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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성태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함.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음. jstroot@hanmail.net

 

 

로동신문

 

 

301동 경비원 나씨는 신문더미를 꾸리다 말고 노끈을 늦추었다. 신문 한장이 비어져나와 눈에 거슬렸다. 노끈 끝을 물고 나씨는 폐지를 쑤석거려 불거진 신문을 당겨넣었다.

“아, 대충 햐. 사돈집에 보낼 거여?”

종이박스를 정리하던 정문 경비실 천씨가 코끝에 땀방울을 달고 서서 짜증스럽게 참견했다. 윗도리 단추 풀고 모자도 뒤통수로 넘긴 게 마음은 벌써 선풍기 밑으로라도 내뺀 모양새였다. 나씨는 노상 겪는 말본새라 천씨가 무슨 소래기를 퍼부어도 돌벼랑 미륵불처럼 웃고 말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하는 날 근무조에 걸리면 천씨는 하루내 부루퉁해서 지냈다.

나씨는 묵묵히 폐지 모서리를 쳐서 귀를 맞추고 노끈을 당겼다. 아까 그놈이 도로 불거졌다. 네 귀로 조금씩 남아도는 게 신문이 원래 너붓한 모양이었다. 요새는 신문들도 크기가 들쭉날쭉해서 꾸리기가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칠팔년 만져온 손끝에 이런 신문은 처음이었다. 나씨는 신문을 뽑아들었다. 한장이 반으로 접혔는데 구깃구깃하고 누리끼리했다.

“그 집에서 나왔나?”

107호에서 나오곤 하는 신문인가 싶어 중얼거린 말이었다. 주말부부집인데 남편이 다녀가면 서울 쪽에서만 돈다는 그 누름한 신문이 더러 나오곤 했다. 경비들 사이에서도 그 신문 때깔이 여러번 입에 오른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살다 내려온 천씨가 그 신문을 알아봤다. 나씨는 오른손에서 목장갑을 벗겨냈다. 천씨가 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눈을 흘겼다.

“그건 아녀. 살굿빛이라고 하지 않더남. 딱 보니까 홀아비 빤스 같은 게 궂은 날 짜장면 그릇 덮었다가 왔구먼. 뭘 펴보고 그랴?”

“어디 노조 신문인가벼.”

1면을 펴들고 심상하게 말하던 나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신문을 탁 털어서 눈앞으로 당겼다.

“홀딱 벗은 배우라도 나왔남? 택배상자에 붙은 글씨도 가물가물한 눈으로 뭘 들여다봐싸.”

나씨는 대꾸가 없었다. 이참에 아예 쉴 참으로 천씨는 담배를 빼물고는 빈 담뱃갑을 구겨서 쓰레기봉투에 던져넣었다.

“오늘은 빈병이랑 피티병이랑 거진 스무자루씩 나왔지? 야유회 뒤끝 같어. 휴가철인데도 이만치 나왔다면 너무 하잖여. 뭘 그렇게 처먹어들 쌓는지, 원……”

천씨의 푸념처럼 음식물 쓰레기통 옆으로 우유병, 깡통, 플라스틱 따위를 담은 마대자루가 쌀가마니처럼 쌓여 있고, 그 옆으로는 철사 옷걸이를 펴서 꿴 스티로폼과 박스에 정리한 폐지가 또 한 산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둘이 작업해낸 것들이었다. 저녁나절에도 또 이만큼 나올 거였다. 천씨는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말을 이었다.

“하긴 휴가철이래도, 있는 동네 얘기지. 열불나는구먼. 왕년에 목동서 일할 때는 여름이 기중 편했어. 이걸 보고 누가 촌구석 임대아파트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하겠냐고. 오늘은 냉장고하고 에어컨 박스만 해도 대여섯개여. 아 참, 전자대리점 놈들한테 배달하고 박스 좀 걷어가라고 말 안했어? 왜들 그랴? 동초소에서 해야지 정문에서 단속할까. 암튼 탈북자인지 새터민인지 하는 입주자들이 철도 없이 들이닥치니 이러다간 우리가 꼭 수용소 지키는 간수 꼴 나겠어.”

그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말고 신문에 박혀서 기척도 없는 나씨가 눈에 밟히자 버럭 소리쳤다.

“아, 아는 사람 부고라도 났어?”

나씨는 화들짝 놀란 낯으로 신문에서 눈을 뗐다.

“어이, 천씨, 나 좀 보더라고.”

나씨가 노는 손을 까불었다.

“아, 볼일 있는 사람이 댕겨봐. 난 시방 입에서도 땀이 나.”

