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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평

 

두번 실종된 손창섭

 

정철훈 鄭喆熏

시인, 소설가. 국민일보 문학전문기자. 시집 『개 같은 신념』 『살고 싶은 아침』, 장편소설 『카인의 정원』 『인간의 악보』 등이 있음. chjung@kmib.co.kr

 

 

전후(戰後) 최고의 문제작가로 평가받는 손창섭(孫昌涉, 1922~ )이 일본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올해 2월 중순이었다. 1973년 12월, 아내의 나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도일(渡日) 36년 만이요, 국내 한 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끝으로 사실상 절필에 들어간 지 31년 만의 일이다. 오늘날 손창섭 문학에 대한 열기는 어느정도 식었지만 그래도 그의 소설이 지닌 매력은 전후 총체적 임시수용소적 체제를 배경으로 한 병리학적 인간 굴절을 어떤 위선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손창섭의 도일은 한국 현대문학사상 가장 극적인 증발에 해당된다. 그는 생몰 연대의 한쪽이 늘 비어 있던 미궁의 작가였다. 그렇기에 문단 안팎에 그를 둘러싼 뜬소문이 무성했다.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 가끔 통곡을 하다 돌아간다느니 동서고금의 명언명구를 베껴 쓴 구도원(求道院)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만들어 나눠준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5년 전 국민일보 칼럼‘문학 오디쎄이’에 “손창섭의 생사를 아는 분 누구 없습니까”라고 공개 수소문했지만 어떤 제보도 없었다. 그러다 일본 주소를 확인한 것이 올해 1월말이었다. 한 지인의 연락처 메모가 단초였다. 2월 중순 토오꾜오 히가시꾸루메(東久留米) 시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을 때는 모든 게 너무 늦어버렸다. 손창섭은 지난해 9월 급성 폐기종 증세로 노인병원에 입원, 6인 병실에서 혼수상태를 오가며 말을 잃어버린 채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일 은둔의 진실

 

손창섭이 왜 도일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랐다. 혹자는 그가 창작활동에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로지 원고료 수입에 의지해 생활했는데, 고료가 넉넉지 않아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김신조 사건 이후에 그가 발표한 소설이 「청사에 빛나리」예요. 계백장군이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이 나오죠. 1967년에 썼다가 68년에 발표한 「환관」과 김신조 사건 후에 쓰기 시작한 「청사에 빛나리」는 기조가 다른 작품임을 알 수 있어요. 그의 도일에는 당시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회의나 반감 같은 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 이유 없이 도일했다는 건 동기가 약하지요. 「청사에 빛나리」에서 손창섭의 작품이 달라집니다. 등장인물도 너무 근사하고 묘사도 근엄해지지요. 계백장군의 24시간 동안의 기록인데, 자 축 인 묘… 등 12지간의 시로 나눈 고전 비극 같은 작품이지요. 말하자면 소설가로서는 전향각서 같은 작품을 내놓은 것인데,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도일의 열쇠는 「청사에 빛나리」에 있을 겁니다. 백제가 망하는 과정을 보면 박정희정권 당시의 정체성과 김신조 사건과의 연관성이 있을 겁니다.”(2009년 2월 3일 문학평론가 유종호 인터뷰)

 

손창섭의 일본행은 자신의 말이 없어 그 이유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필자가 일본에서 만난 부인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 여사에 따르면 그의 도일은 유종호(柳宗鎬)가 지적한 것과 달리 시국의 불안이라든가 정치적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반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일본에 나가 살 결심을 하자 손선생은 나를 따라 건너왔을 뿐,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는 없어요. 한국에 친척도 혈육도 없는걸요. 욕심이 없는 분이지요.”

우에노 여사의 대답은 너무 명료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환멸 같은 게 작용했다면 먼저 일본으로 간 부인의 인보증으로 영주권을 받아내기까지 2년 동안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평양시절 제자의 과수원에서 신세를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도피가 이유라면 취업비자 혹은 여행비자로 얼마든지 떠날 수도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는 일본 영주권을 기다리며 구리에 은거했다.

