원수에 비해 자발적인 글쓰기에 참여하는 회원들이 여전히 소수라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고, 인문교양과 학술담론의 대중화에 일조하고는 있지만 과연 새로운 학술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지적‘프론티어’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현재적 한계를 본질적인 한계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까. 인터넷은 인문학 활동의 새로운 가능공간이지 미리 앞질러 그 한계를 예단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학에서는 점점 홀대받고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프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나 노숙자 인문학과 CEO인문학‘열풍’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 공간을 통해 기꺼이 다수와 공유하려는‘의지’를 갖고 있는지 묻는 것이겠다. 한데, 그러한 의지를 만약‘제도권 인문학’혹은‘대학 인문학’종사자들이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혹시 그런 의지를 가질‘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왜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으론 두가지 원인을 지목하고 싶다. 하나는 소위 제도권 인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리고 있는 인문학의 상(象)과 관련된다.

 

전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나 수년 전부터 제기된 한국사회‘인문학 위기’의 특수한 원인에 대해서는 모두가 어림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다.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白琮鉉) 교수가 지적한 대로,1 1980년대 초반 대학의 입학정원이 대폭 늘어나면서 사회적 수요와 무관하게 인문학 계열 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그러면서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대량으로 배출된 점이 그것이다. 이로써 대학 졸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은‘쓸모없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위기의 원인은 대학이 아닌 대학원 졸업자의 초과 배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학과가 늘어남에 따라 교수 요원의 충원이 필요했고, 이는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가수요를 낳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문학 전공 박사의 수는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대학은 재정을 이유로 교수 충원비율을 최소화했다. 인문학이‘배고픈 학문’이란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굳어진 것이 아닌지. 게다가 그러한‘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물론 공공성을 위해 국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학문분야도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대신 국가에 손을 내미는‘손쉬운’방법에 의존했다. 대학의 정규직 교수들은 강의에 정성을 쏟기보다 논문 편수로 평가되는 연구업적에 더 공을 들였고, 비정규직 교수들은 자세를 한층 낮추어 대학 주변에 남는 일에 자족하거나 절망했다. 모두가‘지속가능한 인문학’의 새로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읽을 만한 국내 인문서가 부족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국외의 고전이나 교양서가 적지 않은 현실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거기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종현 교수는 “교양과목으로서 인문학은 모든 시민이 익혀야 하지만, 한 사회에 인문학 전공자는 매우 탁월한 소수이면 족하다. 그리고 그 탁월한 소수는 사회에서 우대되어야 한다”(앞의 글 146면)고 말하면서‘인적자원 관리에 있어서 공정성과 수월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따르자면 탁월한 국가석학 몇명의 인문강좌를 TV나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인문교육 방안이 될 성싶다.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원동력이‘자유 만끽’과‘자기만족’이며(145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평범한 다수’의 인문학에 대한 욕구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人文)이란 말이‘사람의 무늬’를 뜻하기도 한다면, 인문학의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무늬만 사람’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적/다중적 매체로서의 인터넷을 그러한‘과업’에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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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종현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 한국학술협의회 편 『인문정신과 인문학』, 아카넷 2007, 1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