나씨는 펴든 신문을 들고 천씨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신문 상단을 짚어냈다.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가락 끝이 바르르 활자를 쪼았다.

“이거 저쪽 거시기 아녀?”

나씨는 머리를 산 너머로 넘길 듯 고개를 까닥 젖혀 보였다. 천씨가 머리를 기웃이 디밀고 붓글씨로 흘려 쓴 듯한 신문이름을 평소 버릇대로 소리내어 읽었다.

“로, 동, 신, 문…… 로동신문? 어디 조합 신문인가?”

“그 밑엘 보라니께. 조선로동당이여. 조선로동당 기관지라고 박혀 있잖여. 요 옆탱이도 좀 보더라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주체사상으로다 튼튼히 무장하자! 얼러리. 이쪽으로는, 선군의 위력으로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에서 새로운 비약을 이룩하자! 오매, 살 떨려.”

두 사람은 등에 총부리 닿은 사람들처럼 뻣뻣하게 허리를 세웠다. 찬바람이라도 쓸고 간 듯했다.

“참말로 살 떨리네. 어느 집에서 나왔을까?”

천씨가 아파트단지를 휘둘러보며 속삭였다. 오후 3시의 자글자글한 땡볕 속으로 매미소리만 듣그럽게 끓었다. 여전히 놀란 목소리로 그러나 반신반의하는 투로 나씨가 말했다.

“설마 진짜 아니겄제. 누가 장난으로 맹근 걸 거여, 잉?”

“장난할 것도 없네. 분명 어디 이삿짐에서 묻어 나왔을 거라.”

“신고해야 쓰겄지?”

“신고? 이 반공영감이 오늘 또 열불나게 하네. 제발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도로 쑤셔넣어.”

“안 봤으면 모를까 어떻게 보고도 거시기하남.”

“육십 평생 살면서 사사건건 알은체하고 참견하고 살았남? 그랬어?”

“이것이 그럴 일이냐고. 이웃에 빤히 거시기가 사는 증거가 아니더라고.”

다시 한번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가 천씨가 짜증스럽게 침을 뱉었다.

“그걸 헷또라고 돌리고 하는 소리여? 나씨가 간첩이라고 쳐. 제 안방에서 버젓이 그 흉한 걸 읽고 재활용하라고 내놓겠어? 그런 얼빠진 놈이 대명천지에 어디 있냐고. 같잖은 소리를 해야지.”

“간첩들은 잡혀들어도 뭐시냐, 사상교육시키느라고 다른 거시기를 감옥소로 위장해서 남파한다잖여.”

“그래서 사상교육하느라 신문까지 배달시켜 읽는다고? 이리 내놔.”

천씨는 신문을 사납게 빼앗았다. 그 겨를에 신문이 반이나 찢어졌고 그것을 천씨는 나씨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아나, 간첩. 넘겨짚을 데를 넘겨짚어야지.”

천씨는 신문을 구겨서 신문더미 속에다가 도로 쑤셔박았다. 그는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섰다.

“날도 찌는데 애먼 데 힘쓰지 말고, 대충 끝내고 난닝구 걷어붙이고 선풍기 바람 좀 쐬자고.”

그래도 나씨는 그 자리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안타깝게 말했다.

“천씨 말짝시나 대명천지에 왜 이런 것이 여기에 굴러다니겄어? 바람에 실려왔겄남?”

“왜 누가 평양에서 냉면이라도 시켜먹은 모양이지. 우리 아파트가 오죽이나 별난 데여.”

천씨는 노끈과 가위와 장갑을 묶다 만 박스 위에 던져놓고 철수할 채비를 했다. 등 뒤에 대고 나씨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래두 그러네. 분명히 단지 내에 거시기 뭐냐, 잉, 그것이 사는 거여.”

“이녁 말은 더듬어 듣기도 힘들어.”

“있잖은가베, 고정간첩.”

대번에 천씨가 혀를 털었다.

“이봐, 자네 성씨가 나대기 나씨인 줄은 아네만 정신 차려. 세상일 다 참견해도 국가안보까진 나서지 말라고. 냉장고에 수박 바숴놓은 거 있지?”

천씨가 301동과 302동 사이에 있는 경비실로 들어갔다.

나씨는 폐지더미에서 신문을 다시 뽑아냈다. 그것을 여러겹 접어 딱지만해지자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는 관리사무소 아래층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낯도 훔쳐냈다. 찬물이 닿자 땀 쏟은 낯이 쓰렸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고 그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기는 하지만 좌변기 가장자리를 버릇대로 화장지로 훔쳐냈다. 앉았으려니 바지를 내려 걸친 오금팽이로 두툼하게 신문이 느껴졌다. 아래로 더듬어서 신문을 빼냈다. 아직도 가슴이 할랑할랑했다.