철저한 냉소와 인간 경멸의 상념이 녹아 있는 초기작에 비해 김신조 사건 이후에 발표한 「청사에 빛나리」는 작풍이 다른 게 사실이다. 유종호는 “이 작품에서 손창섭은 계백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며 “세습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한 봉건적·왕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화되어온 황산벌의 결사대장은 아내 보미(寶美)부인의 입을 통해 오히려 졸장부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이 썩어 문드러진 백제가 깨끗이 망해버리고 언젠가 새로운 백제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한편 신라와 고구려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삼국이 통일이 되는 날도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자라서 신생 백제의 충신이나 삼국통일의 공신이 될지 뉘 압니까. 장군,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이 누구시오? 장군도 그중의 한분, 일찍이 나라를 건질 선책엔 목숨을 걸려 않으시고 망국의 위기에 맞닥뜨려서야 무고한 장정과 가족까지 희생시켜서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 하시니 그러고도 떳떳하시오.”(「청사에 빛나리」 부분)

 

작품의 기조가 과거의 냉소 일변도에서 벗어나 무력으로써 국가를 건질 방책, 즉 군사적 측면만 강조하는 계백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걸로 김신조 사건과 그의 도일을 연관짓기는 어색하다.

보기에 따라서 보미부인의 내면에 손창섭에게 밀어닥친 김신조 사건 이후 시대인식의 변화가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장공비의 타격을 받은 청와대의 위급과 맞물려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 신하됨의 도리가 계백의 처지로 되어 모서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소설을 통해 연상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걸 도일의 직접 원인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손창섭은 「잉여인간」(1958) 「신의 희작」(1961) 등의 문제작을 통해 전쟁으로 훼손된 현실과 개인사적 절망이 뒤엉킨 허무의 늪에서 어느정도 빠져나온 뒤 「청사에 빛나리」로 내부에 쌓여 있던 찌꺼기까지 토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틀어쥐고 있던 절망과 허무에서 풀려났던 것은 아닐까. 어떤 경계에 다다른 자는 서성거림없이 체제를 관통해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작가라면 의당 유신체제를 비판했을망정 그의 도일은 이미 유신 이전에 결심한 삶의 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청사에 빛나리」는 『흑야』(1969)로 이어지는 역사 소재 취향의 글쓰기 흔적으로 보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이런 취향이야말로 도일 이후 발표한 연재소설 『봉술랑』(1976)을 태동시킨 원천이었던 것이다.

필자에게 뜻밖의 이메일이 전달된 것은 손창섭을 만나고 돌아온 직후인 올해 4월초였다. “저희 어머니에게 손창섭 선생님은 작은아버지가 되시는데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가족간에 문제가 생겨서 화해를 못하셨대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작은아버지를 꼭 찾고 싶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넣어, 메일을 보낸 이의 어머니를 찾았다.

 

“6·25때 남한으로 넘어온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시다 흑석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찾아가셨어요.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도 일본으로 유학간 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고 굉장히 고생하셨는데 비록 무학이셨지만 독학으로 한자도 깨우치고 일어도 능숙하게 하셨지요. 그런데 작은아버지의 부인이 아버지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는지, 일어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걸 아버지가 알아들었던 모양이에요. 친일파나 일본인이라면 치를 떠셨던 아버지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대요. 아버지는 그후로 연락을 끊으셨지요. 작은아버지는 이후 서너차례 편지도 보내고 소설책도 보냈지만, 아버지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거부하셨지요. 편지도 화가 나서 다 태워버렸고요. 그러다 1982년 임종 직전에‘내가 좀 이해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면 꼭 찾아가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지요.”(손창섭의 조카 손정애)

 

손창섭은 알려진 바와 달리 외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평양 인흥동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위로 형 손창익과 손창환, 누나 손정숙에 이은 막내였다. 부산에서 건설업을 했던 둘째형 손창환의 여식이 정애씨다. 의절을 선언한 형을 뒤로하고 아내 우에노를 따라 도일한 손창섭의 심경은 헤아릴 수 없지만 그의 도일에는 일제와 한국전쟁이 낳은 디아스포라와 가족사의 왜곡이라는 또다른 아픔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은둔과 방치 사이

 

손창섭은 한국에 있을 때도 외부와 접촉이 거의 없었고 문우도 친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노출시키는 에쎄이도 쓰지 않았다. 그를 두고 숨어 사는 기인이 아니냐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게다가 도일 이후 한국문단과 소식을 끊고 작품도 발표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평론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한국문단에서 작고문인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눈으로 확인한 결과 손창섭을 둘러싼 인간적·문학적 오해는 상당히 깊었다. 손창섭이 은둔을 자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일 초기 한국일보에 장편 『유맹』(1976년 1~10월)과 『봉술랑』(1977년 6월~1978년 10월)을 연재하게 된 이면에는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張基榮)의 꾸준한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판인 정철진(鄭徹鎭)에 따르면 손창섭은 장기영이 각별히 챙긴 작가였다.