그는 신문을 무릎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문질러서 폈다. 염병할…… 찢어진 자리를 보고는 중요한 증거물이라도 훼손된 듯 속이 상했다. 신문은 2006년 신년호였다. 햇수로 삼년이나 묵은 것이라 노래질 만도 했다. 그것은 총 4면이었다. 마치 등사기로 민 것처럼 활자가 조악했다. 1면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초상화에 꽃바구니를 진정하는 행사 사진과‘사회주의강성대국의 령마루를 향하여 더 높이 비약하자’는 제목의 신년 공동사설이 실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신문을 두 손으로 갈라 2면으로 넘겼다. 애들이 쓰는 노란 포스트잇 한장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볼펜글씨로 전화번호 같은 게 적혀 있었다. 567로 시작하는 게 이 도시의 전화번호 같았다. 왠지 신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어 경비복 앞주머니에 넣었다.

2면은 온통 구호로 도배되어 있었다.‘올해에 들고나가야 할 전투적 구호’와 김정숙료양소로 교양학습을 나간 각급 당위원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3면도 마찬가지였다.‘벌이 끓는다-사회주의협동벌에 울리는 경제선동의 북소리’며‘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답게 농사일을 깐지게 하자’는 둥 협동농장들 사진과 기사가 빽빽했다. 나씨는 가슴이 고동쳤다. 더러 텔레비전에서 본 인민군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못 볼 걸 본 것 같아 그는 얼른 신문을 덮었다.

도대체 이 신문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는 더욱 궁금해졌다. 생각을 열두번이나 뒤적거려봐도 이곳에서 발견될 신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두드린 생각처럼 간첩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이 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있는 탈북자 가정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모두 열세 가구가 입주해 있었다. 자신의 경비 관할인 301동과 302동에는 세 가구가 살다가 한 가구가 나가고 지난주에 두 가구가 더 입주해서 모두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는 두 동이 한 군데에서 하므로 이 신문이 나왔다면 그 네 집 중 한 집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301동 105호에는 오십대 후반의 여자가 혼자 살았다. 여자는 지난봄까지 식당에 다니다가 관절염이 심해져서 요즘에는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딸 둘이 몇년 전에 중국으로 나온 모양인데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큰딸은 조선족과 결혼해서 살림을 났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708호에는 사십대 부부가 중학생 아들과 함께 이년째 살고 있었다. 두 부부는 공장에 다녔다. 아들은 벙어리가 아닌데도 입 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항상 외톨이처럼 혼자 다녔다. 그 옆의 709호에는 지난주에 사십대 사내가 혼자 들어왔다. 이북 말투가 억센, 깡마른 사내는 안성에 있다는 하나원에서 막 나온 모양이었다. 302동 808호에는 처녀 둘이 역시 지난주에 들어왔다. 언니동생 하지만 친자매 같지는 않았다. 언니는 전자회사에 취직했다고 하고, 동생이라는 처녀는 대학을 가려고 공부한다고 했다.

꼭 짚어서 의심이 갈 만큼 모진 사람은 없었다. 하긴 간첩이 어디 따로 생겼나,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놈들도 아니고…… 나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장실을 나오다가 관리사무소장과 마주쳤다. 이제 갓 마흔이 된 사내인데 올봄에 이곳으로 부임했다. 젊어서 그런지 융통성 없이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융통성 없기로는 나씨 자신도 빠질 데가 없지만 그는 소장을 대면할 때마다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상전 모신 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앞에서 입에 붙은‘탈북자’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조회시간마다‘북한이탈주민’이나‘새터민’이라는 말을 서너번 복창해야 했고, 그 말도 가급적이면 입에 올리지 말라고 입단속을 받았다. 소장 역시 정기적으로 탈북자관리 교육을 받고 오는 모양인데, 아무리 거느리고 있는 경비들이라지만 다들 노인네들인데 이틀 상간으로 초등학생들한테처럼 복창을 시키니 경비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다.

“천씨 아저씨 못 보셨어요?”

“일동 동초 앞에서 거시기 안하남.”

소장 표정이 뭔가 다그칠 기색이어서 나씨는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경비업무가 주업무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는 그 다음 아닙니까? 정문 앞에 노점상들이 인도를 막고 진을 치고 있는데 전혀 단속이 안되네요. 천씨 아저씨한테 좀 전해주세요.”

“이, 그려.”

소장은 계단으로 오르다 말고 나씨를 불러세웠다.

“거 아저씨, 새로 입주한 가정에 태극기 있는지 체크하고 돌리셨어요?”

“아직 안했는디.”

“그거 빨리 하세요. 내일이 광복절인데 여태 안하시면 어떡합니까.”

“알었구만.”

“태극기 줄 때 새터민 가정에는 잘 안내해주세요. 어디에 게양하는지도 잘 모를 테니까.”

나씨는 가는 길에 정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노점상 단속 문제도 경비들 입장에서는 소장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몇년째 아파트 앞에다가 전을 벌여 벌어먹는 뻥튀기 장사꾼이나 이불 장사꾼, 과일 트럭, 푸성귀 파는 노파들을 저번 소장들은 적당히 눈감아주었다. 천씨가 노점상들에게 돈을 좀 모아서 소장에게 디밀어보라고 조언해준 모양인데, 소장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배워서 공사가 분명한 건 있었다. 그래도 나씨는 사람살이가 어디 그런가 싶어 아쉽기도 했다.

105호 새터민 여자가 이불보따리를 들고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정문에서 이불 장사꾼한테 산 모양이었다. 나씨는 짐을 받아줄 요량으로 뛰어가는 시늉을 했다. 여자는 나씨를 보고 인사성 밝게 고개를 숙여왔다. 메마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니 또 사셨수?”

나씨는 빼앗듯이 이불을 받아들었다. 지난번에도 이불 사는 것을 봐서 묻는 말이었다.

“근무 서는 분한테 면목없습네다.”

“원, 벨말씀을…… 아 참, 어젯밤 김씨 근무 때 갖다논 거시기를 잘 나눠먹고 있제요.”

여자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씨는 제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쳤다. 처음 여자하고 말을 트고 지내기 시작했을 때 나씨가 입만 열면 여자가 낯이 달아해서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은근히 나씨를 피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러다가 다른 경비원을 통해서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나씨가 입에 달고 사는‘거시기’가 문제였다. 나씨의 거시기야 말 막히면 내놓는 말이지만 연변 쪽에서는 남자 아랫도리를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도 수박을 말한다는 게 거시기로 실수를 했으니 도로 담재도 담을 길이 없었다. 김씨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새겨보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가 먼저 서먹한 분위기를 푸느라고 입을 열었다.

“수박 한쪽 먹고 싶어도 혼자래 해내기 겁나서 손이 가지 않습네다.”

여자는 이북 억양이 많이 가신 목소리로 자분자분 말했다. 나씨는 여자와 보폭을 맞추느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여자는 날이 갈수록 걷는 게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침 잘 놓는 한의원을 소개해줬는데 찾아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국 딸들한테 보내려고 샀나벼?”

“네. 큰아래 요전에 간나를 낳았는데 어미란 게 해줄 건 없고 애 덮을 요랑 좀 장만했습네다. 길거리 물건이래도 중국 거보다야 한결 낫지 않갔습네까.”

나씨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자가 느티나무 그늘을 지날 때 걸음을 세웠다. 나씨도 그새 몇걸음이나 뗐다고 벌써 등줄기가 축축했다. 두 사람은 그늘에 서서 땀을 들였다. 소문으로는 여자가 두 딸을 데리고 나오느라 북을 여러차례 드나들었고, 그사이 두번이나 잡혀서는 험한 일도 당했다고 했다. 여자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찍어내며 말했다.

“령감님, 저번에 영정사진 찍어주는 사람이래 있다고 하셨디요?”

“아, 그런 젊은이가 있제. 노인네들한테 봉사하러 다니는 거시기가 있어요.”

한달 전, 시내에서 사진관을 한다는 젊은 사진사가 아파트단지의 노인들에게 무료로 영정사진을 찍어주고 갔다. 열댓명 되는 노인들이 노인정에 모여서 찍었는데 나씨도 천씨의 손에 이끌려서 사진을 찍었다. 집에는 십년 전 아내가 살아 있을 때 고향에서 찍은 영정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막상 찍고 보니 집엣것은 너무 젊은 것 같아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방문하갔디요?”

“글쎄 거시기를 갖다주자면 한번 들를라. 얼추 한달 가차이 되었는데 기별이 없네.”

“다음에 오거들랑 저한테도 꼭 전통을 주시라요.”

여자가 쑥스럽게 말했다.

“아직 거시기한디 벌써 고런 걸 찍으려고 하까. 너무 일찍 찍어둬도 꼴사납제. 적당할 때 준비하는 게 상책이라, 고것은.”