 

“한국일보 원고료는 손창섭 혼자서 올린 것이나 다름없어요. 장기영 선생은 생전에 내게 손창섭의 연락처를 물어오기도 했는데 난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지요. 그러나 신문사 사장이니만큼 어떻게 일본 거주지를 찾아냈는지, 연말연시에 선물을 소포로 보냈다는 말을 손선생에게 들은 적이 있지요. 장선생이 직접 찾아가려고 했으나 손선생이 극구 거절하는 바람에 선물을 보낸 것인데 손선생의 부인이 그 선물을 받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당신이 아무리 대인기피증이 있어도 장기영 선생이 만나자고 하는데 당신이 뭔데 안 만나요?’손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죠.”(2009년 1월 19일 정철진)

 

평소 남에게 신세지기를 극도로 꺼렸던 손창섭은 자신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보여준 장기영에게‘재미없는 소설인데 괜찮겠느냐’며 연재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맹』과 『봉술랑』이다.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장기영은 문화부 담당기자에게 원고수발을 하면서 절대로 재미없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며 특별히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봉술랑』이 연재되기 직전인 1977년 4월 장기영은 타계한다. 정철진에 따르면 손창섭은 곧바로 조문을 하러 한국에 건너와 신문사를 찾았다. 그때 신문사가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카메라 기자가 달려나오고 기자들이 나오니까 손창섭은 묘소에도 가지 않고 도망치다시피 신문사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봉술랑』을 끝으로 손창섭은 절필상태에 들어가지만 출판인 정철진과의 교신은 이어지고 있었다. 정철진에게 관리를 위임한 저작권료가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철진이 나름대로 성실하게 저작권을 관리해왔을망정 손창섭에게 인세를 전달한 빈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1999년 인세를 마지막으로 전달한 후 올초까지 10년 동안 편지내왕마저 끊긴 상태로 지내왔다는 정철진 자신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손선생은 토오꾜오로 떠나던 날 나와 함께 점심을 들고 그 자리에서 위임장을 써 주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내게 저작권 관리를 맡긴 것인데 그동안 두어차례 인세를 보내드렸지만 근자 들어 연락을 못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예옥출판사에서 장편 『인간교실』을 발간했는데 인세를 보내주겠다고 연락을 해왔더군요. 그러면서 손창섭에게 정말 돈이 가느냐고 묻더군요. 몇십만원밖에 안되는 돈이지만 손선생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중간에서 내가 매우 곤혹스러워요. 인세 때문이죠. 손선생은 1999년도에 마지막으로 다녀갔어요. 그때 모아두었던 인세 1300만원을 전달했지요. 지금까지 전달한 인세는 모두 3500만원 정도인데…… 이게 손선생이 내게 써준 위임장이에요.”(정철진)

 

위임장

  정철진

본인의 작품 사용(출판, 번역, 상연, 상영, 방송 등)에 대한 가부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위에 적은 이에게 위임함.

1973.12.25

손창섭 인

 

손창섭의 인세를 일일이 챙기는 일은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저작권 관리 면에서 열악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출판관행에 비추어서도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해외거주 작가의 경우 중간에 사람을 놓아 관리하지 않아도 인세가 정확하게 지급되는 씨스템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손창섭은 그러나 1995년에 보낸 편지에서 정철진과 또다른 위임권자인 삽화가 이우영 화백에게 인세의 절반을 제반 비용으로 써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남의 신세를 그냥 질 수 없다는 깔끔한 성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편지 1

삼성출판사와 동아출판사의 인세를 해결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두분 다 公私로 바쁘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동분서주하여 弟의 귀찮은 일을 대행해주시니 사례의 마음을 어떻게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앞으로 송금해주시겠다니 그 성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출판사를 자주 찾아다니시느라면 교통비, 찻값, 점심값, 기타 이런저런 잡비가 적지 않게 들 것입니다. 그러니 弟의 인세 중에서 반액만 보내주시고 나머지 반액은 두분께서 반분하여 상기 비용과 송금 수수료 등으로 충당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1995년 3월 22일 求道院 生

 