“인저 저도 할망 아닙네까……”

여자는 수줍게 말해놓고 쓸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작은아가 고향 나올 때 저희 아바지래 사진이라구 가디구 나왔는데, 저는 거저 그런 경황도 없었더랬디요, 요참에 중국에서 오는 인편으로 그거래 받아갖구 들여다보구 앉았으려니 어찌나 새파란디 아이구나, 내래 더 늙기 전에 해놔야겠다, 막 미안스럽단 말입네다.”

여자는 쓸쓸하게 웃었다.

“사진사가 오믄 내 잊지 않고 거시기하리다. 여튼 객지 나오믄 건강해야 돼야.”

“그래야디요.”

두 사람은 다시 걸었다. 나씨는 뒷주머니에 넣은 신문을 꺼내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을 꾹 참았다. 새터민 사람들은 관리 명목으로 집집마다 담당형사가 있어서 괜한 사단이나 일으킬까 싶었다.

나씨가 경비실로 돌아왔을 때 천씨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묻힌 채 잠들어 있었다. 코까지 드르렁거리는 게 세상에 둘도 없는 상팔자처럼 보였다. 관리소장한테 복장 지적을 받은 게 한두번이 아닌데도 틈만 나면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군대에서 이등상사까지 달고 나온 사람이니 평생 관복을 걸친 셈인데 그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책상에는 수박껍질이 세쪽이나 쟁반째 나와 있고, 나씨 서랍에서 꺼낸 듯싶은 담배가 새로 뜯어져 있었다. 지저분하고 무람없는 짓을 밥 먹듯이 겪지만 그때마다 노여웠다.

“어이, 천씨.”

그는 천씨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왜?”

눈을 감은 채 자세를 다시 잡으며 천씨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소장이 난리났구먼.”

천씨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이 빨갰다.

“아니, 그놈이 또 왜?”

“뭐겄어. 노점상 거시기하라는 거제.”

천씨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느라 그는 담배를 물었다.

“빨리 9월이 와서 초소를 옮겨야지 좀 살겠어. 새 소장 온 뒤로는 정문 초소가 아주 영창이야. 그런 감옥이 없어.”

다음달은 경비원 정기이동이 있는 달이었다. 나씨는 정문 경비실로 갈 차례였다. 그도 벌써 긴장이 되었다. 천씨가 경비복 상의를 입고 모자를 찾아 썼다. 경비실을 나서기 전에 그는 말했다.

“남은 폐품은 천상 나씨가 정리해야겠네. 대충대충 햐. 그리고 저녁은 어떻게 할 거여? 혼자 궁상맞게 라면 끓여먹지 말고 후문초소로 와. 이씨가 된장찌개를 올린다니까. 반주 한잔 털고 와서 같이 야간작업 하더라고.”

천씨가 나가고 나자 나씨는 책상에 어지럽혀진 쟁반이며 재떨이를 치웠다. 천씨에게 적개심 같은 게 치밀었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선풍기 바람에 신문이 들썩였다. 그는 선풍기를 껐다. 신문을 활짝 펼쳐놓고 보니 아까 찢어진 데 말고도 네 귀 쪽에 날카로운 모서리에 찍힌 흠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라도 붙였다가 뗐는지 테이프 흔적이 있고 그 부분에는 활자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음침한 방 한쪽 벽에다가, 어쩌면 옷장 같은 데다가 사진처럼 붙여놓고 지냈는지 모른다. 그는 찢긴 곳을 쎌로판테이프로 붙였다. 신문이 온전히 살아났다. 그는 신문을 잘 접어서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는 캐비닛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태극기는 푸른색 플라스틱 함에 들어 있었다. 정부가 바뀌면서 국경일마다 유난히 국기게양을 챙겼다. 국경일이면 봉사활동 점수가 필요한 아이들을 모집해서 집집마다 돌며 국기게양을 독려했다.

6월과 7월에 입주한 가구는 301동에 세 가구, 302동에 다섯 가구였다. 그는 태극기함 여덟개를 들고 302동부터 돌았다. 세 집이나 사람이 없어서 문손잡이에 걸어놓고 물러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배달할 집은 301동 709호로 지난주에 입주한 새터민 사내의 아파트였다.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문손잡이에 태극기를 걸려고 할 때 안에서 잠금장치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작이 서툰지 한참 걸렸다. 이윽고 머리가 부스스한 사내가 문을 열었다. 그는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나씨한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태극기 전해주러 왔수.”

사내가 팔을 뻗는 것을,

“어디에다가 거시기하는지 잘 모르제? 내 알려줄 거구만.”