편지 2

여러가지로 바쁘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출판사를 찾아다니면서 처리하여 이선생을 통해 보내주신 인세, 수수료 제하고 日貨 25만 8211엔(한화 236만 4305원)을 잘 받았습니다. 귀형의 깨끗하고 따뜻한 인간미에 그저 머리가 숙연해질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 답례로 반액을 이선생과 두분이 나누어 써달라고 전달했는데 전액을 보내오셔서 좀 섭섭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번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받아주실 수 있는 소액으로 인사를 삼을까 합니다. 이선생 회신에 이번 일에는 주로 귀형이 수고를 하셨을 뿐 자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기에 그 의중을 따라 귀형에게는 일화 5만엔을, 이선생에게는 함께 외식대 정도를 송정하는데 그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잠자코 받아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귀형이 마음 써주시는데도 시치미 떼고 지금까지 주소조차 밝히지 않은 처사를 사과합니다. 이 몸은 약삭빠른 재간꾼이 아니어서 별지에 명리에 새고지는 속세간이 지겨워서 사람과 인연을 끊고 숨어서만 사오네. 來日 이래 이러한 인생 자세를 일관해온 터라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사람도 사귀지 않고 본명도, 거소도 숨겨왔으나 뒤늦게나마 귀형에게는 그럴 수 없어 여기에 주소를 명시하오니 지금까지의 결례를 양찰해주시기 바랍니다.

1995년 4월 20일 東京 近郊에서 無石子

 

손창섭은 편지에‘無石子’혹은‘구도원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求道院 生’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이는 그가 “소설가란 무릇 본명 같은 건 내세우지 말고 오로지 필명으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문학이나 문학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연유가 “문학(인)에 따라붙는 권위의식, 명사의식이 혐오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부분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특히‘無石子’는 손창섭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정철진은 올 1월 3일 손창섭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정작 자신도 나이가 들어 저작권 관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를 자신을 대신할 관리자로 추천하고 싶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인세를 전달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우에노 여사가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나 손창섭은 침상에서 임종만을 기다리는 목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에노 여사 역시 한국어를 잊어버려 더듬더듬 한글 몇줄을 읽을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우에노 여사는 편지의 내용을 번역해주었는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사는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세요. 지금 손선생은 병원에 누워 있고 내 집은 작고 초라하지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모든 게 너무 늦었다. 정철진은 선의로 저작권 관리를 했지만 손창섭과의 단절은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긴 세월이다. 우에노 여사는 담담했다. 여사는 밥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다다미방의 한귀퉁이를 가리켰다. “손선생은 이곳에 웅크리고 앉아 온종일 글을 쓰곤 했지요. 밥도 이 자리에서 먹고, 책도 이 자리에서 읽었지요.”

겨우 엉덩이를 붙일 만한 다다미에서 보낸 30년 세월이었다. 때를 놓친 것은 정철진 개인만이 아닌 것이다. 한국문단은 가장 중요한 전후세대작가를 방외인으로 방치했던 것이다.

 

 

「신의 희작」을 둘러싼 오해

 

손창섭 문학을 둘러싼 한국문단의 오해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신의 戱作」(1961)에서 비롯된다.

 

시시한 소설가로 통하는 S-좀더 정확히 말해서 삼류작가 손창섭씨는, 자기 자신에게 숙명적인 유머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신의 희작」 도입부)

 

손창섭은 첫 문장부터 스스로를 시시한 소설가로 통하는 삼류작가 S로 치부한다. 소설의 화자인 작가 S는 소년시절, 어머니와 외간남자의 정사장면을 목격한다. S는 싸움닭이고 강간범이고 독설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내쳐졌다. 외간남자와 정사를 하다 들킨 어머니는 S에게 “칵, 뒈져라”라는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으로 제 수치심을 감춘다. 하여 식구라곤 할머니와 어머니가 전부인 S에게 가정은 비빌 언덕이 아닌 상처와 결핍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외로웠던 것일까. 어머니는 결국 정을 통한 남자와 만주로 떠나고, 소년 S는 운명적으로 야생의 삶에 발을 들여놓는다.

 

야뇨증 때문에 거의 마를 날이 없이 지린내를 풍기는 얼룩진 요와 정부하고 나란히 목을 매고 죽어 늘어졌던 창녀의 모양이, 때로는 따로따로 때로는 뒤범벅이 되어서 어린 그의 머릿속과 눈앞을 혼란하게 하였다.(「신의 희작」 부분)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어머니의 외도와 그에 따른 자신의 정신병리적인 현상을 스스럼없이 소재 삼으며 전후 혼란기의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실존적 세계관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신의 희작」에는‘자화상’이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었기에 체험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나 우에노 여사는 이런 평가를‘잘못된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선생은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지요. 그때 어머니는 스물댓살쯤 되는 젊은 나이여서 시어머니가 재혼하라고 종용하는 바람에 재가를 했지요.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들었어요. 할머니는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수확이 많지 않아 숙모의 도움을 받았다더군요.”(우에노)