하고 나씨는 사내에게 어떤 동의도 받지 않고 성큼 현관으로 들어섰다. 15평 아파트지만 살림이 없어 집은 휑해 보였다. 담배냄새가 꽉 찼는데도 창문은 닫혀 있었다. 나씨는 안방을 통해 베란다로 나갔고 사내가 따라왔다. 나씨는 창문을 열고 뜨겁게 달구어진 난간을 짚었다.

“여기 구녕 보이제? 여다가 내일 아침에 거시기하더라고.”

사내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 내다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내일이래 무시기 날입네까?”

“광복절 몰러?”

나씨는 겁 많은 듯 보이는 사내의 지친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 해방기념일 말입네까?”

“그쪽에서는 그리 불러?”

사내는 눈치 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씨와 사내는 현관 쪽으로 나왔다.

“저 잠깐 보시갔습네까?”

사내가 신발을 꿰는 나씨를 불러세웠다. 그는 부엌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혹시 저거래 감시카메라 아닙네까? 그티요?”

나씨는 무슨 말인가 싶어 천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화재감지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나씨가 피식 웃었다. 사내는 얼굴이 붉어졌다.

“거시기라. 불 나믄 저것이 거시기해. 물이 막 쏟아지지. 그니까 부엌 천장에 매달린 거여. 이 집만 있는 기 아니고 집집마다 다 있어.”

“아, 그렇습네까? 내래 이게 눈에 거슬려설라무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지냈습네다.”

“뭐 거시기한 거 있으면 눈치보지 말고 말햐.”

“모른 거야 천지디요. 차차 적응되갔지 않습네까. 고맙습네다, 아바이 동무.”

다시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태극기 거시기하지 말고 꼭 달어. 우리나라에서는 국기 안 다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녀.”

나씨는 웃어주고 문을 닫았다.

승강기가 일층에 닿았을 때 708호에 사는 중학생 아이가 승강기 문 앞에 서 있었다. 승강기에서 사람이 보이자 아이는 순간 표정이 굳어서 옆으로 비켜섰다. 교복에 가방을 멘 모습이 하굣길인 모양이었다. 아이는 겁먹은 아이처럼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는 건지 눈을 피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손에는 수첩을 들고 있는데 깨알 같은 글씨로 미루어 영어단어장 같았다.

“아야!”

문이 닫히기 전 나씨는 급하게 승강기 단추를 누르고 아이를 불렀다.

“니 안 바쁘믄 나랑 경비실로 좀 가자꾸나.”

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승강기에서 내렸다.

“거시기할 것 없어. 나가 너한테 뭘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랴.”

아이는 말없이 나씨를 따라왔다.

나씨는 책상서랍에서 신문을 꺼냈다.

“너 이거 본 적 있지야? 그짝 거이 확실한지 궁금해서 그런다. 기냥 그거이 궁금해서 그랴.”

나씨는 신문을 아이에게 펼쳐 보였다. 아이가 고개를 기웃이 디밀더니 놀라서 한걸음 물러났다.

“어째, 진짜냐?”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씨를 바라보았다. 나씨가 신문을 펴들고 아이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 아이는 벽을 기대고 주저앉았고, 나씨가 놀라서 다가섰을 때는 벌떡 일어나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아야, 니 왜 그러냐?”

나씨가 쫓아나갔으나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몹시 당황한 얼굴로 경비실로 돌아왔다. 경비실 바닥에 아이가 떨어뜨리고 간 수첩이 있었다. 나씨는 집어들었다. 눈팅, 안습, 대략난감, 딸녀, 똘똘이, 뿅뿅, 무뇌충, 본좌…… 그런 말들이 씌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나씨 눈에는 역시 공부하는 단어장 같았다. 그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냉장고에서 남은 수박을 꺼내 비닐봉투에 담았다.

708호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나씨는 비닐봉투에 수첩을 넣었다. 그리고 문손잡이에 걸어두고 물러났다.

오후내 나씨는 분리수거 작업을 했다. 주민들이 퇴근하면서 다시 재활용품들이 쏟아져나왔다. 7시쯤 분리수거대에 마대자루를 갈아주고 있을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저녁 먹으러 오라는 천씨의 전화였다. 아직 날은 어둡지 않았다. 나씨는 관리사무소 화장실로 가서 손과 낯을 씻었다. 손수건을 더듬는 젖은 손길에 노란 포스트잇이 묻어나왔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포스트잇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으나 그쪽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는 포스트잇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후문 경비실에 들어서자 천씨와 이씨가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에서는 삼겹살이 구워지고, 관리사무소 뒤편 텃밭에서 거둬온 상추와 풋고추가 쟁반에 수북했다. 분리수거하는 날 저녁에는 종종 목구멍에서 먼지 벗긴다며 삼겹살을 구웠다.

나씨가 간이의자에 앉자 천씨가 말했다.

“나씨, 영정사진 나왔어. 야, 인물이 새장가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놓고 그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눕혀놓은 사진틀을 창에다 기대어 세웠다. 아마 포장이 되어 있었을 텐데 천씨 성미에 못 참고 먼저 뜯어본 것이리라.

“워뗘? 누가 경비 서는 사람이라 하겠냐고. 영락없이 은퇴한 교장선생님이여. 봐, 내가 뭐랬남? 뿔테안경을 씌워놓으면 딴사람 같을 거라 안했남.”

낯설어 보였으나 천씨가 추켜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은 좋아 보였다. 그래도 영정사진이라 그는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저, 저 낯짝 좀 보게. 좋으면 좀 웃어.”

그제야 나씨는 성끗 웃었다.

“사진사는 언제 댕겨갔디야?”

“아까 해거름참에 온 걸 내가 받아서 가져온겨. 암튼 공짜라 별 기대 안했는데 사진틀까지 해서 가져왔드라고. 얼마나 보기 좋남.”

고기가 오르고 소주잔이 채워졌다. 허기진 참이라 다들 소주잔에는 입만 대놓고 고기부터 몇점 싸 먹었다. 소주가 입에 닿기 시작할 무렵,

“아까 주웠다는 이북 신문 있잖아요……”

하고 김씨가 입을 열었다. 천씨가 이미 입방아를 찧은 모양이었다. 나씨는 김씨를 건너다보며 말을 기다렸다.

“암만 생각해도 위험한 물건 아니오? 여기 당진 형님은 별것 아니라고 해쌓지만 제가 보기에는 뭔가 구리단 말예요.”

아직 환갑이 두해나 남은 김씨는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불렀다. 그는 나씨의 의향은 어떠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씨는 쌈을 입에 담고 있느라고 대답을 못했고 천씨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게 구리면 신고를 햐. 새터민 관리하느라고 드나드는 형사들 좀 많어.”

입엣것을 넘긴 나씨가 말을 받았다.

“소장한테 일차로 보고하는 게 거시기하지 않겄어?”

대번에 천씨 눈이 고리눈이 되었다.

“얼마나 들들 볶이려고 거기에 안겨. 차라리 못 본 것으로 햐. 괜한 것으로 술맛만 떨어지네.”

김씨가 말했다.

“그러기는 한데 난 도통 탈북자들을 못 믿겠어요. 안할 말로다 북에서 사람을 죽이고 왔는지 도둑질을 하다가 왔는지 알게 뭐야. 장흥 형님 말대로 간첩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게 아니면 그런 신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발견되느냔 말요.”

눈치만 보고 있던 나씨가 입을 열었다.

“뭐 내 생각도 그러네. 배고파서 넘어온 거시기들 아녀. 사상적으로다 우리 거시기가 좋아서 왔다고 보기 애럽잖여. 헐수없이 온 사람들 아니더라고. 이웅평이네 김만철이네 하는 사람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질 않더라고. 근디 정부에서 아파트 사줘, 직장 잡어줘, 도대체 퍼주는 게 얼매여? 나는 이날 이 평생 그런 호강 한번 못해봤네. 암튼 그거 줍고 나니께 입주민이고 뭐시고 거시기들이 모다 의심스럽단 말시.”

천씨가 두 사람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너무 그러지들 말어. 그 사람들 피눈물 흘리면서 온 사람들이여.”

“허이고, 누구는 왕년에 피눈물 안 흘려봤냐고. 나넌 마누라쟁이를 수술도 못 시키고 죽였어.”

나씨가 몸을 틀고 앉았다.

“나씨, 또 시작할 거여? 제발 덕분에 그만 햐. 왜 술잔만 앞에 두면 그랴. 나도 아까부터 곰곰 생각해봤는데 말여, 혹시 이런 게 아닌가 몰러. 그이들도 거기가 지옥이었든 천당이었든 어쨌든 고향 아닌가벼. 근디 고향 떠나면서 고향 그리울 때 볼라고 그거 한장 품고 올 수도 있잖여.”

“아, 듣고 보니 그렇네. 충분히 그럴 만하네.”

천씨의 말에 김씨가 반색을 했다. 제 딴에는 불편해지는 자리를 수습하는 눈치였다. 나씨는 언성을 높였다.