 

손창섭은‘思 祖母叔母’라는 글자를 작은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숙모를 잊지 못하는 손창섭의 효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친필이었다. 그러니 「신의 희작」에서 주인공 S가 평양의 한 유곽 거리에서 성장했고 야뇨증에 걸려 수시로 요를 적셨으며 어머니는 고무신 공장에 다니다 바람이 났다는 장면은 작가의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신의 희작」에 등장하는 S의 아내 이름은 내 이름과 같은 치즈꼬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 속을 수밖에요. 그러나 실제 삶은 소설 내용과는 전혀 달랐어요. 서울에 살 때도 주위 사람들이 묻더군요. 소설을 읽어보면 남편은 성도착증세를 가진 포악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같이 살고 있느냐, 무섭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그때마다 나는‘민나 우소데스(전부 거짓말)’라며 고개를 저었죠. 소설과 실생활은 전혀 무관해요.”(우에노)

 

우에노는 1949년 손창섭과 시모노세끼(下關)에서 결혼을 약조했다. 그녀는 친정이 있는 코오베(神戶)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시모노세끼에서 직장을 다니다 손창섭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코오베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우에노의 손위로 세이지(淸二)라는 오빠가 있었다. 그는 손창섭과 쿄오또(京都)대학에 함께 입학해서 아는 사이로, 이듬해 두 사람이 니혼(日本)대학 문학부로 나란히 옮겨갈 정도로 절친했다. 그때 손창섭은 코오베 집에도 놀러오곤 했는데 우에노가 스물네살이던 해 시모노세끼에서 둘은 다시 만나 결혼 약조를 했던 것이다. 당시 부산에서 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손창섭은 예식은 생략한 채 우에노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손창섭이 등단한 후 서울 흑석동으로 이사가서 20여년을 꼬박 살게 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손창섭은 세상을 속인 진짜 소설가였던 것이다. 아니 「신의 희작」은 그야말로‘손(孫)의 희작’인 것이다. 제목도 희작(戱作)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동안 한국문학계는 소설 속 S와 손창섭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문학평론가들도 S와 손창섭을 동일시하는 바람에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어쩌면 이게 손창섭 문학의 마술인 것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부부의 삶이 소설에서 그려진 것과 닮아 있을 거라고 오해할 만하지요. 하지만 우린 결혼 직후부터 각방을 썼어요. 서울서도 다른 방에서 잤는걸요. 부부생활은 했지만 내 결함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어요. 서른세살에 내가 자궁암에 걸려 자궁을 들어내는 바람에 임신할 수 없었어요. 수술 전에도 그런 증상 탓에 각방을 쓴 것이죠.”(우에노)

 

우에노 여사의 증언은 「신의 희작」이 체험소설이 아니라 실제와 허구가 혼재한 작품임을 방증한다. 그는 손창섭의 만주시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손창섭 연보’에는 열네살 때 어머니를 좇아 만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소설에서처럼 어머니를 따라간 게 아니었다. 일본이 만주이민개혁 대강(大綱)을 발표한 것이 1933년 7월이었다. 이후 정책적인 만주이민이 봇물을 이룬다. 소년 손창섭은 할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만주로 갔던 것이다.

「신의 희작」의 큰 줄거리 중 하나인‘여수에 사는 일본 중학 동창생 백기택을 찾아가 (일본에 두고 온) 아내에게서 온 편지와 옷가지를 전해받는다’거나‘여수의 백기택을 찾아간 아내를 백이 오히려 겁탈하고 첩살이를 시킨다’거나‘그런 아내를 부산에서 극적으로 만나 새 생활을 시작, 자식은 더이상 낳지 말자며 임신한 아내를 윽박질러 인공 임신중절과 자궁절제 수술을 받게 한다’는 대목은 작가적 상상력의 소산임을 우에노 여사의 증언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에 자식을 둘이나 두고 혼자 귀국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손창섭 부부는 피난지 부산의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고아를 수양딸로 들였을 뿐 혈육은 없었다.