“거기에 뭐가 박힌 중 알고 고향타령이랴. 천씨 자네도 아까 살 떨린다고 했지만서두 거시기에 어디 고향 소식 들려줄 나긋나긋한 글 한줄 있더남.”

“아, 그럴 수도 있잖여. 고향 못 밟는 사람은 고향 거라면 다 그리운 법이여. 암튼 우리 그만하자고. 우리 깜냥으로 뭘 알아내겄는가? 어치피 내버렸으니 인저 잊자고. 그것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이 무너지겄어, 가라앉겄어. 자, 한잔씩 들고 야간작업 가더라고.”

천씨가 잔을 부딪쳐 왔다. 나씨는 마지못해 잔을 갖다댔다. 천씨가 얄미워 괜한 말씨름이 되어서 그렇지 천씨 말대로 무슨 대단한 음모가 깃든 신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하루내 허황되게 속을 끓인 것 같았고 그러자 자조적인 웃음마저 나왔다. 그는 신문을 버리자고 생각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 작업은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빈병을 담은 마대자루를 재활용품 더미에 올릴 때 109호 탈북자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작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헌옷가지 버리려는데 말입네다.”

나씨는 새삼스럽게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분리수거는 여덟시까지만 받는 걸 모르남? 글고 헌옷은 저기 따로 수거함이 있으니께 거기다 넣어.”

사내가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굽실거렸다. 그는 가로등 아래 늘어선 노란 수거함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씨는 미안했다.

“어이, 그거 이리 내놔. 옷가지라고 다 재활용하겄남.”

사내가 보퉁이를 건네주었다. 보퉁이를 받고 나씨는 깜짝 놀랐다. 헌옷을 싼 보자기가 태극기였다.

“거시기를 이렇게 써?”

나씨가 나무라듯 소리쳤다.

“집청소 하는데 말입네다, 헌것이 나왔드랬어요. 아까 아바이 동무래 새것두 가져오고 해서리……”

변명하던 사내의 목소리가 꺼져들어갔다. 나씨는 사내를 세워놓고 옷가지는 쓰레기봉투에 던져놓고 태극기는 정성스럽게 개켰다.

“그짝에서도 거시기를 이리 막 내두르지는 않을 거 아니라고. 가뜩이나 이웃들이 이걸 봤으면 뭐라겄어? 조심햐. 여기도 마냥 편한 세상은 아녀.”

사내는 풀죽어서 돌아섰다. 나씨는 혀를 찼다.

야간순찰까지 돌고 경비실로 돌아왔을 때는 밤 11시였다. 그는 뜨겁게 커피를 타 마셨다. 고단한 하루였다. 그는 책상에 놓은 자신의 영정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씌워놓으니 정말 자신이 다른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농사꾼도 경비원도 아니고, 천씨 말대로 대학 나온 교장선생님 같았다. 자신의 장례식을 찾을 조문객을 떠올리자 그는 비긋이 미소마저 떠올랐다. 그러다가 죽은 아내 사진 옆에 걸어놓을 생각을 하니 조금 민망해졌다. 105호 여자가 낮에 만나 늘어놓던 쓸쓸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 사진은 아내 사진 옆에는 걸지 못하고 장롱에 넣어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내일 아침 퇴근길에 사진을 가져가려면 무엇으로 좀 포장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경비실에서는 마땅한 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태극기와 로동신문이 나란히 접혀 있었다. 그는 잠깐 주저했다가 한결 가벼워진 손길로 신문을 꺼냈다. 그것을 책상에 폈다. 그 위에 사진틀을 뒤집어서 올렸다. 네 귀를 접어서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던 그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스카치테이프 붙일 자리와 활자가 떨어져나간 자리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신문 네 귀의 찢긴 구멍으로 사진틀 모서리가 드러났다.

이튿날 아침 8시에 교대조인 김씨가 출근했다. 나씨가 근무일지와 입주민이 간밤에 찾아가지 않은 소포와 택배물건을 인계하고 있을 무렵 관리실에서 방송이 나왔다. 입주민들에게 국기게양을 해달라고 독려하는 방송이었다.

나씨는 자전거 뒷자리에 사진을 묶고 아파트 후문 쪽으로 나왔다. 그는 돌아서서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301동과 302동 베란다가 보였다. 드문드문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탈북자들이 입주한 아파트의 베란다를 하나하나 점검하듯이 짚어보았다. 네 가구 모두 태극기를 게양해놓고 있었다. 그는 조금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씨는 태극기 펄럭이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휴대폰을 꺼내 간밤에 통화가 되지 않았던 미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갔으나 이번에도 역시 받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