손창섭은 바깥으로는 단절되었을지 모르지만 가족생활에서는 자상하고 섬세한 가장이었다. 그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 종종 가족의 이름을 차용했는가 하면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가족에게 부여하기도 했다. 데뷔작 「공휴일」의 주인공 도일의 여동생 도숙은 후일 손창섭의 양딸의 이름이 되었다. 「신의 희작」의 주인공 S의 아내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실제 아내인 치즈꼬에서 따왔다. 여기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손창섭의 익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S〓손창섭이라는 등식은 치밀한 소설적 구상이었던 것이다. 줄거리의 일부가 체험의 소산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부분이 허구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희작」 도입부에 그가 써넣은‘자전적 기록’이라는 대전제는 독자들의 흡인력을 배가시키는 장치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시대에 대한 손창섭의 문학적 대응은 세속에 대한 세속이었던 것이다. 독자들은 야뇨증과 강간으로 점철되는 추악하고 끔찍한 S에 관한 인상을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수기에 접하게 된다. 손창섭과 독자들 사이에 자전적 수기를 소개하는‘나’를 개입시킨 의도는 작품에 이중적인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작가 자신이 시치미를 뚝 떼고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한층 적나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잇점을 노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S와 손창섭과의 관계는 같은 인간인 듯하면서도, 기묘한 장막에 의해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그가 자전적 수기의 도입부에서 밝힌 “시시한 소설가로 통하는 S-좀더 정확히 말해서 삼류작가 손창섭”은 작품 전체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등단 초기에 필사적으로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하구많은 물건 가운데 어쩌자고 하필 인간으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진정 나는 염소이고 싶다. 노루이고 싶다. 두더지이고 싶다. 그나마 분에 넘치는 원(願)이 있다면 차라리 목석(木石)이노라. 나의 문학은 목석의 노래다. 목석의 울음이다. 목석의 절규다.(1953년 「사연기(死緣記)」 추천완료 소감)

 

손창섭은 1997년까지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일본의 외국인등록법에 의해 매년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1998년 아내의 성을 따라 귀화,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로 개명했다. 병실 문패에도‘上野昌涉’라고 적혀 있었지만 손을 주물러 혈액을 순환시키자 그는 손을 움직여 분명‘손창섭’이라고 한글로 적었다. 무의식중에 쓴‘손창섭’이라는 세 글자야말로 그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글이자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되찾는 숭고한 의식은 아니었을까.

 

 

말년의 청빈

 

손창섭은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자신이 쓴 단행본은 물론 작품이 수록된 전집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으니 그의 기이한 행적은 청빈과 겸허의 자기실천이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는 중환임에도 의식이 돌아오면 간호사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했다. 손창섭은 일본에서 별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대신 우에노 여사가 도일 직후 토오꾜오 메이지기념결혼식장 예식부에서 예순다섯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처음엔 토오꾜오 이바라끼(茨城)현, 미도구, 아다찌(足立)구로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삼년쯤 살다 지금 사는 13평짜리 서민 아파트를 분양받은 게 30년 전이다.

우에노 여사는 손창섭이 언젠가 『주간 신쪼오(週刊新潮)』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며 서가를 꼼꼼히 살폈으나 잡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그 잡지의 편집장에게 1973년부터 현재까지‘손창섭’혹은‘無石子’혹은‘求道院 生’이라는 필명의 기고자가 있는지 문의했다. 대답은 “그런 필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창섭이 입원한 노인병원은 규정상 3개월 이상 머물지 못한다고 한다. 지난 4월초에 전화를 걸었을 때 우에노 여사는 남편이 한달 전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으며 구청에서 내주는 차를 타고 한달에 한번꼴로 문병을 다니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이젠 자신도 알아보지 못한다며 한국에서 아무도 찾지 않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우에노 여사는 작별인사를 하러 다시 들른 필자에게 손선생의 서가에서 책 한권을 기념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망설이다 한권의 책을 뽑아들었다. 나까노 코오지(中野孝次)가 지은 『청빈의 사상(淸貧の思想)』이었다. 서문의 한구절에 손창섭이 그은 밑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일본에는 돈벌이를 한다든지 물건을 만든다든지 하는 현세의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간절하게 마음의 세계를 중시하는 문화의 전통이 있다. 워즈워스의 낮게 살고 높게 생각한다는 싯구처럼 현세에서 그 생존은 가능한 한 간소하게 해서 마음의 아취를 느끼는 세계를 산다는 걸 인간의 가장 고상한 생존방식이라 여기는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이 청빈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임종을 앞둔 손창섭에게서 확인한 것은 그가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잊히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목석은 울음이 없다. 울음은 목석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손창섭의 침묵은 끝나지 않는 울음이다. 울음으로 질문하는 문학, 그것이 손창섭 소설의 본질이다.